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13일 토요일 오후 05시 31분 48초 제 목(Title): 퍼온글/한국의 민간신앙, 왜 강한가? 한국의 민간신앙, 왜 강한가? 일시 장소 참석자 사회 1998년 9월 9일 오후 4시 인사동 사원(思苑) 김인회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주강현 민족문화유산연구소장,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저자 최준식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장현근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본지편집위원 ------------------------------------------------------------------------------- - 장현근: 안녕하십니까? 요즘 날씨도 덥고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주제는 한국의 민간신앙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토론할 수 있겠지만 특히 전통을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계승하고,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토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용어의 정의에 관해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저는 한자어 '무(巫)'가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토착신앙, 민간신앙, 무속, 무교 등 다양한 용어로 부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각 용어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을 텐데, 정확하게 어떻게 정의해야 하겠습니까? 주강현: 오늘 좌담회 제목이 "한국의 민간신앙"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민간신앙'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없었던 말로, 일제시대에 생긴 신조어입니다. '굿'은 관용적으로 사용하여 온 옛말인데 반하여, '무속'이라는 용어는 전근대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근대에 들어와 생긴 말입니다. '민속'이란 말도 기왕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민지속(民之俗)'을 줄여서 '민속(民俗)' 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무교'라는 단어는 기독교 같은 제도종교의 영향이 미치면서 종교학적으로 '무교(巫敎)'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토착신앙'이라는 용어는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생겨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관점에서 볼 때 원래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토착민', '본토인', '원시문화'이라고 불렀고, 여기에 연계되어서 그들의 신앙을 '토착신앙'이라고 부르던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상의 여러 가지 용어들이 혼합되어 사용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분명 우리 민간신앙이 제대로 체계화되어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인회: 살펴보면 연구자들에 따라서 각각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별로 만족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우리 연구자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최초에 쓰여진 것이라 생각되는 이능화 선생의 『조선무속고』가 있습니다. 이 선생님은 여기에서 책의 제목은 『조선무속고』라고 했지만 막상 민속에 대해서는 '신교(神敎)'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연구자들이 한국의 전통사상을 여러 가지로 규정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랬더니 초점만 분산되고, 지금 우리의 토론주제인 굿을 하는 무당의 습성과 관련하여 전통사상을 파악하고 정의할 만한 합당한 이론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저도 한국의 전통문화란 관점에서 처음 논문을 쓸 때는 '무교(巫敎)'라고 했다가 지금은 '무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서 보면 무속문화라는 것이 한국문화 전반에 직럭A♣岵막�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것을 협소하게 무당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만 한정지어 볼 수 있느냐, 아니면 보다 더 포괄적인 것으로 볼 것이냐 하는 점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최준식: 종교학적 측면에서 보면 샤머니즘, 굿 등은 전부 종교현상이기 때문에 '무교'라는 말로 거의 정착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것을 무속이라고 부른다면, 기독교나 불교를 기독속, 불속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또한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이 '민간신앙' 문제에 관련해서 포괄범위를 단순히 무당종교로 국한시켜서 볼 것이냐 아니면 민간신앙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강현: 사실 용어라는 것은 그 기원에 상관없이, 자주 쓰다 보면 확산되고 정착되게 됩니다. 학계에서는 이미 '무속', '무교', '민간신앙'이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용어 외에 쓸 수 있는 다른 언어를 찾기는 힘듭니다. 김인회: 일본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무속' 이라고 부르지 않고, 의도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샤머니즘'이라고 부릅니다. 돌아가신 임석재 선생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이지만,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는 다소간 샤머니즘의 영향하에 있습니다. 또한 시베리아의 샤머니즘과 한국의 샤머니즘은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는데도 그냥 '샤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외국학회에 나가서 한국의 굿, 무속이라고 말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만, 또 막상 "샤머니즘" 이라고 말하면 금방 알아듣습니다. 주강현: 외국학계에 발표할 때, 무속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문으로 굿을 어떻게 번역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대개 '샤머니즘'이라 씁니다. 샤머니즘이란 말은 세계적 보편성은 있는데 한국적인 지역적 특수성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저는 항상 괄호를 열고 'Korean Kut'이라고 별도로 명시합니다. 무당은 'shaman'이라고 명기하고 별도로 'mudang'이란 고유명사를 괄호에 넣습니다. 이처럼 보편성과 특수성을 서로 조화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장현근: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한국의 민간신앙에 대하여 아직까지 개념상의 차이가 상존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보편성과 특수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용어의 개발도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속이라는 것이 한국인들의 내면 속에 잠재하고 있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면적 실체가 오늘날 왜 '미신(迷信)'이라고 불리고 있을까요? 