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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사과같은내)
날 짜 (Date): 1999년 1월  5일 화요일 오후 08시 09분 29초
제 목(Title): 윈/ 이지함의 실학적 경세사상과 실천 



실학적 경세사상과 실천 
양반 신분에 손수 고기 잡고 소금 만들어 



권인호 대진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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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영인면사무소에 있는 토정의 동상. 토정이 현감으로 부임해 걸인청을 
세우고 걸인들에게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줬음을 기념해 세웠다.  
 이지함은 명문 자손이었으나 신분계급을 탈피해 직업귀천에 얽매이지 않고 상업에 
종사했다. 서해 고향 앞바다에서 10여년 魚鹽을 했고,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마포 
강변의 민중을 구제했다. 또 군역·방납 등의 폐해를 해결하려 했고, 제대로 된 
대동세계를 추구했다. 이론만 앞세우지 않고 몸소 실천한 그는 실학의 원조로 평할 
만하다. 

요즘 경제사정이 어렵다 보니 여러 사람이 여러 방향으로 그 원인을 지적하며 
현실을 진단하고 개선방안을 말한다. 모두 부분적으로는 일리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가까운 과거에도 학자들이 비슷한 언어문자로 책과 매스컴에서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주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학문이며,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토정(土亭) 이지함은 조선시대 신분제도가 엄연한 명문 양반가 출신이었다. 하지만 
당시 체제옹호적인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담론을 일삼던 성리학에서 벗어나 
민본사상과 실학정신 등 애민정신으로 구체적 현실비판과 그 개혁방안을 논하고 
이를 실천했다. 그는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6대손이고 형님 이지번은 
청풍군수였다. 하지만 당시 일반 민중(四民·사농공상) 가운데 가장 천시하던 
장사를 해 민중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실천한 인물이다. 

개혁방안 거부되자 벼슬 버리고 낙향 

토정은 처가가 사화로 누명을 쓰자 만년까지 낙향하여 전국을 순례하고 다방면에 
걸친 학문을 공부하다 57세에 탁행지사(卓行之士·학문과 행실이 탁월한 선비)로 
당시 오현사(五賢士·서경덕의 문인 이지함, 조식의 문인 최영경과 정인홍, 이황의 
문인 조목, 이항의 문인 김천일)의 첫째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6품직인 현감 
벼슬에 나가 민중구제책을 상소문으로 제시하여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상소문에서 ‘임금된 이는 백성으로써 하늘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다’(國以民爲天 民以食爲天)는 “서경”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명종 
연간 중앙 조정의 훈척파들과, 이들과 결탁된 지방관 그리고 서리들에 의한 
부정부패로 민중이 어육이 되어 배고픔을 참을 수 없는 참상을 폭로했다. 그 
개선과 민중구제책으로 옥(玉) 채취와 은광(銀鑛) 개설, 제련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연고와 주인이 없는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주(洋草洲)와 
황해도 풍천부 초도정(椒島井)을 포천에 속하게 해준다면 어염을 통해 곡식을 
바꾸어 민중들을 구제하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원래 포천은 서울에서 하루가 걸리는 지역으로 동북지역(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지역)의 관리·장군들과 야인(野人·여진족 사신)이 오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는 데 고을의 재정이 많이 투입돼 항상 문제가 
되던 곳이었다. 

토정은 상소한 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를 바탕으로 포천이 잘 살게 되고, 이를 
다른 고을에도 빌려줘 나라의 기틀이 튼튼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벼슬길에 나서기 전 몸소 소금도 굽고 고기잡이도 해보았으며 무인도에 박을 심어 
이것을 곡식으로 바꿔 마포의 가난한 민중을 무수히 구제한 경험을 가지고 
상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절실한 개혁방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러다 다시 부름을 받고 아산현감으로 복무하던 중 끝내 
민중의 병을 고쳐보려다 그 병으로 죽었다. 훗날 토정의 고손(高孫)인 경주부윤 
이정익이 말한 대로, 토정이 평생에 책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등 조선조의 일반적인 성리학자와는 달리 그의 스승 화담 
서경덕이나 남명 조식의 모습을 닮았다. 

