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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2월 29일 화요일 오전 08시 10분 35초
제 목(Title): 창비/코오진/ 일본정신분석 





 일본정신분석 
  





  카라따니 코오진 
  문학평론가, 현재 일본 킨끼(近畿)대학과 컬럼비아대학 교수.    




  
 1 
  
 전후 일본의 지식인들은, 왜 파시즘과 전쟁에 맞서 저항하지 못했는가를 묻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파시즘과 전쟁을 야기한 일본의 사회적ㆍ문화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그러면서도 본질적으로 이 문제를 
추구한 지식인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였다. 그는 이 문제를 
파시즘 전체의 문제로 돌려버리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파시즘을 독일의 나찌즘과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문제를 고찰했다. 나찌에게는 적어도 명료한 의지와 주체가 
있어서 책임이 존재하는 데 반해, 일본의 파시즘에는 명확한 정치적 주체가 없어서 
책임의식 역시 없다. 일본의 파시즘은, 행위는 분명히 있지만 아무도 그 행위의 
주체가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마루야마는 그것을 ‘무책임의 체계’라 불렀으며, 
그러한 씨스템을 ‘천황제의 구조’라 지칭했다. 

 이리하여 천황-관료-부르즈와의 지배층은 결국 책임의식을 갖는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묘하게도 일본에서는 천황제 기구 자체가 전쟁을 수행해갔다고 설명하는 
것말고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전쟁수행의 능동적 추진력을 논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점을 사회과학적으로 해명하는 일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편으로는 전쟁의 주체를 독점자본으로 일원화해 
전부 독점자본이 행한 것이라고 말하는 일원적인 견해,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의 
청년장교가 나쁘다, 좌관(佐官)급들이 나쁘다, 그외 사람들은 무죄다 하는 식의 
오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지배층의 전쟁책임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천황제 자체의 교묘한 구조, 심각한 병리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註1) 

 그렇다면 그러한 구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파시즘은 현대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일본적 형태의 기원을 물으려 한다면, 단순히 
메이지(明治)시대 이후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기초적인 구조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천황제’ 문제란 거기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점을 최초로 제시한 것은 마루야마가 아니다. 그것은 패전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원래 ‘천황제’라는 말 자체가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그 논의는 ‘일본자본주의 논쟁’ 혹은 
‘봉건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원래, 코민테른 테제를 추종하는 
공산당계의 이론가〔講座派〕들과 그에 저항하는 사회민주주의자〔勞農派〕들의 
전략적 대립에서 비롯된 것인데, 학문적인 논의였기 때문에 좌익운동이 괴멸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논쟁의 담당자들은 경제학자ㆍ역사학자들이었지만, 
논쟁은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되어 행해졌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황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아마도 전쟁중에 이 논쟁이 
내포하는 문제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논쟁은 극히 단순화하자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국가에 봉건적 제도, 바꿔 
말하면 기존의 씨스템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축약된다. 코오자(講座)파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봉건적 제도로 간주하고 따라서 
부르즈와혁명(천황제 타도)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데 반해, 
로오노오(勞農)파는 경제외적인 봉건제도로 보이는 것도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언젠가는 
해소될 것이므로 천황제를 특별히 표적으로 삼을 게 아니라 의회주의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결집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면, 로오노오파 쪽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일본의 천황제를 
러시아의 짜르주의와 동일시하는 코민테른을 추종하며 천황제 타파를 내세운 
공산당은, 노동자·농민운동을 유효하게 조직해내는 대신 그들의 반발을 사서 
붕괴되었고, 자신들도 철저하게 탄압당했다. 그러나 로오노오파는 그 반대로 
천황제 또는 상부구조의 문제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양쪽 다 맑스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지만, 그런 방법만으로는 결론이 
날 리가 없었다. 그 문제는 사실상 맑스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맑스에 토대를 두고 사고하는 한, 자본주의의 진전이 종래의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를 해체할 것이라는 견해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론』에서 밝히려 했던 것은 영국을 모델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산업자본주의의 ‘원리’였고, 거기에서는 ‘자본ㆍ노동ㆍ토지소유’라는 
3대계급은 경제적인 카테고리로만 간주되고 있다. 영국에서도 그러한 
순수자본주의가 성립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본주의경제는 
종래의 생산관계나 이데올로기를 해체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보존하고 
활용함으로써 존속된다. 전전(戰前)에 이 논쟁에서 독자적 입장을 취한 경제학자 
우노 코오조오(宇野弘藏, 1899~1977)가 통찰한 것은 이 점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그리고 후에 요시모또 류우메이(吉本隆明, 1924~ )가 
‘천황제’를 해명하려 한 것은 따라서 특수하게 일본적인 것은 아니다. 고도의 
자본주의사회에 왜 전근대적 또는 고대적인 신화가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파시즘이 승리한 나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딸리아에서는 30년대에 
그람시(A. Gramsci)가 상부구조를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로 파악했고, 또한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여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일본의 경우 그것은 ‘천황제’의 해명에 집약되었다. 마루야마가 그것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해석하려 한 것은 그가 맑스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러시아적 맑스주의자가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마루야마는 
‘천황제’가 단순히 전근대나 봉건제 같은 일반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메이지 이후의 천황제 또는 
정치경제체제의 분석만으로는 해명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천황제’가 
세계사에서 예외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령 그것이 예외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만이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이 문제를 보편화하는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이 
문제를 고대로 거슬러올라가 묻는 것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그는, 일본의 고대 이후 사상사를 고찰하면서, 그 근원을 ‘신또오(神道)’에서 
찾아내고 있다. 

