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8일 금요일 오후 05시 01분 12초 제 목(Title): 한21/김영민 자본과 함께 자본을 넘어 자본과 함께, 자본을 넘어 글로벌 자본주의의 ‘전일성’(全一性)이니 뭐니 하면서 모두 한결같이 자본의 배번(背番)을 달고 매머니즘의 전당을 허겁지겁 뛰어다니고 있는 줄로 알지만, 이것도 실상은 속모르는 소리다. 인간(人間)이란 말 그대로 ‘틈의 존재’(Zwischenwesen)일 뿐 아니라, 또 틈만 나면 ‘다른 생각’에 골몰하는 것. 신화와 가까이 하라 물론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모더니즘(근대성)을 모(더)니즘(일원성)으로 풀어내는 이들도 있듯이, 근대 도시적 자본주의의 전일성이야말로 주류(主流)중 주류이며, 특히 근자 우리 사회가 아프게 증명하는 것처럼 그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는 이들은 근대성의 모든 혜택으로부터 졸지에 소외당하고 만다. 이 글은 “틈만 나면 다른 생각에 골몰하는 비주류”를 회집해서 심정적 공명 속에서마나 서로 위안하려는 발상의 산물이며, 또 가능하면 주류의 일부를 변절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자본의 시대에도 마땅이 돌이켜야 할 또다른 가치들을 살펴주고, 자본과 ‘함께’살되 자본을 ‘넘어서’살아야 하는 우리 삶의 건강한 딜레마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결의이기도 하다. 내 제안은 여러 명분으로 현란한 1999년을 맞아 우리 생활의 사소한 구석이나마 재편성하려는 다섯가지 태도에 관한 것인데, 그간 내가 힘써 틈틈이 실천해 보니 할 만하더라. ‘다섯’이란 이 논단의 원고매수와 관련된 절충일 뿐이고, ‘사소한’ 것은 이 글의 원천이 이를테면 ‘틈의 형이상학’이라는 지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끝으로, 빈틈없이 충량한 자본주의의 일꾼들은 괜히 이 글을 읽고 인상그리지 마시라. 첫째는 신화와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자본주의적 도시가 신화의 주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기억하면 이것은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그러나 그 역설 속에서만 오히려 자본주의의 미래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 근자 신화관련 서적이 읽히는 추세는 “70, 80년대를 휩쓸었던 정치·사회적인 열기에서 벗어나 차분히 존재 그 자체의 신비에 대해 알고 싶어하기 시작했다는 것”(김정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이 범접하지 못하는 인간성의 본래의 깊이, 즉 탈역사화될 정도로 깊은 역사의 늪에 대한 본원적 향수의 징후이기도 할 것이다. 둘째는 시(조)를 암송해 볼 것을 권한다. 이구동성으로 ‘시적 서정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상황’을 토로한다. 인간실존의 가장 부드러운 속살마저 자본제적 현실의 각질 위에 속수무책으로 내팽개쳐져 있다는 것이다. 대체 시의 연성(軟性)으로써 이 정점에 오른 자본주의의 경성(硬性)을 헤쳐나갈 수 있는가? 시의 이름이 오히려 부박한 상업주의의 알리바이가 되는 상략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음풍농월의 의고적 인문주의가 자본을 넘어서는 대안인가? 등등의 반론이 금세 입가에 맴돌 것이다. 하지만, 실천의 지평이란 담론의 기대치를 넘어서는 것. 바로 이 점을 믿고 대략 100편만 암송해 보라. 해-보-시-라! 셋째는 별보기 운동이다. 물론 밤하늘을 엿본다고 해서 누구나 파스칼의 이른바 ‘존재론적 경의’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첨단의 과학이 인문적 상상력을 죄다 축출해버린 지금이 아닌가. 하지만 이 경험에 이르게 될 행운의 소수는 우리의 도시 자본주의를 단번에 내파(內破)할 지순한 심혼의 재생을 선사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소유의 벽을 넘어 ‘있음’과 ‘없음’이라는 삶과 앎의 근원적 범주를 생생하고 절절하게 체험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에서 배우기 넷째는 산행(山行), 아니 정확하게는 나무에서 배우기다. 이것은 물의 상상력을 보완한다고 생각하면 좋다. 간단히, 물은 역동적이고 현란하며 때로 선정적이지만, 나무는 정적이고 투박하며 대지의 내핍을 쫓아 늘 참을성의 열매를 해마다 산출한다. 물은 물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뭇 생명의 근원이지만, 나날이 홍수를 닮아가는 자본주의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나무를 닮아가는 묵정(默靜)의 지혜를 배울 법도 할 것. 마지막은 TV에 대해서 한마디. TV 속에 TV귀신이 산다는 것을 아시는지? 그리고 이 귀신의 숫자는 TV 수에다가 내 시청지침을 어기는 시청자의 숫자를 곱하면 된다. 그 지침이란 생각없이 TV를 켜지 말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생각없이 켜는 ‘텔레비전’은 ‘괴뢰비전’이 되며, 바로 그 순간 당신은 TV귀신의 괴뢰(傀儡)가 되는 것이다(어떤 생각을 해야 하느냐고? 그 생각도 생각해 보시라). 김영민/ 한일대 교수·철학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