또 언제부터 무슨 연고로 '미신'으로 치부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을 알게 되면 한국의 민간신앙을 단순히 '미신'이라고 비하시켜 부르는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주강현: CD-Rom으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았지만, '미신'이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용어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단어가 수입된 것까지는 좋은데 동시에 가치관까지 수입되어 '미신' 이라는 어감 속에는 벌써 민간신앙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분명 합당한 객관적 용어가 아닌데, '미신'이라는 단어 속에서 벌써 좋지 않은 것, 비과학적인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후진적인 것이라는 선입견이 지배적입니다. 최준식: 샤머니즘이란 상당히 감정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실제로 세계 종교사를 살펴봐도 종교들간의 갈등이 존재하고 고등, 열등의 구분을 하며 타종교를 미신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입니다. 성리학은 이학(理學)이고 이성적인 것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고려시대는 기록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는 무속 부분을 미신화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일제시대에는 한국적인 것을 탄압했기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고, 해방 후 서양의 과학, 기독교, 조국의 근대화정책, 새마을 운동 등을 거치면서 무속이 더욱 더 터부시되고 열등시된 것 같습니다. 김인회: 저는 우리 나라에서 무속이 미신시 된 것은 고려중기부터라고 생각합니다. 12세기의 『동국이상국집』에 <노무편> 이라는 시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유교가 득세하면서 무당이 성안에 있지 못하고 쫓겨 나가는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유학자의 입장에서 무속을 경멸하는 자세로 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자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의 무속행사를 구체적으로 잘 묘사한 자료로 귀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불교가 삼국시대에 들어왔을 때에만 해도 우리 나라의 전통 종교와 적절하게 잘 혼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교가 들어오면서부터는 억압을 받게 되고,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했던 조선시대에 가서는 더더욱 탄압을 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 민간신앙이 구체적으로 타파되어야 할 대상으로 된 것은 일제시대입니다. 분명 조선시대에도 성균관생들이 미신타파를 위해서 여러 활동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엄격한 유교문화와 그로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필요했던 무속문화는 분명 공존하여 왔습니다. 조선조 500년 동안 지배계층과 무속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로 들어오면서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한국의 전통적인 것들을 전부 없애고 자신들의 문화를 강제로 이식시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전통신앙이 더욱 더 탄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사관에 따르면 한국문화의 정체성으로 주장하면서 한국의 것 중에서 불교는 인도에서, 유교는 중국에서, 기독교는 서양에서 온 것인데, 이것들을 다 빼고 나면 샤머니즘만 남는데 이것은 결국 무속, 미신이었다는 식입니다. 그래서인지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무속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가 분명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가 지나가면 지배층의 문화는 생명력을 잃고 박물관으로 들어가지만, 전통 신앙은 끝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옆에 있는 중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5000년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한국 전통신앙의 문화적 생명력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주강현: 개화시대가 시작되면서 나온 여러 중요한 소설들 가운데 한국의 전통신앙들이 미신으로서, 즉 타파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신소설의 대표주자인 이인직의 소설을 보게 되면, 조선시대의 모든 모순관계는 한국의 전통신앙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식으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문제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평양 대부흥회"의 경우를 무속과 기독교 신앙이 만난 결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구적인 신관이 전통적인 무속과 얽히면서 생겨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정체성이란 입장에서 애써 두 개를 서로 분리시켜 놓고 보려고 하거나, 아니면 양자의 관련성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영향력이 매우 커진 오늘날에도 한국 전통신앙은 민중 속에 살아남아 있고, 강한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최준식: 사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전통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습니다. 우리가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한국적인 것들은 거의 전통신앙의 그늘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술 부문만 하더라도 승무, 살풀이, 산조, 판소리 등은 사실 샤머니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한국의 전통문화로 인정하고 외국에도 수없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현재에 와서는 우리의 것을 돌아보고 소중하게 여기자는 운동도 여기저기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 있어서 우리는 샤머니즘을 이질적인 것으로만 보려고 멀리합니다. 이것은 한국 전통문화의 뿌리는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김인회: 무속이 더욱 더 미신으로서 평가받게 된 상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나라 현대사의 큰 사건을 들자면 두 개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동학농민전쟁이고 나머지는 3 운동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한 가지 종교가 주도가 되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운동입니다. 3 운동이 실패한 후에 다시 두 가지 방향으로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재력가들이 돈을 모아서 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것이었고, 선교사들은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기를 북쪽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갑니다. 