 ‘신또오’는, 말하자면 길게 늘어뜨려진 천주머니처럼, 각 시대에 유력했던 
종교와 합쳐지면서〔習合〕 그 교의 내용을 채워왔다. 이 신또오의 
‘무한포용성’과 사상적 잡거성이 앞서 말한 일본의 사상적 ‘전통’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註2) 

 그러나 이와같은 말로 무엇이 해명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비판하는 국학자 
모또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중국에 대비되는 일본적 사고의 특질로서 
긍정적으로 지적한 사항이며, 마루야마는 단순히 그것을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즉 마루야마가 지적한 사실은 고스란히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실제로 국수주의자들은 그 점에서 일본의 독자성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찍이 오까꾸라 텐신(岡倉天心, 1862~1963)이 아시아의 ‘저수지’ 혹은 
‘박물관’으로서의 일본을 그처럼 평가한 바 있고, 와쯔지 테쯔로오(和V哲郞, 
1889~1960)도 1차대전 후 그것을 일본의 ‘종교적 관용’으로 평가했다. 
국수주의자건 아니건 그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일본 역사에서 바깥과의 관계를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내부적으로 일관된 고유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점이다. 실은 ‘서양사상사’ 역시 같은 식의 사고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말하자면 ‘서양’이라는 것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이며 마치 거기에는 
외부도 내적 차이도 없었다는 식의 사고에 의해. 
 한편, 중문학자이자 비평가인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 1910~1977)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대비를 통해 그 문제를 생각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서양과의 
접촉에 대해 아시아 각국, 특히 중국에서는 그에 대한 반동적인 ‘저항’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별 문제 없이 ‘근대화’를 이루었다. 그것은 ‘저항’해야 
할 ‘자기’가 일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즉 원리적인 좌표축의 존재는, 
발전보다도 오히려 정체를 (일시적이건 장기적이건) 야기한다. 타께우찌에 따르면 
일본 ‘발전’의 비밀은 ‘자기’도 ‘원리’도 없었던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에서 연유하는가를 타께우찌는 생각하지 않았다. 
 후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러한 ‘일본의 사상’의 특징을 『코지끼(古事記)』의 
분석을 통해 의식의 ‘코소오’(古層, 고고학 용어로 오래된 지층을 뜻함)에서 
찾아내려 했다.註3)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작위(作爲)ㆍ제작(製作)에 대해 
생성(生成)을 우위에 두는 사고이다. 물론 마루야마는 서양은 ‘작위’를 우위에 
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콘포드(F.M.Conford)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생성’ 쪽이 지배적인 사고이며, 
플라톤처럼 ‘제작’을 강조하는 것은 소수파였다고 말하고 있다.註4) 그것은 
분명히 선진적인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기독교사상을 
만나기 전 유럽의 각 종족은 어떠했는가. 그들의 사고도 코소오에 있어서는 
제작보다도 ‘생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로 그 생각은 완전히 억압당했다. 같은 경우를 아시아 각국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제국의 주변에 있던 각 민족은 그 문화적·정치적인 영향을 
받아들일 때, 그 이전의 것을 철저하게 억압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코오소에서 생성이 제작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제국의 주변에 존재했던 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코오소를 지적하는 일이 아니라, 왜 일본에서는 
그러한 코오소가 ‘억압’당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일이다. 그 경우, 타께우찌 
요시미처럼 중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와 대비해 일본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그 
대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 일본적인 것을 
고찰하는 한, 결국 그도 ‘코오소’(마루야마 마사오)나 ‘이니시에노미찌(古道, 
인간으로서의 길)’(모또오리 노리나가)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는 중국과의 관계, 한국과의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중국ㆍ한국ㆍ일본이 각기 자기동일체적인 존재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그들이 
생각지 않고 있는 것은, 그러한 지정학적인 관계 그 자체가 일본적인 것 또는 
한반도적인 것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라는 배치에서 오는 관계구조의 문제이다. 
 내가 이 동아시아에서의 특수한 지정학적 관계구조에 주목하는 것은, 이 지역이 
현재와 장래에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 관계구조가 세계사 속의 각 지역을 보더라도 어떤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싸미르 아민(S. Amin)은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에서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재까지 일관된 ‘서양’의 역사가 존재한 것처럼 사고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러한 사고는 근대유럽이 중세시대 때 아랍문명 
없이는 존재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은폐할 뿐 아니라, 그 시원으로 간주되는 고대 
그리스가 선진국 이집트 주변의 섬나라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서양사상의 
2대 요소로 간주되는 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제작’적 사고와,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을 믿는 유태교는 둘 다 이집트의 존재로부터 유발된 것이다. 그러나 
아민이 이집트를 시원의 위치에 두려는 것은 이집트의 오리지널리티를 말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가 이집트인이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아민에 따르면, 
이집트 같은 제국은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경직되고 정체적인 데 반해 그 주변에 
있으면서 미완성인 연해의 반도국가 그리스는 유연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집트ㆍ그리스와 비슷한 관계를 로마제국과 그 
주변인 서유럽의 관계, 나아가 서유럽대륙의 제국(帝國)과 그 주변 섬나라 영국의 
관계에서도 보고 있으며, 중국과 그 주변 섬나라 일본의 관계에서도 찾아내고 
있다. 이렇게 주변에 있으면서 씨스템이 미완성 상태인 국가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아민은 말한다. 
 나는 그에 덧붙여 유럽에 대해 거대한 섬나라인 미국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 주변국가, 특히 섬에서는 자신의 윤곽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고, 또 바깥으로부터 무엇이든 받아들이지만 실리적으로 그것들을 
처리하여 전통규범적인 힘에 의거하지 않고 창조해나가는 일이 가능하다. 즉 
‘일본적인 것’의 대부분은 중국문명의 주변에 존재한 극동의 섬나라였다는 
사실을 봄으로써 해명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의 하나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적인 것의 
특징은 독일이나 프랑스 또는 중국과의 비교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과의 비교를 
통해 밝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영국과 일본의 차이를 말한다면 
영국이 대륙의 제국이나 프랑스 사이에 해협을 두고 접해 있는 데 반해, 일본과 
대륙 사이에는 한반도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노르만 정복 
이전에도 몇번이나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고 그것이 현재까지도 아일랜드 문제로 
남아 있는데, 일본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고대 야마또(大和) 조정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정복자로 간주되고 있지만, 그후 
군사적인 정복이라는 사태는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과 중국이나 
몽고, 또는 러시아 사이에 한반도가 위치해 이곳에서 군사적 침입이 방어되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중국으로부터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정복했던 몽고도 
한반도를 지배하는 데 30년이나 걸렸다. 그들이 일본 정복을 단념한 것은, 일본의 
역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카미까제(神風)’가 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반도의 
저항에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16세기 말 토요또미 
히데요시는 당시 압도적이었던 군사력으로 명제국을 정복하려 했지만, 
한반도에서의 저항에 부딪쳐 단념했다. 
 이 한반도의 존재가 일본의 정치적·문화적 형태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한국이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입에 대해 국가로서의 윤곽을 작위적으로 유지하려 해온 데 
반해, 일본은 바다라는 자연의 경계를 국가의 경계로 간주함으로써 
국가ㆍ민족ㆍ사회의 구별이 애매한 채 지내온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는 중심에 
존재하면서 전체를 통제하는 식의 권력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메이지 
이후의 프로이쎈화에서도 성립하지 않았다. 실은 가장 집권적으로 보이는 파시즘의 
정점에서조차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전후의 
‘토오꾜오재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적한 것처럼, 거기서는 책임을 져야 
할 주체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에 천황제가 존속한 것은 그것이 뿌리깊은 신화적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도, 또 인류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미개한 심성이 잔존했기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한반도의 존재로 인해 한번도 이민족에게 직접적으로 지배당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지배자들은 누구나 스스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대신 
권위를 갖는 천황을 받드는 일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했다. 소설가 사까구찌 
안고(坂口安吾)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천황제란 일본역사를 관통한 하나의 제도였지만, 천황의 존엄이라는 것은 
이용자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실재한 적이 없었다. 
후지와라(藤原)씨 가문이나 장군들은 왜 천황제를 필요로 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들 자신이 최고의 주권을 장악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주권을 
장악하는 것보다도 천황으로 하여금 명령하도록 하여, 자신이 맨 처음 그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명령이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절대적 존엄성을 인민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이 천황에게 부복(俯伏)하는 모습을 통해 천황을 
신격화하고 같은 행동을 인민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황 옹립을 마음대로 하면서 천황 앞에 부복하고, 자신이 부복함으로써 
천황의 존엄을 인민에게 강요하고 그 존엄을 이용하여 명령하고 있었다. 그것은 먼 
역사 속의 후지와라씨 가문이나 무사가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라. 이번 
전쟁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註5) 

