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27일 금요일 오전 12시 16분 08초 제 목(Title): 윈/이순신 역사인물탐구 / 이순신 제 43호 1998.12.01 IMF 경제전쟁시대 왜 이순신인가 갖은 역경에도 23전 23승 지용희 서강대 경영대 교수 이순신의 청렴결백과 겸허한 마음가짐. 그리고 유비무환의 자세. 솔선수범과 인간애에 바탕을 둔 리더십, 용기와 결단, 거북선 개발과 같은 창의성, 철저한 기록정신, 뛰어난 정보활용능력과 전략 등은 오늘날 경제전쟁에 꼭 필요한 요소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한 일본인들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해군을 강화하기 위해 이순신의 업적과 전략을 깊이 연구했으며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러시아 발틱함대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항준비를 하던 일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함대의 한 함장은 이순신 장군의 영혼에 기원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대표적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遠太郞)는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저서에서 일본 해군소장 가와다 이사오(川田功)가 쓴 “포탄을 뚫고”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가와다가 세계 제일의 해장이라고 말한 이순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군대가 조선에 침입했을 때 해전에서 이들을 멋지게 무찌른 조선의 명장이다. 이순신은 당시 조선의 문무 관리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너무도 청렴한 인물이었고, 군사 통제와 전술능력, 충성심과 용기가 실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바다의 명장이라 하면 이순신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서는 그후 잊혀져버렸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메이지 시기 해군이 창설됐을 때 그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했다. 진해만으로부터 부산진에 걸친 수역은 이순신이 그 수군을 이끌고 일본 수군을 괴롭혔던 옛 전장인데 우연이지만 도고 함대는 그 근처에서 기원했다. …그들이 옛날 동아시아가 낳은 유일한 바다의 명장인 이순신의 영혼에 승리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렸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순신 연구 방향성 잃은 측면도 지적해야 러·일전쟁 때 러시아 수군을 무찌른 일본의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본의 영웅이 됐다. 그는 자신이 영국의 유명한 해군제독 넬슨에 버금가는 군신(軍神)이라는 말을 듣고 “영국의 넬슨은 그 정도의 인물이 못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 한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도고 함대는 일본 정부가 외국에서 빚을 끌어다 전함을 사들이고 해군을 적극 육성하여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다. 이에 비해 이순신은 수군 폐지론이 두번씩이나 거론되고 조정에 불려가 감옥에 갇히는 등 갖은 역경 속에서 아주 빈약한 전력으로 세계 해전사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23전 23승의 위대한 승리를 이룩했다. 이순신에게 참패당한 일본 사람들은 이순신을 연구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해전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를 병합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순신의 업적과 전략을 깊이 연구하거나 본받지 못해 임진왜란이 끝난 지 38년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에 크게 시달리고 한일합방으로 결국 나라까지 일본에 빼앗겼다. 이순신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부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거북선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연구 및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분석 등을 시도했다. 또한 이순신 전기를 저술해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노력해왔다. 그 가운데 과거 군사정권이 자신의 필요성 때문에 이용한 면도 없지 않아 이순신 연구가 오히려 바람직한 방향성을 잃어버렸던 측면도 지적됐다. 그러나 역사를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를 투시하는 거울이라고 한다면, 그 지울 수 없는 역사 속에 여전히 빛나는 이순신을 통해 우리는 분명 우리의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향해 나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 해군 등 군대에서는 물론 정부와 기업·학계 등 각계에서 이순신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필자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경영전략을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이순신에 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의 유별난 청렴결백뿐만 아니라 겸허한 마음가짐에 따른 유비무환의 자세, 솔선수범과 인간애에 바탕을 둔 리더십, 용기와 결단, 거북선 개발과 같은 창의성, 철저한 기록정신, 뛰어난 정보활용 능력과 전략 등은 오늘날 우리가 경제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경제전쟁에서 지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는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됐던 동·서냉전의 결과로도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무기를 가지고 소련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력에서 낙후한 소련은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소련은 경제전쟁에서 패배해 그 존재가 없어지게 된 셈이다. 무기로 싸우는 전투에서 패한 나라는 패배의 수치를 국민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치단결, 국가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과 독일이 짧은 기간에 미국·영국·프랑스 등 승전국들을 압도할 정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세계적인 강국으로 다시 부상한 것이 좋은 예다. 이에 반해 경제전쟁은 서서히 진행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국민들은 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뼈저리게 느끼지 못한다. 때문에 국민적 자각이나 분개심도 적어 상황을 역전시키기가 더욱 어렵다. 마치 만성병이 급성병보다 치료하기 어려운 이치와 같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혹독한 경제전쟁에서 패하여 초라한 처지가 됐다. 국제경쟁력이 취약해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막대한 외채에 허덕이다 급기야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 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자가 급증하고 있다. 경제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경제에 관한 한 국경의 테두리가 점점 희미해질 것이며,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국가간 존재했던 각종 규제와 장벽이 제거되고 있으며 서로간 차별없는 경쟁이 허용되는 무한경쟁체제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우리는 무적함대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자동차, 전자회사 등 세계적인 기업과도 본격적인 경제전쟁을 국내외에서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냉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에 대비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자세와 전략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면에서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백전백승한 이순신의 정신과 전략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것이다. ▲ 1998.12월호 역사인물탐구 / 이순신 제 43호 1998.12.01 경영자 정신과 리더십 경쟁력 핵심은 정신과 전략 지용희 서강대 경영대 교수 충무공이 보유한 신뢰재야말로 지도력의 원천이며, 국제경쟁력 강화에도 꼭 필요한 재산이다. 신뢰가 없는 국가는 기회주의가 팽배하여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수 없다. 따라서 거래비용이론에서는 신뢰를 중요한 재산으로 여긴다. 치열한 경제전쟁에서 기업의 경쟁력 강화는 필수다. 따라서 기업의 운영을 책임진 기업가나 경영자들은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고 올바른 경쟁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4백여년 전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비결은 정신과 전략이었다. 