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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13일 토요일 오후 05시 54분 59초
제 목(Title): 전병재/현대사회와 선비문화


현대사회와 선비문화

 
 

전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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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62년 연세대 법학과 졸업, 64년 연세대 법학 석사, 72년 
인디아나대학 철학박사, 88년 한국사회학회 회장, 연세대 문과대학장. 
『사회심리학 : 관점과 이론』, 『마르크스주의와 사회학』(편저), 『현대사회와 
예(禮)』(편저), 『한국사회의 전문직업성 연구』(공저),「인간과 사회」 외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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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또 '선비'인가?
  IMF한파로 세상이 온통 달러 타령이다. 경제주권이 흔들리고 있는 이번 위기를 
경술국치에 버금가는 치욕으로 보는 자들까지도 있다. 정부 고위층은 당장의 
모라토리엄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한편, 온 국민은 나라를 살리자고 
금모으기 운동까지 전개하고 있다. 후기 금융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이전 공산국가들마저도 달러의 흐름 속으로 흡수되고 천하는 달러의 힘으로 
통일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이익이 존중되고 개인의 재산권이 생명권과 함께 보호되는 
사회이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의 척도로 되고 있고 개인과 국가는 하나같이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공의(公義)를 지향하는 정치도 경제의 시녀로 전락해 버렸다. 경제는 이윤의 축적, 
정치는 이윤의 공정한 분배 정도로 생각하기가 일쑤지만 오늘의 정치는 분배 못지 
않게 이윤추구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렇게 돈이 판치는 사회에 가난한 선비가 숨쉴 공간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 
역사적 시점에서 선비 타령은 시대착오적이고 과거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오늘날 세계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각종 심각한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은 따지고 보면 윤리와 도덕이 허물어져 버린 데 있다. 이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세상 사람들이 공의는 무시하고 개인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돈과 
권력만을 문제 삼을 뿐, 올바른 인격은 문제삼지 않는 풍토 때문이다. 일이 
잘못되어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다. 세상이 잘못되면 사회제도나 환경 
탓으로만 돌리고 개인의 인격은 도무지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 훌륭한 
인격자가 논의 될 여지는 없는 것이다. 제도를 아무리 뜯어 고쳐도 훌륭한 사람이 
없으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물질적 풍요와 얄팍한 기분에만 사로잡혀 
삶의 궁극적 가치 문제는 외면한 채 동물적 삶을 살아가는데 급급한 현대사회에서 
삶의 올바른 길을 모색하고 제시해 줄 수 있는 등불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훌륭한 인격자에 대한 이상형마저 없어져 
버렸다. 선비 타령은 결국 사람 타령이다. 돈이 판치는 사회에서 사람 타령이 
웬말이냐고 할지 몰라도 현대사회의 근본 문제는 사람 타령이 돈타령으로 둔갑해 
버린 데 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선비는 누구나 지향하는 이상적 인격상이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선비가 되어 성인의 도를 따르고자 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 분명히 제시되고 있었고 삶은 그만큼 보람찬 것이었다. 그러나 선비는 통상 
과거 왕조사회에서 어리석은 백성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유가적 교양인이자 지적 
엘리트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조선조와 같은 
왕조사회도 아니고 유교가 주도적 사회이데올로기로 존중되는 사회도 아니다. 또 
대부분이 농사나 다른 생업에 종사하고 독서층이 양반에만 국한했던 계급사회도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의 유교적 선비를 무조건 현대사회의 바람직한 
인격으로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전통적 선비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선비가 현대사회에서도 계속 '소금과 등불' 구실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사상적 거봉으로 셋을 꼽으라면 신라의 원효, 조선 중기의 퇴계, 
조선 말기의 다산을 들 수 있다. 원효는 불교, 퇴계는 성리학, 다산은 실학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나라 고유사상을 북돋은 분들이다. 이 중 당시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해서 사상을 실천적으로 살아가는데 거침이 없었던 분은 원효였다. 
이러한 원효의 큰 뜻은 역사적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세히 짐작하기 힘들다. 이에 
비해서 조선조 퇴계와 다산의 숨결은 아직도 우리 귓전에 스치는 듯 가깝다. 
원효가 거침없는 삶을 살다 간 분이라면 퇴계는 현실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물러나 뜻을 가꾸고 교육에 전념했지만 그 영향력은 당대를 덮었다. 그러나 다산이 
유배생활의 실의 속에서 집대성한 사상은 당시 기울어져 가는 세태 속에서 제대로 
주목도 되지 못했고 아직도 그 간절한 뜻은 책먼지 속에 묻힌 채 방치되고 있다. 