 메이지 국가를 만든 ‘원로’들은 천황의 권위를 그런 식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자유민권운동의 압력에 대해 헌법과 의회를 부여함과 동시에, 천황의 명령으로써 
헌법 외의 규제를 강화하고, 또 육군과 해군을 각기 천황이 직접 통솔하도록─즉 
원로가 지배하도록─만들었다. 이 ‘원로’들─그들 자신이 1대에 한정된 헌법 
외의 존재였다─이 잇따라 사망한 1930년대에 육군과 해군은 헌법상 각기 의회와 
내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천황의 뜻’에만 따르게 되었다. 육군과 해군(그들은 
서로 독립된 존재로 대립하고 있었다)은 의회와 정부를 무시하고 행동했으며, 
그것을 ‘천황의 뜻’으로 간주했다. 한편, 천황은 표면적으로는 입헌군주이므로 
의회나 정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서 ‘무책임의 체계’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 궁극적 원인은 사까구찌의 말처럼, 메이지 혁명정권이 천황의 
권위를 강화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 한 데에 있다. 
 한편, 천황의 권위를 이용한 것은 일본의 권력자뿐 아니라 전후 미점령군의 
정책에서까지 볼 수 있다. 후자는 대소련전략으로 이용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천황을 전쟁책임에서 면제시킨 것이다. 당시의 일본 여론─보수파를 포함하여─이 
천황이 당연히 퇴위해야 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를 
애매하게 만든 것은 이 부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천황을 이용하는 권력의 
존재방식이 바로 ‘천황제의 구조’인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천황제의 
구조’를 보존한 채 경제적 강대국으로 부활했다. 그리고 내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러한 천황제의 구조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한반도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이나 소련 세력의 남하에 대한 공포가 점령군으로 하여금 
천황제 유지를 선택하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전후 일본의 경제발전은 6 5의 특수와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신헌법의 
상징천황제와 전쟁포기로 대표되는─란 한반도의 남북분단과 맞바꾸어지는 형태로 
성립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한반도의 정치적·문화적 형태를 
규정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일본에 원리적·체계적인 것에 의한 억압이 
없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말하자면 그 체계적인 억압이 강했던 한반도가 존재했기 
때문이며, 또한 한반도에서는 그러한 반복되는 이민족 침략의 경험이 ‘억압’과 
‘주체’를 강화시켜온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를 떠나서 양국의 역사를 
생각하거나 관계를 보면 각자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중국에 
인접하면서 그러한 정치적·문화적 외압에 노출되어 있었던 한국은, 말하자면 
중국보다도 더 원리적·체계적이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의 비평가 
최원식(崔元植)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사상사의 흐름 속에는 뭐랄까 변방적 성격에서 말미암는 
극단적 경향이 없지 않았다. 정통과 이단을 가리고 조금이라도 정통에서 이탈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박멸적 태도를 취하는 편협한 이데올로기 독재에의 
강렬한 유혹! 일찍이 장유(張維, 1587~1638)는 통탄하여 마지 않았다. 
 “중국의 학술은 갈래가 많아서 정학(正學)이 있고 선학(禪學)이 있고 
단학(丹學)이 있다.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가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가 
있어서 문경(門徑)이 하나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식 무식을 논할 것 
없이 책을 끼고 글을 읽는 자라면 모두 정주를 욀 뿐이고, 딴 학문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 다만 정주의 학문을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들어서, 
입으로 말하고 겉으로 높일 뿐이다. 소위 잡학이란 것조차 없으니, 어찌 정학엔들 
얻는 것이 있으리요.(『계곡만필(谿谷漫筆)』 1권)”註6) 

 실제로 중국에서 쇠퇴한 주자학을 되살린 것은 16세기 조선의 학자들이었으며, 
유교화가 그 무렵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토꾸가와(德川)막부가 공인된 
이데올로기로 도입한 주자학은 바로 조선 주자학이었다. 또한 토꾸가와시대 동안 
조선에서 사절단으로 일본에 건너온 학자들이 일본인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에는 그러한 사실이 잊혀졌다.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硏究)』에서 토꾸가와시대의 주자학으로부터 
국학으로의 변증법적 전개에 대해 고찰한 마루야마 마사오조차 그 사실을 
무시했다. 나중에 영어판 서문에서 수정하기는 했지만. 중국에서의 유교 또는 
주자학도 조선에서처럼 엄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노리나가가 ‘카라고꼬로(漢意)’라고 부른 것─지나친 엄격주의로서 원리·체계를 
고집하고 현실적인 미세한 차이를 억압하는 태도─은 사실은 
‘카라고꼬로(韓意)’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중국·한국·일본의 사고 차이를 보는 일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가 역사적인 
상호관계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2 
  