오늘날 경제전쟁에서 이순신을 연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며 철저하게 준비 이순신이 전승한 원인 중 하나는 겸손한 마음가짐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승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라를 욕되게 했다. 오직 한번 죽는 일만 남았다”(辱國之夫, 只欠一死) 고 자주 되뇌었음을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陣璘)은 전한다. 아마도 육지의 적까지 완전히 소탕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고 더 철저한 대비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에 반해 오만방자함으로 일본 침략에 대비를 소홀히 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갔다 온 김성일(金誠一)은 “도요토미의 눈은 쥐와 같고 외모로 보나 언행으로 보나 하잘 것 없는 위인이니 족히 두려울 것이 없다”며 일본인들을 무시하는 듯한 말로 조정에 보고했다. 또한 임진왜란이 터지자 제대로 싸움도 하지 않고 도망만 다니던 육군장수 이일(李鎰)도 전쟁 전에는 일본을 무찌를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이렇게 일본을 깔보았으니 전쟁에 제대로 대비할 리 있었겠는가. 자만심이야말로 모든 전쟁에서 백전백패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자만심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겨 교만하게 된 마음상태를 의미하므로 자만심에 빠진 사람은 어떠한 것이 문제인가를 파악하기는커녕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세계제일의 기업도 그 경영자나 종업원들이 자만심에 빠지게 되면 곧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미국의 세계적 자동차회사인 GM의 경영자들은 자만심에 꽉 차 일본 자동차의 경쟁가능성과 경쟁력을 과소평가했다. 일본 자동차들이 미국에 진출한 초기 이들은 일본 자동차를 마치 장난감 같다고 비웃기까지 했다. 이러한 오만 때문에 일본 자동차의 미국 진출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여 GM은 큰 손실을 보게 됐으며, 이에 따라 많은 공장을 폐쇄하고 종업원을 대규모로 해고하는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IBM이 가는 곳에 컴퓨터산업이 있다”는 말이 있었듯 세계 컴퓨터산업을 선도하던 IBM도 자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GM·IBM과 같은 회사의 경영자들이 자만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너무나 오랫동안 세계에서 1등을 계속하다 보니 인간의 심리상 자만심이 자연히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초일류 기업과는 거리가 먼 우리기업들의 경영자나 종업원들이 자만하거나 오만해진다면 어떻게 우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IMF 구제금융 이전 우리는 지나치게 자만한 측면이 적지않았다. 필자는 자신의 기업과 개인의 능력을 세계 제일인 양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느 세미나에서 자신의 기업의 기술과 경영방법을 배우기 위해 외국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고 떠벌리는 경영자도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후진국 사람들이 우리의 기술이나 경영방법을 배우러 온 것이었다.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해 이순신의 겸허한 자세를 마음속 깊이 새기자. 이순신은 악조건에서도 이를 탓하기는커녕 모든 힘을 다하여 불리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정신과 자세야말로 경제전쟁의 승리에 필수적인 기업가정신의 핵심이라 하겠다. 이순신을 모함하여 대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된 원균(元均)은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참패, 우리나라 수군은 괴멸됐다. 이에 크게 당황한 조정에서는 권율(權慄)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해 일본 수군과 싸우도록 명했다. 병사·배·무기·군량미 없이 홀몸으로 막강한 일본 수군과 싸우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이순신 같이 외롭고 딱한 처지의 장수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자만하던 GM, 일본 자동차에 추격당해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불쌍한 백성과 나라를 구한다는 일편단심으로 분연히 떨쳐일어났다. 조정에서는 12척의 배로는 도저히 막강한 일본 수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 선조는 이순신을 육군장수로 임명하고 수군을 없애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므로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적 수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적고 미미한 신하에 불과하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얕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결국 유명한 명량대첩에서 12척의 배로 남해안을 돌아 서해안으로 침공하려는 2백척의 일본 대함대를 격파했다. 이순신의 명량대첩에서 우리는 기업가정신의 진수(眞髓)를 볼 수 있다. 12척의 전선으로는 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장수들도 도망가고 임금마저 전투를 포기하라고 명령할 정도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아직 12척이 있다”고 오히려 임금을 설득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게 바로 기업가의 자세다. 기업가정신은 인재·기술·자금이 부족하고 주위의 도움이 없더라도 단호한 마음가짐으로 신제품 개발, 품질개선, 원가절감 등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혁신을 주도하는 솔선수범의 정신이다.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은 기업가정신은 산업사회의 기사도정신과 같다고 했지 않은가. 일본 기업들의 강점 중 하나는 기업가들이 무사정신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킨 이순신처럼 중소기업도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하고 적절한 전략을 구사한다면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없는 것만 무조건 탓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시설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그리고 배경이 없어서 무엇을 못한다고 야단이다. 이러한 자세로는 원가절감, 품질개선, 신제품 개발 등을 위한 혁신을 추진할 수 없으므로 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될 수 없으며, 혹독한 경제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지식경제시대에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이순신의 철저한 기록정신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무인이었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귀중한 “난중일기”를 남겼다. 또 조정에 올린 장계에도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보고했고, 이 자료들은 “임진장초”로 남아 있다. 때문에 우리는 4백년이 지난 지금도 임진왜란이 어떠했으며 이순신이 어떻게 싸우고 이겼는지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기록정신과 지적재산은 상승효과 기록은 일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의 일을 꾸준히 기록함으로써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지표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록을 소홀히 해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 우리는 고려자기를 세계에 자랑하지만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지금도 고려자기를 똑같이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고려자기 기술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인데 국가적 수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기술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기술자가 없어지면 똑같은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10년이나 20년 전의 제품도 제조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어 다시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10년 전 기술도 알지 못하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미래의 기술이 나올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에 많은 후진국들이 우리가 과거에 활용했던 기술을 구매하기를 원하지만 기록이 없어 이를 판매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화학과 교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실험을 몇백년 전에 독일에서 실시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그때의 자세한 실험결과를 사본 적이 있다면서 그들의 철저한 기록정신에 놀랐다고 한다. 