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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22일 일요일 오후 01시 27분 21초
제 목(Title): 윈/ 중국 '시안'의 우리문화 다섯가지 



문화
                                                                   제 42호 
1998.11.01



                     중국 西安서 찾아낸 우리문화 다섯가지 
         高仙芝는 長安에 두개의 저택을 소유했다 


                                                          변인석 아주대 
교수·동양사 



西安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는 정신적 요람과도 같은 도시다. 그러나 그곳에는
우리 민족의 문화 또한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이는 당대 유학생과
상인·구법승려들 뿐 아니라 패망 이후 長安 일대에 정착했던 고구려·백제
유민들이 중국문화 발전에 한몫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 원로사학자가
10여년동안 西安을 드나들며 새로 찾아낸 우리 문화·문물들을 본격 공개한다.

                                       중국 시안(西安) 사람들은 “시안은 나를
                                       키워준 정신적 요람이자 어머니”라고 
흔히
                                       말한다. 당대(唐代)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그들이 내세우는
                                       중화(中華)사상의 센터가 바로 시안이라는
                                       데 커다란 자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그곳은 그들만의 도시가
                                       아니다. 시안을 지칭하는 당대
                                       창안(長安)은 각국의 외교사절들과
                                       유학생·상인·구법승려(求法僧侶) 등이
                                       수없이 왕래하던 국제도시여서 흡사 각
                                       나라의 문화가 혼합된 용광로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 도시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지난
                                       92년. 한·중수교 이후 우리 사학계는
고구려·발해의 발상지인 동북지역에는 상당한 관심을 쏟았지만 시안 등
내륙지역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겨 두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지라 필자는 88년 중국 대외경제무역위원회 초청으로 처음
시안을 방문한 이래 매년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우리 문화 찾기에 골몰했다.
지난 몇해동안은 시안 인근의 창안(長安)현과 안캉(安康)시 등지로 차츰
지역적 관심을 넓혀왔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조사는 일본사람들에 비하면
90년이나 뒤진 것이었지만 그 성과는 괄목할 만했다. 

시안 곳곳은 과거 한국인들이 남겨둔 엄청난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분야별로
봐도 정치·사회·문화·경제·군사·종교 등 참으로 광범위하다. 잘
알려진대로 특히 군사·종교 방면에서의 업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구법승려들의 활동은 특히 시안 남쪽에 위치한 종남산(終南山)을 중심으로
곳곳에 묻어있다. 

필자는 지난 7월 초 동료학자·박물관장들과 함께 시안 일대를 11박12일로
답사했다. 열한번째 시안행이었다. 이번 답사는 그동안 찾아냈던 새로운
유적지와 사실들을 확인하고 총정리하기 위한 여행이 됐다. 

수차례의 답사여행은 3년 전 시안 현지에서 어렵사리 구한 북송(北宋) 연간의
지리학자 송민구(宋敏求)가 편찬한 “창안지”(長安志)로부터 출발했다.
“창안지”를 입수한 뒤 책장을 넘기다 필자는 아주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고선지(高仙芝)─. 고구려 유민으로 당 현종 때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무장이었다. 

그뒤로 “창안지”는 매년 틈만 나면 필자를 시안으로 끌고가는 역사의
자석과도 같았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보고였다. 당시 창안 도성
내에 황제가 하사했던 사택의 주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고구려인을
비롯한 한국인들의 위상을 확인한 것은 무엇보다 큰 소득이었다. 당시 창안
내의 사택은 모두 2백49개. 그 가운데 한국인의 사택이 당시 서역사람들보다
오히려 많은 8개에 달했다. 

그것은 물론 고구려·백제 유민들의 사민(徙民)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구당서”(舊唐書)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당시 고구려·백제
유민들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갔다고 적고 있지만 더이상
진전된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필자는 시안을 답사하면서 고구려 사민집단의
거주지로 판단되는 이른바 ‘고려곡’(高麗曲)
‘사막곡’(沙漠曲) ‘경조부’(京兆府)에 편입된
집단부락이 있다는 사실을 차례로 확인하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백제 후예들은 중원문화에 편입됐지만
시기마다 중국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당대 유행했던 외국음악에 해당하는
9부악(九部樂)에 포함된 고려악(高麗樂)이나
고려기(高麗伎)는 바로 이들 교민집단의 행사를 통해
비로소 전수됐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 문화를 새롭게
창출하는 하나의 자극제였다. 창안에 남아있는
한국인들의 공동체적 흔적들을 찬찬히 따라가보자. 