 이미 분명한 것은, 일본적인 씨스템(넓은 의미에서의 천황제)을 해명하려 할 때, 
그것을 단순히 중국이나 한국과 대비해 생각할 뿐 아니라 그들과의 상호관계의 
역사성 그 자체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 카와이 
하야오(河合/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인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재주껏 잘 받아들인다는 점은 정평이 나 있다. 
외국에서 태어난 사상이나 예술 등이 곧바로 수입되어 ‘유행’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한때 상승했던 유행사상은 갑자기 하강하여 그 모습을 감춰버린다. 
그러면 또다시 새로운 사상이 생겨난다. 이런 식으로 구미의 사상이나 예술이 
한꺼번에 즐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전부가 일본이라는 어머니의 자궁을 통과할 
때 일본화하고 만다. 이자야 벤더슨이 일본에는 일본교라는 종교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과도 결부되는 일일 것이다.註7) 
 일본인의 자아란 서양인측에서 보면 존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으로까지 
느껴지는 모양이다. 어떤 외국인은 일본인과 교섭할 때 그 개인의 판단이 
불분명하고 책임의 소재를 알 수 없어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일본인은 좀처럼 
명확한 판단을 하지 않고 최종적으로는 상사와 상의하고 나서라는 등의 말로 
대답한다. 그 상사한테 교섭을 하러 가면 부하와 상의하고 나서라고 말하기 때문에 
점점 더 알 수 없어진다는 것이다.註8) 