원효에서 퇴계를 거쳐 다산에 이르는 우리 사상의 흐름을 되돌아보면 원효의 
비상이 다산의 실의로 하강하다가 서구 문물이 들이닥친 소위 '개화기' 이후로는 
한국적 사상은 실종되어 버린 셈이다. 근세사가들은 1876년 이후를 '개화기'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개화기가 아니라 사상적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조선의 
혼, 선비의 기개가 서양의 총칼 앞에 무릎을 꿇어 버린 것이 소위 개화요 
서구화이기 때문이다. 겨레의 혼은 잃어버리고 물질에 빠져 버린 시대를 어찌 
개화라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결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돈이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는 적정화의 논리에 의해서 추구되어야 할 가치일 뿐인데도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경제가 극대화의 논리에 의해서 추구되고 있기 때문에 환경오염과 
사회갈등은 더욱 첨예화되어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정도 이상의 
경제발전은 사상적 퇴영을 가져온다. 극대화의 논리로 추구되어야 할 가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사람을 동물 이상의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정신적 가치다. 

'선비정신'이야말로 우리 전통문화의 핵이다. 전통문화는 경복궁 기왓장이나 
사물놀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피와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지금 
IMF한파로 온 나라가 야단들이지만 우리 역사 속에는 이따위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엄청난 시련이 많았다. 그래도 그런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공의(公義)를 밝히는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가 발전해서 우리 나라가 OECD에 가입했다고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다가 
느닷없이 IMF파동으로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들이다. 그러나 이 고비는 아마도 
물질적 풍요만을 지향하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를 송두리째 잃어 버릴가 두려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늘이 내린 채찍일 수도 있다. 얼도 없이 무턱대고 세계화의 
물결 속으로 빠져들면 그야말로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 우리의 정신을 
버리는, 그래서 끝내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제적 위기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되살리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물질적 위기를 정신적 호기로 되살릴 수 있는 슬기와 지혜가 곧 
'선비정신'이 아니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자식이 선비 되기를 원했다. 오늘의 
부모들은 이 극성스러운 교육열 속에서 과연 자식이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며 어떤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가. 교육열만 뜨겁고 교육의 좌표는 없는 것은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고 정신적 가치는 외면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가치전도 현상 바로 
그것이다. 수단만 있고 목적이 없는 사회, 아니 인간이 돈의 노예가 되어 목적이 
수단으로 전도된 사회가 바로 서구화된 현대사회의 실상이다. 선비정신은 본(本)과 
말(末)을 밝혀서 바로 세우는 정신이기도 하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사회에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이런 비판적 지성을 우리는 선비정신 속에서 찾을 수는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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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비, 사(士), 군자(君子)
  선비의 현대적 위상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선비의 본질을 밝혀 보고 
선비의 역할과 신분이 각 사회마다 시대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역사적으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선비'는 두말 할 필요 없이 우리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유래가 어디 있는가? 단제(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우리 나라 고대 종교를 
하느님을 경배하는 수두교라 하고 소도(蘇塗)라는 제사 지내던 장소에서 제주인 
천군(天君)을 도와 질서를 유지하고 부족 성원들의 단합을 도모하던 주체로서의 
무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했다. 이것이 그 후 고구려에서는 태조(太祖,53-146)와 
차대왕(次大王,146-165) 때에 제도화되어 선비 선발은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제전 때 이루어졌는데, 선발 목적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아가 싸울 수 있는 
상무정신을 앙양하고 평화시에는 공공의 사업을 행하며, 일반 백성들을 교화하고 