부흥회운동과 주일학교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무속은 점점 미신타파의 대상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장현근: 세 분 말씀에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국의 전통신앙을 무시했고, 일제시대에는 한국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 더욱 억압했다고 하셨는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당시 한국 사회에서 무속이 상당한 기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무당이 사회구조 안에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확보하고 있으면서 공동체 내 사람들의 맺힌 것을 풀어 주는 매개기능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무속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 기능을 했는지, 순기능 뿐만 아니라 역기능까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최준식: 순기능, 역기능이란 구분이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굳이 존재근거를 가지고 본다면 저는 샤머니즘이 한국인들의 원초적인 욕구를 총족시켜 주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지금까지는 사회적인 기능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개인적인 기능을 살펴보면 샤머니즘은 원초적인 욕구를 총족시켜 줍니다. 백남준씨는 샤머니즘이 음(陰)적인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굿을 살펴보면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납니다. 또한 사람들이 각각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들은 전부 무당에게 가서 말을 합니다.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사람들 마음 속에 털어놓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음적인 것들을 해소시켜 주는 기능을 무당들이 담당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강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마을 단위로 하는 굿, 즉 마을굿이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하는 도당굿, 당산굿 같은 축제가 있었는데,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신을 모시는 행사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의례처럼 여러 가지 사회적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마을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고, 질병을 퇴치하고, 정신적인 위안을 받고자 한 것들이었습니다. 무속에는 분명히 이러한 순기능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측면만 확대하여 그것을 가지고 비판적인 글을 쓰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굿이라는 것은 신앙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분명히 사회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는데 편협한 시각을 갖고 신앙적 측면만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고자 했던 일제에게도 있었지만, 특히 민속학을 공부하시는 전문가들부터 먼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김인회: 일제는 1930년대에 한국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파악하여 정리한 방대한 '아끼바' 혹은 '총독부' 자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1930년대에 나왔으니까 분명 1920년대부터 연구한 자료일 것입니다. 이게 제가 1968년부터 한국 무속의 자료를 연구해 보면서 처음 만난 자료입니다. 사실 그 당시까지 한국에서 나온 연구라곤 이능화 선생, 손진태 선생의 자료와 60년대 후반 김태곤의 "황천무가연구"가 전부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연구가 훨씬 많았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왜 한국 무속에 그렇게 관심을 갖는가에 대해선 김태곤 선생님이 석주명 선생님의 회갑논문집에 쓰고 계신데 저도 아주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시기적으로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일제는 사실상 한국의 교육, 문화를 장악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3 운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일제는 그 후 문화통치를 하게 되고, 경성제대가 설립되고, 일본학자들이 들어와서 한국을 보다 더 잘 통치하기 위해서 한국의 문화, 민속 등을 많이 연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방법을 동원해서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를 분석했습니다. 이는 일제가 한국 민중들의 의식을 이해하고, 한국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걱정하는가를 제대로 파악하여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일제도 우리 나라의 문화를 이렇게 연구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그렇게 연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한국 학자들이 자생적인 동기를 가지고 전통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일입니다. 장현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면 분명 민간신앙에는 훌륭한 사회적 기능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여기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일제는 일찍부터 여기에 주목했다는 뜻이군요. 김인회: 그렇습니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무속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했었는데 우리는 왜 그렇지 못했을까? 이 점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봅시다. 원래 우리 나라의 교육은 'Desk Work'와 'Field Work'가 병행되어 왔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조가 끝나고 일제가 들어오면서 우리 나라의 교육에서 Field Work가 사라지고, Desk Work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무속연구는 Desk Work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Field Work을 통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인데, 우리 나라 학자들은 전부 Desk Worker이므로 책상에 주로 앉아서 연구했기 때문에 성과가 부족한 점도 분명 있습니다. 주강현: 놀라운 사실은 일제시대 민족운동가들의 글을 보면 대개의 글에서 무속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사회주의자들도 당연히 무속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점은 이 시대에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다수가 우리의 전통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하고 서양 문물들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민족운동을 하면서 민족적인 것을 부정하는 편향은 분명 논리적 모순이지요. 무속은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라는 말은 구두선으로 되뇌이고 있지만, 정작 우리 나라에서 지금까지 무속에 대해 국가적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제가 총독부의 총력을 동원하여 큰 프로젝트로서 연구한 적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하고 있는 연구들도 모두 각 연구자들이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거의 수공업적인 것들입니다. 