 長安 도성안 ‘한국인’주택 수 서역인 능가


“창안지”에 나타난 창안 내의 사택들은 주로 왕자·공주· 부마·
귀족·권신·환관· 장수· 지방관리·절도사 등의 전·현직 관리를 포함해
당시 사회의 리더그룹이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인구가 1백만명, 6만 가구에
달했던 창안에 사택이 2백49개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것이다. 1백8개의 방(坊)으로 구성된 창안이고 보면
방마다 어림잡아 사택이 2∼3개 꼴로 자리잡았던 셈이다. 물론 이들은 일반
민가(民家第宅)들과 혼재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사택 가운데
한국인이 거주했던 곳이 8개에 달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구려 후예가
6택, 백제 후예가 1택, 신라인이 1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특히 고선지·왕모중(王毛仲)·흑치상지(黑齒常之)는
“신당서”“구당서”의 열전(列傳)에 실린 인물들이다. 또 주택 가운데
구체적으로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방향이 기록된 것도 있다. “창안지”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泉男生)의 저택, 당 현종의 옹립을 도왔던 왕모중의
저택, 고선지의 주택 위치에 대한 언급은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당시 창안의 행정구역은 모두 1백8개 방으로 구성됐다. 방들은 방위에 따라
다시 16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예컨대 ○○隅(모서리), 北(南)門之東(西),
西(東)門之南(北), 十字街東(西)之南(北) 등의 구분이다. 당시 창안거리는
보통 항(巷)·곡(曲)으로 구분됐다. 곡은 소항(小巷)에 해당한다. 항·곡은
서로 통하고, 그 폭은 대략 2m 정도로 알려졌다. 이들 대저택은 바로 항·곡에
면해 있었다. 

고구려 패망 이후 창안으로 끌려갔던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이 기거했던
주택은 흥녕방 안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흥녕방 동남우(東南隅)로 적혀
있다. 그러나 동남우의 범위는 상당히 넓어 개략적인 지점만 추론할 수 있을
정도다. 동남우는 1방의 16분의1에 해당하는 넓은 범위다. 

몇차례 시안을 찾는 과정에서 필자는 그 사택들의 위치를 차례로 가늠해
보았다. 당대 흥녕방은 현재 시안 시내의 장낙서로(長樂西路)에 있는
샹제리라(香格里拉) 호텔을 오른쪽에 둔 장락중로(長樂中路)의 왼쪽에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 남생의 저택은 지금의 만수북로(万壽北路)를 따라 가면서
왼쪽으로 난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간다. 

고선지의 집은 선양방(宣陽坊)의 서남문 남쪽에 해당한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고선지는 우우림대장군(右羽林大將軍)이었다. 우우림대장군은 당의
군대에서 가장 용감하고 전술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선양방 말고도 영안방(永安坊)에 별도의 저택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요즘말로 1가구 2주택을 소유한 셈이다. “창안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선지와 같이 2주택 소유주는 오직 장열(張說)이라는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창안지”의 저자인 송민구는 장열이 별택(別宅)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고 주석(註釋)을 달았지만 고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첨부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안록산(安祿山)이나 곽자의(郭子儀)는 저택 내에 원(園)과
지정(池亭)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곽자의의 저택에서 거느린
가인은 3천명이나 됐다고 한다. 

현재의 시안 지도를 보면 고선지의 저택은 우의동로(友誼東路)에서
동사사로(東斜四路)로 빠지는 철안(鐵安)1가의 남면으로 추측된다. 그
주변에는 중국밀교의 총본산인 청룡사(靑龍寺)라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지만,
필자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그 일대가 신기술산업개발지구로 지정돼
허허벌판만 남아 있었다. 

