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1998년 12월 30일 수요일 오후 02시 59분 37초 제 목(Title): [특집] 에덴의 동쪽 [8] III. 에덴의 동쪽 1. 에덴은 어디에? 구석기 초기의 모든 지역이 다 에덴은 아니었을 것이다. 구석기 시대 전기는 빙하기로 지중해 이북은 1마일에 가까운 얼음덩이로 덮힌 땅이었다. 따라서 기후가 온화했을 것으로 추정돼는 에덴의 위도는 유럽-아프리카에선 지중해 이남으로 제한된다. 에덴에서의 추방을 수렵 채취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의 이행으로 본다면 에덴의 위치는 명확해진다.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상 최초의 농경 사회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일어난 수메르 문명으로 본다. 최초의 국가의 형태가 일어난 것도 이지역이다 바로 요즘 깡패 미국에게 무차별적으로 얻어터지고 있는 이라크 지역이다. 그러면 이 지역을 에덴이나 그 동쪽으로 본다면 크게 잡아 에덴은 지금의 이라크를 포함한 그 서쪽이고 지중해 남쪽이어야한다. 이 지역들은 사막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우디 반도를 비롯한 중동 지역은 몇 만년전엔 수풀이 울창한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서 석유가 많이 나는 것은 한 때 이지역이 어느 곳보다 동식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사하라 사막은 몇천년 전만해도 지금처럼 황폐한 사막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비옥한 땅이었다고 알려져있다. 사우디 지역이 사막화된 것은 이러한 구석기 시대 전기인들의 동물 남획에 의한 환경 파괴가 최초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농경 사회로의 이행도 가장 먼저 일어났을 것이기에 농경으로 인한 환경 파괴도 가장 먼저 일어났을 것이다. 구석기 시대인들은 그 황폐화된 옛날의 에덴에 계속 눌러앉아 농경사회로 이행했을 수도 있고 동쪽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다.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은 인간의 적극적인 이동일 수도 있고 주위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대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두 가지 형태가 다 나타났을 것이다. 바로 수메르 지역이나 그 서쪽 인근 지방이 에덴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고 있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수메르 지역에 머문 이들은 후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문명을 꽃피운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에덴의 서쪽을 향해간 청개구리들도 일부 있었다. 이들은 곧 나일강을 만나 거기서 이집트 문명을 꽃 피운다. 2. 한민족은 어디에서? 우리 민족에게 에덴과 같은 신화는 남아 있지 않다. 아마 구석기 전기에 한반도 지역의 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그리 썩 좋은 환경이 돼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같은 위도라도 유럽보다 더 추웠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그렇게 보면 중동 지역이 구석기 전기였던 때에 한반도는 빙하로 덮힌 지역이었거나 아주 추운 지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인근 지역에 수렵 문화보다는 농경 문화가 시작돼면서 비로소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즉, 다른 지역으로부터 대규모 인구의 유입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에덴을 떠난 사람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또 다른 에덴을 찾아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들의 앞 길은 거대한 히말라야가 가로막고 있었다. 일부는 히말라야 남쪽을 택해 비옥한 인더스강 갠지즈강을 만나 정착했다. 이들은 여기에서 찬란한 인도 문명을 꽃피운다. 일부는 히말라야 북쪽으로 떠나 비단길을 지나 몽고 고원으로 유입했다. 이 들은 끝없이 펼치지는 사막을 뚫고 나가야했다. 가는 길에 수도 없이 툴툴 대며 히말리야 남쪽으로 간 무리들을 부러워 했다. 하지만 눈 덮힌 거대한 히말리야는 그런 불평마저 싹 달아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태평양을 두 눈으로 보고서야 몽고 고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몽고 고원에 퍼질러 앉은 무리들이 몽고족의 조상이 된다. 이들은 에덴에서 몽고고원까지 걸어오는 데 이골이 난 나머지 그 후로는 항상 말을 타고 다녔다. 이들중 일부는 다시 중국과 만주로 갈라져서 정착한다. 아마 만주로 간 무리들이 동이족으로 이들이 황하 문명의 주역이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문화의 전통적인 본거지는 황하에서 남서쪽으로 많이 떨어진 중국 서부 내룩 지방인 시안(옛날의 장안)이라 황하 문명의 주역이라 단정하기엔 무리가 크다. 몽고 고원에 모인 무리들중 아직도 힘이 남아있던 사람들은 말을 버리고 개를 타고(개썰매를 타고) 혹한의 베링해를 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다. 거기서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에덴을 다시 만난다. 이들 인디언들은 신대륙의 환경에 썩 만족했기에 농경사회로 넘어가지 않고 구석기 시대 방식을 고집했다. 하지만 이들 용기있던 사람들의 자손은 축복을 받지 못 한다. 먼 훗날 그들은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온 야만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우리 한민족은 만주를 중심으로한 동북 아시아에 머문 사람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동식물이 풍부한 환경이 돼질 못했다. 그래서 이주민들은 수메르에서 배운 농경 생활을 시작했다. 이러한 농경을 기반으로한 이주민 집단의 유입이 단군 신화라는형태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것에 대한 근거로 몇년전에 두 가지를 내세운 사람이 있었다. (이름과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 남) i)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유사성. 고대 수메르어에는 오늘의 한국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많이 있다. ii) 단군 영정의 이국성. 단군의 영정을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수염이 무성해서 전형적인 몽고족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다른 위인의 초상보다 수염이 훨씬 많고 피부색도 좀 거무티티하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쓴 모자가 상당히 특이하다. 우리 나라뿐만아니라 동양에서는 왕이 이런 모자를 쓰는 예를 보지 못했다. 이 것은 유대교 랍비나 천주교 신부가 머리에 덮어쓰는 것과 비슷하다. 유대교나 천주교나 다 수메르문명이 생겨난 중동지역이 그 기원인 종교이다. 즉, 단군 신화는 수메르인이 도래해서 한반도 주위의 지배 세력이 됐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