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5일 목요일 오전 11시 12분 09초 제 목(Title): 윗글각주 * 이 연구는 1997~98년도 연세대 현대한국학 연구소의 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1) 김홍식 외,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 민음사 1997. 2) 여러 학자들의 입장을 이렇게 둘로 단순화했을 때, 이들 내부에서 나타난 입장의 다양성을 무시하게 되는 문제는 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을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용어는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이라고 여겨진다. 최근 두 입장을 대표하여 논쟁에 참여한 글들은 다음과 같다. 주종환, 「중진자본주의론의 ‘근대’ 개념과 신식민사관」, 『역사비평』 27호(1994년 겨울호); 안병직, 「식민지시대 연구」, 『시사저널』 (1996년 7월 4일자); 박명규, 「낡은 논리의 새로운 형태: 宮嶋博史의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비판」, 『韓國史硏究』 75권(1994년); 이영훈, 「土地調査事業의 收奪性 재검토」, 김홍식 외, 앞의 책; 조석곤,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창작과비평』 96호(1997년 여름호); 정태헌, 「수탈론의 속류화 속에 사라진 식민지」, 『창작과비평』 97호(1997년 가을호); 신용하, 「’식민지근대화론’ 재정립 시도에 대한 비판」, 『창작과비평』 98호(1997년 겨울호); 안병직,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창작과비평』 98호(1997년 겨울호). 3) 中村哲, 「近代 동아시아에 있어서 地主制의 性格과 類型」, 안병직 외, 『近代朝鮮의 經濟構造』, 비봉출판사 1989. 4) 같은 글; 宮嶋博史,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東京大 東洋文化史硏究所 1991년; 김홍식 외, 앞의 책. 5) 이 입장의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박문규, 「農村社會分化の起點どしての土地調査事業に就て」, 『朝鮮社會經濟史硏究』 1933; 이재무, 「朝鮮における’土地調査事業’の實體」, 『社會科學硏究』 7권 5호(1955년); 신용하,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지식산업사 1982. 신용하는 최근의 연구에서 전국 농경지의 약 5.8%, 임야의 약 59.1%, 종합적으로 전국토의 약 50.4%가 약탈된 것으로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신용하, 앞의 글, 22면 참조. ------------------------------------------------------------------------------- - 6) 배영순, 「朝鮮土地調査事業에 있어서 金海郡의 土地申告와 所有權 査定에 대한 실증적 검토」,『인문연구』 8권 2호(1987); 조석곤, 「朝鮮土地調査事業에 있어서 所有權査定過程에 關한 한 硏究」, 『經濟史學』 10호(1986). 7) 이영훈, 앞의 글, 509∼10면 참조. 8) 정태헌, 「일제하 경제사 인식의 정립을 위한 시론」, 『역사와 현실』 12호(1994), 29면; 「일제하 자금유출 구조와 조세정책」, 『역사와 현실』 18호(1995) 참조. 9) 물론 이에 관해서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다양한 주장 중, 특히 사회구성체론에 입각한 연구들은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적 근대화의 경로를 모색하기도 한다. 식민지근대화론자 중에는 영국적 자본주의 모델인 계급의 3분구조(지주-농업경영자-농업노동자)의 예외성을 주장하고 소농사회의 적합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농사회론은 아직 완전히 입증된 논지가 아니다. 유럽의 프랑스나 아시아의 중국이 모두 소농사회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경우(특히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경우)로 인용되기도 한다. 이에 관해서는 Robert Brenner, “Agrarian Class Structure and Economic Development in Pre-Industrial Europe,” Past and Present No. 70(1976); Philip Huang, The Peasant Family and Rural Development in the Yangzi Delta, 1350~1988, Stanford Univ. Press 1990 참조. 10) 가령 정태헌,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역사비평사 1996, 24면; 조석곤, 「수탈론과 근대화를 넘어」, 『창작과비평』 96호(1997년 여름호), 369면 참조. ------------------------------------------------------------------------------- - 11) Mitsuhiko Kimura, “Standards of Living in Colonial Korea,”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1993년 제3호. 12) 川上常郞, 『土地調査綱要』, 1909, 1∼3면. 13) 광무양전의 긍정성을 주장하는 전자의 대표적인 연구는 한국역사연구회 근대사분과 토지대장반,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민음사 