“창안지”에 등장하는 또다른 고구려인 가운데 왕모중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당 현종의 집권을 도운 인물. 그는 본래 부친인 유격장군이
지은 죄 때문에 관노(官奴) 신분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玄宗)의 노예였고, 나중에는 이융기의 시위(侍衛)가 되었다.
710년(景云1)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정변을 모의, 위후(韋后)를 죽이고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이융기는 태자가 되었다. 왕모중은 평소 현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다 713년 소지충(蕭至忠)을 죽이는 공을 세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이라는 보위를 따로 받았다. 

이후 왕모중은 제왕과 함께 항상 어악(御幄) 앞에 앉았을 정도였다. 평소
현종은 그가 보이지 않으면 걱정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왕모중의 저택은 시기는 달랐겠지만 천남생이 살고 있었던 창안 동쪽 흥녕방에
같이 있었다. 현재는 시안 시내의 만수북로에서 왼쪽으로 첫번째 난
도로(금화북로·金花北路)로 들어가면 눈에 띄는 서도(西都)호텔 뒤쪽의
만년로(万年路) 중간쯤에 해당한다. “창안지”에 실리지 않은
이원좌(李元佐)· 이인덕(李仁德)·이동(李同)의 사택과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사택은 필자가 별도로 다른 문헌들을 통해 찾아낸 것이다. 

 安康縣에서 찾은 新羅寺와 新羅寺鐘


안캉을 끼고 흐르는 한강(漢江)은 장강(陽子江)의 가장 큰 지류에 해당한다.
이곳 한강대교북로에 신라사터가 위치해 있다. 안강은 당대부터
카이펑(開封)∼우한(武漢)을 잇는 교통요지였다. 신라사의 위치가 확인된 것은
중국에서도 근자의 일이다. 

지난 96년 이곳 주민들에 의해 신라사를 확인해 주는 비좌(碑座·사진참조)
2기가 발견돼 안캉역사박물관(관장 李啓良)이 이를 확인했지만 아직 학계에는
보고되지 않은 상태. 신라사터를 확인하는 비문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비좌가
당대의 것으로 밝혀져 신라사지로 확인됐다. 당대에 이 지역에는 신라사가
유일한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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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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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 42호 
1998.11.01



                     중국 西安서 찾아낸 우리문화 다섯가지 
         高仙芝는 長安에 두개의 저택을 소유했다 


                                                          변인석 아주대 
교수·동양사 



                                    이곳 신라사 안에 암자를 짓고 기거했다는
                                    회양선사(懷讓禪師)는 안캉의 역사인물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불교의 규앙파( 仰派)를 개창한 대선사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713년(先天 2)
                                    남악(南岳)의 반야관음대(般若觀音臺)에
                                    주처하면서 혜능(慧能)위의 학설을 널리
                                    홍포해 ‘남악회양선사’(南岳懷讓禪師)로
                                    불렸다. 신라사에 남악회양선사가 어떻게
                                    기거하게 됐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신라사 암자에 주처했다는 사실은
                                    신라사의 명성을 높이는 것임에 틀림없다. 

                                    한강이 비스듬히 내려다보이는 절터의 넓이는
                                    어림잡아 4천평방m는 너끈히 넘을 것 같았다.
                                    주변에는 토기와 주춧돌만 무상하게 흩어져
있었다. 
신라사터를 같이 찾았던 우리 조사단 일행 중 S대 최모 관장은 “그것이
비좌가 아니라 연등(蓮燈)이 세워졌던 하대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연등일 경우 그 자리가 대웅전 앞이 되고, 이곳이 안캉시를 끼고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는 지형이어서 관음(觀音)이 모셔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지 박물관장은 이러한 의견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결국 실마리를 푸는 방법은 발굴작업을 통해 비석을 찾아내는 길밖에 없다.
비석은 짐작컨대 사찰터가 있는 언덕 아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사의
대웅전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동북을 보고 있었으리라. 높이는 한강수면에서
3백m 위에 위치했다. 안캉은 결국 신라인들이 관내와 중국 내지로 향하는
교역의 중심지를 겸했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발 아래 굽어보이는 한강에서는
금방이라도 강을 거슬러오르는 뱃사공들이 신라상인들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절은 시안 종남산에서 넘어간 어떤 신라승이 창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의상이나 자장이 자주 찾았다는 진령산맥 입구의 풍덕사(豊德寺)와
정업사(靜業寺)가 시안에서 안캉에 이르는 자오고도(子午古道)와 일직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안캉의 지세는 남북이 높고, 그 중간은 비교적 낮다.
한강 이북은 진령산구(秦嶺山區)에 속한다. 이렇게 본다면 강북은 종남산과
깊은 관계를 갖는 문화·교통의 동일권으로 묶을 수 있다. 

