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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1일 일요일 오전 01시 34분 13초
제 목(Title): 이덕일/ 조선의 정경유착,정치자금,뇌물.


 
                                                                  



                            ○ 역사산책 ●

               조선의 정치자금과 뇌물, 그리고 정경유착 

                “하인에게 뇌물 줬지 난 몰랐네” 

   ◇정통성이 약한 임금일수록 뇌물을 받은 고위 관료들에 대한 처벌은 약했다.
   뇌물을 준 자만 엄격하게 벌하고 받은 자는 무사하니 인사청탁과 상납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구조화된 부패정치는 조선을 빈사 상태에 빠뜨렸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돈 이 발언하면 다른 모든 것은 침묵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여기서 발언하는 주체인 돈은 「부정한 돈」이란 전제가 따른다. 돈이
   발언하면 원칙이 무너지고 따라서 사람들의 염치가 없어져, 사회는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라 금수의 세상으로 변한다. 부정한 돈이 정책을
   결정하는 체제가 이른바 금권정치인데, 그 구조가 견고할수록 그 규모
   또한 커진다. 

   우리 정치체제는 겉으로는 민주정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금권정치라는 지적에 대해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지금 현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정치권 사정도 결국 돈 문제다. 정치의
   금권화는 사회 전반의 부패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이를 타파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비단 현대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뇌물이나 비자금과 관련된
   사건은 적지 않다. 깨끗한 벼슬아치를 뜻하는 「청백리(淸白吏)」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옛날에도 그만큼 깨끗한 관료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에서 부정한 돈이 개입돼 발생했던 정치사건을 살펴보는
   것은 깨끗한 사회를 지향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숙종의 정권 유지 비용


   조선시대에도 정권 유지를 위한 비자금은 존재했다. 그 비자금을
   관리한 대표적 인물이 숙종(재위 1674~1720)의 외척 김석주였다. 그는
   남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공작을 전개했는데
   김환(金煥)이라는 자를 정보원으로 고용한 후 풍부한 공작금으로 남인
   허새(許璽)의 옆집을 사서 이사시켰고, 다른 남인들의 동태를 파악하게
   했다. 

   김석주는 반대당파의 암살 기도를 우려해 서울에 집을 아홉 채나
   구입해두고 하루씩 돌아가면서 잤다. 그가 자는 곳은 아무도 모르는,
   일급 비밀이었다. 물론 아홉채의 집을 구입한 비용도 비자금이었다.
   그런데 김석주가 사용한 자금을 딱히 뇌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의 숙부는 현종의 장인 김우명(金佑明)이었으므로 숙종의 모후(母后)
   명성왕후와 김석주는 사촌간이었다.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주변에 믿을 만한 종친이 적어 모든 정치적 현안을
   김석주와 의논했고, 김석주는 뛰어난 지모와 남다른 배포로 정국을
   주도했던 것. 

   그가 정국을 주도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 역시 풍부한
   비자금이었다. 그는 정치자금에 관한 한 부족함을 몰랐다. 국왕의
   비자금인 내탕금을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집안 또한
   재력이 풍부했다. 이를 테면 그의 할아버지인 김육의 상(喪)을 치를 때
   왕가에서만 할 수 있는 수도(隧道:산허리를 깎아 길을 만드는 것)를
   사용했다해서 논란이 됐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아무튼 김석주가 주도했던 숙종 초·중기의 정치 기상도는 그가 뿌린
   공작금만큼이나 어둡고 음울했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사이에
   정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때마다 막대한 정치자금이
   동원됐다. 그만큼 조선의 역사는 퇴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준 자만 처벌받는다?


   조선 시대에 가장 보편화된 뇌물의 유형은 자리 보전과 승진을 위한
   것이었다. 관리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조(吏曹)의 요직자나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승들, 그리고 육경(六卿)의 집은 인사를
   청탁하는 인물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세조 11년에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金震知)와 도사(都事)
   강안중(姜安重)이 의정부, 육조, 승정원 등 중앙의 유력자들에게
   자리보전을 위해 뇌물을 쓴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뇌물로 상납한
   물건이 관찰사나 도사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충청도 백성들로부터
   불법적으로 거둔 것이었기에 문제는 심각했다. 