지식은 꾸준한 기록에 의해 축적되며 또한 널리 활용할 수 있다. 종업원 개개인이 가진 지식을 기록해 모으면 회사의 자산이 된다. 미국 기업들은 제조·판매 등 많은 업무처리 방법을 자세히 기록한 지침서를 만들어 실제업무뿐만 아니라 종업원 교육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더 나은 업무방법을 개발하면 이러한 지침서를 계속 개선해 나감으로써 업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있다. 우리도 변해야 한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의 힘을 결집해야 한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살펴보자. 경상우수사 배설과 같이 명량해전 직전에 도망간 장수도 있었지만 피난민이나 패잔병까지 이순신과 함께 싸우려 모여들었고 또 일치단결해 용감하게 싸웠다. 이순신 밑에서는 패잔병도 용사가 됐다. 사실 이순신은 신뢰라는 재화를 많이 가졌다는 면에서 정말 부자였다. 이순신에 대한 신뢰는 깨끗한 몸가짐에서 비롯됐다. 이순신은 출장 후 지급받은 쌀이 남으면 반납할 정도였다. 그의 거처에는 책과 옷·이불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 때문에 병사들이 그를 신뢰해 마지않았다. 그가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 재직시 상관인 병조정랑(兵曹正郞) 서익(徐益)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무리하게 승진시키려고 하자 이를 강력하게 반대해 저지시켰다. 이순신은 “아래 있는 자를 건너뛰어 올리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되므로 공평하지 못하오”라며 서익의 우격다짐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런 성품 탓에 이순신은 윗사람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부하들은 이순신을 진심으로 신뢰했다. 이순신은 나중에 장수로서 품위가 없다고 모함받을 정도로 부하들과 한마음으로 같이 먹고 일했다. 정읍현감 때는 정사를 돌봄은 물론 전쟁 중에 피난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백성들이 모여들자 이들을 성심성의껏 보살펴주었다. “난중일기”에는 어떤 사람이 몹시 궁색한 말을 많이 하기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하루종일 같이 이야기했다는 구절도 있다. 이순신의 따뜻한 보살핌과 인간애 때문에 백성들은 이순신을 크게 신뢰했다. 이항복(李恒福)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순신의 인생관을 보여준다. “장부로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 최선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다.” 이순신이 가진 신뢰재야말로 지도력의 원천이며, 국제경쟁력 강화에도 꼭 필요한 재산이다. 신뢰가 없는 국가는 기회주의가 팽배하여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수 없다. 따라서 거래비용이론에서는 신뢰를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본 수군을 격파한 이순신의 절묘한 전략은 지금의 경제전쟁에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군사전략이든 경영전략이든 모든 전략의 기본은 같으며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 서양의 현대 군사전략가들은 2천년 전에 쓰여진 “손자병법”(孫子兵法)이야말로 영원한 새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극찬한다. 이순신은 경제전쟁의 승리를 위한 백전백승의 전략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기의 강점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집중공략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장·단점과 상대방의 강점, 약점 등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상대방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강조함으로써 정보의 수집은 물론 수집한 정보의 객관적인 평가를 중시하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의 기본에 충실했다. 그는 물리적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과 조류를 철저히 파악했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고지휘관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현장답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수군 중에는 어부들이 많았고, 이들은 자기들의 생업터인 남해안의 지형과 조류의 미세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비록 지위가 낮았지만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작전 수립에 활용했다. 이순신은 적에 관한 정보도 다양하게 수집했다. 정보원과 정탐선을 파견해 적들의 규모와 이동상황 등을 파악했다. 예를 들면 임진란이 터지기 전 이순신은 동해쪽에서 계속 많은 양의 나무조각들이 흘러들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곧 왜가 쳐들어오리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민심을 흉흉케 하는 낭설이라 하여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무조각은 왜가 조선을 침공할 병선을 대량 건조하고 있다는 증거로 생각하고 왜의 침입이 멀지 않았음을 판단, 조용히 장래를 대비했던 것이다. 최근 환경이 급변하고 기업간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새로운 경영기법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영기법들에 지나치게 휩쓸려 경영의 기본원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경영의 기본원리에는 충실하지 않으면서 유행처럼 바뀌는 경영기법을 뒤쫓는 것은 모래 위에 겉만 화려한 누각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면에서 경영의 기본전략에 충실한 것이 역설적인 것 같지만 가장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 1998.12월호 ▶▶ 역사인물탐구 / 이순신 제 43호 1998.12.01 경영자 정신과 리더십 경쟁력 핵심은 정신과 전략 최두환 해군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 '아직 끝나지 않은 임진왜란'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한일합방이 발생하기 20여년 전부터 일본인들은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을 제2의 임진왜란으로 성격규정한 결과라고 판단된다. 1892년 일본의 육군 보병대위 柴山尙則은 “文祿征韓水師始末 朝鮮李舜臣傳”을, 이듬해에는 松本愛重이 “豊太閣征韓秘錄”을 야심차게 펴냈다. 그들은 임진왜란의 실패 원인을 조선 수군에 돌렸고 수군 지휘자인 이순신을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임진왜란의 쓰라린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한국을 삼키려고 지식을 축적해갔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吉)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보다 큰 꿈을 실현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1795년(정조)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됐고, 1967년(박정희 대통령) 아산 현충사 성역화사업이 이뤄졌다. 물론 1908년 단재 신채호나, 31년 춘원 이광수는 반일사상이나 민족의 우월성 고취를 목적으로 이순신을 연구했다가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고, 70년대 노산 이은상이나, 80년대에 구해 조성도의 연구도 계승되지 않고 그들의 운명과 함께 거의 사라져버렸다. 반면 일본은 줄기차게 이순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방향은 계속 이순신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부각시키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을 일본국민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일본 국민의 우수성을 과시함으로써 세계제패의 꿈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일본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물러 전쟁을 지휘했던 나고야성(名古屋城)을 복원했다. 일본인들의 이순신 연구방향을 통해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대한 성격을 교정해야 할 듯싶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인적으로 무모하게 조선을 정벌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가 사용한 ‘조선정벌’이라는 용어는 국가 차원의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개인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일본의 이순신 연구목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본의 최고 작가 小田實(1932∼)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民岩太閤記”에서 “대체로 침략이란 ‘방위’나 ‘국방’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진다. … 그런데 한번 왜곡은 영원한 왜곡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은 어디까지나 ‘출병’이고, ‘분로쿠(文祿)의 역(役)’이었지 ‘침략’은 아니었다. 