 
▲아산현 관아 입구에 있던 아문의 누각 여민루. 현재는 영인초등학교의 담과 
연이어 있어 이지함이 사심없는 어린이들의 눈망울을 지켜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자저(自著·“토정선생유고”)는 1권(상권) 뿐으로 매우 소략하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유학과 제자백가와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법률)·산수·지음(음악)·찰색·신방·비결에 두루 
통달했고, 그의 출처(벼슬에 나감과 물러남)와 실천적인 민본적 사상에서는 노장과 
양명학적 요소도 보인다. 유학의 경세치용적인 실학적 학문사상을 가진 이들의 
학문범위는 이렇게 다양했던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도(道)가 있는 세상에서 빈천(貧賤)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도가 없는 세상에서 부귀(富貴)한 것은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토정이 살던 시대는 훈구파와 문정왕후의 정치파행으로 백성은 연명하기조차 
어려웠고 임꺽정과 같은 무리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토정은 포천현감 당시 
베옷에 짚신을 신고 베로 만든 갓(벼슬하기 전에는 쇠로 된 갓을 쓰고 다니면서 
솥이나 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다)을 쓰고 등청했다. 아전이 밥상을 올리니 
“먹을 것이 없다”면서 더 잘 차린 반상을 두번이나 물리고 난 후 “우리나라 
민생이 곤궁한 것은 다 먹고 마시는 데 절제가 없는 탓이다. 

나는 밥 먹는 자가 반(盤·여러 반찬을 차려놓은 상)을 사용하는 것을 
싫어한다”며 잡곡밥 한그릇과 검은 나물(黑菜·해조류 나물로 미역이나 파래·김 
등) 한그릇을 모자 상자(帽匣)에 차려오도록 해 맛있게 먹었다. 이튿날 고을 안의 
지역인사(品官)들이 인사하러 왔을 때도 마른 나물을 넣은 죽 한그릇씩을 권하니 
그들은 갓을 낮게 숙이고 먹다가 토하고 말았으나 토정은 맛있게 다 먹었다고 
한다. 고을을 구하려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때 고을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만류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민중의 곤궁은 절제가 없는 탓” 

이처럼 토정은 욕심을 적게 가져야 한다는 ‘과욕설’(寡慾說)과 
청심과욕(淸心寡慾·맑은 마음과 욕심을 적게 가짐)을 논하고 과욕이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허령(虛靈)하여 중화(中和)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유교는 인간적 욕망을 어느 정도 인정(寡慾)하면서도 그것을 인격적 수양에 의해 
적게 가지도록 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비해 도교(老莊)와 불교사상은 무욕, 즉 
욕심을 없애고 끊어 버릴 것을 주장하니 속세를 떠난 색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토정은 무욕을 주장하면서도 다시 이를 유학의 가장 중요한 덕목과 최고단계인 
중화로 보았다. 토정의 학문에는 유·불·도교의 색채가 함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 우리 사회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해 뇌물은 물론 나라의 세금까지 
도둑질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무원의 부패가 곧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한다. 

이러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남명과 토정은 물론 내암 정인홍, 성호 이익 
그리고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계에서 캬바레 제비족한테 유부녀가 돈을 
뜯기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또 청백리의 표본이며 
‘풀뿌리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미래’를 외쳐대던 지자체장들이 비리 혐의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대다. 이러한 원인은 누가 제공했는가. 조선 후기 
인조반정 후의 성리학의 타락, 매관매직, 서인-노론-세도정치-친일매국 세력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해바라기 성향, 겉으로는 도학·예학을 내세우면서도 원칙과 
윤리도덕을 무시하는 이중성, 즉 비민본적, 비실학적, 비철학적 정치세력의 핵심인 
수구세력이 원인제공자였던 것이다. 이에 더해 서구의 외형적인 사회정치사상과 
교육의 부문별한 도입(이것은 개화파로부터 국제화·세계화·21세기주의자로까지 
연결된다), 즉 나무의 열매만 보고 옮겨 심을 토양(문화)은 무시한 채 서구 지식 
수입상들에 의한 ‘전통 가치와 사상 죽이기’의 결과로 본다. 