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선비 자격은 따로 없고 지도력과 전투력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뽑은 후, 편대를 조직해서 무예와 학문을 익혀 국가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자질을 키웠다 한다(신채호, 『조선상고사』 서울: 동서문화사, 1977, 
172-3쪽). 삼한 시기의 선비제도가 신라에서는 화랑제로 이어졌는데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용비어천가나 두시언해에서 '션?.?'로 
표기되고 있는 이 말의 어원이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앞으로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고어사전을 보면 선비는 학문에 빼어난 수재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중국에서 유학과 한자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선비는 '유(儒)'자라는 한자와 먼저 
결합했고 '사(士)'라는 한자와 연결된 것은 조선조 중기 이후인 것 같다. 이 
경우에도 선비는 문사(文士)에만 국한해서 쓰고 무사(武士)는 호반이라는 말로 
따로 부른 것으로 보아 우리의 선비는 중국의 벼슬, 일본의 무사(武士)와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사(士)'라는 말은 매우 넓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을 보면 사(士)는 처녀에 대응하는 미혼 남자나 성년이 된 
남자를 일컫기도 하고 남자에 대한 미칭(美稱)이기도 하며 무사와 병사를 일컫기도 
하고 지자(智者)와 현자(賢者)를 일컫기도 하고 사군자(士君子)라 하여 인격자, 
독서인, 그리고 벼슬하는 사람을 총칭하기도 한다. 『맹자』나 『예기』 같은 
곳에서는 왕과 제후를 돕는 벼슬자리로 상대부경(上大夫卿), 하대부(下大夫),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등의 서열이 밝혀지기도 한다. 『논어』에는 
집편지사(執鞭之士)라 하여 왕후의 행렬 앞에서 채찍을 들고 길을 트는 천직도 
사(士)로 나올 때가 있고 『맹자』에는 지극지사(持戟之士)라 하여 창 들고 보초 
서는 위병도 사(士)로 나온다. 이런 벼슬이나 직명과는 달리, 벼슬을 하지 않는 
독서인을 지칭하는 처사(處士)라는 말도 『맹자(孟子)』에 나오고 있다. 이런 말 
쓰임이 우리 '선비'라는 말과 그대로 부합된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조선조 
이후, '선비'라는 말은 무사(武士)보다는 문인(文人)적 분위기를 더 강하게 품고 
있으며 벼슬자리를 일컫는 말이기보다는 수양하고 공부하는 군자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멋과 풍류가 우리 나라 선비가 
갖추어야 할 기본 요건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도 우리 선비가 중국의 
벼슬아치나 일본의 사무라이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사(士)는 역시 
녹을 받고 벼슬을 하는 자들을 의미함으로써 군자(君子)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일본의 '사무라이'가 어떤 의미에서는 선비보다 중국의 
사(士)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예원 박사의 「근세일본의 
지식인상」(『전통과현대』,1997년 겨울호)을 보면 일본의 경우, 과거에는 
문사(文士)가 무사(武士) 보다 천시되었는데, 오늘날 문사가 그나마 행세하게 된 
것은 유교적 전통이기보다는 서구화 과정에서 도입된 서양적 지식인상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선비는 사(士)라는 직분 개념이기보다는 차라리 
군자(君子)라는 인격개념에 더 가깝다. 우리 나라처럼 문(文)이 숭상된 나라도 
없다. 이는 선비를 이상적 인격상으로 존경한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선비문화가 제대로 체계화 된 것은 사림정치가 이루어졌던 조선조 중기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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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조 사림정치와 선비문화
  조선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엄청난 국난을 겪고도 망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정신 때문이었다 하겠는데, 이런 선비정신은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 퇴계와 남명의 양 거유가 밝힌 것이다. 조선조가 역성혁명을 통해서 
건국된 직후에도 유학적 절의를 지킨 고려 충신들을 숭앙하는 경향이 강했다. 개국 
공신들이 정치를 담당하고 있을 때, 절의를 숭상하는 일부 문인들은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다. 포은 정몽주의 영향을 받은 고려 유신 야은 길재도 
고향에서 유학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일대의 그 
문하생들이 훗날 조선조 사림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사림이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말 성종 때부터이다. 세조의 
지나친 강압정치로 위축된 민심을 되살리기 위해서 성종은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거 등용하여 주로 정책을 비판하는 삼사(三司)의 자리에 앉혔다. 이들은 정치를 
적극 개혁할 것을 주창했는가 하면 향촌에서는 선비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향소, 
향사례, 향음주례 등을 활성화해서 민심을 다스리고 도덕을 진작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조 건국 초기에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기반 구축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지방 
사림들의 비판세력을 수용할 수 없었지만, 15세기말로 접어들어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히면서부터는 조선왕조도 현실적 권력정치로부터 이상적 도덕정치로 
정치의 방향을 전환할 여유가 생긴 셈이다. 