   세조가 직접 뇌물 제공 여부를 심문하자 김진지는 『의정부와 육조,
   승정원에 쌀과 콩을 각각 1곡(斛:10말)씩 주었습니다』라고 실토했는데
   이는 물론 축소 답변이었다. 그러나 수량의 다과를 떠나 뇌물 사건에
   이름이 거론된 당사자들이 대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승, 판서 등이
   차비문 밖에 나와 대죄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복부(僕夫:하인)에게
   준 것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뇌물은 청탁자인 김진지의 하인이 대상자인 정승, 판서가의
   하인들에게 전달했을 것이므로 고관들이 직접 받지는 않았겠지만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논리였다. 좌의정 구치관(具致寬)만이
   받지 않아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몰랐다』는 이들의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물론 세조가 이런 변명을 믿을 만큼 순진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조는 뇌물에 관련된 이들 고관들을 불문에 부쳤다. 세조는 『여관에
   있을 때 친척이나 옛 친구가 주면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물며
   복부가 받고서 보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면서
   수회 사실을 몰랐다는 이들의 변명에 맞장구를 쳤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뇌물을 받은 고관들은 법을 굽혀 용서하면서도 뇌물을
   준 김진지에게는 법보다 강하게 처벌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였다.
   세조는 뇌물을 받은 대신들에게 『인군(人君)의 마음으로 어찌 사람을
   죽이려 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도『한 사람을 죽여서 만 백성을
   살리고 그 나머지를 경계함이 옳지 않겠느냐?』라고 물었는데, 이는
   김진지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뇌물을 받은 대신들이 뇌물을 준
   인물의 처리 문제에 대해 입을 열 수 없음은 당연했다. 

   공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병조판서 김질이 겨우 김진지의 처형을
   만류하고 나섰다. 그의 어미가 나이 90을 넘긴 데다 외아들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세조는 강경했다. 

   『법이란 만세에 전하는 것이니 어찌 어미가 늙었다고 변함이
   옳겠는가?』 

   결국 김진지와 강안중은 처형되었다. 세조는 나아가 부정을 감찰해야
   할 사헌부 관리들이 감찰에 소홀했다며 추국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뇌물을 준 자만 처벌하고 받은 자를 벌하지
   않으면 이후에 뇌물받는 무리들을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라며
   수뢰 고관들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세조는 『네가 처결할 일이
   아니다』라며 사헌부를 추국할 때와는 정반대의 자세를 보였다.
   사헌부도 지지 않았다. 거듭 세조에게 주청했다. 

   『적은 물건을 받는 것도 용서할 수 없는데 백성의 고혈인 쌀과 콩을
   고관들이 공공연히 받았으니 국문하소서』 

   그러나 세조는 끝까지 거부했다. 

   『그렇지만 조정을 다 고칠 수 있느냐? 하물며 모두 공훈이 있는
   장수와 재상이니 이런 일을 특별히 용서하지 않고 무엇을
   용서하겠느냐?』 

   이처럼 세조가 공신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고 대신
   하위관리들에게는 강경한 처벌을 한 것은 그의 약점 때문이었다. 그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집권함으로써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이 부족했다. 따라서 세조는 이 뇌물 사건의 처리 본보기를 통해
   공신의 약점과 하위관리들의 두려움을 동시에 유발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사정에 사(私)가 끼었으므로 제대로 된
   사정이 될 수가 없었다. 


                       수사관 방해하는 고관들


   김진지가 뇌물을 준 것도 자리 보전과 승진을 위한 것이었는데 조선은
   이런 유형의 인사청탁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조선은 인사 청탁을
   막기 위해 개국 초인 정종 1년부터 「분경(奔競)」을 금지했다.
   분경이란 고관들의 집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며 뇌물을 바치는
   엽관(獵官) 운동을 말한다. 분경금지 조치란 고관들의 집에 출입하는 것
   자체를 금지한 것이지만 분경은 근절되지 않았다. 

   정종 때 금지조치를 내렸는데도 분경이 계속되자 그 뒤를 이은 태종은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즉위 초에 삼군부(三軍府)와 사헌부의 아전을
   시켜 고관들의 집을 찾는 자는 까닭을 물을 것도 없이 모조리 잡아
   가두게 한 것이다. 이 조치 나흘 후 지의흥삼군부사 김영렬(金英烈)이
   종친 이무(李茂)의 집에 분경했다 해서 파직됐는데 이는 하나의
   본보기였다. 