만약 한글 연구에 국가적으로 예산을 투입한다면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무속연구에 국가예산을 투입한다고 하면 반대할 사람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김인회: 저는 이 문제가 우리 나라 양반의식과도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대 독립협회운동은 많지 않은 엘리트들이 중심이 되어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지방에 지회를 하나 만들고자 해도 부탁을 해야 어렵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 말 신간회운동이 일어났지만 가입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은 자기 손으로 이력서를 쓸 수 있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사실 동학, 임오군란 때 이미 역사의 흐름이 민중의 손에 있다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우리 나라의 엘리트들이 민중들을 얕잡아 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육당 최남선 선생의 글들을 봐도, 고대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단군 같은 고대무속은 이야기합니다. 단재 선생의 경우는 우리 나라 역사 5천년의 대사건이라고 해서 고대 무속이 화랑도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 유교의 김부식에게 패배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무속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무속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장현근: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무속의 사회적 기능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우리 학계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양반이나 엘리트들과 많은 관련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무속이 일반 민중, 대중과 더 큰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요. 그 범위를 어떻게 상정해야 되겠습니까? 주강현: 민간신앙이 갖고 있는 것을 개별적인 기복신앙 이외에 사회적 의의로 접근한다면 저는 {정감록』을 들겠습니다. 정감록을 잘 살펴보면 그 내용은 포괄적인 신의 정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조선시대에는 왕조타파의 씨앗 역할을 하였던데 반해, 일제시대에는 현실 도피적인 성향을 많이 띠었습니다. 이처럼 민간신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급진적으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성격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봉건적이고 정체적이어서 역사적 퇴행성을 갖고 있습니다. 김인회: 사실 우리가 학문적으로 정감록류의 참서, 도가류의 민간신앙적 문화내용을 무속으로 넣을 것인지, 아니면 더 넓은 기층문화에 넣을 것인지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전부 다 무속으로 포함시켜 버리면 그 중에는 도가류들도 분명히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그 동안 연구가 어느 정도 되어서 무속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서서 하는 굿이 아닌 무당이 하는 앉은굿 같은 경우는 거의 연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백산맥에 들어가 보면 산신신앙도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또한 독경, 법사 같은 것들은 다분히 도가적인 요소들이 포함되고, 더 나아가면 기철학, 단학, 국선도, 거슬러 올라가면 화랑도까지 있는 데 이것을 전부 무속에 포함시킨다면 분명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문화의 광대한 산맥 속에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구체적, 체계적으로 전통문화, 무속 등을 잘 드러내는 작업이 아직도 심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강현: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김열규 교수는 동학의 교주에 관련하여 "어느 날 홀연히 신기가 그득하여" 라는 대목을 접신(接神)과정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무속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무속자체가 갖고 있는 혼재성 때문에 정확하게 딱 잘라서 구분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한국무속은 미분성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 미분성 때문에 구분이 어렵기도 하고, 반대로 미분성 때문에 곳곳에 '침투'하여 잠복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굿은 한국인의 뿌리라는 말도 하는 것이며, 그 뿌리란 말은 깊게 잔가지를 드리워서 잠복되어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최준식: 물론 기우제, 용신신앙 등 사회적 기능이 있기는 했었지만,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무속은 가족, 동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희귀하게 민간신앙, 불교가 합쳐져서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식의 있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혁세(革世)적인 내용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강현: 저는 굿이 지닌 의례를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년 전에 시베리아 야쿠츠크에 가서 에벤키 사람들이 하는 진짜 샤머니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소수민족 에벤키족에게 샤만의 굿은 단순한 공연이 아닙니다. 의례 자체가 어떤 민족적인 마지막 징표입니다. 장현근: 기독교의 경우에는 예배당, 불교는 법당이 있는데 우리 민간신앙에서 굿의 경우는 대나무 하나, 깃발 하나만을 놓고 합니다. 이렇듯 굿이 의례의 '규모'를 갖춘 타종교와 다른 까닭은 혹시 종교적 초월성이나 성직(聖職)이란 의미보다 대중들의 현실적 삶의 현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굿의 대중사적, 민중사적 의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주강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 라는 속담이 있는데 저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굿판에 가보면 굿을 치르고 난 후에 떡을 먹습니다. 요즘에야 살기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먹고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굿판에 가면 배고픔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고,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도 있었습니다."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 싫어서 굿 못하겠다" 라는 말도 있는데, 당시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습니다. 여인들이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는 분위기와 장소는 굿할 때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 마을에서 굿을 치르고 난 후에 지신밟기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의식을 하는 등 집단적인 마을 행사를 하게 되면 마을 전체, 즉 공동체의 신명을 풀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굿은 개인적, 공동체적인 측면에서 신명풀이를 해주고 민중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했던 살아 있는 의식이었습니다. 김인회: 저는 지난 3년 동안 일본 무속을 연구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마을 굿을 해도 이것을 주재할 무당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직접 나와서 합니다. 거리가 바뀔 때마다 춤을 추는데 혹시라도 그 춤사위를 잊어 버릴까 봐 아버지와 아들, 즉 선생과 제자가 같이 나와서 춤을 춥니다. 