이렇게 보는 정신구조는 더 먼 과거에도 마찬가지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임진왜란·이순신·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서는 매년 간행되고 있다. 石原道博· 內藤鐫輔· 岡野昌子· 吉岡新一· 高橋盛孝· 德問康快· 矢澤康祐· 嶋岡晨· 佐藤和夫· 藤居信雄· 貫井正之· 片野次雄· 北島卍次 등등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나, 학회―朝鮮學報· 朝鮮史硏究會· 史學雜誌· 學硏 등을 통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이순신 전문가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 전문가가 더 많듯이…. 일본인들은 10년 전부터 조선을 정탐하여 빈틈없이 준비했다는 임진왜란 이후, 줄곧 큰 일을 치를 때마다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내세웠다. 한일합방이 있기 20년 전부터, 태평양전쟁이 있기 30년 전에도 대대적으로, 최근 30년 동안에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30년 뒤에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그래서 우리는 이순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제3의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충무공 사망의 진실 충무공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1570∼1620년)이다. 그는 노량 충렬사에 써붙인 시(題露梁忠烈祠)에서 “공로가 커도 상 못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을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 만고에 그 영혼 어디 계신고.”(“충무공전서”권2) 이런 의문을 더 절실하게 주장한 사람은 숙종 때 판부사(判府事) 이이명(1658∼1722년)이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방비해서 왜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고 마침내 몸을 버리기까지 했던가. 세상 사람들은 공(이순신)이 성한 뒤에는 몸이 위태로울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화살과 탄환을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오래 전부터 충무공의 전사(戰死)에 관한 의문은 제기돼 왔다. 첫째 충무공이 과연 전사했는가 하는 점. 둘째는 해전을 하는 사람이 갑옷을 벗고(免胄) 싸울 수 있느냐는 문제. 셋째는 전사한지 16년(장사 지낸지 15년)만에 묘를 이유없이 이장했다는 점이다. 세번째 의문은 이순신이 은둔해 있다가 실제 죽었을 때 묘를 다시 썼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과연 충무공 죽음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필자는 결론적으로 충무공은 전사했다고 본다. 충무공은 노량에서 시작, 관음포까지 해전을 하면서 1598년 11월 19일 10시께 적탄에 맞았다. 그때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꺼내지 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최후로 남겼다. 마지막 전투에 관한 조카 이분(李芬·맏형 희신의 셋째아들)의 기록을 보자. “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몸종 금이(金伊)와 회· 완(莞) 등 세 사람만이 알았으며, 믿던 부하 송희립(宋希立) 등도 알지 못했다.” 조·명 연합군으로 함께 싸웠던 명나라의 진린(陳璘) 제독은 충무공의 전사소식을 곧바로 알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힘써 싸워 이긴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진린이 충무공의 배 가까이 갔다가 충무공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놀라며 세번이나 넘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도 진린이 직접 충무공의 시신을 확인했다는 내용은 없지만, 그 해전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명나라 군사들까지 소고기를 먹지 않고 슬퍼했다. 또 진린이 세번이나 넘어지는 충격을 받는 인간관계라면 아마 그 시신을 안고 통곡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진린을 사지(死地)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린은 시신을 눈으로 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린은 지휘권 문제 때문에 조선 조정에 의견을 물었고, 조정은 이시언(李時言)으로 바꾸어 통제사로 삼았다. 진린은 이듬해 정월 보름 충무공을 애도하는 제사까지 지냈다. 충무공이 갑옷을 벗고 있었다는 부분은 확인할 수 없다. 단지 갑옷을 착용했다 해도 조총이 관통했다면 지근거리였다고 보인다. 충무공의 건강상태는 무척 안좋은 중환자에 가까웠고, 또 시력도 좋지 않았으므로 가까운 적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밖에 교전중이라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한다. 잠시 이순신의 건강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이순신은 몸이 아파 안절부절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일기를 기록한 날을 기준으로 임란 동안 1백41일(일기 총 분량의 8.85%)이나 ‘아팠다’는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은 온백원을 상비약으로 복용했다. 이로 볼 때 평소 위장이 나빠 급성 위장병 증세를 보이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는 명량해전 25일 전 인사불성이 됐을 뿐 아니라 열번이나 토하기도 했다. 중환자의 상태에서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약 50∼100m에서 날아온 탄환이 옆구리를 관통해 유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1998.12월호 역사인물탐구 / 이순신 제 43호 1998.12.01 백전백승의 전략 萬全之計로 전진· 후퇴 적절히 구사 박선식 민족병학문화연구가 어린 시절 동네아이들과 벌였던 군진놀이는 전략에 대한 감을 터득하게 했다. 전란에 대비한 중점사항은 날마다 전투장비 추스르기와 거듭 군사 조련하기. 전투에 임했을 때는 적세 탐문, 항시 출동상태 유지, 유인전술, 선제공격전술 등을 철저히 구사, 백전백승을 거뒀다. 흔히 이순신을 구국의 명장이라거나, 좀더 높일 경우 ‘성웅’이라고 일컬어왔다. 도대체 이순신이 그같이 지고한 존재로까지 된 바탕은 무엇일까. 이순신의 삶을 헤아리다 보면 어렴풋이 그에게 완벽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이순신을 막연히 마치 신처럼 높이 올려다보는 자세는 이제 경계해야 한다. 한 역사인물인 이순신을 더욱 멀게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성장기를 순차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나름대로 이순신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이순신은 유·소년 시절 유난스러울 만큼 ‘습진(習陣)장난’을 했다고 한다. 습진장난이란 당시 군사들의 군진(軍陣)을 흉내내는 놀이다. 군진은 전쟁을 치르기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말한다. 때문에 군진에는 엄격한 규칙, 즉 군율이 있다. 이러한 특성이 어린 이순신의 정신세계 구축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순신에 관한 “이충무공전서”의 다음 기록은 그의 가치관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호방하고 영특한 기백은 어릴 적부터 나타났다. …가슴에 병법을 지녔음은 아이 때의 ‘싸움하는 군진(戰陣)놀음’에서 나왔다. …여러 아이들과 장난할 때도 싸움하는 군진을 펼쳤다. 그때마다 공(公·이순신)을 받들어 장수를 삼았다. 그의 ‘이끌고 부리며 얽어짜는 절차’(指顧造次)가 아주 볼 만했다.” 이상의 글을 보면 우선 이순신의 비범함이 ‘싸움하는 군진놀음’과 결부돼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비범하다 함은 바로 문무 겸비를 뜻하고, 무략의 기본요소는 놀이에서 익혔다는 것이다. 또 어린 이순신이 ‘싸움하는 군진놀음’을 통해 ‘이끌고 부리며 얽어짜는 절차’를 깨달았다는 점이다. 좀더 자세히 재해석해보자. 어떤 무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변별력이 전제돼야 한다. 무리를 터무니없는 곳으로 인도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력도 전제돼야 한다. 한 사람이 많은 이들을 무턱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무엇인가 얽어짠다 함은 창조력이 전제돼야 한다. 숱한 것 가운데 시급을 요하거나 꼭 필요한 것을 먼저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習陣장난 통해 위기대처방식 깨우쳐 결국 ‘이끌고 부리며 얽어짜는 절차’는 가장 합리적인 조건에서 가능한 일이다. 달리 말해 최적을 지향하는 조건이다. 이순신은 바로 이같은 최적화 지향의 성격을 싸움하는 군진놀이를 통해 익혔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이 어린 시절 했던 습진장난은 초보적이나마 위기에 대처해 극복하는 방식을 깨우치게 했던 것이다. 더불어 어린 이순신은 비록 가짜 군진일망정 위난의 시공간에서 구현해야 할 엄격한 준법의식까지 자연스레 존중하는 성격을 지니게 됐으리라 여겨진다. 최적화를 추구하는 이순신의 성격은 곧바로 늘 만전을 기하는 사상이 됐다. 이순신은 이후 무관의 길에 들어 곧잘 ‘만전지계’(萬全之計)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순신의 만전지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만전을 기하는 성향을 통해 볼 때 이순신은 무원칙한 행위를 싫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관 초기 이순신은 북변지역에서 몇차례의 전투를 경험했다. 