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8일 금요일 오후 04시 43분 15초 제 목(Title): 한21/ 사상의 뿌리세우기. 사상의 뿌리를 세워야 한다 한국적 현실 담지 못하는 복제철학 난무… 언제까지 서구·일본·중국에 기댈 건가 (사진/한국의 사상가들이 쓴 책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민운동 단체들이 운영하는 철학마당 '느티나무' 책장에도 수입된 사상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지식인들이 모인 한 좌담에서 에세이스트 고종석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식인이란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인데 글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대학 교수들 중엔 아무 글이나 막 써내는 부류가 있고 글을 안 쓰는 게 아카데미션의 체신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고씨의 말을 이어 김영민 교수(한일대 철학)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그런 문제가 특히 심할 뿐 아니라 심지어 반동적인 구석이 있죠. 기이하게도 글을 잘 쓰는 것 자체를 폄훼하는 잠재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서양 근대 학문의 유습인 ‘인식 중심주의’가 주범이랄 수 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90년대 이후에 한국 지식인들이 어울려 만드는 풍경이나 지형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근대의 공허함’과 맞물려 있는 ‘사상의 황폐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하나의 문제는 ‘지식의 식민화’입니다. 수입과 유통, 주석과 복제는 넘쳐나지만 우리의 역사와 터에 기반을 두면서 생각의 자생력을 심도 있게 키워내는 학자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철학 교수는 엄청나게 양산되었지만 제대로 된 사상가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비극…”(<1998 지식인 리포트>(민음사 펴냄) 중에서). 진정한 사상가를 찾을 수 없는 비극 최근 한꺼번에 번역돼 나오고 있는 일본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책들이나 중국 미학자 이택후(李澤厚)의 저서들을 보면 다시금 이 ‘비극’을 되씹게 된다. 서양철학을 받아들여 완전히 소화한 뒤 자신들의 문화나 문학, 미학체계로 발전시켜나가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 책이 우리나라에서 왕성하게 읽히는 것은 거꾸로 그에 맞서 우리 독자들을 이끌어줄 국내 학자나 서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가라타니 고진(58·긴키대학·컬럼비아대학 교수)은 97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민음사 펴냄)이 번역돼 나오면서 주목받은 뒤, 지난해 말 <탐구> 1(송태욱 옮김)·2(권기돈 옮김, 새물결 펴냄)와 <은유로서의 건축>(김재희 옮김, 한나래 펴냄)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잔잔하게 ‘가라타니 붐’을 일으켰다. 동양권 철학자로 서양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천착해온 이 학자는 문학비평가로 출발해 철학·논리학·정치경제학·문화인류학·사회학으로 뻗어나가며 사유의 발랄함을 자랑하고 있다. 가라타니가 일관되게 연구하고 써온 것은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철학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 비판 위에서 일본의 문학과 철학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는 ‘근대’, 그중에서도 근대국가의 내셔널리즘과 ‘문학’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국수주의의 기원을 캐내는 데 쓰였다.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의 핵심은 정치적 기구보다는 ‘문학’에 있다. 그것은 오늘날 새롭게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기능하고 있다. 1990년대에 우리는 국경 없는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가 그 힘을 잃어가는 것과 함께 많은 ‘상상의 공동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단지 정치나 경제의 레벨에서만 살펴볼 수는 없다. 우리는 네이션의 핵심에 있는 ‘문학’을 그리고 그것의 ‘기원’을 다시 되물을 필요가 있다.” <탐구>는 가라타니가 10대에 (서양)철학책을 읽기 시작한 무렵부터 느껴온 ‘타자’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다. 왜 ‘나(私)가 빠져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나아간다. 그는 결국 서양철학이 타자를 염두에 두었으면서도 자기대화에 머물러 있었으며, 늘 남을 가르친다는 입장에 서 있었음을 비판한다. 이렇게 해서 가라타니는 ‘주체성의 철학의 극복’을 시도한다. 서양 형이상학의 원동력을 ‘건축에의 의지’로 본 <은유로서의 건축>은 그 거대한 건축물, 다시 말해 서양철학의 이론들을 하나씩 일본문화의 토양 속에서 해체하며 그 이념들을 재평가하고 있다. 그는 서양철학의 형식화에 대한 비판을 ‘언어 중심적인’ 평가로 이끌면서 담론과 은유로 확대하려는 동양 학자 나름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가라타니·이택후, 동양적 사유체계 정립 이택후(69)는 <미의 역정> <화하미학>(동문선), <중국미학사>(대한교과서), <중국현대사상사론>(교보문고),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지식산업사) 등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다. 기존 격식이나 전통적인 연구방법들을 깨면서 서양철학이나 미학의 규범까지를 과감하게 아우르며 그 자신의 말마따나 “이도저도 아닌, 새로운 형상”으로서의 저술을 일군 미학자이자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글들은 특히 문학과 예술, 철학과 역사 사이에 그어진 선이나 한계를 깨면서 중국 문예와 철학이 지닌 특색을 죽 훑어내리는 긴 호흡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의 역정>을 우리말로 옮김 윤수영 교수(강원대 중어중문학)는 “중국 미학의 세계에서 중요한 알맹이들을 거머쥐는 그 손의 장력에 찬탄의 염을 금할 길이 없다”고 이택후의 생각의 깊이와 글쓰는 솜씨를 평가했다. 가라타니 고진과 이택후 모두 한국 학계와 교류가 있는 학자들이다. 가라타니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한국어판 서문에 “이 책이 <한국 근대 문학의 기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새로운 의의가 부여된다고 생각”한다며 이 책이 한·일의 역사적 알력을 넘어 참된 교류를 진전시킬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21세기 한·중·일 삼국이 함께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해 우리 학자와 지식인들이 애써야 할 대목이 어디인지 일러주는 한마디라 할 수 있다. 정재숙 기자 jjs@mail.hani.co.kr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