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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사과같은내)
날 짜 (Date): 1999년 1월  6일 수요일 오전 06시 55분 48초
제 목(Title): 윈/자본주의 붕괴하는가? 



권말부록 / 세계경제 위기논쟁 제 44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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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붕괴하는가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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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7월 태국의 경제가 붕괴했을 당시 미국은 태국과 미국의 교역량이 1%도 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느긋해했다. 경제위기가 심각했던 지난해 1월 태국의 
군인·은행원 등이 방콕에서 '달러모으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유럽을 사로잡았던 유령이… 1백50년을 지난 지금도… 아직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은 바로 지배자의 이념일 뿐이다.’ ‘마이클 
조던은 사람들에게 나이키 옷을 입으라고 말하며 5백만달러를 받았지만 베트남 
처녀들은 그것을 만들기 위해 1달러60센트를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입기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다. 아, 이제 그런 짓은 그만해야 해.’ 

1998년 5월 “공산당 선언”의 발간 1백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에서 거행된 
한 국제학술대회를 알리는 포스터는 이처럼 자극적인 문구로 가득했다. 정의감에 
사로잡혔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라는 두 젊은 천재가 20대의 혈기왕성했던 나이에 
‘자본주의 타도’를 설파했던 “공산당 선언” 이 책자에 후세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 선전물’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들 두 선배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자본주의의 대안과 인간 해방에 대해 뜨거운 설전을 나누었다. 모임은 대성공, 
세계 5개 대륙에서 3백15개의 기고문이 쇄도했고 5월13일부터 16일까지 4일간 
벌어진 회의장은 봄을 맞은 파리 만큼이나 열기가 넘쳤다. 회의 끝에 모든 
참석자들은 마음으로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다시 한번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수년전과 비교했을 때 이들의 자세는 확연히 달랐다. 공산주의의 맏형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자 갈 길을 잃고 시름시름 앓던 것에서 완전히 탈피한 모습이었다. 
자신에 차 있었고 시대적 사명감이 회의장을 뜨겁게 달궜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지 이미 10년.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이 성황을 이뤘다는 
데는 분명 새롭게 생각해 봐야 할 점들이 있다. 물론 유럽과 프랑스의 지역적 
특색이 먼저 거론될 것이다. 좌파가 득세한 유럽, 비록 연정이기는 하지만 
공산당이 여당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던 프랑스여서 공산주의자들의 모임과 
광범위한 토론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하다. 80년대 후반 도미노처럼 밀려든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이들을 뿌리째 뒤흔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유럽 좌파의 
역사가 깊다 해도 버티기 쉽지 않은 충격이었음이 틀림없다. 지난 10년 사이 
유럽의 좌파연합에서 빠져나온 지식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들이 모든 것을 걸고 
‘해방’시켜 주겠다던 대중들은 그들에게 흥미를 잃었고, 대신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감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들이 다시 세계 각지에서 숱한 
지지자들을 얻었다는 것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유럽에서 
일어난 ‘좌파의 승리’도 이같은 세계적 대변혁의 한 결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유럽 좌파의 승리, 현 위기 반영 

무엇일까. 유럽 대중들이 좌파에 힘을 실어주고 세계 각국에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이론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답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바로 세계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 이제는 세계의 한 귀퉁이,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도 
일상용어처럼 돼버린 이 단어는 거의 전적으로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은 치밀하게 위기를 분석했고 예측했으며 또 
그의 ‘도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말처럼 ‘산고(産苦)를 
줄이기 위해’ 그 시기를 앞당기려 했다.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은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다. 

지난 80년대 멕시코가 “더이상 빚을 갚을 수 없다”며 나자빠졌을 때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저 가난하고 빚이 많은 나라, 
지도자들의 무능으로 국가를 바로세우지 못한 나라의 한 사례였을 뿐이다. 
브라질이나 그밖의 남미 국가들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어도 주요 선진국들의 해석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말은 80년대 G7 국가인 
영국을 덮쳤던 파국에도 별로 쓰인 적이 없다. 성장은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실업과 
파업으로 런던 시내에서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해도 ‘위기’라는 단어는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경제 운영을 잘못하면 선진국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준 사례였을 뿐이었다. 

지난 97년 7월 태국의 바트화가 붕괴됐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미국과의 교역량이 기껏 1%도 되지 않는다’며 느긋해 했다. 
전문가들은 태국에 투자한 돈이 많고 교역량이 큰 일본이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른바 ‘복합불황’으로 힘겨워하던 일본인지라 극복하기 
어려운 부정적 영향일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의 위기 등의 발언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태국 금융위기의 여파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홍콩에 이어 신흥공업국의 선두주자 한국을 강타했을 
때조차 서방 언론들은 ‘아시아의 위기’를 거론했을 뿐이다. 헤지펀드와 외화 
투기꾼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어도 자본주의의 한계나 근본적인 모순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나 대공황의 공포가 스멀스멀 고개를 쳐든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98년 봄 세계경제를 이끌던 경제대국 일본의 엔화 폭락과 그를 이은 
주가 폭락으로 세계는 대공황의 불안을 본격적으로 내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일본발 세계공황’이라는 말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미국은 심화되는 
아시아의 경기침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본이 적극 나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소비를 진작시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10조엔에 달하는 
소비세를 영구히 감면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하시모토 정권은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 미국은 일본의 ‘아시아 위기 
책임론’을 들먹이며 일본을 몰아세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98년 하반기부터 아시아의 위기는 급속하게 세계의 위기로 전파되는 
양상이다. 남미와 동유럽이 휘청거리더니 98년 8월 마침내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만다. 중국의 위안화 절하 문제는 당국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아시아와 세계를 위협했다. 오직 미국만이 ‘번영의 오아시스’에 남아 세계 
각국에 이래라, 저래라 ‘훈수’로 일관했을 뿐이다. 많은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8년이라는 긴 기간 호황을 누려왔던 미국은 명실공히 ‘경제우등생’. 
다른 나라의 경제정책에 조언해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불안을 느낀 거대자본들이 속속 미국에 또아리를 틀어 세계의 경제위기는 오히려 
미국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동산과 주식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인플레가 
우려된다”며 한때 금리 인상을 시사하기도 했다. 

전문가들 대부분 세계 장기불황 예고 

그러나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미국 역시 어쩔 
수 없었는가 보다. 점차 조여드는 위기의 고삐는 미국의 기업을 억눌렀다. 수출이 
줄어들고 수익이 감소했다. 주가는 일시적으로 올랐지만 떨어지는 추세고 부동산을 
팔겠다는 사람은 늘고 있다. 특히 지난해 8월 헤지펀드를 운영하던 ‘롱텀캐피털 
매니지먼트’(LTCM)가 도산 위기에 몰렸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익을 찾아 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국가경제를 붕괴에까지 몰고갔던 헤지펀드들이 
투자국들과 함께 무너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자본금 
20억달러인 회사가 무려 1천억달러의 손실을 입었다는 소식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롱텀캐피털에 돈을 묻었던 은행들은 함께 도산 위기에 몰렸으며 
급기야 은행들이 대출을 꺼림으로써 신용경색의 조짐까지 보였다. FRB는 
35억달러의 긴급 재원을 마련해 헤지펀드를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여기에 9월30일부터 한달반 사이 모두 세차례의 금리인하를 단행, 미국도 마침내 
‘번영의 오아시스’에서 떠난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세계경제의 ‘위기설’은 새롭지 않다. 장기불황으로 가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거의 그렇다’고 답하고 있다. 나아가 대공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도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30년대의 대공황이 새롭게 관심을 끌고 최근 
상황과의 비교는 유행처럼 신문지면을 오르내린다. ‘장기불황이냐 대공황이냐’. 
경제주간지의 특집기사 제목과도 같은 이 표어는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살벌하게 만들고 주머니돈을 꺼내는 데 인색하게 만든다. 소비를 늘려야 경제가 
되살아난다고 하지만 여간해서 소비자들은 돈을 쓰려 하지 않는 상황이다. 

세계은행 보고서, ‘공산당 선언’ 문구로 시작 

심지어 일각에서는 자본주의 자체의 수명이 다했다는 말도 나온다. 자본주의는 곧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점차 지식인·언론인·대학생 등 사회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이들의 폭넓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은 이제 그 대안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 것이며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되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빈부격차와 지역문제가 심화되고 실업이 폭증하고 있어서다.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도대체 자본주의는 왜 이토록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가”라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올 만하다. 대학을 졸업해도 오갈 곳이 없고 직장을 잃어 거리를 헤매야 
하는 젊은이들의 불만이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 붕괴를 예언했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상징인 돈을 불태우는 패러디 
사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다시 힘을 얻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의 붕괴를 ‘역사의 필연’으로 보는 이들인 만큼 그 어느 학파보다 많은 
지식을 축적해 왔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대해 비판적 연구로 일관해온 
마르크스주의와 그 ‘변종’들은 이제 누구보다 강력한 이론을 바탕으로 완전 
‘무장’(武裝)을 갖춘 셈이다. 위기가 증폭될수록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역사적 순간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것이며 “역시 우리가 옳았다”고 외칠 
것이다. 이제 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다시 한번 서재 귀퉁이 한 켠에 
처박아뒀던 “자본론”과 “반(反)듀링론”을 꺼내들지 모른다. 현 단계의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겠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지난해 세계은행(IBRD)이 발간한 ‘세계발전 보고서’의 머리글을 보면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된다. 이 보고서는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시킨 사회들, 
이를테면 러시아나 중국·베트남·동유럽에 초점을 맞추며 세계경제가 격변기에 
들어섰음을 회원사들에 알리고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현대사회를 기막히게 
묘사한, 아주 낯익은 문구로 출발하고 있다.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 불안과 
격동…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돼온 관념이나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도 전에 낡은 것이 돼버린다. 
정체적(停滯的)인 모든 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자신들의 상호관계를 냉철한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보고서가 이 글을 앞머리에 인용했다는 사실은 아주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인용문은 
바로 자본주의 붕괴를 염원했던 마르크스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 
서너쪽만 넘기면 나오는 대목이다. 의구심이 드는 것은 자본주의의 영속성과 
안정적 운영을 제1의 과제로 여기는 세계은행이, 그것도 세계경제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보고서 머리글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으로 출발한 이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위해(危害)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일까. “그가 예측했던 
‘대변혁’에는 자기 자신의 붕괴도 포함돼 있다”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묘사는 꽤 쓸만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묘사만 적절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운동’ 자체가 그의 분석대로 움직이는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쇼크’라는 타이틀로 세계경제의 위기를 분석한 
지난해 10월21일자 “뉴스위크”(한국판)가 이를 반영한다. 재미있게도 이 
특집기사의 머리글은, 비록 순화시키기는 했지만, 앞서 IBRD가 인용했던 
“공산당선언”의 한 구절 그대로였다. 여기에 이례적으로 마르크스의 사진까지 
게재하고 그 밑에 자극적인 문구를 덧붙이고 있다. “‘공산당선언’을 쓴 
마르크스는 세계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의 무덤을 파줄 사람들’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21세기는 마르크스의 ‘재기 무대’로 시작할 수도 

이 기사는 ‘위기를 맞은 세계경제는 마르크스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과 ‘대자본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는 것으로 
들린다. 어쩌면 21세기는 마르크스의 화려한 ‘재기 무대’로 출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소련과 함께 몰락한 뒤여서 그의 재기는 더욱 극적인 무대가 될 
것이다. 물론 19세기 이후 자본주의 붕괴와 관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예측은 
대부분 빗나갔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고서’의 
인용과 자신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혼란기 때면 이들은 마치 종말론을 
부르짖는 사이비 종교인들처럼 ‘곧 자본주의의 붕괴가 도래할 것’으로 
말해왔지만 “공산당선언”이 나온 후 1백50년동안 자본주의는 더욱 번성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붕괴를 예상하던 옛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 
먹혀버리고 말았으니 현실적으로는 ‘실패’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현실적 실패, 즉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비난은 이론가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20년대 초 러시아의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와 볼셰비키의 핵심인물 
트로츠키가 벌인 자본주의 위기 논쟁은 아주 좋은 예가 된다. 