그래서 일본의 굿은 그 형식이 매우 엄격하게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굿은 그 형식이 엄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명이 납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틀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혹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염려될 때, 굿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접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 신을 부르는 전문가 즉 무당을 시켜서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처럼 신이 있는 성소로 사람이 직접 가지는 않습니다. 대신 사람이 살고 있는 땅으로 신을 부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곳이 신성한 장소가 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일본은 춤만 추지만, 우리 나라는 장편의 무가를 먼저 부릅니다. 무가의 내용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신을 부른 이 장소가 보통 터가 아니라 매우 신성하고 역사가 깊은 곳이라는 것이고, 나머지는 신을 부르라고 부탁한 사람들의 집안은 당당하게 신에게 요구를 할만큼 훌륭한 삶을 산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은 후에는 신을 쫓아냅니다. 우리 나라 굿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큰 신, 잡신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지상천국이 온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무속이 갖는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자기 족속, 자기 땅에 대한 자부심을 사람들에게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게 나올 때는 가족, 부락, 지역이지만 확대되면 global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장현근: 그렇다면 사회적 관점에서 무속이 불만족스러운 세상, 즉 현실을 바꿔 보고자 하는 혁세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닙니까? 특히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그러한 사상과는 연관이 없습니까? 김인회: 무속에서는 내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현세주의입니다. 현세가 지상천국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신들로부터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빌려 올뿐입니다. 최준식: 무속이 과연 혁세(革世)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을까 하는 문제는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강현: 무속에 세계관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상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유교가 지배하는 마을에서 굿을 벌이게 되면, 무당들이 활약을 하게 되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유교적인, 기존의 질서와 체제에 대한 '제의적 반란' 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김인회: 우리 나라의 굿이라는 것이 입지조건에 따라서 아주 다양합니다. 제가 직접 가서 본 적이 있는데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기 이전에 정발산에서 굿을 합니다. 말머리 도당굿이라고 하는데 정발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있는 여섯 부락이 공동으로 주관합니다. 특히 이 말머리 도당굿의 특징은 할머니들의 축제라는 것입니다. 차일을 친 가장 좋은 안쪽 자리를 할머니들이 차지하고, 그 바깥의 자리를 할아버지나 젊은이들이 차지합니다. 성격이 다르지요. 주강현: 80년대 중반에 제주도 모슬포에서 굿을 봤는데 심방이 나와서 4 항쟁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명단을 한명 한명 나열해 호명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참석자들이 웁니다. 지금은 4 항쟁 심포지엄도 하고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감히 4 항쟁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이런 의식을 통해서 공동체에 있는 한을 풀어 주는 역할을 무속이 담당했었습니다. 이것은 무속이 잔잔하지만 은근히 체제에 대해서 부정적인 성격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이런 측면들까지 포함해서 넓게 본다면 무속이 혁세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인회: 마을 굿을 하게 되면 온 마을이 그날은 밥을 하지 않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게 되면, 재산이 한쪽으로 몰리게 되고 그 결과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이렇게 쌓인 불만들은 반드시 풀어야 하는데 마을 굿이라는 기회가 재분배와 스트레스 해소에 크게 기여합니다. 또한 원래 어떤 공동체에나 기존의 행정체계가 있는데, 마을 굿을 할 경우에는 기존의 위계질서와 다른 체계가 성립합니다. 굿을 하는 일자를 정할 때 누가 모이고, 굿의 책임을 누구에게 맡기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위계질서가 생깁니다. 결국 마을 굿을 할 때 나름대로의 새로운 질서가 생깁니다. 주강현: 원래 무당은 평상시에는 천민, 즉 하층민입니다. 그런데 굿판을 벌이게 되면 그들이 주역으로 올라섭니다. 하층민이 종교적인 행사에서 제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장현근: 혁세와 관련하여 무속과 다른 전통 신앙과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예를 들면 의례(儀禮)가 굉장히 발달한 불교이지만 미륵신앙과 같은 것이 있는데, 망이렇좁弩缺� 난 때 그들은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혁세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무속과 연관시켜서 볼 수 있을까요? 김인회: 살펴보게 되면 도가쪽의 의식이 보다 더 공격적이고, 무속쪽이 화해적입니다. 원래는 둘 다 같은 족속이었던 것 같은데, 무속이 살아남기 위해서 전투적인 내용을 뺀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강신무를 살펴보게 되면 한반도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전투적입니다. 서울의 무당은 굿을 할 때 작두를 타도 물항아리 위해서 하는데, 황해도의 경우는 높은 단을 칠성단이라 해서 쌓아 놓고 그 위에서 합니다. 평안도로 올라가면 훨씬 살벌하고 피가 많이 나오는 굿을 합니다. 이를 볼 때 무속도 도가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전투적이었는데 현실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서 과격한 부분들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동학, 삼일 독립운동에서의 경우처럼 막상 위협적인 경우가 되면 거대한 민중운동의 계기로서는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장현근: 동학에서도 무속의 영향력이 그렇게 많이 나타납니까? 최준식: 제가 알기로는 동학의 경우는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고, 선도(仙道)적인 것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샤머니즘적인 것은 거의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동학보다 차라리 불교와 무속은 연관시켜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둘 다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상보적인 관계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의 스님과 절 앞에 있는 무당이 서로 결탁해서 손님을 서로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혹은 절 안에서 굿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부안 내소사의 경우에는 절안에 당산 나무들이 있어서 같이 했다는 기록도 있고, 서로 평화공존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강현: 불교와 민간신앙과의 관계는 시기별로 파악해서 봐야 있습니다. 여말선초에는 각 지역마다 향도가 존재하였으며, 매향의례(埋香儀禮)가 존재하였습니다. 