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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6일 금요일 오전 11시 23분 52초
제 목(Title): 뉴스+/최종길 교수 고문으로 사망 


“최종길교수 고문으로 사망”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함께 끌려간 김장현씨 증언  
    

아주 착잡한 만남이었다. 단풍이 막 불타기 시작한 서울 남산 산허리에서 두사람은 
어떻게든 웃으려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지난 73년 중앙정보부에서 유럽거점 간첩단사건과 관련해 조사받던 중 투신자살한 
것으로 발표된 전 서울대 법대 최종길교수의 아들 광준씨(34·부산대 법대 
조교수)와 당시 그곳에서 같은 사건으로 조사받고 4년 실형까지 산 김장현씨(63). 

 두 사람은 초면이었다. ‘NEWS+’의 주선으로 10월31일 옛 중앙정보부 (현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자리) 남산분실 수사국과 지하벙커 등을 함께 둘러본 두사람은 
북받쳐오르는 감회를 억누르지 못했다. 

“어두운 방 저편에서,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백이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최씨) “25년 세월이 흘렀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습니다. 
한달 이상 갇혀 모진 물고문과 몽둥이 세례 속에 ‘간첩 김장현’이 만들어진 
곳인데 어떻게 잊을 수 가 있겠습니까”(김씨) 

그동안 참았던 말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두 사람은 나이차를 넘어 진한 정을 
느끼는듯 헤어질 줄을 몰랐다. 서로를 위로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모자랐다. 두 
사람 모두 절실한 신원(伸寃)의 욕구를 안은 듯했다. 최씨의 경우엔 선친의 
간첩누명을 벗기는 동시에 아직도 의문 투성이인 사인을 백일하에 밝히는 일, 
그리고 김씨는 ‘강요된 간첩 자백’ 이후 ‘난파선처럼 살아온 사반세기’를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번은 외치듯 얘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온몸에 넘쳤다. 

10월17일 서울대 법대에서는 최종길교수의 25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고인의 동료교수였던 이수성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수석부의장은 “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최교수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면서 “다시는 
그런 죽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최교수의 사인이 정확히 밝혀지고 그의 누명도 
벗겨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도식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최종길교수 
추모사업회’는 이수성 배재식전서울법대교수가 추모문집 발간을, 김승훈신부가 
사인규명을 각각 책임지기로 했다. 

도대체 최교수 의문사 사건과 그 배경이 된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이란 무엇인가. 

73년 8월8일 김대중씨 납치사건으로 세계의 이목이 박정희정권과 중앙정보부로 
쏠리면서 그해 가을 전국 대학가는 유신반대 데모로 들끓었다. 당시 국내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마침 한해 전의 7·4공동성명 이후 다소 이완된 
통일논의에서 정부의 배타적 주도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책은 
역시 ‘간첩단 사건’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그때 중정이 취한 지렛대는 67년 동백림사건(‘NEWS+’ 90호 참조)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체류 지식인들의 동베를린 북한대사관 방문 또는 북한인사 접촉 
여부였다. 중정은 동백림사건 당시 프랑스 총책으로 지목됐던 노봉유씨(미체포·그 
뒤 알제리에서 사망)와 인천중학교 동창인 이재원씨(미체포·네덜란드 유학생)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와 연고가 있거나 유럽에서 그와 접촉했던 인물들을 ‘엮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꼭 10년전, 경제과학심의회의 공무원으로 세미나 참석차 유럽에 갔을 때 
이재원씨와 알게 돼 그와 함께 동베를린까지 방문했던 김장현씨가 우선 
잡혀들어가고, 이어 독일 유학중이던 김성수씨(상자기사 참조)가 ‘김장현씨의 
친구’라는 죄로 엮인다. 