1921년의 유럽. 10월혁명으로 러시아가 세계를 뒤흔든 지 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년이 지났건만 유럽과 미국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여전히 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해 7월 
모스크바. 제3차 코민테른에서 혁명의 실세 트로츠키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아주 중요한 선언 하나를 발표한다. “자본주의는 1851년부터 시작해 네차례의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며 “1914년부터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되는 마지막 
다섯번째 기간이 시작됐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는 또 “20~30년 후 자본주의는 
균형을 되찾겠지만 자본주의가 치러야 할 대가는 끔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럽에서만 수백만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게 될 것이며 그와 그 
가족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마침내 급속하게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해인 22년 러시아의 저명한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 역시 매우 비슷한 내용의 
책자를 발간한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경제통계를 광범위하게 수집한 후 내놓은 
이 책은 트로츠키의 그것과 흡사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자본주의는 
1789~1809년 팽창과 1809~49년의 수축, 1849~73년의 또 다른 팽창과 1873~96년의 
또 다른 수축이라는 50년 정도의 장기순환을 두 차례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는 1896~1920년의 팽창기를 지난 쇠퇴기의 
전환점이었다. 자본주의의 순환과 관련해서는 트로츠키와 거의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1920~1921년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해석이었다. 콘드라티예프는 
트로츠키와 달리 당시 자본주의 위기가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계기로 오히려 빠르게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콘드라티예프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스스로 위기라는 ‘병’을 치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강력한 어조로 반박했고 콘드라티예프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러시아 지식인들을 뜨겁게 달군 대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결론은 
트로츠키의 승리. 이론은 양쪽 모두 검증받을 수 없었지만 권력은 실세 트로츠키의 
손을 들어줬다. 콘드라티예프는 논쟁에서의 패배와 함께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참형을 피할 수 없었다. 

 ▲
1999.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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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세계경제 위기논쟁 제 44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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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붕괴하는가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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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지펀드의 대부격으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 그 자신도 국제 환투기꾼들에 대한 
규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1920년대 러시아의 자본주의 위기논쟁 

돌이켜보면 지금 콘드라티예프의 유형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론적으로 
특별한 근거도 없이 논쟁에서 패한 것도 속이 쓰릴 일인데 참혹한 형벌 끝에 
생사까지 확인할 수 없게 됐으니 후세 역사가들은 그에게 동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트로츠키 역시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후 유랑생활을 했으니 
인과응보를 받은 셈이다. 어쨌거나 이 논쟁은 경제사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기순환론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인 데다 경기순환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이들의 이론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80년이 지난 현재 학자들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무승부’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이론가 모두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결과론적으로만 따진다면 일단 콘드라티예프의 주장이 
맞는 듯 보인다. 자본주의는 붕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숨쉬며 위기가 끝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황금기’를 구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은 콘드라티예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늦은 일이었고 트로츠키의 
주장대로 대공황과 또 한차례의 세계전쟁을 치러야 했다. 단기적으로는 
트로츠키가, 장기적으로는 콘드라티예프의 주장이 옳았던 셈이다. 

이 논쟁은 이 시점에서 충분히 재론할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았으니 
다시 한번 주목받을 것이 틀림없다. 경기순환론은 그때 그때의 경기에 따라 순환을 
거듭했다. 30년대 공황기에 슘페터에 의해 재론됐고 70년대 오일 쇼크에 따른 위기 
때 다시 한번 무대에 오른 경험이 있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을 때면 어김없이 이 
논쟁은 수면 위로 떠올라 주목받았다. 지난 80년동안 후학들의 주장과 논쟁은 각종 
학파를 낳으며 오늘에 이른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슘페터를 비롯해 페레츠나 
프리드먼 등 신(新)슘페터주의자들, 대규모 투자를 원인으로 찾는 포리스터, 
세계체계론의 창시자 월러스틴, 프랑스 조절이론의 대가 리피에츠나 보이어 등 
마르크스 추종자냐의 여부를 떠나 자본주의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콘드라티예프나 트로츠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자본’은 ‘재산’과 달리 일정한 수익을 목표한다 

그렇다면 위기에 처한 현재 세계 자본주의는 어떻게 변할까. 트로츠키의 말대로 큰 
희생을 치른 뒤 결국 붕괴할까, 아니면 콘드라티예프의 말대로 한 단계 더 높은 
팽창과 발전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인가.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왔지만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서다. 그러니 아무래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과 ‘자본주의’의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자본주의’의 핵심 개념인 ‘자본’을 보자. 이는 한마디로 ‘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은행에 예금했거나 부동산에 묻어두었거나 혹은 주식으로 보유하고 
있거나 자본은 궁극적으로 모두 ‘돈’의 가치로 따져진다. 특정 화폐단위로 
계산된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 자본은 ‘재산’이기도 하다. 재산이란 개인이나 
단체가 소유한 ‘부’(富)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은 자본보다 어느 
정도 포괄적이며 주관적이다. 5억원으로 평가되는 고향 땅이 10억원으로 표기되는 
주식보다 더 값진 재산이 될 수 있으며 남편이나 아내, 아들이나 딸 등 가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재산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본’은 재산이 될 수 있다. 특정 시점에서 자본을 
화폐로 환산한 것을 재산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과 재산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다. 자본은 늘 스스로 크려는 성향이 있는 반면 
재산은 그같은 성향을 갖고 있지 않다. 일정한 수익을 내려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이다. 퇴직금과 명예퇴직금을 합쳐 1억원이 있다고 치자. 만일 이를 현금으로 
장롱 안 깊숙한 곳에 숨겨놓으면 이 돈은 단순히 ‘재산’으로서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돈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은행에 입금하거나 
부동산·주식·채권에 투자한다면 이는 ‘재산’인 동시에 ‘자본’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본주의’란 순수한 의미에서 ‘자신을 불리기 위한 자본의 활동을 
보장하는 경제시스템’으로 규정할 수 있다. 자신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어떤 
규제도 과감히 철폐한다는 것이 자본의 논리다. 나아가 이같은 경제시스템은 
사회와 정치시스템을 복속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가장 유사하게 자본주의를 정의한 사람은 벨기에의 경제사학자 피렌. 그는 
자본주의를 가리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화폐를 사용하는 사회체계’로 
규정했다. 물론 베버나 좀바르트 등 정신이나 종교를 강조한 학자들은 자본주의를 
다른 식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자본가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화폐가 이윤을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성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유럽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다. 순수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했던 사회의 폐단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규제’를 
채택한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의 증식 그 자체를 막는 것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든 시장사회주의든 자본의 활동을 억제하지 않는 한 역시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태,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80년대초 프랑스 사회당에서 좌파적 성향이 
강했던 세레스그룹이 ‘사회민주주의’란 이름을 거부하면서 사회당을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의 상당부분을 결집시키거나 혹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자본주의의 구조에 도전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려는 
대중정당”으로 규정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가 만든 새로운 인간 ‘기업’ 

이같은 자본주의 체제는 효율적인 자본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잉여 창출의 
주체 하나를 창출했다. ‘법적인 인간’ 즉 ‘법인’이다. 이중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자본주의의 핵이며 특히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릴 만큼 자본 
증식을 위한 최고의 피조물이다. 자본주의 기업은 따라서 ‘이윤(profit)의 
극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 이윤을 얻지 못하는 기업은 아예 존재의미를 
상실한다. 

‘이윤’은 이미 일상용어로 정착했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경제학적 용어 중 하나다. 그 원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회계상으로는 아주 분명해서 전체 매출액에서 경비 총액을 빼면 그것을 곧 
‘이윤’으로 여긴다. 경비에는 임금·이자·지대·원료 구매비에 감가사상각비 
등이 포함된다.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취하지만 그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경비를 낮춰 상품을 생산한 후 비싼 값에 많이 파는 것이다. 기업 활동의 초점은 
여기에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성공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해(自害)에 가까운 저가정책을 채택해야 
하는가 하면 말도 안되는 고가정책이 먹혀들기도 한다. 시장상황에 따라, 
경쟁기업의 특성에 따라 기업의 이윤 극대화 전략은 복잡한 양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아주 넘기 어려운 세가지 장애에 맞서 기업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가 노동자다. 노동을 상품으로 파는 노동자는 기업으로부터 임금을 받게 된다. 
기업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임금은 ‘총비용’에 속한다. 그러니 ‘이윤의 
극대화’를 꾀하려면 임금을 낮춰야 한다. ‘시장’은 두번째 장애물.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 즉 상품을 비싸게 많이 팔기 위해서는 
시장의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즉 독점상태라면 
기업은 상품의 가격과 생산을 임의로 조절하며 최대의 이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 대한 기업의 탐욕은 끝이 없으며 자본주의 역사는 시장 
확장의 역사라고 할 만큼 기업은 시장을 위해 사투를 벌여왔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관문은 다름아닌 경쟁상태의 다른 기업이다. 기업간 경쟁은 분명 여러 가지 
견지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막는다. 원료 구입가를 올리고 시장을 나눠 먹어야 
한다. 

시장에서 ‘퇴출’당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신제품을 개발하거나 경쟁기업을 
제압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심지어 원가 이하로 가격을 낮춰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기업의 이윤 극대화 노력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개별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은 사회 전체적으로 상호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거나 노동자를 줄여 전체 인건비를 낮춘다면 그 
기업은 수익성을 높일 수 있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소비자를 잃게 된다. 다시 
말해 시장을 상실하는 것이다. 경쟁기업을 무찌른다는 것 역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경쟁기업을 퇴출시켰다 해도 새로운 경쟁기업이 그 자리를 메울 테고 
경쟁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할 경우 또 다른 기업이 동일한 경제행위를 할 것이다. 
기업은 영원히 승자가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는 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고 역동적이다. 정체되거나 안정된 
상황은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짧다. 끊임없이 변해야 하고 또 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성장가도를 달리다가도 어느 순간 침체기로 빠져들기도 하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적으로 계속한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면 기업은 투자를 하고 
노동자를 고용한다. 경쟁기업을 이기기 위해 좋은 인력을 뽑자니 임금을 올려줘야 
한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임금을 올리다 보니 소비가 늘고 경제는 활황을 
누린다. 기업은 생산을 가속화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장은 한계에 봉착한다. 
과잉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생산은 소비에 비해 턱없이 많아져 더이상 팔 곳이 
없어지고 계속되는 임금상승에 기업의 수익은 줄어들게 된다. 

그러면 감급과 감원을 단행하고 불경기가 찾아온다. 생산에서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자본은 한편으로 새로운 시장을 찾아나서며 다른 한편으로는 머니게임에 
몰입하게 된다. 경제에는 거품이 일게 되고…, 이것이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순환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끝없는 이윤 창출이 이뤄진다면 그 이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두 말할 것도 없이 기업의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이 돈은 
‘재산’으로 정체되지 않고 ‘자본’이 되어 이윤을 찾아 떠돌아다닌다. 
생산으로, 부동산으로, 주식시장으로, 금 같은 귀금속으로, 석유나 식량 같은 
원자재로….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동안 자본은 구르고 굴러 다른 자본을 
먹어치우며 눈덩이처럼 커져만 간다. 자본은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리고 특정 시대 그 자본의 주인은 자본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길을 터놓으라고 외친다.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은 모두 장애물일 
뿐이다. “자유를 달라!” 바로 그것이다. 