   그러나 분경은 계속됐다. 두 달 후에는 상장군 박순(朴淳) 역시
   이무에게 분경했다 하여 파직당하고, 석달 후에는 사평우사(司平右使)
   이문화(李文和)가 정승의 집에 분경했다 하여 파직되는 등 분경이
   잇따랐다. 

   세조의 아들인 예종은 비록 1년 2개월이란 짧은 기간을 재위에
   있었으나 강력하게 분경을 억제한 임금이었다. 예종은 사헌부 관리를
   시켜 고관들의 집을 감시하게 했는데, 함길남도 관찰사
   박서창(朴徐昌)이 반인(伴人:경호병) 김미(金美)를 시켜 신숙주에게
   표피를 뇌물로 주었다가 이 감시망에 적발되었다. 예종은 박서창을
   파직하고 김미를 의금부에 가두어 직접 신문하는 등 분경금지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예종의 분경금지 또한 그 의지만큼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아버지 세조처럼 뇌물수수자인 공신들을 처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부정일수록 강하게 처벌해야 하는데 받은 자는
   무사하니 분경과 뇌물이 근절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종 1년에 발생한 분경 사건. 당대의 공신인
   하동군(河東君) 정인지가 이 사건에 개입돼 있어 결국 처벌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한 분경 사건이 아니었다. 사헌부 조례(牲隸)
   등이 분경하는 인물을 체포하자 정인지의 가동(家童)들이 이들을
   제지했으며 사헌부 서리(書吏)와 실랑이하다가 옷고름이 풀리는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정인지가 직접 나타나 이들의 호패를
   내놓으라고 호통친 후 사헌부 관리임이 드러나자 『간간이 가짜
   금란자(禁亂者)가 있다』며 돌려보냈던 것이다. 

   사헌부 조례나 서리들은 요즘으로 치면 검찰 수사관들이었으니 국가
   기관의 공무집행을 방해한 큰 사건이었다. 모욕을 당한 사헌부에서
   『정인지는 가동을 다스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법사(法司)의
   아전(衙前)을 잡아 욕보였으니 국문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정인지는 세조의 집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신하였다. 예종도
   속으로는 이 사건에 분노했으나 『공함(公緘)으로 탄핵하라』는 종이
   방망이 외에 휘두를 것이 없었다. 공함이란 사헌부에서 당상관이나
   부녀자들을 심문할 때 서면으로 조사하던 것을 말한다. 서면조사라는
   것이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니,
   이는 사실상 공신인 정인지를 봐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위층들을
   처벌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경도 근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경 유착


   뇌물사건과 형태는 다르지만 그 성격은 같은 것이 과거에
   「관상유착(官商癒着)」이라 불렀던 정경유착이다. 세종 때 평안도
   관찰사였던 김점(金漸)은 최오을마대(崔吾乙鹿大)란 장사꾼을
   반인(伴人)으로 삼아 도내의 재물을 긁어모았다. 김점은 최오을마대를
   침실에 드나들게 하면서 재물을 긁어모았는데, 토관(土官) 같은 벼슬을
   팔고 옥사(獄事)도 뇌물 액수에 따라 처리하는 등 수뢰방법에 가림이
   없었다. 

   그는 사신들의 행렬에도 뇌물을 챙긴 인물이었다. 사신 길에 배행하는
   장사꾼은 국내의 인삼과 중국의 약재 등을 교역하여 큰 이익을 보았다.
   세종 때 광대 이법화(李法華)의 아들 오마지(吾陵知)가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려고 능단(綾緞) 각각 한 필을 무수리(水賜婢)
   내은이(內隱伊)의 식구에게 주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을 정도로
   사신 배행은 이익이 보장되는 일이었다. 

   김점은 사신의 행차에 배종하는 장사꾼을 여러 가지로 위협 공갈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후에야 보내주었다. 그가 교체돼 돌아올 때는 짐이
   150여 바리나 돼 세차례로 나누어 운반했는데도 짐바리를 실은 행렬이
   끊어지지 않아 보는 이가 놀랄 정도였다. 