성종(1469-1494)은 보수적 훈구세력과 진보적 사림세력을 잘 융합하여 국정을 잘 
운영해 나갔다. 그러나 연산군(1494-1506) 때에 이 두 세력은 서로 다투게 되고 
왕은 이들의 갈등을 신권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게 된다. 연산군 
어머니 폐비사건으로 덕망 있는 훈구대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사림세력이 고개를 
드는가 했으나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로 되어 김종직과 관련이 있는 김일손, 정여창 
등 수십 명의 선비들이 사형 당하고 유배되는 무오사화로 인해서 영남사림은 
쑥대밭으로 되었다. 갑자사화에서 나머지 선비와 사대부들을 몰아낸 연산은 
신언패(愼言牌)라는 것까지 만들어 선비정신을 말살하려 했지만 결국 그 가장 큰 
피해자는 황음(荒淫)으로 빠져들다가 중종반정(1506년)으로 쫓겨난 연산군 
자신이었다. 

중종에 의해 등용된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강력한 개혁을 
주장하다가 훈구세력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기묘사화(1519년)로 그 일파는 
몰락하지만 당시의 희생자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여 이후 조선 선비상 
정립에 밑거름이 되고 16세기 후반, 사림정치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된다. 
기묘사화 이후, 중종은 훈구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다시 사림세력을 불러들였지만 
명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또 다른 풍파로 선비들은 네 번째 을사사화(1545년)에서 
화를 당한다. 이 마지막 을사사화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사림간의 당쟁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서 훈구세력에 의해서 핍박된 이전의 사화들과는 그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이미 싸움은 사림대 훈구세력의 갈등이 아니라 사림들간의 갈등으로 
훗날 사림정치가 빚는 당쟁의 예고편이기도 한 것이었다. 

유교적 선비상을 정립한 성리학의 양 거두 퇴계 이황(1501-1571)과 남명 
조식(1501-1572)이 살았던 16세기 초려傷굼� 사림세력이 훈구세력을 대치하게 되는 
조선조 정치사의 중대한 분수령이다. 조선조 초기 사대부 관료학자들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관학 아카데미즘을 일으켰다. 이들은 공신, 척신들과 어울려 훈구세력을 
이루어 부와 권력에 머물면서 이들의 부패상을 비판하고 나서는 신흥 사림파 
학자출신 관료들을 견제하고 탄압해 왔었다. 연이은 사화로 당시 뜻있는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묻혀 서원을 세우고 사학을 육성했다. 연산에서 명종 초에 
이르는 4-50년 동안, 이른바 4대 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한 후, 
숨어서 글만 읽고 독수기신(獨修其身)하는 선비들이 많아지고 더러는 아예 
글읽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소위 
산림추숭(山林推崇), 즉 숨어사는 선비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사화로 
형까지 잃은 퇴계,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을 잃은 남명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서원 중심의 학문을 세운 대표적 선비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초년에 과거를 통해서 벼슬길로 나아갔으나 을사사화로 
한때 파직된 후로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그 후 왕명을 거역하지 못해 몇 차례 외직을 역임하다가 명종 
10년(1555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도산으로 들어가서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한다. 명종은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완상하기까지 했다. 퇴계는 진리를 이론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먼저 찾으려 함으로써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강조했다. 성(誠)과 경(敬)은 이러한 지행합일사상의 두 기둥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비의 도리에 관한 퇴계의 말씀을 들어보자. "무릇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혹 벼슬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혹 시운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항상 몸을 깨끗이 하여 의리를 행할 뿐, 복이나 화를 논할 바가 아니다"(자성록). 
퇴계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자신만을 이롭게 
하고 남을 손해보게 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니라 도적의 마음이라 했다. 
이익을 볼 때는 항상 의리를 함께 생각해야 하고 의리를 떠난 이익추구는 옳지 
못한 것이라 했다. 이익과 의리가 함께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이익과 
의리가 상반되면 소인은 이익을 따르고 선비는 의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퇴계도 이전의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성신의(敬誠信義)를 소중히 했지만 
사상사적으로 볼 때 퇴계는 치인(治人) 보다는 수기(修己) 쪽에 더 치중한 학자다. 
그는 조광조가 너무 성급하게 치인 쪽으로 치닫다가 개인적으로는 화를 당하고 
정치적 기틀도 바로잡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자신은 제도개혁 보다는 인심을 
순화시키는 일에 치중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퇴계는 자성(自省)과 
근신(謹愼)을 항상 강조한 삶을 살았다. 퇴계는 공부를 벼슬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치인은 수기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수기를 치인의 수단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1550년에 명종이 퇴계의 청으로 소수서원의 편액을 하사하여 사림 선비의 뜻을 
높여 주었는데, 그 이듬해 남명이 55세에 단성 현감으로 나가라는 직첩을 받고 
올렸다는 소 가운데는 '국사 이미 잘못되고 방본은 벌써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천심과 인심이 아울러 떠나 버리게 되었으니, 자전께서는 구중궁궐의 
한낱 과부요, 전하께서는 단지 선왕의 외로운 사자(嗣子)에 불과한 것입니다' 라는 
소리까지 하자, 이에 명종은 '자전(慈殿)에 대해서까지 불공스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통분스런 일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불경죄로 다스리고도 싶으나, 그가 
소위 일사(逸士)로 추천을 받은 사람인 까닭에 불문에 부쳐 두는 것이다.'하고 
넘어갔을 정도로 선비의 기개가 존중되었다. 남명에게 벼슬로 나아갈 것을 권했던 
퇴계도 말인 즉 옳은 것이지만 언사가 너무 지나쳤다고 비판했지만 실록을 
편찬하던 사관들과 율곡을 위시한 많은 선비들은 남명의 이러한 기개를 찬탄하고 
있었다. 남명은 명종의 거듭되는 부름에 한번 올라가 사정전에서 명종을 뵙고 
치란의 도리와 학문의 올바른 길을 표(表)로 올린 후, 며칠만에 다시 내려와 
버렸다. 

