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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6일 금요일 오전 11시 34분 35초
제 목(Title): 뉴스+/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 



강영희의 인물탐구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 
“미술품에는 가식없는 역사 담겨있죠”  
    

성북동 언덕의 북단장(北壇場)에 들어서면, 우선 고즈넉한 뜨락의 무심한 
아름다움에 둘러싸인다. 이어 정원 한쪽에서 미소띤 간송 전형필선생(1906~62)의 
흉상과 마주치게 되고, 마침내 철옹성처럼 보이는 고색(古色)의 보화각에서 그분이 
소중하게 거둬들인 국보급 문화재들과 만나기에 이른다. 
망국의 시기에 산지사방 나라 밖으로 유출되는 조국의 보물들을 되찾는 데에 
10만석 거부의 재산을 하늘의 뜻인양 고스란히 쏟아부은 간송(澗松). 그가, 조선어 
사용까지 금지하며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한 일제의 광풍을 맞받아치듯 193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사립박물관이 바로 보화각이다(1966년부터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보화각이 올해 환갑을 맞았다. 

 독립을 되찾은 나라에서 적어도 외세에 의해 문화재를 빼앗기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인생 환갑이 그렇듯 이곳의 환갑에도 
나름대로 자족의 여유가 허락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이곳에 간직된 우리 문화의 
정수(精髓)들, 그러니까 일급(一級)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정선 심사정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 김정희의 글씨, ‘훈민정음’ 원본 등이 그 여유로움을 축복해줄 
듯하다. 

하지만 자그만치 30여년의 세월 동안 아예 보화각의 한쪽에 들어앉아 이곳을 
지켜온 최완수선생(57)에게, 보화각의 환갑이란 흐뭇한 결산의 시간이기는커녕 
비로소 그분의 유지를 본격적으로 받들고 펼쳐야 할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간송의 
뜻이란 궁극적으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입증해 식민사관을 극복해내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에 들어오며 설립해 30여년간 이끌어 온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바로 이같은 작업의 산실이다. 

30여명의 국사학자, 미술사학자, 한학자들이 주축이 된 이 연구소는 세상에 이른바 
간송학파로 알려졌다. 올해초 이들은 그간 쌓아온 연구성과를 다소 선언적인 투로 
담아 ‘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라는 책을 펴냈다. 간송의 유지이자 그들의 
학문적 지향점이기도 한 식민사관의 극복을 조선시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 집중적으로 모색한 작업인 셈. 그는 식민사관의 극복이란 그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일 뿐이며, 이같은 시각의 전환이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됐지만 일반사회에서는 이제 비로소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눈여겨 볼 것은 그가 식민사관 극복의 지렛대로 삼는 것이 다름아닌 미술사 또는 
문화사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그의 타고난 미(美)적 취향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미술품 또는 예술품을 역사적 기록에 덧붙게 마련인 
윤색을 걷어낼 수 있는 역사적인 물증으로 보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의 역사왜곡 
역시 이같은 윤색의 대표적인 경우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는 사학자라면 물론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수련이 기본이겠지만, 또한 감식안(鑑識眼)을 갖고 그것을 
검증하는 능력을 아울러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문화의 꽃에 해당하는 
예술품을 정확한 안목으로 읽어냄으로써 뿌리에 해당하는 당대 이념의 전체 
영양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예컨대 조선 후기에 활짝 피어난 진경문화의 조선색(朝鮮色) 뒤에는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최고도로 완성시킨 조선성리학이 버티고 있으며, 우리의 
가을하늘처럼 파랗고 깊은 맛을 지닌 고려 순청자의 비색(翡色) 뒤에는 중국의 
경우와는 반대로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융합시킨 천태(天台) 이념의 후광이, 
그리고 고려 후기의 상감청자 뒤에는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아우르며 중국의 
점수돈오(漸修頓悟)를 돈오점수로 뒤집어 내세운 조계종의 이념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의 말을 주의해서 들어야 할 대목이 있다. 요컨대 그는 우리 
고유의 이념과 고유색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래문화를 무조건 
배격하는, 이른바 국수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일수록 좋다는 입장이며, 단지 그것을 우리화해 우리색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점이 포인트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그같은 
소화저작에 성공해 왔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역사기술에서 실증(實證)적으로 
입증해내고자 하는 최대의 핵심이다. 