 카와이가 지적하는 것은 마루야마나 그밖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온 일이다. 
예를 들면 두번째 문장은 마루야마가 지적하는 ‘토오꾜오재판’에서 드러난 
‘무책임의 체계’가 두루 퍼져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카와이는 그 원인을 일본이 ‘모성사회’라는 사실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대단히 애매한 개념이다. 게다가 
그는 ‘서양인’과 ‘일본인’ 이외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고찰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고 현상을 단순히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한 일본인의 사유방법을 일본어의 문법에 의거해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러한 싸피어-워프(Sapir-Whorf)적인 언어결정론은 곧잘 
역사적인 사항을 본질론화하고 만다. 둘째로, 일본어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것들의 
많은 부분은 다른 알타이계 언어, 특히 가까운 한국어와도 공통된 것인데, 그런 
논자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정신이니 심리적 구조 따위의 상상물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언어로부터 출발하는 일은 불가결하다. 다만 그 언어란 에크리뛰르( 
riture, 書記法)로서의 언어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고대에 씌어진 역사물로 되돌아가, 일본인의 사고의 코오소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코지끼』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코지끼』의 
에크리뛰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하지 않았다. 표현된 내용에는 
주의했지만, 표현형태 그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던 것이다. 즉 ‘역사’를 
기술하는 에크리뛰르 자체의 역사성을 묻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요오가나(萬葉粕 
로 씌어진 『코지끼』는 실제로는 한문으로 씌어진 『일본서기』 이후에 씌어진 
것이다. 원래 역사를 기술한다고 하는 발상은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코지끼』는 이미 한문으로 씌어진 것을 와고(和語, 고유어)로 번역한 
것이며, 그것은 한자를 표음적으로 사용한 만요오가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한자를 받아들인 방식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는 여러가지 차이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차이가 그것으로 나타나는 차이이며, 
또한 그 자체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차이를 형성하고 있는 차이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문자를 가진 것은 중국뿐이었다. 그 주변의 민족들이 ‘문화’를 
가진다는 것은 한자를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중국에게 ‘문화’란 한자 사용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립어’인 중국어에 적합한 한자를 ‘교착어’의 
성격을 지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받아들이는 데는 곤란이 따랐다. 물론 한자는 
상형문자가 아니라 표의적이면서 동시에 표음적이다. 고대에 한자를 받아들인 
민족들은 한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음성적) 언어를 표시하기 
위해 한자를 표음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중국문화권에서 한자를 이용하여 문자를 
만든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안남문자·서하문자·거란문자·여진문자, 또는 한국의 
이두 등이 있다. 실제로 7세기경의 만요오가나─그것으로 『만요오슈우』와 
『코지끼』가 씌어졌다─는 원래 한국에서 고안된 것이며, 일본의 그 발상은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일본의 
히라가나나 카따까나는 9세기경 관습적으로 고정된 한자의 표음적 
사용(만요오가나)를 간략화함으로써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표음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일본의 특징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15세기에 한글이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한자를 표음적으로 사용한 만요오가나가 
카나로 바뀌어간 것은, 무엇보다 일본어는 모음과 자음의 숫자가 적고 또한 (모든 
소리가 모음으로 끝나는) 개음절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자음과 모음의 수가 많기 
때문에 자음과 모음을 알파벳처럼 조합하는 방식이 고안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의 주된 차이는 일본에서는 한자를 소리(중국어의 음성에 가까운 
음성)뿐 아니라 훈(일본어의 소리)으로 읽는 방식이 택해졌지만, 한국에서는 
한자를 소리(중국의 소리에 가깝다)로 읽고 훈(한국어의 소리)으로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고대에는 한국에서도 한자를 훈으로 읽는 방식이 있어서, 일본에 
그 방식이 전해진 것일 터이다. 그러나 한글이 고안되면서 한자는 전부 소리만으로 
읽혀지게 되었다. 그것도 일본에서의 한자 발음이 중국 각지의 발음을 복수로 
받아들인 데 반해 한가지 소리로 읽혀졌다. 
 이와같이 한자를 훈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그것은 외래적인 
한자를 내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이미 한자를 훈으로 읽는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일본어를 한자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그와 