자본의 성장(어쩌면 이 말은 ‘자본주의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은 
한편으로 커다란 사회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것이다. 절대 빈민층이 사라지고 중산층의 생활이 향상된다 해도 이들의 
생활향상보다 늘 자본의 성장속도가 빠르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대적 
빈곤’이라는 개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활황기 때나 가능한 
말이다. 불황이 찾아들면 이들 중산층은 어느새 ‘빈민’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황이 길면 빈민으로 전락하는 중산층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 그러나 상류층은 
불황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자본의 증식속도는 떨어져도 여전히 ‘자본’은 
‘재산’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 불황을 넘어 이른바 ‘대공황’이라는 장기불황이 찾아오면 얘기는 
달라진다. 자본의 증식을 막는 것은 물론 자본 감소도 비일비재하다. 기업은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오르고 부도나 폐업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 

불황이 오면 기업은 몸을 움츠리고 활황을 기다리면 되겠지만 대공황은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은 뭔가 타개책을 적극 모색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장 개척과 새로운 수요의 창출, 그것도 아니면 전쟁이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전쟁이 우려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산과잉·수익감소·실업·머니게임·거품…. 이들은 공황 전야(前夜)에 나타나는 
중요한 상징들이다. 그리고 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십년에 한번씩이기는 하지만 늘 있어왔고 앞서 얘기한 대로 자본주의의 원리는 
공황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적 모순을 갖고 있다. 1930년대 공황이 지금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우리의 기억에 너무 생생하다는 것, 그리고 세계적 파급효과가 
컸다는 것 외에는 이전과 별 차이가 없다. 자본주의가 출범한 이래 숱한 공황이 
있었다. 단지 국가간 혹은 지역간 의존도가 높지 않다 보니 소규모로 끝났을 
뿐이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튤립광란’은 초기 공황의 아주 좋은 사례다. 
지중해를 원산지로 하는 튤립이 북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중반. 외양이 
아름다운 데다 진귀해 교양있는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징표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일반귀족이나 평민들 사이에서 모방 소비가 일기 시작했고 
튤립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큰 돈을 벌게 해주는, 요즘 말로 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으니 재배농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농민들은 
모든 것을 팔아 튤립을 사려고 달라붙었다. 열풍이 막바지에 오르던 1636년 튤립 
한뿌리는 말 두필 값에 달했다. 그러나 거품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어느 시점에서 오름세가 주춤하더니 갑자기 너도 나도 튤립을 내놓았다. 튤립 값이 
폭락하며 ‘튤립공황’이 찾아든 것이다. 뒤늦게 재산을 팔아 튤립을 산 사람들은 
빈털터리가 됐고 빚을 진 사람들의 자살이 뒤를 이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튤립공황은 세계는커녕 이웃 나라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지역적인 ‘사건’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같은 지역공황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자본주의 역사는 공황의 역사 

프랑스에도 영국에도 등장했다. 17세기 영국의 금융공황은 20세기 금융공황과 
원리는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 나라의 상황에만 국한됐을 뿐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얘기는 달라졌다. 한 나라, 혹은 한 지역의 공황은 이웃 
나라에 영향을 주더니 19세기말에 이르자 주요 국가들의 공황은 전세계에 파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의 국가별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점차 세계공황으로 옮겨진다. 
한 국가의 공황이 다른 국가로까지 파급된 최초의 공황은 1848년 유럽 
대공황이었으며 이것이 미주와 아시아에까지 영향을 줬던 것은 1870년의 
세계공황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보자. 미국은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특수’로 
엄청난 돈을 긁어 모았다. 1913년 7억달러에 불과했던 미국의 금 보유액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21년 7억달러. 8년만에 3백50% 증가한 수치다. 1913년 35억달러였던 
미국의 대외투자액은 세계전쟁이 끝난 1919년 65억달러로 늘어났다. 전쟁기간 
미국의 공업생산 증가율은 무려 2백~3백%에 이른다. 이 많은 부(富)를 축적한 후 
미국은 문호를 닫아버렸다. 외국 상품에 고가의 관세를 붙였고 이민을 제한했다. 
그러니 ‘돈’은 갈 곳이 없었다. 초기에는 플로리다를 중심으로 부동산에 
투입되더니 금리인하 소식과 함께 곧장 주식으로 향했다. 주식에 엄청난 
‘거품’이 낀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그로스먼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잉축적된 자본은 투자할 곳이 부족한 상황에 직면한다. 유휴자본은 
자본수출이나 증권에 투자하는 것을 통해서만 완전한 붕괴를 모면할 수 있다. 
그래서 1925~26년의 불경기에 돈이 증권거래시장으로 몰려든 것이다. (시장에) 
불이 붙었다는 것은 생산적인 투자의 출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다.”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전후 자본주의가 단절된 것은 
1970년대. 여기에는 두가지 사정이 있다. 우선 대공황기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채택된 케인스식 정책이 70년대 중반 세계를 강타한 오일 쇼크와 그에 따른 
인플레를 감당할 수 없어 새로운 체제에 자리를 양보했다.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로 대변되는 이른바 ‘통화주의’가 케인스 시대의 조종(弔鐘)을 울린 
것이다. “모든 기업의 활동을 자유롭게!”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가격과 임금의 
정부규제 철폐와 다른 부분에서의 정부개입 최소화를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케인스식 복지자본주의에서 순수자본주의로 길을 바꾼 것이었으며 현재 
세계를 휩쓸고 있는 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70년대 세계경제는 또 하나의 특징이 두드러졌다. 브레튼우즈협정에 따른 
고정환율제가 깨지고 변동환율제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44년 전세계 44개국이 
맺은 ‘브레튼우즈협정’에 의해 채택된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환투기꾼들의 활동이 
쉽지 않았다. 고정환율제란 일정 범위 내에서 환율을 결정하는 제도. 미국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금태환’ 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이 제도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과 일본의 산업발전은 이를 낡은 것으로 바꿔버렸다. 미국은 
유럽과 일본이 쓸어간 달러를 더이상 금으로 바꿔줄 수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중반 금융자본의 ‘궤도 이탈’ 

년 닉슨 대통령은 달러화의 금태환 정지를 발표해 브레튼우즈 협정을 종결시키고 
말았다. 각국의 외환제도는 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수급에 
의해 환율이 결정됐다. 환투기로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70년대의 위기는 결국 현재 위기의 산파(産婆)였다. 그때부터 자본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적 자본 이동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이면 자유로운 자본 이동의 문제점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86년 피터 
드러커 교수가 세계적인 시사전문지 “포린 어페어즈”에 실린 논문에서 지적한 
내용은 세계경제의 중요한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재화 및 서비스 무역보다 
자본 이동이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됐다. 재화와 서비스 무역과 
자본이동은 이미 분리됐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양자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약화됐으며 더욱 나쁜 것은 자본의 이동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산업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금융자본이 산업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자본주의의 궤도 이탈이 시작됐다는 말이다. 최근의 위기를 예측한 통찰력 있는 
지적이었다. 거의 같은 시점 뉴욕은행은 세계 4대 은행의 외환거래량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연간 이 은행들에서 약 51조6천억달러가 거래되는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이 액수는 당시 경제혁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의 연간 
GNP의 5배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세계 재화·서비스 무역액 4조달러에 비해 무려 
12배가 넘는 액수였다. 드러커 교수의 주장이 전혀 허황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2년 후 이 현상은 언론에까지 보도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88년 
영국의 시사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70년대 이후 등장한 세계경제의 최대 
변화는 환율을 움직이는 힘이 실물경제에서 자본의 흐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도 80년대까지만 해도 이 돈의 흐름이 세계 전지역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바로 공산주의 국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국가경제를 어지럽힌다면 바로 인근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권 내로 
빨려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아시아에는 발전이 요구됐다. 자본주의의 
이식과 발전. 공산주의 진영을 고립시킨다는 최대의 효과가 그 전략 안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아시아에는 저임금의 노동력이 풍부했고 신흥 시장의 가치가 높았다. 
자본주의 진영의 아시아 전략이 무관심이나 공격보다 ‘투자’로 이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특히 80년 후반 엔고와 ‘재팬달러’의 아시아 진출은 
‘아시아의 기적’을 창출해낸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80년대의 얘기일 뿐이다. 90년대의 신 세계질서는 
미국으로 하여금 아시아 전략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가 붕괴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80년대 후반 이미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당시 파탄에 
빠진 소련경제는 개방과 개혁 없이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고 이때쯤 세계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의 붕괴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여기에 고르바초프가 
권좌를 차지한 지 1년만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 사고는 소련의 
향후 변화를 알려주는 좋은 지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80년대 
말이면 공산주의의 붕괴 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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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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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세계경제 위기논쟁 제 44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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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붕괴하는가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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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경제 상황은 증시에 즉각 반영된다. 따라서 미국 증시의 폭락은 공황의 
전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1998년 1월1일 미국 증권거래소의 모습.  
 사회주의 붕괴 후 미국 “아시아 도와줄 필요 없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디미트리히 사임즈가 88년 12월27일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은 9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방향을 적나라하게 제시하고 있다. 
사임즈 주장의 요체는 세가지. 우선 미국은 원하지 않는 제3세계의 원조 요청을 
거절할 수 있으며 도전적인 제3세계 채무국을 강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더이상 제3세계 국가들에 의해 미국이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경비를 유럽 국가들에 전가할 수 있다는 점, 군사력 
사용을 억제하는 요인이 제거됐으므로 국익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공산주의의 붕괴로 미국이 얻을 수 있는 둘째, 셋째의 이점이라고 
썼다. 선진국은 물론 제3세계에 대한 압박과 강요 그리고 금융이나 군사적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시사였다. 

90년대의 ‘세계화’(Globalization) 열풍은 그래서 시작된 전지구적 수준의 
‘폐해’였다. 미국의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들은 사임즈가 예상했던 이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자유주의의 강력한 물결 아래 이들은 스스로의 통제권마저 
상실한 채 세계경제를 교란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이제 한 국가의 안정보장마저 
위협을 가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지난해 10월 G8의 경제수뇌회담을 맞아 
환투기꾼들의 대부로 지칭되는 조지 소로스마저 “국제 환투기꾼들에 대한 규제가 
요구된다”고 했을까. 아시아가 넘어갔지만 자칫 세계경제 전체가 이들로 인해 큰 
혼란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계화를 부르짖었던 미국의 정부도, 
기업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공산주의는 곧 
자본주의의 최대 무기인 ‘자유’를 억제했으며 공산주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자유’를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가 제거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낙관론 “세계경제 2년 이내 안정된다” 

이제 본래의 질문, ‘자본주의 미래’로 돌아가자. 이 질문의 답은 20년대 초 
콘드라티예프와 트로츠키의 논쟁과 같은 선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결론은 둘 중 하나다. 최근의 ‘위기로 인해’ 자본주의가 붕괴되거나 
아니면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거나이다. 상당한 고통과 
혼란은 어떤 경우에도 필수. 만일 자본주의가 붕괴된다면 그 이후의 체제에 대한 
질문이 이어질 테고 붕괴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위기가 언제쯤, 또 어떻게 끝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연이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낙관론을 살펴보자. ‘국제통화기금(IMF)의 캉드쉬 총재는 낙관론의 대표적 
인물. 최근 “99년도 아시아 경제는 안정을 취하고 성장세를 회복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대부분의 낙관론자들은 2년 안에, 혹은 늦어도 수년 안에 위기가 해소될 것으로 
전망한다. 대공황의 참혹한 결과를 경험한 인류는 세계공황을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테고 그렇다면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미 위기가 진정 국면에 
돌입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아시아 
국가들의 환율과 금리가 안정되고 주가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장기적으로는 여전히 불안한 요소가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낙관론이 점차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말이다. J P 모건 싱가포르 지점의 경제분석가 베른하르트 
에쉬바일러는 “경기가 바닥을 쳤기 때문에 이제 회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전형적인 낙관론을 피력했다. 