그는 불가(佛家)와 무척 인연이 깊다. 우선 서너살 먹은 어린시절부터 마음에 
안차는 사람한테는 절을 안하면서도 스님들만 오면 절을 했다는 것. 그리고 한번은 
겨울 산길을 한밤중에 죽도록 헤매던 중에 그의 앞에 육척 거구의 무섭게 생긴 
스님이 덜미를 잡으려고 쫓아오자 놀라 도망치다가 제길을 찾아들게 됐다는 등의 
얘기를 그는 스스럼없이 풀어놓는다. 그같은 ‘종교체험’은 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과 아울러 낙관적인 강인함을 선사한 모양이다. 그래선지 그는 봉도 
안뜯은 채 꽂혀 있던 100여권의 대장경 인쇄본에 넋이 나가 보화각에 주저앉은 
이래, 30여년을 간송미술관의 해태처럼 꿈쩍하지 않고 독신으로 버텨왔다. 그나마 
처음 10여년은 책을 읽다 통금을 넘기기 일쑤여서 결국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의자를 붙여놓고 기거하기도 했다는 것. 

따지고 보면 부처님 대신 역사(歷史)쪽을 선택했다 뿐이지 ‘나름의 방식으로 
출가한 것 아니겠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그는 주저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기꺼이 아들의 한복수발을 하는 어머니가 최선생의 삶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저간의 뜻도 대강 그런 어름에 있는 모양이다. 

그는 우리 역사, 문화사, 미술사의 전체 흐름을 두루 돌아본 결과 우리 문화의 
특색을 강경명정(剛硬明正) 넉자로 압축할 수 있다고 했다. 강경이란 우리 국토가 
전부 화강암으로 돼있기 때문에 우리 성정에도 그같은 암석끼가 들었다는 것이며, 
명정이란 사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경계가 분명한 성정을 지녔다는 것이다. 겸재 
그림이나 추사 글씨의 강한 암석끼가 바로 그것이며, 이것은 예술양식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 민족 고유한 
색깔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편 유연한 적응력은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두말없이 시인했다. 앞면의 장점이 뒷면의 단점과 동전의 양면인 
것은 당연지사일 터. 그렇다면 우리만의 고유색에 당당한 자부심을 지니는 것은 
뒤집어 우리의 약한 고리를 정면으로 보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보학(譜學)의 대가다. 그가 수시로 짚어내는 다방면의 해박한 계보에 
대해서는 혀가 내둘러질 정도다. 게다가 위창 오세창과 간송 전형필에서 혜곡 
최순우로 연결된 조선적 감식안의 적통(嫡統)을 자신이 이었다는 자부심은 그에게 
대단히 소중해 보였다. 그래서 “적통을 무척 중시하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물어보니 그는 “그걸 잃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또 
“적통에서는 왠지 기득권이나 권력의 냄새가 난다”는 필자의 지적에는 “나라가 
망할 때 주변의 형편없는 모습들만 보이게 마련인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체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로 답한다. 뒤이어 필자의 머릿속을 메운 상념은 ‘당당한 
주체의식’과 ‘비판적인 자기성찰’ 사이에서 균형잡힌 자의식을 유지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아뜩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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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로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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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1966년부터 현재까지 간송미술관의 연구실장을 맡아 ‘간송문화(澗松文華)’ 
55집을 펴냄. 

1975년부터 서울대,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학과와 미대에서 강의하면서 많은 
제자를 키워냄. 

저서로 ‘겸재정선 진경산수화’ ‘추사정화’ ‘불상연구’ ‘진경시대 1, 
2’(공저) 등이 있음. 


강영희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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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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