   정승이 정사(正使)로 나서는 사신 행렬에까지 하위 벼슬아치인 김점이
   손을 벌릴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딸이 있었다. 그의 딸은 태종의
   후궁으로 숙공궁주 김씨였다. 그런데 김점이 일으킨 파문이 커지자
   임금은 숙공궁주 김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세금문제도 정경유착의 한 고리였다. 조선의 세금은 크게 토지세인
   전세와 군역, 그리고 공납(貢納)의 셋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군역과
   공납이 농민들을 괴롭혔다. 태조 7년 경기우도 도(都)관찰사
   박경(朴經)이 『수군 만호·천호가 자기가 관할하는 군적(軍籍) 가운데
   부강(富强)한 자는 뇌물을 받고 방환(放還)해 준다』고 상소했다.
   조선시대에도 부자에게 돈을 받고 군역을 면제해주는 사건은 그리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군사들은 산성 축조나 천릉(遷陵;임금의 능을 옮기는 것) 같은
   역사에도 동원됐는데, 이는 상당한 고역이어서 끌려온 군사들이
   역사에서 벗어나려고 뇌물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예종 때 세종대왕의
   능을 옮기는 역사가 있었을 때 이를 감독하던 천릉도감사(遷陵都監使)
   민혜가 면포를 받고 군사들을 풀어주었다가 발각됐다. 즉 뇌물을 받고
   군사들을 전역시켜준 사건이었다. 

   선대왕의 천릉에 동원된 군사를 빼돌린 행위에 예종은 분개했다.
   예종은 『나는 도둑질은 서민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사류(士類)도 도둑질을 하는구나』라고 분개하면서 민혜를 극형에
   처하고 그 처첩과 자손은 관노비로 영속시켰다.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은 부정이 개입할 소지가 가장 많은
   세법이었다. 농민들이 애써 공물을 마련해도 수납권이 있는
   감조진무(監造鎭撫)가 퇴짜를 놓기 일쑤였다. 감조진무는 공물을 대신
   납부하는 상인인 방납업자(防納業者)와 짜고 농민들이 납부하는
   공물을 퇴짜놓았기에 농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방납업자들의 비싼
   물품을 사서 납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인정(人情)에는 사람들 사이의 정이란 뜻만이 아니라
   뇌물이란 뜻도 담겨 있었다. 벼슬아치에게 주는 뇌물을 인정물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때론 감조진무에게 바치는 이 인정이 물품값의
   갑절을 넘기도 해서 농민들의 허리는 이래저래 휘기 마련이었다. 

   방납업자들은 고관과 선이 닿을 경우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예종 때 허안석(許安石)이란 방납업자는 고관들과 결탁해 많은 공물을
   대납했다. 방납업자 생활 수 년이 못 돼 성명방(誠明坊)에 커다란 집을
   지었는데 그 마룻대와 추녀끝을 궁궐처럼 붉은빛으로 채색하여
   참람하다고 물의가 일 정도였으니, 당시 방납이 얼마나 큰 이익을
   보장하는 이권인지 짐작할 만하다. 

   따라서 이 막대한 이익을 일개 상민인 방납업자가 다 취할 수는 없었다.
   함께 일을 처리하는 감조진무와 나누어 먹는 것은 물론 뒤를 봐주는
   고관들에게도 그 이상을 상납해야 했다. 그들이 착복하는 막대한
   이익분은 고스란히 백성의 고혈이었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적 공격과 표적수사


