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사과같은내) 날 짜 (Date): 1999년 1월 7일 목요일 오전 04시 49분 08초 제 목(Title): 한/조희연 문화적 과잉근대화 . [한겨레시평] /문화적 과잉 근대화/조희연/성공회대사회학교수/ ▶프린트 하시려면 지난해 추석 때의 일이다. 개량한복을 입은 둘째 애가 너무 예뻐 보여, 추석 지나더라도 자주 입고 학교에 가라고 당부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애는 “싫어요”하고 단호하게 아빠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잘 구슬러 이유를 캐어물으니, “다른 애들이 놀려서 입고 가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대답을 충격과 함께 기억하고 있다. 일반적 현상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한국사람이 한복을 입는데 친구들이 놀려서 못입는다'는 바로 그 `무국적'의 교실분위기를 생각하면서 내가 미국에서 겪은 부끄러운 경험을 떠올렸다.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아리기라고 하는 한국에도 꽤 알려진 학자의 강의를 청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의 주제는 `세계체제의 변동과 노동운동의 변화'였다. 말미에 제3세계와 한국의 노동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길래, “20세기말은 세계체제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노동운동이나 제3세계 노동운동의 이념과 운동방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별 생각없이 던졌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전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전투적이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 운동의 향방이 세계노동운동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은 바로 당신이 그리고 한국의 노동운동이 해야 할 것이다.” 그 응답에 충격을 받고, 참담한 심정으로 `내가 우리 현실을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가'하는 점을 생각하며 캠퍼스에 앉아 있던 적이 있다. 요즈음 이런 생각을 한다. 즉 우리 현실·역사·문화·전통을 대면하는 자세의 근저에는 `식민지성' 혹은 `종속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여전히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것 그 자체에 대한 비하적 시각 혹은 콤플렉스 같은 것 말이다. “우리의 전통·역사·문화는 저급한 것으로서 근대화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시급히 척결하여야 한다. 경제성장은 바로 서구적인 것 혹은 미국적인 것의 모방적 도입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고를 학문적으로는 통상 근대화론적 인식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문화적·의식적 지적 과잉근대화' 현상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과잉근대화의식은 미국의 것은 크게만 보이고, 우리의 것은 작아만 보이는 `친미적 선망'과 착종되어 있다. 어떤 점에서 이런 과잉근대화의식과 친미적 선망이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의 중요한 정신적 토양이었다. 세속적인 악폐의 근원을 양키문화의 침투로 보는 이슬람근본주의 같은 사고로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이끄는 자본주의적 성장열차에 올라타기가 참 어렵다. 우리 사회에는 정반대의 의식이 존재하였고 이것이 고속성장의 한 정신적 동력이기도 하였다. 잘 알다시피 60년대 이후의 한국의 고도성장패턴은 풍부한 저임금노동력을 토대로 하여 외국시장에 내다팔 노동집약적인 생산물을 `모방'적으로 생산하여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바로 이러한 모방적 성장패턴과 과잉근대화의식은 상승작용하면서 서로를 강화시켜왔고, 우리들 의식 속에 체화되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친미적 선망을 상업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유브 갓 메일>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에버 애프터> <시티 오브 엔젤>과 같은 국적불명의 영화제목들이 거리를 장식하게 된다. ♠위로 기사제보·문의·의견 opinion@mail.hani.co.kr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