신라사에는 범종이 하나 있었다. 신라사종은 1227년(남송 嘉定 17) 주조됐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 중 하나로 꼽히는 청동종이다. 이때는 중국과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의 국경이 진령산맥과 신라방이 있었던
회하(淮河·당대 漣水)를 경계로 그어졌기 때문에 남북 교역이 차단되는 대신
내륙 교역이 성황을 이루던 시기다. 당시 중국과 고려의 교역도 이곳 내륙까지
이어지면서 신라 교민의 수와 재력도 상당히 컸을 때다. 그런 배경을 가늠해
보면 신라사종은 이들 신라인 사업가들의 재력이 뒷받침됐을 것이 틀림없다. 

중국 전통의 니형(泥型) 주조법을 계승한 이 종은 크기에서도 산시(陝西)성
내에서 단연 으뜸이다. 높이 2.4m, 무게가 1만근으로 기록돼 있으나 실제는
3천kg 정도다. 아래쪽 두께는 15cm나 돼 전체적으로 모양새가 질박하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이 종은 현재 안캉시 향계동(香溪洞) 공원으로 옮겨져
있었다. 본래 범종 소리는 중국의 고대 8가지 악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히지만 신라사종은 현재 종을 매다는 종뉴(鐘 )가 파손돼 소리가
투박했다. 그러나 안캉시 당국은 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종을 한차례
쳐보는데 5각(角·약 1백원)을 받고 있다. 

신라사종은 본래의 뜻과 전혀 다른 처지에서 돈벌이 도구가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소리는 마치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내는 듯 들렸다. 신라사종은
수백년 동안 여러 곳으로 옮겨다녔다. 신라사종이 어떻게 이 공원으로
옮겨졌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일설에는 신라사종이 안캉시 동남쪽에 있는 천성사(天星寺)로 옮겨졌는데,
사(謝)씨 성을 가진 어사(御史)가 절을 허물고 자신의 부친 묘를 쓰는 바람에
신라사종도 절을 떠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청 말에 쓰여진 지리서
“중수흥안부지”(重修興安府志)의 기록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원사료를
채택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현재의 신라사지를 살펴보면 가파른 지세가 정면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범종은
명(明) 이전 어느날 집중폭우 등 자연재해로 언덕(坡) 아래로 굴려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안캉현지”(安康縣志)도 신라사종이 홍수에 떠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사종 단면에는 대략 5천자 내외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대부분은 시주자의 이름이다. 상단에 있는 전서(篆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해서체로 썼다. 내용에는 주조 연월일, 시주자, 불교 직명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 글자는 송대 서체 연구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종관(鐘款)은 지난 91년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것을 신라사종이라고 확정짓는
근거는 ‘신라사’가 지워졌지만 현재 新자에서 ‘立’부수가 어렴풋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羅자와 寺자는 아예 없어졌다. 본래 이 종은 안캉시
신성북문(新城北門)의 성루에 있었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수행했던 新羅王子臺


신라왕자대가 신라 왕이 있었던 자리라는 뜻에서 사용됐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진령산맥 안 신라왕자대와 가까운 운제사(雲際寺)는
태평욕(太平山谷) 안에 있는 만화산(万華山) 정상에 있다. 때문에 송대의
역사지리학자들이 탁 트인 운제산(雲際山) 정상의 약간 평평한 곳을
신라왕자대로 이름붙인 것으로 보인다. 

“창안지”권(卷)15에는 “신라왕자대가 동남
60리에 있다”고 적었다. 한·당시대의
호현(瓠縣)은 지금 노곡( 谷) 아래 미피호가
있는 호현(戶縣)이다. 초당사에서 볼 때 동쪽에
향적사가 있다고 한다면 같은 거리의 서쪽에
미피호가 있는 호현이 있다. 호(瓠)는 본래
벽자인데 같은 음의 호(戶)로 쓰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또 호현이란 명칭 외에
“섬서오로지도”(陝西五路之圖)에는
종남호현(終南瓠縣)이라고 표시했다. 옛날에는
호(扈)와 호(瓠)가 같이 쓰였기 때문이다. 