대조적이다. 한자는 소리만으로 읽히고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외부적이다. 
지식층은 바로 그러한 외부적인 한자를 쓰려 하였고, 15세기에 일반대중을 위한 
한글이 만들어진 다음에도 한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2세기경에는 한자카나혼용문이 표준화되어서 한문을 일본어로 읽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 비해 한문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대신 일본어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두번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한자는 일본어 내부에 흡수되면서도 동시에 항상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한자는 훈독에 의해 
내면화되지만 문자는 외부적인 차원에 머물게 된다. 그 때문에 한자로 씌어진 것은 
외래적이며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 점은 메이지 이후의 일본의 
에크리뛰르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처음에 서양의 개념들은 한자로 번역─이 번역은 
식민지화한 한국은 물론, 청일전쟁 이후 대거 건너온 중국의 유학생에 의해 
중국어로 정착되었다─되었지만, 동시에 카따까나로 표기되는 방법이 이용된 
것이다. 카따까나는 불경 등의 한문을 읽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외국어를 표기하는 데 적합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는 서양개념이 
한자어로 번역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고, 거의가 카따까나로 표시된다. 외래어는 
말을 할 때는 외래적이라는 사실이 거의 의식되지 않지만, 쓸 때는 카따까나에 
의해 그 외래성이 명시된다. 또 때로는 히라가나나 한자로 써야 할 일본어를 
일부러 외래어로 써서 낯설게 하기 효과를 사용하기도 한다. 즉 한자나 카따까나로 
표기되는 한 일본어에 존재하는 외래적인 것의 외래성이 끝까지 보존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한자나 카따까나로 표기된 것은, 일정한 가치─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그것들을 열광적으로 숭배한다─를 띠게 되면서 그에 따라 어느정도의 반발도 
일으키게 된다. 그것들은 아무리 빠롤(parol) 면에서 일상화되어도, 또 그것 
없이는 말을 할 수 없어도 암묵적으로 ‘야마또 코또바(大和言葉)’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야마또 코또바’란 꼭 옛날부터 존재한 원래의 말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왔건 기원이 잊혀져 히라가나로 표기해도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정착된 말을 의미한다. 
 어쨌든 세 종류의 문자를 사용하여 말의 출처를 구분하는 것은 일본밖에 없다. 
그것도 이미 천년이 넘은 일이다. 이러한 특징을 무시하면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온갖 제도와 사고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반 제도와 
사고는 그러한 에크리뛰르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에는 어떤 외래사상이라도 받아들여지지만, 그저 
잡거(雜居)하고 있을 뿐, 내적인 핵심에 미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문자 사용형태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자나 카따까나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 자체는 일본어에 속하지만 외래성의 표시를 달고 있다. 그것들은 한자나 
카따까나로 표시되는 한, 본질적으로 내면화하는 일 없이 또한 그에 대한 저항도 
없이 얼마 지나면 외래적인 것으로서 한쪽으로 밀쳐진다. 결과적으로 일본에는 
외래적인 것이 모두 보존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점에 대해 가장 깊은 통찰을 한 사람은 철학자도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닌 소설가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芥川龍之介)였다. 「신들의 
미소(神神の微笑)」라는 그의 단편소설에서 주인공인 예수회 선교사의 환각 속에 
일본의 ‘혼령 하나’가 나타나, 일본에서는 바깥에서 들어온 어떤 사상도, 예를 
들면 불교도 유교도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들어보세요. 멀리 우리나라까지 건너온 것은 데우스뿐이 아닙니다. 공자, 맹자, 
장자─그밖에 중국으로부터는 철학자들이 여러 사람 왔습니다. 당시는 나라가 막 
생겨났을 때지요. 중국의 철학자들은 학문 이외에도 오나라의 비단이니 진나라의 
옥이니 하는 여러가지 물건들을 갖고 들어왔습니다. 아니, 그런 보물보다도 더 
귀중한 문자까지도 갖고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우리를 정복한 
걸까요? 예를 들면 문자를 보세요. 문자는 우리를 정복하는 대신 우리들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 중에 카끼노모또 히또마로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 하지만 나는 시보다도 문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히또마로는 그의 시를 기록하기 위해 중국의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 때문이라기보다는 발음 때문이었습니다. 주(舟)라는 글자가 
들어온 후에도 ‘배’는 항상 ‘배’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의 
언어는 중국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물론 히또마로 자신보다도 히또마로의 
마음을 지켜온 우리들 이 나라의 신의 힘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데우스도 이 나라 사람이 되겠지요. 중국이나 인도도 
변했습니다. 서양도 변하지 않으면 안되지요. 우리들은 나무 속에도 존재합니다. 
얕은 시냇물 속에도 존재합니다. 장미꽃을 스치는 바람 속에도 존재합니다. 절의 
담장을 감아드는 햇살에도 존재합니다. 어디에라도, 또 언제고 존재합니다. 
주의하세요. 주의하세요. 