위기를 극복하자는 선진국의 노력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점도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진다. 국제단기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와 감독, 경제 
위기에 대한 지원, 세계경제의 부양책 등이 현재 거론되고 있는 세계경제 구제의 
지침. 이를 위한 선진국들의 공조체제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IMF와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들도 국제투기자본의 규제를 제안했고 미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에 대한 부채 탕감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같은 
공조체제는 미국의 금리인하와 20조엔에 달하는 일본의 경기부양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 결과는 일단 좋아 보인다. 
아시아를 비롯한 주요 국가들의 주가가 동반상승했고 한국에서도 
‘신3저호황’이라는 말이 언론의 지면을 메웠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됐던 세계경제의 위기는 극복됐다. 특히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87년의 위기와 위기론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니 1∼2년 안에 위기와 함께 위기론이 자취를 감출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87년의 위기와 위기론을 새삼 거론한다는 것은 낙관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87년 역시 새해 벽두부터 세계 곳곳에서 ‘대공황’의 얘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세계경제를 떠받들어 주는 미국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달러값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었으며 미국은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이른바 ‘쌍둥이 
적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그해 2월22일 G6 국가들의 
재무장관을 소집해 “달러값을 현 상태에서 유지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루블협약’으로 불리는 이 합의는 분명 85년 성공적으로 치러진 플라자 합의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실질적인 협력을 받아내지 못한 채 협약이 
백지화돼버린 것이다. 특히 독일의 태도는 군사대국 미국을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몰골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엔화 강세에 눌린 미국은 달러값 안정에 
전력투구했고 독일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해 10월15일 독일의 금리인상은 세계경제를 불안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게다가 82년 여름부터 회복세로 돌아선 미국 경기는 ‘호황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전망이 주류를 이뤘다. 선진국간의 불화, 미국 경기 하락의 조짐은 
증권가에 세계적 대불황의 불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87년 미국 증시, 실물 위축에도 이상 열기 

그런데도 87년 미국 주가는 이상 증세를 보였다. ‘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활황이었다. 86년 말 다우존스 평균주가는 1천8백95.95. 그러던 것이 
8월25일에는 2천7백22.42로 8개월 사이에 무려 40%나 뛰어올랐다. 수십년동안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증권가는 오히려 당황했다. 30년대 대공황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58년 전인 29년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말들이 
터져나왔다. “머지않아 거품이 꺼질 것”이라거나 “그렇게 되면 세계공황은 
불보듯 뻔하다”는 얘기들이 증권가를 떠돌았다. 곧 주가폭락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힘을 얻는 듯했다. 

10월로 들어서자 실제로 상황은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갔다. 12일 하루 주가가 
10.77포인트 하락했다. 며칠 새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하더니 주가는 14일 다시 
95.46포인트가 떨어졌다. 15일에는 또 57.61포인트가 떨어졌고 아침부터 
술렁거리던 10월16일 금요일에는 매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날 하루 주가는 무려 108.36포인트 하락했다. 금요일 폐장 이후 미국인들의 최대 
화제는 단연 주식이었다. 일시적인 것인가, 아니면 대폭락과 그를 이은 
대공황인가. 저마다 TV 앞에 앉아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 했다. 이날 ABC-TV 저녁 
뉴스에는 베이커 재무장관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국민 여러분, 결코 당황해하거나 동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의 주가폭락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이상할 정도로 높은 수치에서 
당연히 내려간 것 뿐입니다. 중개인들은 진작부터 주가조정이 있을 것으로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베이커 장관의 말에 시청자들은 어느 정도 안심하는 모습들이었다. 정부 책임자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개인들이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점에 신뢰가 갔다. 예측이 맞았으니 앞으로의 예측도 맞을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던 사람은 정작 국민을 안심시킨 베이커 장관. 실제 일어날 
일은 전혀 예측불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발표를 마치고 바로 독일로 
떠났다. 유럽 순방은 본래 잡혀있던 일정이었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 그것도 공항 
호텔에서 서독 정부관리와 3시간동안이나 만났다는 것은 전혀 일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어떤 얘기가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났다는 것 자체가 ‘빅 
뉴스’였다. 이 소문은 다음날 유럽과 일본은 물론 미국에까지 전달됐다. 삽시간에 
투자가들의 불안을 조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10월19일 월요일. 마침내 ‘블랙 먼데이’가 찾아왔다. 이날은 시작부터 
우울한 날이었음이 틀림없다. 뉴욕보다 14시간 일찍 개장해 당일 뉴욕증시를 
알아볼 수 있는 도쿄증시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날 
뉴욕에서도 주가가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정도인가였다. 그런데 
9시30분 개장과 동시에 주식시장은 충격의 도가니로 빨려들어갔다. 거래는 전혀 
성사되지 않았고 오직 ‘팔자’ 주문만 난무했다. 1백35달러였던 IBM의 주가는 
개장과 동시에 1백25달러에, 1백84달러였던 머크는 1백70달러에 ‘팔자’ 주문이 
나왔다. 이날 하루 하락한 주가는 무려 508포인트. 하루 사이 5천억달러가 
허공으로 날아간 것이다. 29년 ‘암흑의 목요일’을 능가하는, 뉴욕증시 개장 
2백년 이래 최고치였다. 시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뉴욕의 폭락은 곧장 일본과 영국에도 파급됐다. 도쿄에서는 20일 오전장에서만 
니케이 다우존스가 무려 1천8백73포인트 떨어졌고 런던에서는 하루 사이 12%가 
떨어졌다. 상황이 이러니 29년의 악몽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세계는 곧장 ‘패닉’으로 줄달음칠 듯했다. 만일 단시일 안에 
불안과 공포를 잠재울 수 없다면 그것은 곧 현실로 드러날 것이 뻔했다. 
29년 증시 폭락과 함께 ‘러닝뱅크’(Running bank·불안한 고객들이 은행으로 
달려가 동시다발적으로 예금을 인출하려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각국 
정부는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잠재우는 데 역량을 총동원했다. 미국도, 일본도, 
영국도 30년대 대공황의 공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 안심시킨 베이커 장관, 정작 본인은 ‘불안 초조’ 

베이커 재무장관은 급거 유럽에서 귀국해 상황을 총지휘했다. 월요일 뉴욕증시 
폐막 후 피츠워터 백악관 대변인은 “레이건 대통령이 주가폭락 사태를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고 전하고 “그러나 미국 경제는 견실하며 따라서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국민을 진정시켰다. 일본의 나카소네 총리는 직접 “이번 
주가폭락은 29년과는 결코 다르다”는 요지의 발표를 했고 미야자와 대장상은 즉각 
각종 주가부양책을 내놓았다. 영국의 로손 재무장관도 특별성명을 통해 투자가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영국 경제의 성장률이나 국제수지 동향을 봤을 
때 모든 면에서 견실하다. 그러니 불안한 미국경제에서 파급된 월 스트리트의 
혼란에 전혀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독일은 금리인상 결정을 5일만인 20일 전면 백지화했고 거의 동시에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도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재할인율을 7.5%에서 6.75%로 낮춘 
것이다. 

블랙 먼데이 이후에도 일부 전문가들은 여전히 공황의 도래를 주장했고 그날의 
충격으로 투자가들은 몸을 사렸다. 그러나 주가는 더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두달 후 연말 폐장시 주가지수는 1천9백38.83. 10월19일보다 200포인트 상승한 
수치며 전해 말에 비해 40포인트가 올랐다. 결국 87년 한해의 주가는 약보합세로 
끝을 맺은 셈이다. 돌이켜 보면 ‘블랙 먼데이’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내릴 때가 됐다”고 생각하다가 실제로 하락 증세가 
나타나자 너도 나도 ‘팔자’ 주문을 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시적 패닉 상태였을 
뿐이라는 얘기였다. 일부는 각국 정부의 즉각적인 시장개입이 최고의 
치유책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블랙 먼데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나갔고 이후 몇몇 전문가들은 ‘블러디 먼데이’라는 말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암흑’이었다기보다 ‘큰 손해를 본’ 월요일이었다는 
해석이다. 

만일 낙관론자의 해석대로 간다면 현재의 위기는 87년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헤지펀드는 여전히 규제대상이겠지만 세계 
지도자들은 위기를 이겨낸 후의 자축 분위기에서 샴페인을 터뜨릴 것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재기 무대는 썰렁한 객석 앞에서 예측 실패에 대한 
‘자아비판’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지식인들이 다시 꺼내 두었던 “자본론”과 
“반(反)듀링론” “독일 이데올로기”는 다시 서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칫 
지하 서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는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상의 시스템이라는 평가를 훈장처럼 달고 다닐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경제는 87년과 전혀 다른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 
위기는 주요 선진국들의, 그것도 주식시장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출발했고 수일 
내에 꺼져 버렸다. 미국 뉴욕의 한 복판에서 이뤄졌다는 점은 30년대 대공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지만 다양한 보완 시스템들과 국가의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개입만으로도 위기와 위기론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한마디로 ‘중증의 위기’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최근의 위기는 주변 국가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로 
번져가고 있는 양상이다. 태국·인도네시아·한국·러시아·브라질 등 이른바 
개발도상국이나 체제이행 국가에서 일본과 유럽·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경제 바야흐로 디플레시대 돌입’ 

90년대 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은 아시아 붕괴로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 역시 점차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위기가 ‘중증’이라는 증거다. 그래도 이는 어디까지나 겉모습의 차이일 뿐이다. 
실제로는 더 큰 차이와 위험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얘기했던 
자본주의의 모순이 지난 10년 사이 훨씬 심화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세계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방향으로 물꼬를 텄다고 보는 견해, 즉 비관론이 더 힘을 
얻는 듯하다. 시간이 갈수록 비관론이 낙관론을 더욱 능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공황에 접어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는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과 다름아니다. 이같은 견해에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의식 하나가 도사리고 있다. 

97년 11월10일자 “비즈니스위크”는 최근의 세계경제를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분석기사를 게재했다. ‘세계경제는 바야흐로 디플레의 시대로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며 ‘상품가격은 전세계적으로 떨어지거나 정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92년 3%를 웃돌던 독일의 소비자물가는 이후 지속적으로 떨어져 96년 이후 1%를 
밑돌고 있다. 일본의 디플레 영향은 더욱 심해 93년 3분기를 기점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진 물가는 아직 플러스로 옮겨지지 않았다. 미국과 프랑스는 90년대 들어 매년 
들쭉날쭉한 변화를 보였지만 96년말을 정점으로 급격히 하락하는 추세다. 올해 
물가상승률도 1%를 밑돌 전망이다. ‘물가의 하락’ 그것이 곧 디플레다. 