   뇌물 수뢰 사실은 정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문종 즉위년에 이조의 인사권을 쥔 이승손(李承孫)은 일가들을 부유한
   여러 군에 배속시키고 그곳 토산물을 무더기로 긁어모았다. 그 행렬을
   본 세상사람들이 『공물을 바치는 모양이로군』이라며 빈정대기도
   했다. 그는 뇌물 수수 방법으로 연회를 이용했는데, 한 번은 연회장에서
   열 명의 손(客)이 각기 소 혀를 바쳤는데 이는 곧 10마리의 소를 뇌물로
   바쳤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와 정적관계에 있던 이조판서 권맹손(權孟孫)이 이승손의
   수뢰 사실을 문종에게 밀계해 파직시켰다. 그러나 권맹손도 청렴한
   인물은 아니어서 1년 후에는 권맹손 자신이 도리어 수뢰죄로 파직되고
   이승손이 다시 서용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뇌물 수뢰는 개인적
   차원에서 정적 공격의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선조 때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면서 뇌물
   수뢰는 개인 차원의 공격을 넘어 상대 정당을 공격하는 재료로
   사용된다. 선조 11년 전랑(銓郞) 김성일(金誠一)은 진도 군수
   이수(李銖)가 윤현과 윤두수에게 뇌물로 쌀을 바쳤다고 공격했다.
   윤현이 서인이었기 때문에 동인인 김성일이 공세를 취한 것이다. 

   이수는 대간의 탄핵으로 구속돼 신문을 받았는데 동인이 장악한
   사헌부는 이수가 뇌물로 준 쌀이 장사꾼 장세량(張世良)의 집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일단 다른 일을 핑계로 장세량을 구속해 의금부로
   이송했다. 여론이 표적수사라고 비난하자 다른 뇌물 사건에 연루된 전
   옹진 현령 이신로(李信老)를 하옥하여 이른바 형평성을 맞추려 하였다. 

   진도의 공납업자인 장세량이 보관한 쌀은 공물값이었고 관계
   장부(案牘)도 모두 보존돼 있어서 별다른 증거를 찾을 수 없었으나
   정치적 사건이었던 탓에, 그는 무려 20여 차례나 혹독한 형신을 당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내가 살기 위해 어떻게 남을
   죽을 곳에 빠지도록 무함하겠는가?』라며 자복을 거부했다. 

   장세량의 혐의가 사실이라 해도 이는 뇌물을 보관한 데 불과하니 세 번
   이상 형신을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률이었기에 세간에는 비난이
   들끓었다. 장세량이 끝까지 자복하지 않자 무죄라고 판단한 선조가
   석방을 명령했다. 그러나 동인이 장악한 승정원은 임금의 특명을
   네차례나 거부하면서 의금부에 전하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도승지
   이산해와 입직 승지를 파면하고 이수와 장세량을 석방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정쟁이 격해지면서 상대당의 부패에 대한 견제와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경쟁했는데 남인
   윤휴가 대사헌으로 권세를 잡자 서인 남구만(南九萬)이『윤휴가
   금송(禁松) 수천 그루를 베어서 집을 지었다』라고 공격했다. 남인 좌상
   권대운(權大運)이 조사 후『윤휴가 지은 집은 십여 간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윤휴를 변호하자, 서인 판윤 김우형(金宇亨)이 재조사에
   나서 『서도금산(西道禁山)에서 벤 소나무 삼백 그루가 모두 윤휴의
   집으로 들어갔다』라고 반박했다. 양자의 조사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자 숙종은 형조판서 이관징(李觀徵)에게 재조사를 시켰는데
   이관징(李觀徵)은 남인이었으므로『그것은 윤휴가 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보고했고 숙종은 이를 믿고 윤휴를 위로했다. 

   숙종 때는 지금처럼 당론이 모든 것에 우선했다. 숙종 때는 거듭된
   흉년으로 백성들이 아사하는 등 재변이 잇따랐는데도, 당인들은 재난
   극복보다는 당쟁에 몰두했고 정권이 한 번 바뀔 때마다 상대당의
   당인들은 역모로 몰려 죽어갔다. 당쟁이 격화하니 부정이 줄어드는
   효과는 있었지만 당론이 국론보다 앞서는 가치의 전도현상이 일어났고
   나라와 백성은 당론에 희생될 뿐이었다. 


                        사정기관간 견제하기


   공신 등 특권층을 제외한 조선시대 뇌물 수뢰자에 대한 처벌은
   강력했다.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는 것은 물론 오른쪽 어깨에 「관물을
   도둑질한 자(盜官物)」라고 새기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사형당하기도 했다. 

   세종 때 서천, 남원 등지의 수령으로 관청 물건을 도용하고 전라도
   관찰사가 돼서는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어 일부는 권문세가에 뇌물로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했던 「장윤화 사건」이 터졌다. 