향도결계(香徒結契)를 해서 향을 땅에 묻고, 후에 미륵천년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혁세성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여말선초에만 보이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조선후기가 되면 각 마을로 미륵이 침투해 들어갑니다.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 따위는 마을 안의 신앙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오로지 미륵만이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것도 일반 불상의 형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고, 단순한 돌멩이들도 미륵이라고 불렀습니다. 남근 신앙과 관련된 남근 바위도 미륵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는 칠성신앙과 미륵이 결합되게 됩니다. 분명 이 자체를 혁세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아들을 낳으라고 강요받은 고난에 빠진 여인들이 미륵신앙을 통해서 구원받고자 했다는 점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미륵교도들이 비밀조직을 만들고, 무당을 동원해서 양주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들이치려다 실패한 숙종조 '여환의 난' 같은 대역사건은 분명 혁세사상과 관련 있습니다. 훗날 증산도의 강증산도 자신을 미륵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전통신앙은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서만 봐야지 한가지를 통해서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장현근: 그러면 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제사의식, 조상숭배 등과 관련하여 유교와 민간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말씀을 해 주시지요? 중국에서도 집집마다 조상의 신위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아침저녁으로 지성을 드려 제사를 지내는 그들은 제사를 많이 지낼수록 돈도 많이 벌고 복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세속화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조상에 대한 유교적 제사를 보면, 그렇게 기복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강현: 이 문제에 관련해서 대표적인 사례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지역에서 당산굿 혹은 당산제를 지내는데, 분명히 샤머니즘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을 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중앙에서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격식을 갖추어서 유교적으로 포제 따위를 지냅니다. 제(祭)를 드려도 남자들끼리만 가서 드리고, 무속적인 굿과는 아주 다른 제(祭)를 드립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유교는 분명 민중생활 속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민간신앙적인 것과 결부되어 융합된 채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김인회: 그런 문제는 지역적인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상도의 경우에는 산신제를 유교적으로 지내지만, 해안쪽에 가서는 무속적으로 지냅니다. 강릉의 경우에도 먼저 강릉을 대표하는 관료들이 유교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물론 그 때는 무당들도 참가합니다. 그 후에는 굿을 합니다. 이처럼 지역에 따라서는 유교적 형식으로 제(祭)를 드리고 난 후에 굿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일관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장현근: 의식은 그렇다 하더라도, 조상숭배에 있어서는 어떠합니까? 주강현: 기존의 연구논문들을 살펴보면 주로 유교를 전공으로 하는 분들이 하시기 때문에 정말로 유교적인 논문들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전라도 위도로 현장조사를 간적이 있었습니다. 차례를 지내고 있었는데, 제사상도 있고, 지방도 있고, 지극히 유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상 옆에 항아리가 있고, 그 위에는 삼색실과를 쟁반에 담아 놓았습니다. 궁금해서 그것이 뭐냐고 물어 봤더니 조상상이라고 했습니다. 그 곳에 20여 가구가 있었는데, 돌아봤더니 전부 그런 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제사라는 형식 속에 유교와 무속이 같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원래 무속적인 조상 제사가 이어져 오던 배경 속에서, 어느 시대인가 유교가 강하게 조상제사를 규정하게 되면서 양자가 병립하게 된 사례입니다. 그런데 유교를 전공으로 하시는 분들이 이처럼 지역적으로 분명히 무속적인 조상제사가 병존하고 있는데, Field Work를 하지 않고, Desk work만 하시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인회: 원래 유교에서는 조상을 신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혼이나 영으로 봅니다. 또한 제사의 대상으로 되는 것은 정말로 자신의 직계 조상이지, 자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속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로 나누어서 봅니다. 죽은 자들도 불완전하면 잡귀가 되기 때문에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결혼도 시켜 줍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될 때 가족의 신으로 모십니다. 결국 무속은 유교와 비교할 때 조상의 범위가 넓고 아주 융통성이 많습니다. 최준식: 유교와 무속이 제사에 있어서는 상보적인 관계였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유교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부계(父系)에 속하고, 나이가 들어서 자식이 있는 경우에만 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는 모두 무속이 담당했습니다. 며느리가 자신의 아버지 제사를 지낼 수는 없지만, 굿은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무속은 유교적인 제사가 담당할 수 없는 부분들을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탄압을 받았어도 무속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유교는 구분이 분명히 되어 있기 때문에 샤머니즘이 가장 침투하지 않은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속에 관해선 차라리 기독교가 관련이 많을 것입니다. 장현근: 내친 김에 기독교와 민간신앙과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최준식: 저는 기독교 신학자들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데 무엇이냐 하면 자꾸만 기독교의 현실 기복적인 측면을 샤머니즘에 덮어씌운다는 것입니다. 주강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평양 대부흥회가 무속과 기독교가 만나는 첫 번째 사건이라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종교학에서는 부흥회를 하나의 큰 굿판으로 봅니다. 그 순서도 굿하는 순서와 비슷합니다. 먼저 찬송가를 반복해서 부르고, 노래를 부른 후, 단순한 동작을 반복해서 행하며 통성기도를 합니다. 그 후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결국에는 방언(放言)이 나와야지만 기도가 잘 드려졌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렇게 하는 교회만 커져가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주강현: 기독교와 민간신앙의 관계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평양 근교를 지나가다가 한 무당이 장군신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선교사는 무당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신(神)인가에 대해서 여러 설교를 해 주었습니다.