 아꾸따가와는 16세기의 예수회 선교사를 들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 
상황에서, 20세기 초의 기독교에 일어난 일, 나아가 당시에 왕성한 하나의 
세력으로서 그를 어떤 의미에서 자살로 몰고갈 만큼 위협하고 있던 맑스주의 
운동에, 장래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감하고 있었다 해도 무방하다. 즉 
아꾸따가와가 말하는 것은 현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외래적인 종교나 사상이 일본에서 흡수되고 무화되고 만다는 사실을 
열거할 때 무엇보다도 문자의 문제에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프랑스의 
정신분석 의사 라깡(J. Lacan)이 일본에 대해 말한 것과 부합한다. 
  
 3 
  
 라깡은 일본 문자의 용법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듯, 최소한 세 번 그것에 
관해 글을 썼다. 예를 들면 『에크리』(Ecrits)의 일본어 번역판이 출판되었을 때 
서문에서 라깡은 일본어 같은 문자 사용방식은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아가 일본 독자에게 “이 서문을 읽고 곧바로 내 책을 덮을 
기분이 되도록 만들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라깡이 주목한 것은 일본에서 한자를 
훈으로 읽는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음독은 훈독의 주석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연결하는 고리가 갓 구워낸 고프레처럼 신선한 상태 그대로 제시되는 것, 
사실 그 점은 만들어낸 사람들의 행운입니다. 어떤 나라건, 방언이 아니고는 자기 
나라 말 속에서 중국어를 말하는 식의 그런 행운은 갖고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도─더 강조해야 할 점입니다만─그 자체가 항상 사고, 즉 무의식과 
언어(빠롤)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도록 미지의 외국어로부터 문자를 차용했다고 
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을 위해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는 국제적인 
언어들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꼭 그렇지 않은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일본어를 말하는 사람에게는 거짓을 매개로 하지 않고, 
즉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으면서 진실을 말하는 일이란 일상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음독이 훈독의 주석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일본어의 음성은 곧바로 한자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음성과는 
별도로, 그것을 한자로 표시하여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깡이 그 사실로부터 
일본인은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이유는, 아마도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상형문자’로 파악한 데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신분석의 요점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데 있거니와, 그것은 바로 음성언어화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에서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어는 이를테면 ‘상형문자’가 그대로 의식상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점에서 
‘무의식과 빠롤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에게는 ‘억압’이 
없다고 하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의식(상형문자)을 항상 
노출시키고─진실을 말하고─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라깡은 
사실 일본인을 설명하는 일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가 일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 일본이 자신들의 에크리뛰르 속에 정신분석의 한계점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분석가에게 의존하려 하지 않는 
분열병환자(프로이트는 나르씨시즘 신경증이라고 부른다)에게서 정신분석 치료의 
한계점을 본 것과 같다. 그 결과 라깡이 제기한 것은 억압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배제(foreclosure)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원(原)억압의 배제, 다시 말하면 상징적 
거세의 배제이다. 거세는 억압에 의해 주체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신경증적인 
것이 그 주체에 따라붙는다. 한편 거세의 배제는 주체를 충분히 구성하지 않고 
정신증(분열병)적인 것을 초래한다.註9)한국과 일본의 차이라고 내가 말한 것은 
이와같은 문자의 문제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자를 
받아들일 때 ‘거세’가 생겨난 것이다. 그 사실은 현대에 한자를 폐지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한자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일이 바로 강한 
‘억압’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그러한 현상은 선진적인 문명국가에 
접했을 때 그 주변 민족들에게 일어난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 점에서는 한국인은 
일본인보다는 서양인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수수께끼’를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라깡이 말하는 거세란 상징계, 즉 언어적 세계(문화)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그 세계에 들어가면서도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 방법이 
훈독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그러한 거세의 배제가 있었다. 아마도 동아시아 공통의 
기반 속에서 특별히 ‘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이 점뿐일 것이다. 
많은 일본인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적하는 것은, 일본에 확고한 주체가 
없고 원리적인 중심이 없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신경증적은 아니지만 
분열증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라깡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일본에서는) 주체는 다른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어에 의해 
분할되어 있지만, 한쪽은 에크리뛰르(한자)의 참조에 의해 충족되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빠롤 그 자체에 의해 충족되고 있다. 이 점이 아마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로 하여금 그 모든 행동에서 일본인의 주체는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한 저 도취적인 감각을 부여한 것이다. ‘기호(signe)의 제국’이라고 그는 
자신의 에쎄이에 제목을 붙였지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표면(semblant)의 
제국’이다.註10)