이같은 디플레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첫째가 공급과잉이다. 지난 95년에서 97년 사이 세계 주요 국가들의 연평균 생산은 
소비의 성장률을 앞질렀다. 일본의 연평균 산업생산성장률은 4%를 육박했으나 
소비는 기껏 1%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엇비슷한 비율로 생산량이 늘어난 미국의 
경우도 소비 성장은 3%를 넘지 못한다. 이는 연평균 공장가동률이 70~80% 수준에 
그치는 것을 감안한다면 생산능력의 성장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수치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공급과잉은 놀랍다. 지난 84년에서 95년까지 아시아 개도국들의 
생산성장률은 무려 10%. 그러나 소비성장률은 7%에 불과하다. 전세계적인 
공급과잉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곧 기업들의 수익성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수익성의 하락은 즉각 
인건비 하락과 실업으로 이어진다. 기업의 수익성 제고를 위해 노동자가 치른 
희생은 크다. 국제노동기구는 최근 전세계에 존재하는 준실업 인구를 
10억5천만명으로 추산했다. 이중 완전실업 인구는 1억5천만명, 수입이 충분하지 
못한 파트타임 노동자는 9억명에 이른다. 게다가 지난해 시작된 위기로 아시아 
지역에만 1천만명의 신규 실업자가 발생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G7의 
실업자는 수년 사이 1천3백만명에서 2천4백만명으로 1백% 가까이 늘어났다. 

‘노동자의 빈곤화’가 전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순수 실업자만 
10%를 넘어섰고 고용창출을 이뤘다는 미국이나 영국의 노동자 역시 저임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심지어 “미국이나 영국의 노동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프랑스의 실업자가 되겠다”고 말할 정도다. 

이같은 결과는 결국 빈부격차가 심화됐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의 사례를 보자. 미국은 80년대까지 10%에 육박하는 실업률로 골머리를 앓다가 
최근 완전고용에 이를 정도로 일자리가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울 좋은 얘기일 뿐이다. 70년대 후반 주급 4백달러를 
넘던 미국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이후 수직하강, 90년대 들어서는 3백40달러선을 
위협하고 있다. 시간급 임금도 같은 추세. 70년대 중반 11달러였던 시간당 
실질임금은 90년대 들어 10달러 선까지 내렸다. 

80년대 후반 미국을 강타한 리엔지니어링 열풍은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낸 
1등공신. 질적으로 본다면 정부의 고용창출 홍보가 갖는 허구성을 알 수 있다. 
새로 생긴 일자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것이다. 고용보장과 상대적 고임이라는, 
어느 정도의 혜택을 누리던 정식 직원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에서 
파트타임·일용직·파견근로자 등으로 일해야 했다. 97년의 UPS(발송 전문회사) 
파업이나 지난해 미국 자동차 업계를 강타했던 GM의 파업은 불안정적이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삶을 보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최후 방어책이었을 뿐이다. 

미국 노동자 되느니 프랑스 실업자 되겠다 

지난 95년 정부는 공식실업률을 5.7%로 발표했지만 저명한 경제학자 서로는 실제 
실업률이 28%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결과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됐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빌 게이츠 개인의 자산은 미국 극빈자 1억6백만명의 그것과 같다는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생산이 과다해졌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곧 생산에 투자된 자본이 큰 
이익을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돈은 머니게임으로 흐르게 되고 
생산이 과다해질수록 이익을 찾아 세계를 떠돌아 다니는 돈이 많아진다. 
헤지펀드의 증가는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세금과 감독·규제를 피하려고 
역외펀드를 이용하고 고수익을 달성하기 위해 투자대상과 투자방법에 제한을 두지 
않는 공격적 자금이 바로 헤지펀드다. 그야말로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비판에 
걸맞은 ‘놀잇돈’이다. 

지난해 IMF가 발표한 자료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는 헤지펀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관심을 끈다. 보고서에 따르면 헤지펀드는 49년 앨프리드 윈슬러 존스라는 한 
언론인 출신의 금융계 인사가 창안한 것이다. 이후 별 뚜렷한 성장세가 보이지 
않았지만 85년 타이거펀드가 높은 이익률을 내면서 각광받기 시작했고 90년대 들어 
급속하게 팽창했다. 85년 당시만 해도 헤지펀드의 규모는 불과 8억달러. 그러나 
5년 후인 90년에는 85억달러로 10배 이상 늘었고 다시 5년 후인 95년에는 
5백34억달러로 10년 만에 80배 성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97년 현재 규모는 약 
1천억 달러. 85년 22개였던 펀드 수는 97년 1천1백개로 12년 사이 무려 5백배가 
늘었다. 이들이 쓸 수 있는 돈은 자본금의 10배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니 
헤지펀드가 움직일 수 있는 돈의 규모는 약 1조달러에 이르는 셈이다. 한 국가를 
초토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액수다. 아시아 국가들의 위기가 이들 때문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자본이 마땅한 투자처를 잃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역사는 ‘공황’이 
바로 이 상황에서 찾아드는 ‘불청객’임을 입증하고 있다. 1840년대 유럽의 
공황은 면직물의 과잉생산으로 자본이 투자할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시작됐다. 

이 공황이 장기화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유휴자본이 철도라는 새로운 투자처를 
찾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영국 사학계의 대가 브로델과 홉스봄 모두 “철도가 
19세기 세계경제를 일순간 바꿔버렸다”고 쓰고 있다. 철도는 1850~60년대 붐을 
일으키며 세계의 자본을 끌어모았고 공황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1860년대가 
끝날 무렵 웬만한 곳에는 이미 철도가 깔렸고 더이상의 수익을 내기가 어려웠다. 

◀◀ ▲
1999.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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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세계경제 위기논쟁 제 44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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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붕괴하는가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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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및 경영기술의 발달에 따라 기업의 수익률 증가에 노동자들의 역할은 
줄어들고 그만큼 실업의 기회는 높아졌다. 일본 혼다사에서 개발한 혼다 
휴먼로봇.  
 잘못하면 대공황, 잘해야 성장 정체 

그러자 자본가들은 돈을 거둬들였고 돈이 부족한 산업계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30년대 대공황 역시 유휴자본 최후의 안식처였던 증시가 붕괴되자 돈은 갈 곳을 
잃었고 세계는 공황이 휩쓸고 지나가버렸다. 

세계경제가 공황으로 갈 확률이 높아진다는 예측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아무래도 공황을 막기 위한 ‘선진국 공조’라는 최후의 무기가 쓰여지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각국의 이해가 다르고 절대 손해보지 않으려는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다. 최근의 선진국 공조는 진정한 의미에서 ‘공조’로 여겨지지 않는다. 또 
선진국들이 처한 각국의 상황이 공조를 일궈내기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세가지 복병, 美 주가·선물시장·Y2K 

지난해 미국은 9월30일에서 한달여 사이 세차례 단행한 금리인하를 가리켜 
‘세계경제를 살리기 위한 조처’라고 홍보했다. 실제로 미국의 금리인하에 이어 
엔화 강세가 뒤를 이었고 아시아를 비롯한 개도국의 증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세계경제에 일단 긍정적 효과를 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금리인하에 
높은 점수를 주지는 못할 것 같다. 세계경제보다 국내적 요인이 더 많이 개입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LTCM의 도산 위기와 함께 시작된 신용경색의 심화 
등 급작스런 경기침체를 방지하려는 긴급처방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요구한 
일본의 경기부양책은 수차례 발표됐지만 진행은 지지부진하고 유럽중앙은행(ECB) 
도이센베르흐 총재는 지난 11월2일 독일 정부의 금리인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고실업의 해소는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할 일이지 금리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선진국의 협조는 앞으로도 매우 불투명할 조짐이다. 

이 역시 30년대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 지도력을 발휘하려 했던 영국은 지도력이 
부족했고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미국은 지도력 발휘를 거부했다. 세계를 
이끌기보다 자국 스스로 발전하겠다는 이기심의 발로였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부가 얼마인가. 미국은 공연히 혼란에 빠진 
유럽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혁명을 통해 체제를 바꾼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공산주의 세력들이 잔존해 있었다. 미국은 이들을 
혐오했고 문을 닫아도 국내경제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결국 
대공황의 참사를 일으킨 원인은 국가의 ‘이기심’에 다름아니었다. 아직도 유럽 
경제사가들은 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을 미국에, 미국은 유럽에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세계경제의 앞길에는 세 가지의 복병이 잠복해 있다. 첫째가 미국 경기다. 
지난 8년동안의 호경기가 이제는 내리막길을 갈 때가 됐다는 예측이 지배적인 데다 
올들어 2천5백억달러라는 사상 최대규모의 무역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올해 
예상되는 무역적자 규모는 무려 3천억달러. 현재 9천대를 넘나드는 주가는 조만간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금리인하로 간신히 유지되는 미국의 주가 
폭락은 아마도 대공황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29년과 87년의 악몽이 되살아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천문학적인 헤지펀드의 선물거래액이 두번째 복병이다. 
돈놀이에 눈이 멀어 세계 은행들이 벌여놓은 선물시장 규모는 무려 1백40조달러.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된 법인의 주가총액을 10배나 넘는 액수다. 어디 한곳이라도 
삐끗하면 세계적인 규모의 은행 도산이 줄을 이을 테고 당장 신용경색이 일어날 
것이다. 계약고가 8조5천억달러에 이르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이나 7조5천억달러에 
이르는 J P 모건사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95년 27세의 초년병 펀드매니저 
브라이트 닉 리슨의 실수로 선물거래에서 엄청난 적자를 본 베어링스가 2백30년의 
역사를 끝으로 도산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밀레니엄 버그의 문제도 얼마든지 복병으로 작용할 수 
있다. 수년전부터 예견됐던 일이지만 2000년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아직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심각한 것은 밀레니엄 버그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월 스트리트는 이미 이를 염두에 두고 가상시장을 개장했고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네트워크가 워낙 복잡해서 실제 
벌어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영국의 한 연구단체는 세계 미사일의 
핵탄두를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모두 제거해 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자칫 핵무기가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계경제에 대한 비관론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지난해 8월말 
일본의 경제전문지 “니케이 비즈니스” 역시 세계경제를 전망하는 자리에서 
비관론을 앞세웠다. 최악은 대공황, 최상의 결과라고 해도 기껏 성장의 정체였다. 
가장 먼저 거론된 것이 역시 세계공황의 발발이다. 선진국들의 비협조로 위기가 
두드러지면서 미국 주가가 20~30% 폭락하고 달러값도 떨어진다, 세계적으로 자금과 
무역의 흐름이 끊기고 결국 대공황이 몰려온다는 시나리오다. 만일 간신히 공황을 
피하게 된다면 세계경제의 앞길에는 장기불황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주가나 달러값이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세계경제는 충격을 적게 받겠지만 
지금과 같은 불황을 극복할 수는 없다는 해석이다. 장기불황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경제를 위한 최상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경제의 
연착륙과 일본 경제의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달성된다 해도 성장은 거의 멈출 
것으로 예견했다. ‘안정적인 저성장 시대의 도래’를 뜻한다. 