얼마 후 그 무당은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좋은 신이라면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며칠 후에 가서 보니 그 무당은 여러 신상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사진을 끼워 놓고 제(祭)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생각한 것은 다른 신들은 전부 치워 버리고 예수님만 모시는 것이었겠지만, 무당은 예수님을 여러 신 중에서 한 분으로 모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 고유의 만신(萬神) 사상과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의 다신숭배사상인 판테온과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한국에 와서 특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한국적인 특수성, 민족적인 특수성 때문에 생겨난 것 같습니다. 김인회: 기독교와 무속은 모두 다 장점과 단점을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단점은 너무 독선적인 배타주의라는 것이고, 무속의 단점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의 장점은 모든 사람들을 품어 주는 사해동포주의, 사랑과 겸손이고, 무속의 장점은 자연에 포함한 모든 것에 너그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의 단점과 무속의 단점이 결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양자의 장점이 결합하면 좋을 텐데 오히려 단점들만 결합되었습니다. 장현근: 바로 그런 작업이 전통과 현대를 건강하게 연결하는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 나라에 독특한 새벽기도도 정안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민간의식의 연장이란 설명도 있습니다. 기독교와 무속사이의 상보적인 입장에 대해서 좀더 말씀해 주시죠! 주강현: 저는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 일치가 참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변선환 목사님의 경우에는 종교 다원주의를 말씀하시면서 어느 종교든지 개의치 않고 대화도 하시고 여러 좋은 관점에서 말씀하셨는데, 말년에 감신대에서 쫓겨나셨다는 것은 우리 나라 기독교의 현실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최준식: 기독교와 무속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하는 면에서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실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지 않는 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장현근: 무슨 종교를 믿든지 한국인의 심성 속에 민간신앙적 측면이 상존하고 있다고 볼 때 민간신앙은 어떤 형태로든 설명이 되어 오늘날 한국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현대적 이해가 가능하도록 민간신앙을 논리적 분석의 대상, 체계적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민간신앙은 대중들의 비체계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체계적인 대중의식을 지식인의 언어로 체계화시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까?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 생산이 아닐까요? 최준식: 그런데 이 민간신앙이라는 것이 체계화되기에 매우 어려운 점을 갖고 있습니다. 체계화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할는지도 모르지요. 김인회: 우리 나라가 민간신앙에 대해서 체계화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시는데, 문제는 그 차원이 아니라 아직까지 민간신앙의 정체에 대해서도 정확히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석굴암이 심히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세계의 보물창고 속에서 본다면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문화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전통과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난 후에 싸움을 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나라는 문화교육측면에서부터 심각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화인 무속에 대해서 너무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강현: 사실 저도 공부할 때 무속에 대해서는 대학원수업에서 조차 제대로 수업 받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혼자의 힘으로, 거의 자력갱생을 하면서 학업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공부하기 힘든 환경인데, 민간에 대한 교육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현근: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학문적, 논리적인 언어로 분석해 놓게 되면, 후학들이 연구하고 정리할 때 보다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간 우리 나라의 무속을 연구하시면서 느끼신 문제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최준식: 원래 민간신앙이라는 것은 각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앞에서 나왔지만 마을 공동체내에서 개인적인 기능과 사회적인 기능을 동시에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오면서 근대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마을 공동체들이 전부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모형을 찾아서 새롭게 과학적, 학문적, 논리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주강현: 무속에 대해서 보다 더 연구가 잘 되기 위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교육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Desk Work 보다는 현장에서 할 수 있는 Field Work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좀 극단적으로 설사 Desk Work가 안되더라도 현장에서 할 수 있는 Field Work만이라도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게 되면 학생이 백 명 이상 참가하는데 이 학생들을 데리고 Field Work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여건 때문에 교육이 어렵습니다. 김인회: 이 문제는 무속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분야의 학문하는 자세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근대교육이 들어오면서부터 Field Work가 사라지고 Desk Work만 남게 되었는데, 이제부터라도 각급 학교의 교육이 Field Work 중심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학교 뿐만 아니라 학교 밖도 교육의 장이라는 인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주강현: 제가 보기에 우리 나라 민속학 연구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구역량이 너무 엉뚱한 곳에만 편중되어서 고려중기, 조선초기 민간신앙 연구 따위로 세분화된 역량분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사적으로 넓게 본 것은 있을지라도 각 분야별로 섬세하게 연구되어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연구들도 주로 대중적인 관심이 집중된 분야에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제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가 힘듭니다. 