   장윤화는 비리사실이 발각되자 건어(乾魚)·포육(脯肉)·화분(花盆)을
   배 두척에 실어 박은 등 권력자에게 바쳐 무마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사헌부에서는 곤장을 치고 어깨 위에 관물을 도둑질 한 자라고
   자자(刺字)하자고 청했으나 세종의 감형으로 자자는 면한 채 부여로
   귀양갔다가 넉 달 만에 사망했다. 

   뇌물 근절에 수사기관과 법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선은 조사의 주체와 객체 간 결탁을 막기 위해
   엄한 직업 윤리를 규정했다. 조선시대에 관리의 감찰을 맡던 부서는
   사헌부였고, 사헌부에서 사건을 이첩받아 추국하는 기관은
   의금부였다. 당시 사헌부는 종친이나 대신들도 사헌부 관리를 보면
   피할 정도로 그 위세가 당당했다. 

   사헌부 관리들은 그 위세만큼 엄한 직업윤리를 요구받았는데 심지어
   이들은 일반 사람들과 사사로이 접촉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성종
   16년에 사헌부의 금란(禁亂) 서리 김경손(金敬孫)과 나장(羅將)
   조승로(趙承老) 등이 저자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것은 이들에게 얼마나 엄격한 직업 윤리를 요구했는지를 보여준다.
   사헌부 관리들이 저자 사람과 술을 마셨다는 보고를 받은 성종은
   심하게 화를 냈다. 

   『사헌부 아리(衙吏)의 소행을 보니 부호가 뇌물을 바친다면
   범법했더라도 놓아주고 그들이 잡는 자는 다 의뢰할 데 없는 약한
   사람일 뿐일 것이다. 경성(京城) 안은 왕화(王化:임금의 덕)가 가까운
   곳인데도 이러니 외방은 말할 것도 없겠다』 

   성종은 술에 관한 한 관대한 임금이었는데도 사건 관련자들을 전
   가족과 함께 평안도로 이주시킬 만큼 강하게 대응했다. 사헌부
   관리들이 일반인들과 자유롭게 접촉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이
   만연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오늘날 고위 공직자에 대한 검찰의 사정을 보면서 검찰의 부정은 누가
   사정하는가란 의문을 제기하는데, 조선은 사헌부와 의금부가 서로
   견제케 해 사정기관의 부정을 막고자 했다. 사헌부의 부정은
   의금부에서 감찰하고 의금부의 부정은 사헌부에서 감찰함으로써 상호
   견제 기능을 갖게 한 것이다. 

   조선의 사헌부 관리들은 대체로 처신을 잘 하는 편이었다. 세조
   4년에는 결성현감 김우신(金遇辰)이 관비(官婢)를 간음하고
   남형(濫刑)한 죄로 탄핵당하자 대사헌 황효원(黃孝源)에게 뇌물을
   쓰려다가 국문 당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사헌부 관리들은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뇌물사건은 사면에서 제외해야


   사헌부 장령은 정4품밖에 안 되는 중견 관직이지만 탄핵권이 있었기에
   정승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예종 때의 사헌부 장령 이육(李陸)은
   성품이 방달(放達:언행의 구속을 받지 않음)하고 소절(小節)에
   구애받지 않으며 장령(掌令)이 돼서는 삼가고 경계하여 친구와 만나도
   얼굴을 들고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예종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리 공직자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송사를 판결하는 관리들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가(勢家)를
   두려워하거나 청탁을 듣거나 뇌물을 받고 그릇 판결한 것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면한 뒤에 사건이 발각되면 논하지 않으므로, 이를
   징계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비록 사면한 뒤라도 그릇 판결한
   관리는「임금의 교지를 어긴 율」로 논해야 합니다』 

   임금이 즉위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모년 모월 모일 모시
   이전에 발생한 사건은 대역과 강상(綱常) 죄가 아닌 한 발각됐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한다』는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발각되지 않은 뇌물사건도 여기에 포함돼 훗날 죄상이
   드러나도 처벌받지 않는 폐단이 있으므로 뇌물사건은 대사면령에서
   예외로 적용해 교지를 어긴 율로 처단하자는 상소였다. 현재의 사정과
   관련하여 사회 일각에서 제기하는 과거 덮기 주장을 보며 음미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성종 때 부상(富商) 김득부(金得富)가 제용감(濟用監) 첨정(僉正)
   김정광(金廷光)에게 뇌물을 주어 추포(殖布:질 낮은 베)를 바치고 그
   대가로 국포(國布)인 정포(正布)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처음 사건을
   맡은 의금부 낭청(郎廳)이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려 하자 사헌부에서
   재조사를 실시했고 망신을 당한 의금부에서도 즉각 재조사에 나섰다. 