수사가 한달쯤 진행된 끝에 거의 마무리될 무렵인 73년 10월16일, 이번엔 이씨의 
인천중 동기생으로 독일에 유학(1958~62)했던 최종길교수가 중정으로 소환된다. 
그는 교수회의에서 시위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마구잡이 구타에 항의하는 등 이미 
당국의 눈밖에 난 상태였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최교수가 10월19일 새벽 
1시반 조사받던 건물의 7층 화장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이 가족들에게 
전달된다. 여기엔 “동베를린에 다녀온 사실이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최교수의 자살 소식과 동베를린 운운의 중정 설명을 전혀 믿지 
않았다. 시체부검에 의사인 부인을 포함해 가족의 입회가 사실상 봉쇄된 것은 물론 
장례 때도 가족의 시체 접근이 원천차단됐기 때문이다. 때론 이같은 
‘정황증거’가 ‘직접증거’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해주는 법.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지난 74년 12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중정 내부의 제보를 근거로 
‘최교수가 전기고문기의 오(誤)작동에 따른 심장파열로 사망했다’고 폭로하면서 
사태는 한단계 진전되는 듯했다. 

최교수 사망사건은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단 한발짝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NEWS+’ 취재진과 만나 사건발생 25년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김장현씨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증언을 했다. 

“남산 지하실에서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한달쯤 지나 조사가 마무리될 무렵 내 
방의 두세 칸 앞에 ‘서울대교수 최종길’이라는 명패가 걸렸다. 당시 중정 
지하실에서 조사받던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최교수뿐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수사관의 감시 아래 화장실에 갈 때 맞은편에서 좀 퉁퉁한 사람이 다리를 절며 
화장실쪽으로 걸어오더니 얼떨결에 나에게 목례를 했다.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최종길이구나’ 생각했다. 그도 나처럼 고문 때문에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김씨는 그 뒤 최교수와 다시는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선 어느날 갑자기 
수사요원들이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더니 김씨에게 “며칠 조용한 데에 가서 
쉬다오라”며 서울구치소로 보내더라는 것이다. 수사관을 제외하면 
중정조사과정에서 최교수를 목격한 유일한 인물인 김씨는 ‘그날’이 최교수의 
사망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고문 체험’을 설명했다. “처음엔 고향이 목포인데다 
경제부처에 근무한 ‘죄’로 김대중씨의 ‘대중경제론’ 집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무조건 대라는 겁니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얘기지요.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인가’라고 대들면 몸을 웅크리게 하고 꽁꽁 묶은 뒤 욕조에 발랑 눕히고 물을 
먹입니다. ‘얘기하겠다’는 소리가 무조건 입에서 튀어나오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얘기할 거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이번엔 온갖 협박이 시작되지요. 
‘휴전선에 끌고가 쏴죽인 뒤 월북하려 했다고 발표하겠다’ ‘황산을 부어 살을 
녹인 뒤 뼈는 갈아 날려버리겠다’ 등등. 그쯤 되면 ‘나는 산 목숨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돼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자신은 이미 7, 8회 이상 물고문을 당한 
상태였는데 최교수가 들어온지 하루이틀 사이에 ‘비슷한 몰골’이 됐던 사실을 
감안하면 고문을 당해도 어지간히 당했던 것 같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그밖에 
최교수의 미국인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최근 “당시 주한 미CIA 책임자 도널드 
그레그(나중에 주한대사)가 최교수 사건을 자살이 아닌 고문치사로 언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유가족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들은 모두 ‘최교수 고문치사’의 새로운 정황증거인 셈이다. 물론 
당시의 중정 관계자들은 “발표했던 내용 이상 더 얘기할 것이 없다”며 진술을 
거부하거나 아예 최교수 가족 또는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이제 발생 25년만에 김장현씨의 증언 등으로 전기를 맞게 최교수 사인규명 문제와 
유럽간첩단 사건이 백일하에 진상을 드러내고, 나아가 우리 현대사의 치부에 
해당하는 각종 ‘의문사’와 ‘조작 간첩’ 사건들도 빛을 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 창 희 기 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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