두 번째는 민속학에 은근히 친일적인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다른 문화와 비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의 일본 것과 비교를 할 뿐, 중국렇망囹시베리아렛윰∏た� 등과 비교한 것은 드뭅니다. 인류학도 왜 자꾸 미국과만 비교하는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최준식: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그런 어려운 연구풍토와 무관하게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의 무당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인회: 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무당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무당은 늘었지만 무속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강신무, 굿 등은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배워야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몰리는 쪽으로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무속을 잘 배우지는 않습니다. 최준식: 앞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우리 나라 전통문화의 저변에는 민간신앙적인 것이 분명히 깔려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음악, 복식, 춤, 신화 등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속의 현장을 살펴보게 되면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집합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나라의 전통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무속은 가장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신자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무속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 아예 가지 않습니다. 좀 관용적, 포괄적인 학문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주강현: IMF가 되어 불경기가 되니까, 점 집은 잘된다고 합니다. 요즘 가장 많이 팔려 나가는 책들도 무속관련 책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 만큼 수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그러나 본받을 만한 모범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장현근: 확실히 과학은 삶의 수단일 뿐,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학세계라 불리는 오늘날이지만 과학이 인간의 존재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인간의 몫'인 정신영역을 두고 그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한국의 민간신앙이 생명력을 유지하며 보다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나 무속연구의 방향에 대하여 정리를 좀 해 주십시오. 김인회: 우리 나라 무속의 중요성은 무당이 종교 지도자인데도 평소에는 천민으로 대우받는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이면서도 평소에 천민으로 고통 당하며 대우를 받기 때문에 여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현재 종교지도자들은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자만 하지, 무속에서처럼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무속의 종교적 지도자 의미를 재창조, 계승, 음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강현: 우리 나라에서 발간되는 커다란 잡지들을 봐도 무속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고 글을 연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분명히 수요는 있는데도 이것을 직접 잡지의 기사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터부시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과학과 관련해서 민간신앙들을 검증하고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체계, 분석틀도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무속의 생존공간이 지극히 부족한 형편입니다. 재창조를 위해서 사회적 관심의 제고가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김인회: 그 문제는 우리 나라 학문의 연륜을 살펴 볼 때 거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사실 무속을 연구하는 분들이 거의가 국문학을 연구하시던 분들입니다. 구비문학을 전공으로 공부하시다가 무속, 무가쪽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접근하는 방법도 거의 국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결과로 무속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도 민속학이라는 것이 학문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강신무, 세습무가 있다는 것 이외에는 학자들마저 주장이 달라 합의된 것이 거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인류학이나 민속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학자들과 국내의 민속학자들이 서로 조화되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아직도 우리 삶의 현장, 문화에 대한 연구가 심히 부족한 상태입니다. 주강현: 제가 파악해 봐도 고 김태곤 교수의 유고 테이프 같은 것을 살펴보면 거의 순수 문학적인 요소만 활용하고 음악적 자료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굿판의 복합적인 현상에서 문학적인 것만 추려서 무가집을 출간한 셈이고, 나머지는 사장된 채 그대로 남겨진 상태입니다. 이처럼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전혀 안한 것은 분명 아닌데, 체계적려뗍汰岵막�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수공업적이 되고,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국가적인 지원으로 통합적인 연구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김인회: 그래도 지금 연구하는 후학들은 상황이 좋은 편입니다. 민속학을 연구하던 6~70년대 초창기에 비해서 지금은 비디오자료도 있고, 문헌자료도 상당수 정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때는 꼭 Field Work를 하지 않아도 문헌을 통해서 개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자료센터 등을 마련하여 현장연구가 수월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최준식: 우리 나라 샤머니즘의 특색은 사람들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갈등이 많은 사회 속에서 무속은 그런 것들을 풀어 주는 사회적인 기능을 분명히 담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무속에 대해서 '미신'이라고 부르며 낮게 평가하는 사회적인 편견을 없애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현근: 좌담회를 통해서 한국 문화 속에서 무속은 민간신앙으로 분명히 살아있다는 것, 민간신앙에 대해 일제(日帝)로부터의 편견을 벗어나 보다 주체적인 이해와 연구,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 무속에 대해서 '미신'이라고 부르는 편견을 벗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Field Work"를 통해서 보다 더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시간 동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