미래 세계경제를 읽는 키워드, 실업과 지역화 

이같은 비관론은 1천년의 말기를 접하며 맞는 것이어서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더해준다. 새로운 천년에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우려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척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극심한 혼란기라 해도 현재 안에는 반드시 미래를 읽는 척도가 
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실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업의 증가는 비단 선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의 문제만이 아닌 세계적 추세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양적으로도 늘고 있지만 기간으로도 
장기화된다는 점을 문제로 꼽고 있다. 이들은 ‘고착화’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의 국내 실업을 ‘IMF한파’ 정도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동안 어느 
정도의 보호막과 강압적인 고용안정 제도로 현실감을 상실했었지만 90년대 이후 
‘세계적 규모의 실업 축적’이 진행되고 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명예퇴직이나 연봉제 등은 인건비 절감이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던 국내 기업들의 
고육지책이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기업이 수익률을 높이는 데 노동자들은 점차 
불필요해졌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세계화를 통한 저임노동자의 활용, 과학 
및 경영기술의 발전에 따른 일자리의 상실 때문이다. 프랑스의 여류 문인 비비안 
포레스테는 이것이 곧 현대인의 ‘경제적 공포’라며 핵심을 찌른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경영자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던 그 세계는 이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그 세계 위에서 걸어다니고, 숨쉬고 있으며, 
그 세계에 복종하거나 혹은 그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 
세계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말로 표현하면 ‘별 볼일 없게’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비밀스럽게 그 세계를 지배하며 구(舊)세계의 난파 상황을 
관리하고 있는 진짜 세력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 실세의 지배자들이 통치하여 
만들고 있는 현재의 기업은 다국적·초국가적이다. 이들은 절대적 자유를 보장받고 
세계화와 불규칙화를 지향하며 겉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재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포레스테는 다소 과장적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은 점차 필요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노동이 필요 없으므로 실업은 사실상 
불가피한데도 정치가들은 늘 실업을 해소하겠다고 말하니 “우리는 지금 위대한 
속임수 속에 살고 있다”고 절규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 ‘노동이 필요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조만간 닥쳐올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구매력이 사라짐으로써 생산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면 뭔가 새로운 안전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레스테의 말에서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상당량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진다는 말이다. 물론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특히 단순한 육체노동과 사무직을 위한 일자리는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 기계는 인간의 근력을 대치할 수 있으며 정보화의 
발전은 싼 개도국의 저금리 노동자를 어렵지 않게 관리할 수 있다. 상당한 사무직 
역시 이 과정에서 ‘퇴출’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이른바 ‘40대 60의 
사회’ ‘30대 70의 사회’ ‘20대 80의 사회’ 등의 용어와 일맥상통한다. 생산을 
위한 인력이 거의 필요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앞의 수치가 21세기 
세계경제를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의미한다. 80년대말만 해도 40%였던 
수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30%에서 20%로 줄어들었다. 나머지 60~80%는 중요한 
노동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생계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치다. 어쩌면 
최소한의 생계조차 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실업은 전세계가 해결해야 할 제일과제로 등장할 것이다. 실업이 가장 큰 
사회문제로 떠오른 독일의 슈베른市 모습.  
 우리는 이 대목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계급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바로 ‘실업자 계급’이다.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이론에서 
실업자는 노동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또는 
임금인하를 위해 자본주의 제도는 늘 일정한도의 ‘산업예비군’을 필요로 한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최근과 같은 과다한 실업을 상정하고 있지는 않다. 다수의 
실업자가 장기화된다는 사실에서 분명 이들을 하나의 새로운 계급으로 만들고 
있다는 ‘경향성’을 찾을 수 있다. 

97년 12월 프랑스에서 발생한 실업자 소요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의 
실업자들은 실업보험기금공단 사무실을 점령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라”며 연말보너스로 1인당 3천프랑씩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이 시위는 
12월말에 접어들면서 각종 실업대책위원회나 시민운동단체는 물론 공산당이나 
녹색당 등 정당의 지지를 받아내는 등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시위는 전국적 
규모로 파급됐고 사회당 정부는 마침내 굴복하고 만다. 10억프랑의 자금을 
긴급구호금으로 제공하는 한편 최저사회수당을 인상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계급갈등이라는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실업자 처리가 미래 자본주의 유형 결정 

중요한 것은 노조가 실업자 시위에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노조측은 “실업자는 
곧 잠재적 노동자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노동자와 
실업자간의 연대나 지지가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만일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특혜, 이를테면 고용안정과 상대적 고임금을 보장하고 완충역할을 요구한다면 
노동자와 실업자간의 갈등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시위 초기 프랑스 
노동자들이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는 사실은 이같은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결과적으로 실업자와 고용을 보장받지 못한 
저임노동자들은 합세해 격렬한 투쟁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일부는 범죄와 마약에 
빠져들겠지만 대부분은 고용의 창출 및 보장, 실업수당 인상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갈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다. 우선은 국가가 책임져야겠지만 
현재 주요국들의 재정은 대부분 적자상태다. 도저히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 
국·공채를 소유하고 있는 부호들, 즉 국가에 대한 채권자들은 사회의 실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테고 무관세 지역으로 생산과 활동의 본거지를 옮기려 할 것이다. 
세금은 줄고 지출은 많으니 국가의 재정적자 규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한마디로 
이 상태로라면 실업자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이대로 갈 경우 향후 10년이면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국가들의 실업률은 저임 노동자를 포함해 40∼50%를 
넘나들 전망이다. 더욱이 인구는 계속 늘고 있으니 실업은 21세기 최대 현안이 될 
수밖에 없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현재 역사적인 갈림길에 급속히 다가서고 있다. 국제 기업들은 유례가 
없는 엄청난 양의 재화와 용역을 더욱 더 적은 노동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인구가 늘고 있는, 바로 그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에게 거의 노동자가 필요없는 생산의 시대를 가져다주고 있다. 
점증하는 인구 압력과 떨어지는 고용기회간의 충돌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첨단 세계경제의 지정학을 다음 세기에 구체화시킬 것이다.” 

어쨌거나 자본주의 사회는 일단 실업자 해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가 예견된다. 우선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방법이다. 케인스식으로 대대적인 정부공사를 
발주한다거나 대자본의 컨소시엄으로 국제적인 대형사업을 일으켜 고용을 증대하는 
것이다. 소규모 벤처기업 등 기술 중심의 기업 설립을 유도해 신규시장을 개척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난관을 갖고 
있다.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노력인지도 모른다. 일단 정부의 재정은 
적자투성이어서 케인스식의 사업을 벌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무리해 사업을 
벌인다고 해서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30년대 ‘뉴딜’도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그 실효성은 상당한 의심을 
받고 있다. 

두번째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고용을 창출하려는 ‘대안’이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노동시간의 축소에 따른 고용창출. 임금을 적게 주더라도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나눠갖게 한다는 정책이다. 노동자들은 임금의 일부를 
남에게 주는 대신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 조스팽 정부는 
지난해 봄 이미 주 35시간 노동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다. 
관리비가 많이 들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데다 노동자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는 등 
기업이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어서다. 현재 인력보다 1.5∼2배까지의 인력을 
관리하려면 새로운 인력이 필요할 테고 적게 일함으로써 노동의 집중력이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쉽게 직장을 잡을 수 있는 노동자를 지배하기란 쉽지 않다. 
경비와 생산성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노동자에 대한 지배력이 감소되는 방식을 
기업은 결코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세계의 실업정책, 21세기에는 ‘무용지물’ 

또 하나의 대안은 제레미 리프킨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이른바 ‘제3부문의 
강화’다. ‘제3부문’이란 현대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을 
제외한 공동체 부문. 주로 자원봉사로 충당되며 현재까지는 
고령자·장애자·정신병자·불우아동·무주택자와 빈민들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구성돼 있다. 미국의 경우 이 부문의 GNP비율은 6%에 이른다. 리프킨은 기업에 
대한 지원금과 불필요한 방위비를 줄이고 부가가치세를 도입한다면 수천억달러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의도는 좋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우선 이해당사자가 너무 많다. ‘막강 권력’을 자랑하는 기업과 군수업체들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이같은 제안을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게다가 이 방법은 
선진국, 특히 공동체를 위한 자원봉사의 문화가 발전한 나라들에 국한된 이야기다. 
일례로 일본과 같은 국가는 비록 선진 자본주의 국가라 해도 자원봉사 활동이 극히 
제한돼 있어 실행이 어렵다. 재원을 마련할 수 없는 개발도상국들에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네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복지국가로의 방향 모색이다. 실업자와 
저임노동자들에게 일자리보다 생계를 보조해 준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최저생계비와 
간신히 삶을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이른바 ‘티티테인먼트’ 사회에서부터 
북부유럽에서와 같이 개인의 삶을 보장해 주는 강력한 복지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것이다. ‘티티테인먼트’란 엔터테인먼트와 엄마젖을 
뜻하는 ‘티즈’의 결합어. 적당한 놀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다. 
브레진스키가 고안한 이 신조어는 마르틴과 슈만의 저서 “세계화 덫”이 
번역되면서 국내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경제위기로 지역블록화 급진전 

마지막으로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바로 억압의 방식이다. 실업자에게 
최저 생계비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들의 소요를 강압적으로 막으려는 
사회다. 과거의 경험에서 비춰보면 우리는 이를 대충 ‘권위주의적 독재’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사회라면 어쩌면 실업자들에게 강제노동을 부과할지도 
모른다. 이같은 정책이 성공적이라면 사회는 외관상 안정적인 모습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실업자들의 분노는 계속 축적될 테고 언젠가는 활화산처럼 불타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정하다. 

지난해 8월 대공황기의 영국 정부가 실업자들을 강제수용했다는 언론의 폭로는 현 
시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선데이 타임스”는 29년 영국이 전국에 
2백50개의 반강제 노동수용소를 설치해 운영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이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한 증인은 “노예와 같은 치욕과 모욕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놀라운 사실은 토니 블레어 정부가 이와 비슷한 정책을 
마련했었다는 점. 25세 미만의 실업자들은 정부와 민간기업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무조건 수용하되 그렇지 않으면 실업수당을 끊겠다는 내용이어서 60년 전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의 키워드는 지역블록화다. 위기가 가중될수록 또 투기자본이 기승을 
부릴수록 국가는 보호주의를 채택하려 들 것이며 ‘지역’이라는 집단의 방어벽을 
칠 것이 뻔하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 이를 21세기에도 유지하려는 미국에 대한 
반발심리로 지역화와 보호주의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기업의 수익 악화로 
미국의 통상압력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으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유무역’의 기치 아래 모든 국가가 무역장벽을 낮추고 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이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서는 심지어 옛 식민지에 적용하던 
바나나 수입의 특혜까지 철폐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자유무역주의에 대해 
각국이 느끼는 염증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유럽은 지역 블록화에서 단연 선두. 지난 91년 12월10일 유럽영수회담에서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된 이래 이제 첫 단계인 통화통합을 코앞에 두고 
있다. 유럽은 99년 1월1일을 기점으로 유러통화를 정식 출범시켰다. 1차적으로 
11개국, 3억 인구가 참여함으로써 국내총생산(GDP) 규모로는 미국을 다소 밑돌지만 
영국 등 나머지 4개국이 참여할 경우 97년 현재 미국의 GDP 7조8천억달러를 넘는 
8조달러에 이른다. 명실공히 세계 최대 단일경제체제가 출범하는 것이다. 

유러통화의 출범은 벌써부터 세계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유러통화로 달러가 
힘을 잃을 것이라는 전망에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국제연구소의 
추산에 따르면 세계 각국이 보유한 외환 중 5천억∼1조달러 정도가 유러달러로 
바뀔 테고 국제무역에서 결제하는 비중도 40%에 육박할 것이다. 추정대로라면 
달러의 폭락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2002년 1월1일에서 7월1일 사이 모든 
가맹국의 화폐가 대치된다면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 상태로라면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은 급속도로 유럽으로 옮겨질 것이 뻔하다. 레스터 서로 
교수는 “현재 진행중인 세계경제전쟁은 결국 유럽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패배란 쉽게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 역시 경제전쟁에서 패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에 경제블록화를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물론 중심은 일본이다. 
가뜩이나 장기불황에 시달리며 자국 통화의 약세에 치를 떨고 있는 일본은 자칫 
유러통화의 등장으로 ‘경제대국’의 이미지가 완전히 추락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는 입장이다. 여기에 미국의 ‘일본 패기’(Japan Bashing)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기세다. 아시아 위기 이후 미국의 태도에 적지않은 분노감을 
드러낸 일본이다. 위기의 최대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최대 책임자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미국의 대일공세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 경제블록을 급속하게 추진중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일본의 엔블록 계획은 8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일본은 이때 ‘강한 
엔화’를 기반으로 아시아 엔블록을 만들자는 비밀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재팬달러를 근간으로 고도성장의 길을 달리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적극 수용할 뜻을 내비쳤다. 이들에게 일본은 빈곤을 퇴치시켜 준 절대 
은인이었다. 하지만 인근 동북아 국가들, 특히 한국이나 중국 등은 과거 
‘대동아공영권’을 상기시키며 우려의 뜻을 드러냈다. 아시아 내부에서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한 미국도 이 계획에 개입해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90년대 
중반까지도 일본은 수차례 아시아 블록을 제창했지만 인근 국가들이 ‘과거사’를 
들추는 통에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이 계획이 다시 실행에 옮겨졌다. 97년 9월 아시아 통화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 즉각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제창하고 나섰다. 비록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IMF의 구조조정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이들이 미국의 
국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이 계획은 이후에도 계속 재론됐다. 

