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8일 금요일 오후 04시 36분 30초 제 목(Title): 한21/책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늑대가 인간이 되는 길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짐승들의 자기보존 충동은 ‘이기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나 ‘인간’은 다르다.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뒤로 돌릴 준비가 되어 있을수록, 더 큰 공동체를 세울 능력도 그만큼 더 커진다. 자신의 노동과… 생명을 바치겠다는 희생의 의지가 곧 개인들의 이해와 생명을 전체에 종속시키는 길이다.”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이익만 위해서 사는 사내들은 후세에 잊혀질 것이나,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 영웅들은 명성을 누릴 것이다.” 히틀러는 이를 “가장 순수한 이상주의, 가장 심오한 인식”이라 부른다. 이인화의 말과 비교해 보자. “어떤 불의와 타락에 몸을 적실지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보편적 의지를 위해 국익에 이르는 좁고도 험한 길로 달려가겠다…/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금욕과 절약을 규율하면서 자기 밖의 가족과 회사와 국가에 대해서는 헌신적인 희생을 하도록 강요받는 시대, 이것이 박정희 시대의 영웅적 본질을 이룬다.” 여기서 가혹한 착취의 희생자들은 졸지에 ‘영웅’이 된다. 여기엔 먼저 ‘어떤 불의와 타락’도 마다 않는 이기적 개체들의 적자생존이 있다. 한편 이 신화적 폭력의 세계에서 늑대들이 ‘인간’이 되는 길이 있다. 즉 자신의 이기적 충동을 ‘종족의 자기보존 충동’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기적 충동만 갖고 살아가는 짐승, 즉 유대인과 달리, 아리아족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제 실존을 ‘인간’으로 끌어올릴 줄 안다. 이때 약육강식의 카오스는 ‘전체’라는 이름의 코스모스로 전화하고, 이 속에서 짐승들은 비로소 ‘인간’이, 심지어 ‘영웅’이 된다. 외로운 야수들의 전체로의 집단적 엘랑 비탈(생의 도약). 파시즘의 전체주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신화적 구원이다. 물론 이 구원은 가짜다. 왜? 그 ‘전체’ 속에서 야수들은 화해에 도달하나, 이들이 ‘전체’에 양도한 미시폭력들은 이제 거시폭력이 되어 또다른 희생양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누구? 물론 전체의 단합을 해치는 내부의 적들, 즉 ‘타락한 유대인’, ‘이기적’인 샤일록들(=자유주의), 이 짐승 종자가 만들어낸 사상(=사회주의)이다. 그리하여 거시적 차원에서 ‘전체 빼기 하나’의 제의. 다르게 생각하는 자를 배제할수록 ‘공동체’는 순수해지고 ‘전체’의 동질성은 강화된다. 불순물을 배제할수록 공동체는 신성해지고, 이 신성함이 휘두르는 폭력은 가볍게 인간적 규모를 넘어선다. 내적 동질성의 강화는 곧 외적 배타성의 강화다. 더이상 내부에서 적을 찾을 수 없을 때, 폭력은 이제 ‘세계사적 사건’을 저지르러 밖으로 뻗어나간다. “아리아족은 정복자로서 열등한 인간들을 복종시키고 자신의 명령과 의지와 목적을 위해 그들의 실천적 행위를 규제했다.”(히틀러) 일찍이 아시아에도 히틀러 뺨치는 실존주의 철학자가 있었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야(…)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노는 것,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일세.” 조갑제가 신나서 인용하는 징기스칸의 말이다. 이 분, 과연 제 핏줄이 ‘신(新)몽골족’의 군대에 정신대로 끌려가도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느낄까? 그때도 “야만성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몽골전사들의 ‘당당한 야수성’을 칭찬해댈까? 정말 ‘당당한 야수’다. 엑스 리브리스(ex libris)란 ‘∼라는 책에서’라는 뜻의 라틴어로, 책을 인용할 때 쓰는 말입니다. 진중권씨의 이메일 주소는 kyoko@zedat.fo-berlin.de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