호(扈)는 하·상(夏商) 때 호씨(扈氏)가 거주한
데서 연유하며, 이후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진국(秦國)이 호읍(扈邑)을 정했다. 진나라의
효공(孝公) 때에 와서야 비로소 호현으로
고쳐진 뒤 2천여년동안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 
신라왕자대의 위치는 초당사까지 차량을 이용하고, 남쪽에 있는 규봉산을
도보로 올라가는 꼬박 4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그 정상에서
아래로 굽어보는 경치는 감탄사를 연발시켰다. 당시 신라왕자란 자장(慈藏)
스님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자장 스님은 당시 이곳 동쪽 낭떠러지에 나무를
얽어 맨 암자를 짓고 한동안 주처했기 때문이다. 이때 수많은 신도들이 이
험악한 암자까지 찾아갔다는 것은 당시 주변에 고려촌(高麗曲) 교민이 많았기
때문으로 짐작됐다. 

고려곡은 고구려가 패망하자 많은 유민이 전쟁포로로 끌려와 살았던
집단거류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 지명이 다른 글자로 바뀌어
고력거(高力渠)로 된 것이다. 두개의 발음은 모두 ‘까오리취’(Gaoliqu)다.
지명은 이와 관련된 유래를 갖게 마련이다. 이곳 까오리취도 그 옛날 고구려
유민이 전쟁포로로 끌려와 살았던 데서 연유한 것이 북송인 장례(張禮)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필자는 이점에 착안해 고려곡의 위치를 밝힌 논문을 최근
발표했다. 

현재 까오리취는 80가구에 4백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농토는 마을을
포함해 대략 6백무(畝)이다. 거주민의 성씨를 보면
석(石)·이(李)·철(鐵)·녕(寧)씨가 많았다. 

종남산에서 수행했던 고려승 의상(義湘)·자장(慈藏) 스님의 활동에는 이
지역의 고구려 후예들이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한국인의 공동체적 힘을
인식한 중국 사서(史書)에는 우리 민족을 ‘고구려 후예’‘고려족’으로
구분해 사용했다. 

 고구려 후예들의 집단 거주지 高麗曲


고구려 후예라는 말이 고구려족 혹은 고구려인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친밀하게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당시 널리 사용된 사회통념적(社會通念的)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구당서” 권106
‘왕모중전’에서는 그를 ‘본고려인’(本高麗人)이라 했다가 장열이 쓴
“농우감목송”( 右監牧頌)에서는 ‘동국망왕지후예’(東國亡王之後裔)로
적었다. 

창안의 지리를 이해하는 데 창안8경(景)과 창안8수(水)는 매우 중요하다. 또
이것들이 있는 장소마다 한국과 관련된 유적이 적지 않다. 그것은 신라의
구법승려들과 지식인·신선(神仙)·유학생들과 관련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낸 이들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때로는 기록이 있다고 해도 현장을
비정(比定)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우리 사학계에 이미 보고된 신라관(新羅館)·신라방(新羅坊)과 필자가 찾은
고려곡·신라사 등은 우리 유민들의 집합체 혹은 거류지였다. 이러한 공동체적
힘이 당(唐) 사회에서 유민들의 집단적 에너지를 발산시킬 수 있는 모태가
됐다. 

예컨대 당시 자장율사에게 수계받은 신도가 하루에 1천명씩이나 됐다고 한다.
이들 신도 가운데는 창안 성남의 고구려 교민부락(신라인 포함)인 고려곡
사람들도 분명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령산맥의 험준한
산꼭대기 암자까지 어찌 신도들이 몰려들 수 있겠는가. 

필자가 시안을 뒤지고 다니다 발견한 신라인 김가기(金可記)의
집터·승천처·마애각문의 내용을 발표한 것이 엇그제의 일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다시 새로운 한국 관련사료와 문물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이러한
연구가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너무나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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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11월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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