그 가운데 녹둔도전투의 전말을 보자. 이순신의 만전지계는 오히려 전투에서 더욱 구체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은 조산보 만호(萬戶·종4품 무관직) 겸 녹둔도 둔전관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원적인 담당업무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우선 당면문제점을 분석했다. 경계 책임지역을 둘러본 이순신은 배정된 병력으로 두곳을 무난히 방비하기 어렵다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바로 상관인 이일(李鎰)에게 경비강화 방책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일은 적은 병력을 가지고 그대로 임무를 수행하라고 하며 이순신의 계책을 묵살했다. 이순신은 거듭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했으나 이일의 무책임하고 소극적인 답변이 거듭될 뿐이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자신이 주장한 계책의 내용과 그간의 사안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주어진 여건을 토대로 여진족의 남하를 예의주시했다. 마침내 여진족이 대거 밀어닥쳤다. 이순신은 수적인 열세를 다소 덜기 위해 우선 군사들을 높은 곳으로 이동시킨 뒤 낮은 곳의 적을 바라보며 적의 접근을 견제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 퇴로를 헤아려 미리 총통화기를 배치했다. 이윽고 여진족들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순신은 예상되는 퇴로에 복병하여 그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차를 밟아 적을 격퇴한 셈이다. 이순신은 그같은 자신의 작전순차를 이후에 ‘응기결책’(應機決策)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시기에 맞게 방책을 짜 위기를 벗어남을 뜻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합리적 전투를 치르고도 상관인 이일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이일은 다짜고짜 많은 적에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린 점만을 물고늘어질 기세였다. 상황이 험악해지자 이순신은 자신이 그간 제기했던 적극적 방어책을 거론했고, 그에 관한 기록을 보관중임을 넌지시 밝혔다. 이순신의 태도는 오히려 당차고 다부졌다. 도무지 기세가 꺾이지 않는 그의 태도로 보아, 이일은 자신의 소극적이고 부실했던 지휘책임에 뒤탈을 입을 것 같았다. 때문에 이일은 조정에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킬 것을 신청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순신의 녹둔도전투에 따른 1차 백의종군 일화에서 이순신의 세심하고 철저한 단계적 관리 성향을 읽을 수 있다. 이후 이순신은 몇차례의 진급과 강등을 거듭하다 남부 연안의 수군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그같은 시기에 일본의 침략 조짐은 짙어졌고 이순신은 자신의 만전지계를 전란 준비에 고스란히 활용했다. 이순신의 전란 대비 과정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날마다 전투장비 추스르기’(日修戰具)와 ‘거듭 군사 조련하기’(撫循士卒)다. 이순신은 이 과정에서 관련 병학지식의 수집에 성실했다. 특히 유년시절의 벗이었던 류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전술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에 관한 난중일기의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 무렵 이순신은 종래의 온갖 전비에 관한 지식을 총동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태종대에 있었던 귀선의 재개발을 추진한 점은 이순신의 적극적인 일처리의 단면을 드러내준다. 당시로서는 귀찮은 일일 수도 있었지만, 이순신은 투철한 국방의식으로 강력한 신규 군선의 건조사업을 추진한 셈이다. 평시와 전시상황에 맞는 관리기법 적용 다음으로 청렴한 관료의 길에 충직했다. 둔전의 관리나 노획물의 처리에 일말의 부정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 자애로운 아버지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심지어 조카들까지 거두어 양육하던 이순신은 친자식과 차별없는 애정으로 일관했다. 모든 휘하 장졸들에게는 확실한 지휘관이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만전을 다하는 심경으로 실로 1인5역에 충직했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의 최적화 지향성은 이후 발생한 임진왜란기의 전장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평시와 전시의 상황에 맞는 관리기법을 적용했다. 이순신은 평상시 적의 침입에 대한 경계와 비상을 대처한 군진내 관리를 강조했다. 그리하여 늘 적세탐문(賊勢探問)과 정리주즙(整理舟楫)을 강조했다. 적세탐문이란 적의 징후를 주시, 정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정리주즙이란 아군의 전투역량이 되는 군선 등의 전투장비를 항상 곧바로 출동시킬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바탕해 그는 원척후엄경위(遠斥候嚴警衛)라 하여 멀리는 반드시 척후를 보내며 가까이는 엄한 경계를 편다는 수칙을 휘하 장졸들에게 무겁게 요구했다. 이순신은 다시 전투의 경우에 맞는 만전지계를 꾀했다. 먼저 행선의 조건을 까다롭게 했다. 나갈 만한지 확인하고야 전진하며(見可而進), 지키기 어려울 때는 과감히 물러나(持難而退) 다음 계책을 도모하려 했다. 그리고 항행하는 경우 좁은 협수로를 통과할 때는 물고기가 꿰미에 꿰인 듯 일렬로 나가게(魚貫齊進) 하고, 비교적 넓은 물길일 때는 학의 날개처럼 펼치게(鶴翼列陣) 하여 적들을 유도, 기만하여 쳐부수고자 했다. 이를테면 당항포해전 때 어관제진의 모양을 갖춰 작전을 펼친 점을 알 수 있다. 또 한산도해전의 경우는 적이 좁은 견내량에 숨어 있었으므로 넓은 바다로 이끌어내 공격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한산도해전을 치를 당시 이순신은 자신의 완벽에 가까운 작전방략을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에 따른 결과라고 기록했다. 거짓으로 적 선단에 패하는 척 끌어낸 뒤 완벽한 봉쇄의 진형을 펼쳐 적 선단의 수륙병진 전략을 일거에 분쇄한 것을 말한다.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한산도해전의 결과 모두 66척에 이르는 적선을 격파했다. 죽어간 적병은 줄잡아 9천여명. 이어 안골포해전에서 59척의 배를 불태운 뒤 다시 20여척의 군선을 격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적들이 웅거하던 부산포를 향한 공격작전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본거지인 부산포를 치기 위해 이순신은 철저한 단계적 군진관리를 폈다. 만만치 않은 적의 군세에 맞서기 위해 합당한 전비 확보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부족한 군선의 수를 늘리고, 총통화기의 양적 증가를 꾀했다. 특히 일본 수군의 전투력은 조선 수군의 중화기에 상대적 열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점을 알고 있던 이순신은 무엇보다 강력한 중형화기를 증가시켜 화력전으로 적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어느 때보다 강화된 전비와 그에 따른 전투력의 확보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겨우 40일에 걸쳐 이룩한 놀라운 변화였다. 마침내 이순신은 1592년 8월24일 전 수군 역량을 이끌고 부산포 공격전을 주도했다. 이 전투 과정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을 보는 즉시 선제공격하는 방식을 펼쳤다. 드디어 적의 밀집지역에 다다라서는 장사진의 진형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조선 수군의 작전 가운데 가장 원거리 기동작전에 해당하는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무려 1백여척에 이르는 적선을 격파했다. 실로 대규모의 승첩을 거둔 것이다.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꾀하고자 했던 수륙병진전략은 부산포해전을 통해 여지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최소 전력으로 많은 병력을 물리친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은 수군 재건사업을 불길같은 열정으로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소금을 굽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아 팔기도 했다. 그것은 배고픈 장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힘겨운 몸부림이기도 했다. 또한 굴러다니는 온갖 금속붙이를 주워 총통화기를 만들었고, 밤이 되면 장졸들과 함께 화살대를 다듬기도 했다. 이순신의 그같은 모습은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살리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 1998.12월호 ▶▶ 역사인물탐구 / 이순신 제 43호 1998.12.01 백전백승의 전략 萬全之計로 전진· 후퇴 적절히 구사 박선식 민족병학문화연구가 이순신 스승은 장인? 이순신을 생각할 때 좀처럼 풀리지 않는 사항이 있다. 도대체 누가 그의 스승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태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순신의 약력을 살펴보면 스승은 다름아닌 장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순신은 본래 한성의 건천동(오늘날 중구 인현동 지역)에서 살던 도심지 출신이었다. 그러다 부친인 이정(李貞)은 가족들을 데리고 충남 아산으로 이사했다.