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11월 26일 목요일 오전 02시 58분 05초 제 목(Title): 연합]<조선총독부 민속조사 어떻게 볼 것인 번호 : 84/1211 입력일 : 98/11/25 15:32:09 자료량 :40줄 제 목 : <조선총독부 민속조사 어떻게 볼 것인가> 날 짜 : 98년 11월 25일 (서울=연합) 金台植기자= 일제는 식민통치 훨씬 이전에도 육군참모본부 등을 통 해 우리나라 민속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조선총독부는 막대한 인력의 공무원과 자금을 동원해 무속과 향토신앙은 물론이 고 소작제도를 비롯한 `경제민속'에 이르기까지 소름끼칠 만큼 광범위하고 철저한 조선민속조사를 일제 패망때까지 계속했다. 張哲秀 교수(정신문화연구원)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일제가 출판물로 남긴 조선 민속 관련 연구물만도 82종에 이르고 있다. 민속 거의 모든 부분에 손을 댄 셈이다. 총독부가 이처럼 광범위하고 철저한 민속조사를 실시한 이유는 자명하다. 식민지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목적일 따름이었다. 그러면 조선총독부가 남긴 이런 광범위한 자료들은 식민통치를 위한 방편이었다 는 이유 때문에 전부 사장되어야 할까? 아니면 아무리 식민통치를 위한 것이었다 해 도 이용가치는 있지 않을까? 일부 학자들은 이처럼 불순한 의도에서 이뤄진 총독부와 여기에 예속됐던 일본 민속학자들의 연구 결과물을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민속학자들은 총독부가 남긴 연구물 중 가치가 있는 것은 이용하자 는 주장을 내놓고 있고 또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문화연구원 발간 계간 학술지인 `정신문화연구' 제72호가 특 집으로 다룬 `조선총독부 민속자료 조사에 대한 연구'라는 기획논문은 일제의 민속 �88∼1954)를 분석했다. 南교수는 "1908년 충북 경찰부장의 직책으로 조선민속 연구라는 `처녀항해'에 나선 이마무라는 물론이고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아키바와 이마무라의 연구는 조선민족은 정체돼 있고 사대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일본의 계몽이 필요하다는 식민통 치 이데올로기를 이끌어 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1930년대 신민족주의를 개창했으며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민족 지성사의 대변자로 꼽히고 있는 손진태 등에 대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우리 민속학자들의 연구 또한 식민주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金善豊 중앙대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민속조사 자료가 식민통치에 이용됐다고 해서 이들 연구물을 아예 뭉개버리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선택적인 이용을 주장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