한 인간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의 기준은 사회와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와 
구조 그리고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의 21세기는 어떻게 시작될 것인가. 
이른바 ‘국제화’ ‘세계화’ ‘정보화’만 하면 끝나는 것일까. 이럴 때일수록 
사회구조나 제도와 함께 토정선생과 같은 인물이 그리워진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이를 구할 때’ 

토정은 포천현감으로 있을 당시 올린 상소문에서 민중의 참상을 소상하게 말한 
다음,“지금 현실은 우물로 기어들어가 죽게 되는 어린이를 구할 때”라고 
표현했다. 비록 군자는 의(義)를 말하지 이익(利)을 논하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우선 어린이부터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맹자가 
주장(先富後敎와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하는 유학의 민본정치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토정은 “대개 도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末)이다. 그러나 근본과 
지엽말단은 어느 쪽도 폐지돼서는 안된다. 근본으로 말을 마르고(制) 말로써 
근본을 제정해야 사람의 도(道)가 가능하다”면서 재물을 생산하는 데도 농사가 
본이지만 소금을 굽고 광산을 채굴(鹽鐵)하는 것도 말로써 상호보충하고 마르게 될 
때 모든 쓰임새가 결핍되지 않는다는 실학적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토정이 상소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앞서 말한 “왕은 백성을 하늘로 하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한다”는 주장 역시 그의 민본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로써,“덕이란 오직 선정이고 정치란 백성을 기르는 데 있다”(德有善政 
政在養民)는 것과 서로 통한다. 일찍이 토정과 함께 정인홍도 개혁적인 정책을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임진왜란 때 내정개혁 건의와 자주적 국방강화 그리고 
부국양민책(富國養民策)의 하나로 일반 민중에게 은광 개설의 허가 요구 등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지방 고을의 사또로서 민중의 생활이 곤궁하고 초췌한 것은 
방납(防納)을 자행하는 모리배와 고을 수령 그리고 서리들 때문이라 하고 이를 
엄금하도록 상소문을 올렸다는 점에서 공통의 인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토정의 민본을 바탕으로 한 실학사상을 이론적으로 확장시켜 보자.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국가)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고 했다. 또 
순자도 “임금은 배고 서민은 물이다. 물이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며 국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남명 조식도 ‘민암부’란 글에서 같은 
사상을 피력했다. 토정은 아산현감으로 재직시 고을 민중들의 고통의 원인이자 
원성의 대상이었던 양어장을 메워 폐해 버렸다. 이는 당시 각 고을의 토산품을 
바치는 공물의 폐해(防納, 代納)가 심하였는데 이러한 문제를 백성의 입장에서 
과단성있게 해결하려 했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때 올린 상소문을 보면 지방의 
탐관오리와 민중의 고통에 직접 관련된 서리의 농간을 적발하는 데 토정은 귀신과 
같았다고 한다. 그동안 농간을 부리며 중간착취를 해오던 서리들은 그 짓을 못하게 
되자 앙심을 품고 나중에 토정이 전염병에 걸리자 약을 잘못 쓰게 해 죽게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성리학 본래면목인 현실정치·민본정치 촉구 

이처럼 토정은 목민관으로서 민중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군액(軍額·군비와 
방위세)을 삭감하고 군역(軍役·병역의무)을 덜어 주며, 족징(族徵)을 폐지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는 조선 후기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끝내 나라가 
망할 것을 내다본 실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똑같다. 

토정은 율곡과의 대담(율곡의 “石潭日記”에 토정과의 관련기사가 많이 나옴)에서 
율곡이 성리학을 공부하기를 권하자, 자신은 욕심이 많아 성리학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토정이 당시 성리학이 유학 본래의 학문사상인 현실정치와 백성을 
본위로 하는 민본정치의 실학적 모습에서 이탈하여 구구한 천리심성(天理心性)의 
사변적 철학으로 빠진 것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토정은 유학의 본령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인데 당시 유학자들은 
‘수기’에만 매달려 치인의 도를 소홀히 함을 비판한 것이다. 조선 중기의 
선비들은 과거 문장이나 외우고 이를 위해 사서(四書)의 주희(朱熹) 주(注)에 
매달리는 학문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계휘가 율곡에게 “사람들이 토정을 제갈량에 비유한다”는 말을 하자 
율곡은 “가당치 않다”면서 “토정은 기화이초(奇花異草)나 
진금괴석(珍禽怪石)이지 포백숙속(布帛菽粟)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기이한 꽃이나 이상한 풀, 진기한 새나 괴상한 돌처럼 사람들의 호기심과 주의를 
끌지는 모르나 사람들에게 직접 사용되는 이로운 삼베나 비단, 콩이나 조 같은 
물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토정은 “내가 비록 콩이나 조는 
아닐지 몰라도 상율((橡栗·상수리와 밤. 즉 대체식물)의 종류이니 어찌 전혀 
쓰임새가 없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토정이 관리로 진출하지 않고 처사(處士)적 행동과 노장적 은둔사상에 빠져 
있음을 율곡이 꼬집은 것으로 여겨지나, 토정의 애민휼민(愛民恤民)하는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율곡의 평가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된다. 