지난해 말부터 위기가 가속화하고 미국이 일본에 위기 극복의 역할을 맡기겠다는 
의향을 비치자 이 계획은 급속히 진전을 보고 있다. 지난해 11월14일 시작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담에서 AMF의 창설에 대다수 국가들이 
동조한 것이다. 미국의 정책변화도 ‘반대’나 ‘불가’(不可)에서 한걸음 물러난 
태도였다. AMF 창설의 순항은 일본의 이해와 위기를 겪는 아시아 국가들, 아시아 
위기의 여진을 우려하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모두 맞아떨어진 결과다. AMF는 일본의 
엔화경제권 구상의 첫 걸음이 분명하다. 

◀◀ ▲
1999.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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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세계경제 위기논쟁 제 44호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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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붕괴하는가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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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블록화에는 불안정성과 위기 내재 

그러나 경제블록화가 갖는 불안정성과 폐단도 만만치 않다. 전지구적 혼란을 
가속화할 우려가 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이 문제다. 세계경제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는 중국은 결코 엔블록에 가세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제 규모면에서나 
스스로 생각하는 위상 측면에서도 중국은 일본이 설정한 경제권에 포함되기 
어렵다. 오히려 대만이나 홍콩 등을 포함한 중화경제권으로의 길을 가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동남아시아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둘러싼 일본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중국의 자존심과 아시아에만 
수천억달러의 돈을 쏟아부은 일본의 주도권전쟁이 아시아 위기를 계기로 급격하게 
촉발될 것이다. 

지난해 8월 소로스의 퀀텀펀드와 벌인 한판 싸움은 ‘중화경제권’의 구축이 이미 
가시화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소로스가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입은 
엄청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홍콩을 공략하자 중화경제권이 대거 참전, 
‘환투기의 황제’로부터 홍콩을 지켜준 것이다. 이 전쟁은 지난해 7월 소로스가 
현물시장에서는 홍콩달러를 팔고 선물시장에서는 되사는, 이른바 
‘스왑’(Swap)거래로 시작됐다. 소로스가 움직이자 주요 헤지펀드들이 뒤를 
따랐고 홍콩은 주가가 30%나 떨어지는 위기상황으로 몰렸다. 홍콩은 2주일 사이 
1백50억달러를 쏟아부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은 홍콩이 보유하고 있던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입해 주었다. 여기에 대만 리덩후이(李登輝) 총통까지 가세, “개인들이 
증시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시장에 혼란을 일으키는 투기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하며 소로스펀드와 거래금지를 지시함으로써 전세는 
중화경제권의 승리로 돌아섰다. 

아시아 지역 둘러싼 미·일·중 패권싸움 개시 

아시아 지역화의 안정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미국이다. 미국은 결코 아시아 
지역의 이니셔티브를 놓을 수 없을 전망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EU로 문호를 
닫아버리고 아시아마저 중국과 일본의 경제권으로 ‘분할’돼 버린다면 미국의 
영향력은 현재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신흥시장으로 
급부상하는 아시아는 미국의 국익에 절대적인 존재다. 앞서 지적했듯 과잉상태에 
빠져버린 생산은 새 시장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국가는 수출의 물꼬를 
터줘야 할 대리인이다. 위기 직전까지만 해도 인도나 인도네시아의 자동차시장을 
둘러싸고 선진국들이 벌인 경제전쟁을 상기해 보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아시아 위기의 불똥을 의식해 일단 AMF 창설에 동조적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미국은 일본과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패권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3백억달러를 내놓으며 
AMF 창설을 밀고나가자 중국과 미국 역시 아시아 경제위기 해소를 위해 
지원하겠다며 주도권 경쟁에 참여할 뜻을 비쳤다. 그동안 수출 하락과 고실업, 
홍수 피해에도 불구하고 “위안화를 내리지 않겠다”며 대국의 면모를 과시했던 
중국이 지난해 11월17일 위기에 처한 아시아를 돕겠다며 55억달러를 내놓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이 아시아를 돕기 위해 1백억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지 하루 뒤여서 패권경쟁의 양상을 한층 높인 것으로 보인다. 21세기에는 
아시아를 둘러싼 패권경쟁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러시아 역시 주요 변수다. 이미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상태에서 어느 경제권에도 
포함되지 않은 러시아가 스스로 경제회생을 이룩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국민경제는 더욱 처참해지고 마피아와 신흥재벌의 탄압이 심화될 수 있다. 
휘청거리는 러시아 경제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 큰 부담이 될 것은 분명하다. 
돈이 없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핵폐기물이 그대로 주변환경에 노출돼 있다. 
이같은 러시아의 환경오염은 아시아를 비롯한 인류 전체에 대한 위협이다. 

그러나 서방진영의 더 큰 부담은 슬라브민족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혁명이 성공한다면 공산주의식 전체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이 많다. 전체주의자들은 도탄에 빠진 민중을 선동할 테고 러시아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주범으로 미국이 비난의 도마에 오를 것이다. 이웃 국가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침략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경제블록화는 역내국가들에 자칫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내 국가들은 경제블록으로 보호받고 역내교역량이 늘어나는 등의 장점을 
갖게 되겠지만 아울러 과거의 민족국가 단위보다 지역 전체의 경제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를 갖게 된다. 지역 스스로 자신만의 경제를 위해 독자처방을 
내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생산능력의 발전과 실업은 대세로 굳어져 
해결책이 제시되기 어렵다. 어느 한 지역이 다른 한 지역을 위해 ‘희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역내 경제는 아무래도 선진국 중심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쪽은 호황을 누리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극심한 
실업과 빈곤에 시달릴 수도 있다. 스페인과 같은 고실업국가는 이미 그같은 점을 
극히 우려하고 있다. 

실업과 블록화를 동시에 고려해 본다면 이제 21세기 전반부의 세계경제 흐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현재의 세계경제의 침체와 혼란은 99년 한해를 
이끌어갈 것이다. 어쩌면 미국의 주가폭락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대공황의 길로 
접어들지도 모른다. 대공황의 ‘태풍’을 간신히 피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된다. ‘밀레니엄 버그’라는 또 하나의 태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태풍은 곱게 지나가기 힘들어 보인다. 수년전부터 예상되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운 현 상황에서, 어쩌면 언제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기업이 이 문제까지 염두에 두기란 쉽지 않다. 

‘2000년문제’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 안정을 찾겠지만 경제혼란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실업은 계속 늘어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폭동과 소요사태가 계속된다면 서서히 앞서 얘기한 실업을 대비한 사회가 
발생될 것이다. 어떤 사회는 대대적인 사업을 벌일 테고 어떤 사회는 노동시간을 
단축할 것이다. 그러나 효과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아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국가는 실업을 막지 못할 경우 존망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소요로 권력교체가 빈번해질 수 있고 빈곤은 
특별한 상대가 없는 복수심과 증오로 불타오를 것이다. 국가는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뭔가 방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또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지역화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 틀림없다. 99년 출범한 
유러통화는 빛을 발할 테고 유럽연합은 곧이어 탄생의 메시지를 보낸다. 미주나 
아시아 블록도 마찬가지. 급속도로 세계경제가 지역화로 재편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들이 노출될 것은 뻔하다. 중심부 국가들은 지역 내부 
국가들을 종속시키려 할 테고 해당국가들은 이에 반발할 것이다. ‘지역 내부의 
남북화’와 이에 대한 역내국가간 충돌이 발생한다. 여기에 블록간 갈등도 
존재한다. EU나 아시아의 선진국들은 가급적 지역 내부에서 자급자족적 체계를 
유지해 나가려 하겠지만 세계의 최강국 미국은 이를 저지하려 할 것이다. 세계의 
패권을 지역 패권국에 이양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어떤 블록에도 포함되지 않는 중국·러시아와 엔블록이나 EU의 충돌이 예상된다. 

21세기 초반 20~30년은 ‘혼돈의 시대’ 

블록 내부, 블록간 갈등에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는 미국·중국·일본간 패권 
다툼은 무력까지 동원하는 수준을 예상할 수 있다. 지난해 4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실제로 이 전쟁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특집으로 다뤘다. 
물론 여기에는 한반도도 포함돼 있다. 아직은 가공할 핵무기가 사용될 만한 
세계전쟁을 가정하기란 쉽지 않다. 지나친 파괴력으로 전쟁을 ‘억지’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국지전과 내전은 재발할 것이다. 만일 한 지역경제가 
붕괴된다거나 한 지역의 선도국 경제가 초토화된다면 혹은 그같은 상황이 극히 
우려된다면, 또 혼란스러운 정국 끝에 히틀러나 무솔리니·스탈린 등 전체주의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선진 국가들간의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곧 인류가 
치러야 할 세번째 세계전쟁을 의미한다. 아마도 21세기 20∼30년은 ‘혼돈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며 전반부가 지난 후에야 이후의 사회체제가 가시화할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무리가 따르겠지만 현 상태에서 50년 후의 사회체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사회체제의 키워드는 여전히 실업과 블록화다. 여기에 각 경제권이 갖고 
있는 문화적 전통을 가미해야 한다. 문화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관성의 법칙’이 있고 생명력이 길어 제도나 체제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문화다. 21세기 자본주의의 미래를 
내다보는 데에 문화의 특성을 간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 대안이 없다? 

아마도 프랑스혁명 이후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견지하고 있는 유럽은, 
현재보다 많이 떨어지겠지만 사회복지국가로의 지향점을 향해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초국적기업들은 이를 저지하려 하겠지만 유럽은 그 어느 지역보다 
‘깨어있는 시민’이 많은 곳이다. 사회체제의 최고 가치를 ‘공동체’로 보는 
‘시민’은 결코 이를 묵과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버머스의 얘기대로 
‘생활세계’가 자본과 권력을 극복한 후 ‘의사소통적 합리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성적 사회’가 출현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EU가 미국과 일본을 
누르고 21세기 패권국가로 등극한다면 이같은 자신의 가치를 ‘세계화’시키려 할 
수도 있다. 