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어려웠던 집안살림 탓으로 추정된다. 이순신에게는 위로 희신(羲臣)과 요신(堯臣) 두 형님이 있었다. 두 형은 늘 글방에 출입했고, 이순신도 더불어 22세까지 유사(儒士)가 되기 위한 수업을 했다. 때문에 이순신은 실상 처음부터 병학을 익힌 것이 아니다. 그런데 22세 이후 무인수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되는 1576년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등과했다. 한편 이순신은 21세가 되는 1565년에 결혼했다. 배우자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그런데 공교롭게 이순신이 결혼한 이후부터 그간의 문과 수업이 아닌 병학 수련으로 바뀌는 점이 눈에 띈다. 왜 그랬을까. 결혼 후 수학 방향의 변화에 대해 장인인 방진이 열쇠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방진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이충무공전서”의 다음 기록이 눈길을 끈다. ‘정경부인 상주 방씨(尙州方氏)는 충무공의 부인이다. 부친의 이름은 진(震)인데 벼슬은 보성군수를 지냈다. …나이 겨우 12세 때 화적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오므로 보성공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도둑들이 이미 계집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없었다. …방씨부인은 베 짜는 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하고 외치며 다락에서 힘껏 던졌다. …보성공의 활솜씨를 두려워했던 도둑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 도망갔다.’ 기록을 통해 방진은 상당한 재력가였음을 알 수 있다. 도적떼가 커다란 위험에도 불구하고 범행대상으로 삼았다는 점과 계집종까지 매수한 치밀성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방진의 활솜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궁술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도적떼가 계집종을 통해 미리 화살을 치울 정도였을까. 소설가인 고 김성한씨는 소설 “임진왜란”(동아일보 연재)을 통해 이순신이 호걸인 방진의 사위가 됨을 사실감있게 묘사했다. 소설의 내용을 보면 방진은 동네의 훤칠한 무사인 이순신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외동딸에게 장가들게 한 것으로 돼 있다. 더욱이 이후 이순신은 방진을 통해 병학수업을 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이순신은 궁술과 검술 등의 무예에 남다른 재주를 나타내는 것으로 돼 있다. 물론 그같은 내용이 소설이라는 범주에서 전개됐기는 하지만 그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실들은 거의 일치한다. 다만 이순신이 방진에게 정말 병학을 익혔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재력과 무예를 갖춘 장인이 호감 가득한 사위에게 무슨 일인들 주저했겠는가. 이순신에게 특별한 스승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장인인 방진은 사실상 스승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순신이 백척간두의 위기를 걷어낼 수 있는 인물임을 알고 사위로 맞아들였다면 방진의 혜안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장인 방진이 없었다면 명장 이순신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방의 적 무찌르는 배' 이순신의 임진왜란기 활동에서 매우 두드러진 행적은 제작된 귀선의 운용이었다. 귀선이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 하지만 오늘날 당시 이순신이 운용했을 귀선의 모양새와 기능에 관해 명확한 정설은 없다. 뚜렷한 관련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귀선은 이미 태종대에 있었던 전투용 군선이었다. 때문에 선조조 이순신에 의한 귀선은 재개발된 귀선인 셈이다. 그렇지만 당시 귀선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재래식이었는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다만 이순신에 의한 귀선은 이순신의 전투지휘 철학과 일정한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충무공전서”를 보면 귀선을 찬양한 다음의 기록이 눈에 띈다. “가만히 있을 때는 방속 같이 편안하고, 군사들은 풍우(風雨) 맞을 걱정도 없으니 병법에 이른바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해놓고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고 함이다.”(귀선송) 이 기록은 귀선을 재개발하여 아군 장졸 한 명이라도 애틋이 보호하고자 했던 마음이 담긴 것이다. 한편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이끌던 임진왜란 초기의 군진 누각은 ‘진해루’(鎭海樓)라는 편액으로 명명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정유재란 뒤 다시 ‘진남관’(鎭南館)으로 개칭됐다. 여기서의 진해와 진남이란 개념은 귀선과 일정한 사상적 궤를 같이한다고 이해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북방을 담당하는 신이한 짐승으로 현무(玄武)가 있다. 그런데 이 현무는 매우 드세보이는 거북과 뱀이 서로 엉켜 있다. 여기의 거북은 민화에서 보는 신귀(神龜)와 같은 존재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순신이 천문지리적 식견과 민족적 가치관념을 염두에 두고 늘 전투에 임하고자 했던 인물임을 고려할 때 귀선의 재개발은 ‘북방의 신귀로써 남방의 사악한 왜적 무리를 짓누르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도 이해된다. 말 그대로 ‘진남’(鎭南)의 실현이다. 이순신의 귀선은 고려 과선(戈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 과선은 튀어나온 쇠뿔로 적선을 들이받는 전법의 구사가 가능했다고 한다. 마치 그같은 특성을 귀선의 용두(龍頭)나 전방의 하부에 있는 귀면부가 했다는 견해다. 일리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귀선의 용두와 귀면부를 들이받을 경우 자칫 잃는 게 더 많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용두의 내측에는 총통화기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자칫 용두가 파손되면 고지에서 저지로의 요격기능을 상실할 수 있다. 또 전방 하부의 귀면부로 들이받을 경우 거꾸로 적 창검병의 등선(登船)이 가능해진다. 귀선의 전방 중앙에는 닻을 걸어놓은 문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적이 오르지 않는다 해도 불덩이를 투척한다든가 화전(火箭)을 쏘는 등의 화공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순신 수군의 선조조 귀선을 고찰하면서 오늘날 갑론을박을 빚는 것으로 중앙 단면상의 갑판 구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간 이른바 2층갑판설과 3층 갑판설이 제기돼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2층이건 3층이건 설치된 당시의 총통화기의 운용에 무리가 없는 구조여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귀선의 좌우 현판구조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 복원된 모형 귀선들이 하나같이 전라좌수영 귀선도의 현판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임란 당시의 총통화기를 일정한 발사각으로 통일하여 사용했다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8백보나 1천2백보를 비행한다고 기록돼 있는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쏠 경우 무턱대고 전라좌수영 귀선도의 현판을 따를 수는 없다. 적어도 2m에 이르는 대장군전의 길이를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긴 길이의 총통전은 동차(童車) 자체가 구조적으로 이루는 기본적인 각도에 의해서라도 그 높이를 무시할 수 없다. 또한 발사각을 조정할 경우 현판에 고정된 총혈(銃穴-총통 접촉부)은 당연히 문제가 된다. 때문에 전라좌수영 귀선도에 그려진 것처럼 총혈에 대장군전을 맞춰 발사하기가 어렵게 된다. 더욱이 총통전의 중간 부위에는 쇠날개가 달려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이제껐 별 관심을 끌지 못한 통제영 귀선도의 현판구조는 사뭇 주목의 대상이 된다. 긴 총통전의 발사에 큰 문제가 없는 장방형의 문(門)과 그 옆에 뒤섞여 뚫린 총혈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순신이 명량해전 직전 남은 잔선들을 모조리 귀선으로 꾸미게 명령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 형태를 고찰하기 어렵지만 그 무렵의 귀선은 급조된 귀선으로 또 다른 전투적 기능을 갖추었을 것이 분명하다. ◀◀ ▲ 1998.12월호 역사인물탐구 / 이순신 제 43호 1998.12.01 '충무공의 정신' 을 찾아 관광산업은 '정신'을 팔아야 고세훈 月刊중앙 WIN 기자 절대 불리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두려움에 떠는 부하들을 일시에 용감무쌍한 전사로 변화시켰다. 평시 정신교육에 철저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전력을 집중화해 대승을 거뒀다. 그의 위기관리능력은 절대절명의 순간 나라를 구한 ‘구국의 빛’이었다. 경제전쟁시대 ‘전문경영인 이순신의 정신’을 찾아나선다. 이순신 장군 서거 4백주기. 그가 요즘 같은 경제전쟁 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를 전문경영인으로 재조명하면 어떨까.