 
▲정몽주·길재·서경덕의 학맥을 이어 이이·조헌 등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줬던 
토정의 얼을 추모하는 영모비가 아산시 영인면사무소 안에 있다.  
 토정이 젊었을 때 외출했다가 돌아오는데 도포가 없는 것을 보고 집안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거지아이가 추위에 얼어 병든 것을 보고 뜯어서 세 아이에게 
나누어 주고 왔다”고 했다. 그는 또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있어 형제간에 가난과 
부유함을 서로 같이하고, 가진 것을 사유하지 않고 남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남의 급한 일을 구제했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욕심이 적어 명예와 
이익(名利)이나 음악과 여색(聲色)에는 담백했지만 때로는 당시 성리학자들의 
위선과 정치에 대해 독설과 해학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더불어 삶과 대동사상 

토정은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서해의 고향 앞바다에서 10여년 어염(魚鹽)을 
했고, 또 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마포강변의 민중을 구제했다. 이와 
관련지어 몇몇 학자들과 토정 관련 소설책 등에서 토정이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이라 하나 사실 허생의 모델은 경남 합천 출신으로 
인조·효종 때 사람인 와룡(臥龍) 허호(許鎬)라는 실존인물이라는 게 이가원 
교수를 비롯한 한문학계의 정설인 것 같다. 허호는 매점매석으로 품귀현상을 
이용해 거부가 됐다거나 도적을 모아 섬에서 잘 살게 했다는 점, 이 소문을 들은 
어영대장 이완이 그를 관직에 기용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등의 기행이 “허생전”과 
똑같다. 하지만 토정의 행적 또한 그와 매우 유사했다는 점에서 민중들의 염원과 
함께 “허생전”의 제재로 언급됐다고 본다. 

토정은 아산현감 재직시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위해 큰 집을 짓고 거처하게 
하면서(乞人廳을 설치하여) 각자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수공업을 가르쳐 각자의 
힘으로 의식을 얻게 하였으며 이것도 안되면 볏짚을 주어 짚신이라도 삼도록 
독려했다. 

이는 단순한 빈민구제 사업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면서 
벌어먹게 하는 모습으로 대동세상을 향한 이상을 보여준다. 그때 올린 상소문에는 
62세가 넘도록 장가도 못간 홀아비 김백남이나, 50세나 됐는데도 시집도 못간 그의 
누이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사례를 들면서 가슴아파하면서 정치의 근본을 왕에게 
상소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처와 자식은 궁기가 배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올바른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토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서 ‘올바른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를 공공의 공유물로 삼는다’고 한 것이나 ‘환과고독(鰥寡孤獨)과 
폐질자(廢疾者)가 다 부양되는 바가 있으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업이 있고, 
여자는 빠짐없이 시집갈 자리가 있다’는 것을 ‘대동(大同)세상’이라 부르고 
있다. 또 대동사상은 묵가(墨家)의 ‘상동(尙同)사상’과 유가의 가족중심 
‘방법적 차별애’ 그리고 노자(老子)의 ‘현동(玄同)사상’을 발전시킨 
겸애사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 

토정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신분계급을 탈피해 당시 주자 성리학의 
정분론(定分論)에서 사민평등의 직업귀천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대동세계를 위해 이론만을 앞세우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했다. 

IMF 경제체제 아래서 미국 중심의 시장경제원칙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경제원칙으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부자들의 이데올로기가 
극대화할지 모른다. 이와 함께 재벌의 시장·금융 독점과 정치권력적 힘의 논리가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적나라하게 횡행하고 있다. 

한편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또한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은 노력하고자 해도 근거가 
없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홈리스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한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이런 때야말로 토정의 애민과 휼민 그리고 청빈과욕의 
실천에서 민본적 실학사상이 주목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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