1995)이며, 후자의 대표적인 연구는 이영훈, 「光武量田에 있어서 ‘時主’ 파악의 실상─忠淸南道 燕岐郡 光武量案의 사례분석」, 김홍식 외, 『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민음사 1990)이다. 14) 度支部, 『驛屯土實地調査槪要』; 이영훈, 「土地調査事業의 收奪性 재검토」, 526면 참조; 신용하, 앞의 글. 15)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타인의 토지에 대한 이용은 상당히 자유로웠고, 그 결과 한 토지에 여러 권리가 중복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최원규, 「韓末·日帝初期 日帝의 土地權 認識과 그 정리방향」, 『韓國 近現代의 民族問題와 新國家建設』, 金容燮敎授 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3, 지식산업사 1997, 318면 참조. ------------------------------------------------------------------------------- - 16) Douglas North, Structure and Change in Economic History, W. W. Norton and Co. 1981. 17) 김용섭, 「羅州 李氏家의 地主經營의 成長과 變動」, 『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일조각 1992. 18) 배영순, 「韓末·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개정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88; 조석곤, 「土地調査事業과 근대적 地稅制度의 확립」, 김홍식 외, 앞의 책. 19) 전자의 주장은 林炳潤, 『植民地における商業的農業の展開』(東京大出版會 1971)에서 찾아볼 수 있고, 후자의 주장은 조석곤, 이영훈, 앞의 글에서 나타난다. 20) 宮嶋博史,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序說」, 梶村秀樹 외, 『韓國近代經濟史硏究』, 사계절 1983. ------------------------------------------------------------------------------- - 21) 배영순, 앞의 글, 210면. 22) 宮嶋博史,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528∼29면. 23) 졸고, “Peasants, State, and Landlords,” Ph. D. dissertation, Univ. of Chicago 1994, 2장 참조. 24) 조석곤, 「土地調査事業과 근대적 地稅制度의 確立」, 김홍식 외, 앞의 책. 25)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각년판 참조. ------------------------------------------------------------------------------- - 26) Bruce Cumings,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Northeast Asian Political Economy,” Frederic Deyo e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New Asian Industrialism, Cornell Univ. Press 1987, 51∼52면. 27) Hilary Conroy, The Japanese Seizure of Korea: 1868~1910, Univ. of Pennsylvania Press 1960. 28) Jon Halliday,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ese Capitalism, Pantheon Books 1971, 100면. 29) 상업자본과 산업자본보다 농업자본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토지소유권의 법제화에 힘입은 면과 함께 당시에 조선회사령이나 이와 유사한 법적 통제를 통해 자본의 농업 집중을 유도한 면도 있다. 30) 宮嶋博史,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序說」, 梶村秀樹 외, 앞의 책, 308면. ------------------------------------------------------------------------------- - 31) 堀和生, 「日帝下 朝鮮에 있어서 植民地 農業政策」, 梶村秀樹 외, 앞의 책, 359면. 32) 朝鮮總督府, 『朝鮮小作年報』, 148~49면. 33)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각년판 참조. 34) 堀和生, 앞의 글, 364~65면. 35) 朝鮮總督府, 『朝鮮の群集』, 555~59면. ------------------------------------------------------------------------------- - 36) 堀和生, 앞의 글, 372면; 飯沼二郞, 「日帝下 朝鮮에서 이루어진 農業革命」, 飯沼二郞·강재언 편, 『植民地時代 韓國社會와 抵抗』, 백산 1983, 91면. 37) 유재건, 「식민지·근대와 세계사적 시야의 모색」, 『창작과비평』 98호(1997년 겨울호), 67면 참조. 38) Bruce Cumings, “The Legacy of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Raymond Meyers and Mark Peattie eds.,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Princeton Univ. Press 1984, 490면.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