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리더십, 위기대처 능력, 창의성, 애민정신, 솔선수범의 자세, 유비무환의 정신 등을 생각하면 그는 훌륭한 전문경영인으로서도 손색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탐사는 ‘전문경영인’ 이순신을 찾는 과정이었다. 탐사는 ‘경제성의 원칙’을 우선 고려해 임진왜란의 시간순서와 관계없이 빨리 일을 볼 수 있도록 여정을 잡았다. 아산·진도·해남·여수·통영 등지에 머무르며 ‘경제전쟁 시대의 이순신’을 그려보았다. 남쪽바다와 면한 지역에서는 충무공(忠武公·이순신의 시호)의 흔적을 허다하게 만날 수 있었다. 학교나 공원 등에 세워진 충무공 동상들, 통영시·제승당·진남로·우수영·좌수영·벽파진·선소 등 도로나 동네 명칭 등에 이르기까지 수군병영·충무공·일본 등의 이미지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 이런 흔적은 오래 전부터 습관화된 일상처럼 특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문제는 ‘정신’이다. 충무공이 백전백승했던 것은 ‘정신’이 올바로 박혔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훌륭한 조상을 둔 4백년 뒤의 후손들이 IMF체제를 맞고 있음은 ‘정신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전쟁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정신’이 바탕이 된 경쟁력이다. 마음이 풍성한 계절 10월의 마지막주. 서울을 출발,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들녘을 보며 아산 현충사로 향했다. 관람객을 압도시킬 정도로 넓은 현충사는 ‘성전’ 같았다. 규모는 컸지만 ‘이순신의 정신’을 느끼는 데는 효율적이지 못할 듯했다. 이순신의 생애와 전투상황, 유물과 유적의 내용과 유래 등을 종합한 비디오물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시간에 쫓기듯 구경하면서 이순신을 올바로 이해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현충사를 떠나 ‘풍요의 고장’ 진도로 향했다. 진도는 농토가 넓고 바다의 산물이 풍부하며 진도개·‘현대판 모세의 바닷길’(바닷길이 열리면 이곳에서는 영등제가 열린다)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씻김굿·노동요 등 전통문화가 잘 간직된 ‘문화의 보고’로 평가된다. 게다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전과가 어린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이 있다.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가 명량해협(울돌목)이다. 과연 울돌목의 물살은 다른 곳에 비해 빨랐고, 가운데 쪽 군데군데 와류가 흐르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화석화하지 않은’ 충무공의 정신 연구는 명량대첩 탐구가 제격이다. 명량대첩은 이순신을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보다 뛰어난 장군 중의 장군’으로 인식하게 만든 대표적 전투다. 하지만 전투의 내용은 너무 신비화돼 있고, 그 결과 잘못 알려진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명량대첩의 전투상황과 이순신의 정신을 추적해 보자. 국가의 위기상황에 대한 이순신의 인식은 돋보인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 즉 수군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12척밖에 남지 않은 수군으로는 일본에 대항할 수 없다 하여 수군을 포기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수군이 없으면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장계를 올렸다. 이러한 시각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부터 초지일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임란 초기 조선군의 전략이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강한 해군력을 이용해 해상에서 왜군과 맞싸워야 했는데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연안을 지키는 군졸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견고하게 잘 만든 성과 참호 등 기본여건을 활용하지 못했음도 지적했다. 왜군은 육전의 명수였다. 전국시대 날만 새면 전쟁을 일삼던 그들은 육지에서의 백병전에는 ‘노하우’가 풍부한 군대였다. 그러므로 전력이 우세한 조선 수군을 이용, 해상에서 왜군을 무찔러야 승산이 있는 것이었다. 조선은 수전의 명수, 왜군은 육전의 명수 1597년 정유재란 발발 후에도 초기 해상방어에 실패해 왜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왜군은 이순신이 투옥되고 없는 틈을 타서 원균의 조선 함대를 유인해 거의 전멸(칠천량해전·1597년 7월21일)시켰다. 조선 수군의 주력이 꺾이자 왜군은 육군으로 사천과 하동을 거쳐 구례로 진입했고, 그 일부는 함양·운봉을 거쳐 남원을 접수(8월16일)했다. 다른 병력은 초계와 안의를 거쳐 전주를 점령했다. 육전에서 승승장구한 일본은 수륙병진작전을 기도했다. 이제 진도의 이순신 수군만 돌파하면 서해안을 통해 군수물자를 운반하면서 조선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명량은 서해로 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요지였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수군이 무너지면 조선은 끝장이었다. 절대로 수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전략가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았다. 남은 배는 12척뿐이었지만 이순신은 어느 정도 승산을 점치고 있었다. 왜 수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고 조선 수군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량해전 이틀 전 첩보 입수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8월3일)되고 명량해전이 있기 전 그는 나름대로 군비도 갖췄다. 남해안의 남은 수병 1백20명과 배설의 전선 12척을 거둬 전투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진을 옮기며 전선을 정비하던 중 어란포(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서 적선 8척을 격퇴(8월28일)했고, 9월7일에는 적선 50척을 맞아 물리쳤다. 수군의 사기도 올라갔다. 벽파진에서 적세를 관망하던 이순신은 해전 이틀 전 중요한 정보를 접했다. 9월14일 벽파진 건너편에 정탐병으로 파견한 임준영의 보고였다. 내용은 ‘정박하고 있던 적선 2백여척 중 55척이 먼저 어란포에 들어왔다’는 것. 게다가 적진에 잡혀 있던 사람으로부터 ‘왜군이 지난주(9월7일) 패한 앙갚음으로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첩보도 얻었다. 그는 대회전이 임박한 것을 직감하고 전령선을 보내 피난민들을 뭍으로 올라가게 했다. 그리고 명량해전 바로 전날(9월15일) 명량 뒤쪽의 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겼다. 이유는 ‘벽파진 뒤에 명량이 있는데 소수의 수군으로는 (물살이 빠른) 명량을 등지고 싸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략회의를 열었을 것이다. 드디어 9월16일 새벽 6시반께 망루 병사로부터 적이 출진했다는 전갈이 왔다. 적진이 있던 명량 입구 굴도와 이순신 수군이 정박한 우수영의 거리는 약 2.7km. 불과 20∼30분이면 대적하는 거리다. 이순신은 즉시 우수영에서 약 1백35m 떨어진 예상접전지역으로 이동했다. 왜 수군의 선두대열은 명량의 최협부를 통과했고, 양 수군은 접전했다. 제장들에게 (전날의) 약속을 확인하고 이순신 함대는 (一자로 전열을 형성하고) 각종 총포를 우레와 같이 발사하면서 돌진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의 막강한 전력을 본 장졸들은 겁에 질려 도망가려 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호각과 깃발로 먼 바다로 물러선 장수들을 불러들인 후 군령의 엄함을 보임과 아울러 곧바로 적진으로 뛰어들도록 명령했다. ‘정신강화교육’ 뒤 두 장군은 여지없이 적진으로 돌진했다. 평시 신상필벌의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해 군령을 세운 결과다. 이순신은 평소 화살이나 거북선을 손수 손질하거나 병사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또 장수들의 특장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장병들이 이순신을 얼마나 존경하고 따랐는지는 여수에 있는 타루비(墮淚碑)가 증명한다. 노량해전에서 장군이 사망한 후 5년만에 병졸들이 돈을 갹출해 만든 것으로 이 비를 보면 눈물이 난다는 뜻에서 타루비다. 한창 전투에 몰입하던 중 이순신 배에 타고 있던 왜군 출신 준사가 바다 위로 떠오른 붉은 옷을 입은 시체를 가리켰다. 안골포에서 싸운 적장 마다시인 것 같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김돌손을 시켜 갈쿠리로 시체를 끌어올렸다. 적장 마다시임을 확인하고 시체를 토막내 뱃전에 매달자 왜군은 완전히 기가 꺾였다. 전투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이 난 조선 수군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지자·현자총통과 화살을 쏘아 총 31척의 배를 깨뜨렸다. “난중일기”의 명량대첩 전투기록은 허전하다. 뭔가 대단한 작전이 있었을 것 같은데 싱겁기까지 하다. 물론 “난중일기”는 개인적인 일기문이므로 전투상황을 상세하게 적을 필요는 없다. 다른 전투에 대한 묘사도 이 정도 수준이니 당시 상황을 종합해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울돌목에 철색 설치해 왜선 전복 이순신이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승리한 것으로 예시되는 울돌목에 대해 알아보자. 울돌목의 해협 길이는 3백25m. 그런데 양쪽 해안의 50m 정도는 수심이 낮고 물밑에 바위턱이 있어 배가 통과할 수 있는 폭은 약 1백20여m에 불과하다. 한꺼번에 여러 척의 배가 통과할 수 없다.