남명은 특히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스스로 차고 다니는 쇠방울 소리를 듣고 
반성과 자제에 철저했고,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내명자경 
외절자의(內明者敬內明者敬 外節者義)라고 새겨진 칼집을 만지며 졸음을 멀리 
했다. 끝까지 백두(白頭, 벼슬 없이 공부만 하는 선비)를 고집하고 오로지 
수기에만 철저했던 선비로서 임종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처사(處士)로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처신은 무조건 은둔을 고집한 
피세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경과 의를 강조한 남명의 입장이 결코 세상을 
등진 삶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도 나라와 겨레를 잊지 않고 뜨거운 
애국심으로 숙세(淑世, 세상을 맑히다)를 자임한 분이었다. 국사를 걱정하고 대의 
바르고 강직한 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뜨거운 충성심은 항상 조정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선비는 나아가고 물러설 때를 분명히 알고 
옳게 처신하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군자가 나가서 당대에 쓰이게 되어 좋은 일을 
하려다가 일을 그르치고 몸을 망쳐 사림에까지 화를 끼치는 자는 바로 낌새를 
내다봄이 밝지 못하고 세세를 살핌이 주밀하지 못한 때문이라 했다. 이런 남명이기 
때문에 명분사상과 분수사상에도 투철했던 것은 물론이다. 

남명이 추구한 선비상의 또 다른 면은 하학인사 상달천리(下學人事 上達天理)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래로 사람의 도리를 익히고 위로 천리를 통함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한 그는 몸을 닦지 않고 머리로 지식만 넓히려 하는 것은 
학문의 올바른 길이 아니며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참선비가 아니라 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몸가짐에서부터 바른 습관을 익힐 수 있는 
소학(小學)의 기초 위에 비로소 올바른 대학(大學) 공부가 가능하다고 했다. 
반듯한 인격교육은 소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대학의 지성교육은 
이러한 인격교육을 기반으로 할 때라야 제대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야말로 현대사회의 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고 있음을 제대로 밝혀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경세제민의 안목은 별로 신통치 못했어도 고고했던 
선비로서의 자존심과 의기충천하는 유가적 기절만은 가장 투철했던 인물이 바로 
남명이다. 

퇴계가 경(敬)을 숭상했다면 남명은 의(義)를 더 강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퇴계의 경신(敬愼)과 남명의 의기(義氣)로 바탕이 이루어진 조선조 선비문화는 
선조 때에 이르러서 문치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목릉은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선조와 그 원비 및 계비의 능인데, 후인들은 선조 때의 
문치를 높혀 부르기 위해서 당시를 목릉성세라 했다)를 이룬다. 선조는 덕망 있는 
사림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 바치게 했는데 율곡의 유명한 『동호문답』도 여기서 제출된 것이다. 
율곡에 따르면 유학적 선비는 수기, 치인, 입언의 세 가지 덕목이 있다. 여기서 
입언(立言)이란 치인의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했을 때 조용히 물러나 자손 만대에 
교훈을 남기는 작업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정치도 이내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등으로 나뉘어져 당쟁으로 치닫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운이 점차 약해져서 결국은 일본과 서양 세력 앞에 무릎을 
꿇는 경술국치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퇴계와 남명에 의해서 고양된 선비정신이 
이렇듯 제구실을 못하고 소위 선비라는 자들이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 자멸해 
버리게 된 연유는 앞으로 철저히 연구되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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