 거듭 말하지만 ‘일본인의 주체는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물론 
과장이다. 근대국가와 산업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종류의 ‘억압’은 어떤 
나라에서라도 일어난다. 근대 일본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근대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를 단순히 근대적ㆍ전근대적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포스트모던한 것으로까지 보인다.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그 수수께끼에 주목해온 것은 
근거가 있다. 만약 그 점에 보편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것일까. 
 나는 여기서 ‘억압’이 초래하는 오이디푸스적 권력과는 다른, 말하자면 
‘배제’가 초래하는 권력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이미 말한 것처럼, 푸꼬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관념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억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선 ‘억압’이라는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푸꼬는 생각한다. 또한 들뢰즈(G. 
Deleuze)와 가따리(F. Guattari)는 정신분석의 신경증적 또는 편집증적 틀을 
탈구축함으로써 분열병적인 것에서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것들은 오히려 
‘억압’이 뿌리깊이 존재하는 문화 내부의 문제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천황제의 구조’라 부른 권력구조에서는 중심이라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의 중심은 없다. 거꾸로 말하면 
‘무(無)의 장소’가 권력의 중심이다. 또한 거기에서는 ‘생산의 기관, 가족, 
국한된 집단, 제반 제도 속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권력의 관계’(푸꼬)가 억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전전(戰前)의 일본 파시즘을 보면 그것은 
명백하다. 예를 들면 1940년에 완성된 ‘요꾸산(翼贊)체제’ 또는 
‘총동원체제’에서조차도 아무런 중심도 일원적인 집합점도 없었다. 따라서 
푸꼬의 이론으로 마루야마가 일본에 대해 말한 것을 비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또 
라깡이나 바르뜨가 일본에 대해 말한 것을 ‘배제’가 초래한 권력구조를 보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일은 어리석다. 
 예를 들면 라깡이나 푸꼬가 일본인에 대해 말한 ‘진실을 말한다’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는다’는 것은 권력구조에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가. 18세기 후반에 
모또오리 노리나가는 다음과 같이 ‘카라고꼬로(漢意)’를 비판했다. 

 사람들이 영악한 말을 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일에 대해 세상의 똑똑한 척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도오까(道歌) 같은 속요를 읊으면서 자기 혼자 다 깨달았다는 
듯이 곧잘 말하는 법이다. 또는 내 몸은 걱정없다면서 자신이 정신적 깨달음에 
의해 평안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경위를 말하는 일은 전부 유교나 불교에 아부하는 
위선이다. 실은 자신이 평온한 상태에 있다고 말하면서 만족하는 사람이란 없는 
법이다. 예를 들면 수명이 70세에 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어서 70세까지 살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할 터인데, 그것도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만 탄식하며 90세까지고 100세까지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註11) 

 죽음이란 단순히 슬픈 일일 따름이라고 노리나가는 말한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모든 종교가 허위이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사상을 작위ㆍ위선으로 간주함으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권력의 부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저항까지도 그렇게 간주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반권력의 위선〔漢意〕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오히려 현재의 권력을 그 권력이 자신의 비순수성과 모순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긍정하는 것이다. 노리나가가 유학자를 공격하고 
‘이니시에노미찌(古道)’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현황(토꾸가와체제)을 변화시키는 
것을 부정했듯이. 
 이처럼 ‘억압의 부재’가 억압에 저항하는 자를 억압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구조를 괄호로 묶어두고 철학적으로 ‘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예를 들면 니시다 키따로오(西田幾太郞, 1870~1945)는 ‘무의 장소’라는 개념을 
정치적인 의미 부여에 이용했다. ‘일본 역사 속에서 황실은 어디까지나 무의 
유였다, 모순적인 자기동일체였다.’ 즉 황실은 정치적 권력이 아니기 때문에 
교체되는 정치권력의 배후에 ‘무의 유’로서 계속 존재하는 것이며, 
메이지헌법에는 절대주의적 군주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서양이나 중국의 군주와는 
다른 ‘무의 유’이며 대동아공영권에서도 지배권력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율적인 아시아국가(모나드)를 통합하는 제로기호로서 존재한다고 니시다는 
말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론은 일본의 바깥에서는 전혀 기능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니시다를 권위화하려는 사람들은 니시다를 비역사화ㆍ비정치화시켜 그의 
철학을 ‘동양의 철학’이라고 서양을 향해 선전하고 있다. 분명히 억압의 씨스템 
속에서 ‘억압의 부재’를 동경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그러한 평가는 ‘억압의 
부재’가 초래하는 권력구조 내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무의미하며 보편적이지도 
않다. 일본이 천황제의 구조를 보존하는 한 전지구적 환경에서 일본이 존재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전후에 사까구찌 안고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지금까지도 신선하다. 

 일본국민 제군, 나는 제군에게 일본인 및 일본 자신의 타락을 부르짖는다. 일본 
및 일본인은 타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부르짖는다. 천황제가 존속하고 이러한 
역사적으로 왜곡된 구조가 일본의 관념에 뒤엉켜 남아 있는 한 일본에서 인성의 
올바른 개화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올바른 빛의 길은 영원히 차단되었고, 
진정한 인간적 행복, 인간적 고뇌, 인간의 모든 진실된 모습은 일본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註12) 

  
 〔朴裕河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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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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