반면 미국의 길은 다르다. 164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앵글로색슨 사람들이 
미국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3백50여년동안 개인주의와 자유는 미국의 최고가치가 
된 상태다. 잘돼도 개인 탓, 못돼도 개인 탓이라는 생각이 강한 문화다. 이같은 
문화적 토양 아래서 복지가 제대로 운영된다는 것은 실로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영역의 가치보다 개인적 성공가치가 더 큰 사회다. 노조나 실업자 조직이 힘을 
기르기도 여간 어렵지 않다. 따라서 미국은 실업문제의 해결도 복지보다 개인에게 
선택지를 부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다. 물론 선택지라 해봐야 ‘저임이냐 
실업이냐’의 둘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업자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으니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하도록 만드는 전형적인 티티테인먼트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유교적 가치로 무장된 아시아에는 아예 시민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복지의 
개념도 가장 원시적인 것뿐이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조차 나이가 들면 
병상에 누워만 있는 ‘네다키리’(寢たきり) 노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1세기라고 해서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연줄주의·가족주의·집단주의가 
중심축인 현대 유교의 공동체 개념은 21세기에는 전혀 걸맞지 않을 만큼 편협하다. 
연줄·가족·집단을 떠난 개인은 완전 무방비상태. 직업을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다. 더욱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의 희생을 강요하는 
연공서열제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시아 지역은 21세기의 현안인 실업에 
대해 최악의 사회체제를 운영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제도적 보완 없이 21세기를 
맞는다면 삶의 젖줄과도 같은 직업을 잃게 된 서민들의 저항이 어느 사회보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이제 시간이 갈수록 대중들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느낄 테고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위기는 한시적으로 극복된다 
해도 바로 그 위기로 인해 대중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다소 혼란스럽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를 상정하고 있어서다. 

하나는 현재 진행중인 전지구적 위기의 주범인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있는가’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자본주의가 붕괴했을 때 그 자리를 메울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두개의 질문은 성격이 다르지만 답은 아주 비슷하다. 
‘없다’거나 ‘모른다’는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론가들의 대안은 크게 세 가지. 케인스식 
복지주의나 사회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다. 물론 여기에 개념이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유교 자본주의’를 첨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어떤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인류는 모든 실험을 끝낸 
상태며 어떤 체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됐다. 문제는 여전히 실업과 
빈부격차. 케인스주의는 인플레와 실업을 해결하지 못한 채 오일쇼크와 함께 막을 
내렸고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역시 실업을 해소하지 못하고 시장자본주의의 강력한 
기세에 눌려 있다. 공산주의는 21세기에도 ‘대실패’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을 
것이다. 유교자본주의는 그 정실(情實)성과 부패를 극복한다 해도 복지와 공동체 
개념의 편협성으로 전 인류의 희망이 될 수는 없다. 

인류의 미래는 과학의 지혜로운 운영에 달려 

한편 자본주의 붕괴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회체제는 붕괴됐고 새로운 
체제로 전환됐으며 자본주의 역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파멸을 
생각한 사람은 비단 마르크스에 국한하지 않는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조차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시하고 있다. 그는 “국부론”에서 
“‘완벽한 자유주의 사회’는 ‘완벽한 부’를 축적할 테고 그 시점에서 
자본주의는 성장도 축적도 멈출 것”으로 봤다. 혁신과 ‘창조적 파괴’로 잘 
알려진 슘페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본주의는 자신이 창안한 제도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고 말함으로써 변증법적 논리가 마르크스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시키고 있다. 자본주의의 최대 지지자 중 하나로 알려진 그의 말은 
아주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자본주의는 합리적인 사고의 틀을 창출해냄으로써 다른 많은 제도의 도덕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결국에는 그 제도에 반기(反旗)를 들게 한다. 부르주아 
자신에게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들은 합리적 태도가 왕과 교황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사유재산과 부르주아적 가치 전반에 대해서까지 공격을 퍼붓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초기 경제학자들의 후예들은 이제 선학들의 통찰력에 감탄과 함께 존경심을 
내비치고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로 환호되던 공산주의 붕괴에 즈음해 세계적 
석학들은 자본주의 붕괴도 멀지 않았음을 예언하지 않았던가. 공산주의의 붕괴는 
곧 자본의 축적을 향해 돌진하는 자본주의의 ‘브레이크’ 파열을 의미했고 과학과 
경영기술은 이 자동차에 로케트용 ‘터보엔진’을 달아준 꼴이다. 조종능력을 
상실한 자본주의가 어디로, 어떻게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석학들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단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후를 
생각한다면 인류의 상상력은 아직 지나치게 왜소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를 사는 인류는 수백년동안 자본주의의 물을 마시고 자본주의의 공기를 
흡입하며, 자본주의와 함께 생활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본주의 이외’의 사회는 단지 원시사회로 
간주될 뿐이다. 자본주의의 붕괴를 ‘필연’으로 간주했던 마르크스조차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한 언급은 고작 몇줄에 불과하다. 21세기 중반 이후 전혀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봤던 미국 사회학계의 석학 월러스틴도 그 사회를 가리켜 
“우리가 전혀 알 수 없고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라고 말한다. 앤서니 기딩스 
교수가 제창하는 ‘제3의 길’이나 피터 드러커 교수의 ‘포스트 자본주의 
사회’는 좋든 나쁘든 자본주의의 ‘변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인류가 맞고 있는 세계경제 위기의 
원인인 동시에 현상이기도 한 잉여자본의 활동과 세계화, 그리고 실업의 열병 
이면에 보다 원천적인 다른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기의 주범으로 
인식되지는 않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위기를 일으킨 주요 동력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바로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주로 ‘정보화’로 불리기는 하지만 여기에 
사무자동화나 공장자동화, 순수 자연과학까지 포함하는 훨씬 포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PC통신의 기술 발전이 없었다면 순식간에 국경을 넘나드는 
헤지펀드의 존재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용과 시간문제로 인해 초국적기업들이 저임금을 찾아 생산시설을 
제3세계로 옮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 그토록 많은 수의 사무직 노동자와 
블루칼라를 ‘시대의 패배자’로 만든 것이 사무자동화나 공장자동화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생각해 볼 것은 과학과 ‘돈벌이’의 관계다.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수천년동안 이 둘은 서로 무관하게 발전해 왔다. 진리탐구를 위한 인간의 
호기심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출현과 
동시에 과학은 기묘한 발전양상을 보여왔다. 대부분의 과학이 자본주의에 종속적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이윤 극대화를 노린 기업은 새로운 제품을 팔기 위해, 또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이 과학기술을 이용했다. 

이 역사는 18세기 산업혁명의 기반을 구축했던 하그브리스의 제니방적기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부터 시작됐다. 에디슨은 발명뿐 아니라 이를 사업화하는 
데도 천재였다. 이후 기업은 시장성이 없는 기술에 투자하지 않았으며 국가 역시 
‘발전’과 무관한 투자는 제한했다. 한마디로 과학기술은 자본의 통제를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방법으로 과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발전시켜 왔으니 과학 역시 자본을 이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 

자본주의의 발전 늦춰 시간 벌어야 

그런데 최근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존과는 뭔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자신을 이끌어온 자본을 배반하고 딴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자신의 모태인 자본주의를 파괴시키고 자신에 종속시키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밀레니엄 버그는 그 대표적 사례. 최근의 위기를 봐도 
이같은 현상이 눈에 띈다. 대처 전 영국 총리가 펼쳤던 신자유주의의 브레인 
역할을 했던 ‘런던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의 존 그레이 교수는 최근 “신기술의 
능력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며 현 위기의 중심에 기술발전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윤을 증진시키기 위해 과학기술을 활용하던 자본주의가 그것에 의해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자리를 줄인다는 점은 전통적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관계를 
급속도로 해체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앞서 말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과학은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를 더이상 필요 없는, 성가신 존재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덧붙여 과학에는 아무 규제가 없다는 점도 강점이다. 자본에는 국가와 
노동자가, 자유주의에는 복지주의가 브레이크 역할을 맡고 있지만 과학기술에 
브레이크를 거는 주체는 어디에도 없다. 과학의 발전을 더디게 해야 한다는 
종교단체의 얘기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90년 시작된 ‘인간 유전자 
프로젝트’에는 이미 천문학적 돈이 투입됐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95년에는 
특정 박테리아의 DNA 전체에 대한 유전자 지도가 만들어졌다. 인류 전체의 기원을 
달성하려는 과학을 단순한 ‘돈벌이’에 종속시키려 했던 자본은 21세기 그 대가를 
치르며 응징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다음 세기 중반경이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과학은 자칫 자본주의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종속시켜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의 세계경제 위기는 아무래도 공산주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순수 논리가 
과학기술과 결합됐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돌진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터보 엔진을 장착한 데다 브레이크도 없다. 

아무도 규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측불허’는 늘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고 
이는 실제상황을 연출한다. 현재의 세계 지도자들이 지금 할 일은 결국 
자본주의에서 터보 엔진을 떼고 브레이크를 새로 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기업의 이윤을 규제한다는 의미이며 자본의 활동을 제한한다는 의미다. 
궁극적으로는 거침없이 뻗어가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완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위기의 주범인 헤지펀드를 규제해야 하고 세계화를 규제해야 한다. 21세기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유행어가 되어버린 ‘시장과 국가의 갈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일 쇼크 
이후 힘을 얻은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임금과 자본이동의 자유를 부르짖고 정부 
개입과 규제의 최소화를 주장해왔다. 자본주의의 기본원리인 ‘약육강식’의 
전형적인 발전이었다. 90년대 들어 득세한 ‘세계화’는 자유주의의 또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최근의 세계경제의 위기는 다름아닌 이같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산물. “자유로운 자본의 증식은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자본주의 비판론이 
그대로 적용되는 사례다. 지난 10년 가까이 자본주의 선진 지역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의 족쇄에 묶여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최근 독일의 정권을 잡은 좌파정권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젊은이들이 갖는 
‘취업의 권리’ 인정, 에너지세율 인상, 금리인하를 정책으로 내걸자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반대 세력들의 반발에 부닥쳤다. 독일 최대 기업인 다임러 벤츠사의 
슈렘프 회장은 “슈뢰더 정권의 정책은 매우 산만하다”며 비판의 포문을 열었고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금리는 독립적으로 결정된다”며 반발했다. 

시장과 국가의 갈등은 향후 더 치열해질 가능성이 높다. 시장은 자유를 외치겠지만 
자유시장은 대다수 국민에게 빈곤과 고통을 준다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독일기민당(CDU)의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슈뢰더에 대해 “중도노선을 표방한 
것과는 달리 독일을 너무 좌익쪽으로 몰아간다”는 비판은 이런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국민을 위한다는 인기영합의 전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슈뢰더는 
독일의 국민이 자신의 손을 들어준 이유를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일반대중의 고통을 줄여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과 노동자·실업자의 갈등에서 국가가 점차 자신의 기능을 되찾을 것인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시민사회를 강화시키는 일이다. 
인간의 자유로웠던 영역은 90년대 경제위기와 함께 축소됐고 이제 존폐가 거론될 
정도의 위기에 처해 있다. 투표로 시민들이 뽑아준 정치인들이 시민을 위한 
존재인지에 강한 의문이 생기는 실정이다. ‘믿을 것은 나 자신 뿐’이라는 말을 
새겨둘 때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이같은 활동은 이미 시작단계에 돌입했다. 

96년 11월말 태국 치앙마이에서는 다국적기업을 감시하던 아시아 사회단체간의 
워크숍에서 세계적인 빈곤문제가 거론됐고 97년 11월에는 캐나다 포트엘진에서 
60여개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이 ‘세계화와 기업의 지배’라는 주제로 회의를 
개최, IMF를 운동의 목표로 설정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도 여러 차례 세계적인 
사회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위기를 토의했다. 인류 전체를 위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들의 활동은 눈에 띄고 있지만 아직은 힘이 부족하다. 어느 정도 
효율적일지도 알 수 없다. 바야흐로 모두가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 이제 
근로자·노동자·소비자·생산자로서는 더 이상 위기를 막을 수가 없어보인다. 
모두 ‘깨어 있는 시민’이 돼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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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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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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