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20m. 유속은 약 11.5노트(24km). 굴곡이 심한 암초 사이로 소용돌이 급류가 형성된다. 이때 암초에 부딪쳐 튕겨나오는 소리가 20m 밖까지 들려 울돌목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조류는 1일 4회 교차하며 교차하는 중간에 2회의 정지상태를 보인다. 세계적인 특수지형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했다는 점에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하다. 왜군이 공격한 날은 물살이 가장 빠른 사리(7물)였다. 그런데 빠른 물살이 어느 한쪽에만 유리한 조건일 수는 없다. 단지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 수군은 울돌목을 등지면 힘에 부쳤을 때 불리하므로 진영을 울돌목 뒤쪽으로 옮겼는데, 그 판단이 옳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또 한가지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는 시간을 이용해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점을 살펴보자. 조류는 6시간마다 바뀐다. 왜군이 공격한 새벽 시간은 조류가 막 바뀌는 때다. 그런데 다시 조류가 변할 때까지 싸웠다면 5∼6시간을 접전했다는 얘긴데 그렇게 오랫동안 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최초 전투 시작 1시간 정도에 판세가 결정났을 것으로 본다. 후퇴하는 적선이 빠른 물살 때문에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부딪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밖에 울돌목 양쪽에 쇠사슬을 연결해 왜선을 전복시켰다는 설도 있다. 이는 ‘공식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조응량(趙應亮)의 묘비명에 적혀 있다. 조응량은 이순신과 무과시험에 동반 급제했고, 명량해전에 참가해 전사한 이 지역 출신 장군이다. 그의 묘비명에는 ‘울돌목에 철색(鐵鎖)을 설치해 그 지점을 지나가는 왜선을 전복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진도의 향토사연구가 박주언(朴柱彦)씨는 “동네 노인들에게 울돌목에 철색이 있었다는 사실과 모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매사에 만전을 기하고 주변 의견을 청취하는 이순신의 평소 자세로 보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 “난중일기” 9월16일자(명량해전)에는 출동 직전 ‘약속을 확인하고’라는 대목이 있는데 전날의 전략회의를 주지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명량해전의 승리 요인 중 하나는 ‘타깃에 대한 집중공격’이다. 전투 때마다 이순신은 왜장이 탄 배에 화력을 집중했다. 조선 수군의 화력이 왜군보다 월등한 데다 한곳에 집중공격하니 배겨날 도리가 없다. 줄다리기에서 숫자는 적다 해도 힘을 한데 모으면 승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경제전쟁에도 마찬가지로 집중화의 원칙은 중요하다. 상품 판매시장 확보를 위해 정확한 타깃을 정하고 그에 따라 집중적인 마케팅을 실시해야 효과적이다. 진도대교로 연결되는 진도와 해남에는 이순신 관련 유적이 많다. 해남의 우수영관광단지에는 명량대첩탑을 비롯해 전란 관련 유물들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이밖에 충무공 영정을 모신 충무사에는 명량대첩비가 있다. 대첩비는 일제시대 일인들이 강제 철거했던 것을 이 지역 유지들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찾아내 1950년 현 충무사에 모셨다.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현상을 보이는데 충무공의 혼이 나라를 근심하여 땀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관리자였던 김대안(93년 타계)씨 등에 의하면 6·25 때 비문이 식은땀을 흘렸고, 최근에는 괌에 비행기 추락사고가 났을 때 같은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영령 위로하는 ‘진도 평화제’ 이순신과 관련해 진도는 재작년부터 뜻깊은 행사를 벌이고 있다. 향토사연구가 박주언씨가 제창한 ‘진도평화제’. 909년 왕건과 후백제의 결전, 1271년 삼별초 진도정부의 대몽항쟁, 1597년 명량대첩, 1894년 동학 격전 등 진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상한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다. 박씨는 한국·일본·몽골이 참여하도록 추진하고 있으며, 아울러 경제적인 교류도 계획하고 있다.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은 좋은 관광자원이다. 거북선 모양의 유람선을 띄워 바다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면 실감이 더할 텐데 현재는 유람선도, ‘그 날의 소리’도 없는 상태다. 1980∼84년 진도대교 건설 당시 물살로 인해 공사 추진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바다를 바위덩어리와 모래주머니 등으로 메웠기 때문이다. 빨리 제 소리를 찾도록 노력할 일이다. 전라좌수영의 본산 여수에는 이순신이 정무를 봤던 진해루 자리에 세워진 진남관이 웅자를 자랑한다. 진남관은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큰 기둥이 68개나 된다. 진남관은 여름이면 하얀 소금꽃을 피운다고 한다. 재목이 될 소나무를 여수 앞바다에 띄워 3년 정도 담가놓았기 때문이란다. 이순신이 바다 위에 쏟은 땀과 열정이 소금꽃이 되었으리라 상상해본다. 여수시 시전동에는 이순신이 거북선을 제작, 정비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선소(船所)가 조성돼 있다. 고려 때부터 이곳에 조선소가 있었고, 조선 성종 때의 고지도에도 선소로 기록돼 있다. 배를 건조, 정박했을 굴강(掘江)에는 마을사람들이 굴강의 좁은 입구를 이용해 밀물 때 들어온 숭어를 잡고 있었다. 많을 때는 세양동이 정도 잡는다는데 충무공이 배려해준 선물인 셈이었다. 여수에서 통영으로 가려면 고성반도를 거쳐야 한다. 통영이란 지명은 일제 때(1914) 행정구역 명칭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에 설치(1593년)된 이후부터 기능상 명칭인 통영이란 명칭은 계속 통용됐다. 그러므로 통영은 이순신이 수군통제사가 됐던 시점부터 얻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19세기말까지 나전칠기·갓·소반·유기·부채 등 수공업제품으로 유명했던 12공방도 이순신과 관련이 깊다. 남해에서 서진하는 왜군을 막아내려면 다량의 군수물자가 필요한데, 통영은 외딴 곳이라 이를 자체조달해야 했다. 그로 인해 수공기술이 발달했지만 지금은 명맥이 끊겨 아쉬움이 남는다. 아산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의 환도(環刀)는 1594년 통영의 장인 태귀연(太貴連)·이무생(李茂生)이 만들었다는 명문(銘文)이 전한다. 문화 상품화하는 마케팅 마인드 필요 학익진 전법으로 유명한 한산도해전은 임란 개전 이후 최초로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이 실력 대 실력으로 맞붙은 승부였다. 임란 직후에는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이 싸움 한번 못하고 완패했다. 반면 이순신이 출전한 5월4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합포·사천·당포해전 등은 조선 수군이 우세한 전력으로 일본에 완승했다. 이때는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왜 수군에 대한 기습공격이었다. 왜 수군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아무튼 한산도해전에서 양측은 처음으로 진형을 갖추고 ‘진검승부’를 펼쳐 이순신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다. 한산도해전의 요체는 학익진전법. 견내량에 정박했던 왜 수군을 유인해 학익진을 형성한 조선 수군이 엄청난 화력으로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물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수군만으로 왜군의 주력을 무력화할 수 없기 때문에 수군의 건재는 국가 유지의 조건임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1594년 이후 왜 육군 주력이 남해 연안으로 후퇴해 성을 쌓는 등 장기전에 돌입하자 정유재란이 일어날 때까지 왜 수군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수군의 존재만으로 전략적 가치를 한껏 높인다는 전략이었다. 충무공과 관련된 지역을 돌면서 오늘날 경제전쟁시대에 ‘충무공과 임진왜란’은 훌륭한 관광상품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역의 관심은 미약했다. 통영시 향토역사관의 김일룡(金一龍) 관장은 “실제 거북선을 만들어 통영에서 한산도까지 유람선으로 띄우든가 체험항해 상품을 만들면 훌륭한 역사의 산교육이 될 수 있”고 “한산도에도 밀랍인형으로 당시 병영상황을 재현하면 실감을 더할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물론 여수나 통영에서는 충무공 관련 행사가 열린다. 통영시는 올해 37회 한산대첩축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하지만 문화를 상품화하는 마케팅 마인드가 부족한 것 같다. 거북선 체험상품은 학생들 수학여행뿐 아니라 역사에 관심 많은 일본인들도 다수 불러올 것이다. 그런데 체험만의 생명력은 길지 않다. 정신이 접목돼야 한다. 일본 관광객이 참여하는 가운데 한산대첩축제라는 ‘정신행사’가 열린다면 지속적인 관광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충무공의 정신에 감동한 사람이라면 충무공의 혼이 서린 상품(예컨대 거북선을 이용한 옥제품·열쇠고리·수건 등)들도 귀하게 여길 것이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 ‘꽃’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에서처럼. ▲ 1998.12월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