   김정광은 대신 김국광의 동생이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소훈(昭訓)
   윤씨의 친족이었는데도 원상 구치관은 『법은 모름지기 귀하고 가까운
   사람부터 먼저 적용해야 한다』며 사헌부에 동조했다. 재조사결과
   수뢰사건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악생 (樂生) 김산은 면포 17필, 정포(正布) 5필, 기와 1000장, 탄(炭)
   10석(碩), 재목 10조(條)를 뇌물로 주고 추포(殖布) 88필을 바쳤고, 양인
   김검동은 생사 2필, 명주 1필, 지초(芝草) 5두, 철정(鐵釘) 200매(枚), 술
   1분(盆)을 주고 추포 55필을 바쳤고, 양인 김어부개(金於夫介)는 기와
   2000장, 면포 20필, 시목(柴木) 3차(車)와 꿩·조개·배·물고기 등의
   물건을 뇌물로 주고 추포 39필을 바쳤고, 양인 서치손은 김정광에게
   당청첨(唐靑繩) 1부(部)와 녹초(綠錞), 꿩·물고기 등을 주고 추포
   29필을 바쳤고, 사노(私奴) 홍말생은 명박영자(明珀纓子) 1꿰미(串),
   시복(矢服) 1벌과 물고기·감귤 등을 주고 추포 10필을 바치는 등 무려
   36명이 뇌물을 건네고 질 나쁜 추포를 바치고 그 대가로 질 좋은 정포를
   지불받은 부정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조선시대 뇌물죄 처벌은 오늘날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보다
   열배는 엄했다. 뇌물을 바친 백성들은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겨우
   감형돼 곤장을 맞은 후 북쪽 지방의 역노(驛奴)로 전락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은 조선시대의 「국록을 받는 자가 법을 굽혀
   뇌물죄를 범하면 각각 그 주된 것을 통산하는 법」에 비정할 수 있는데
   뇌물 액수에 따라 처벌이 달랐다. 뇌물이 1관이면 장 70대, 1관 이상
   5관은 장 80대, 10관이면 장 90대, 40관이면 장 100대에 도(徒)
   3년이었고, 55관이면 장 100대에 유(流) 3000리였으며, 80관 이상이면
   교형(絞刑:교수형)에 처했다. 김정광이 받은 뇌물은 모두
   157관966문으로 이 법에 따르면 교형에 처해져야 했다. 

   의금부에서는 두 가지 죄가 함께 발각됐을 때는 중죄(重罪)에 따라
   논죄하는 법에 따라 김정광이 받은 뇌물은 국가가 몰수하고
   참형(斬刑:목이 잘리는 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김정광은
   의금부의 주청에 따라 목이 잘릴 뻔했으나 성종이 한 등급 감해 장
   100대에 변방의 종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정광은 그 이름이 「장안(贓案)」에 실리게 되었는데
   뇌물죄를 범한 관리들의 명단인 장안에 실리면 그 후손은 대대로
   벼슬길이 막혔다. 그러나 사헌부는 『김정광이 범한 죄는 근래에 없던
   일인데도 죽음을 면했으니 청컨대 율(律)에 의해 죄를 주소서』라며
   참형에 처할 것을 거듭 주청했으나 성종은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고관이 삭탈된 후 변방의 종으로 전락했으니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임금의 비자금, 내탕금


   조선의 국왕에게는 내탕금이란 합법적인 비자금이 있었다. 현재는
   비자금이라고 하면 전직 대통령과 일부 정치가들의 자금을 연상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조선 임금의 비자금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내탕금을 긍정적으로 사용한 임금이었는데, 북도에 흉년이
   들자 각신(閣臣:규장각 대신)을 보내 음식 진휼과 공상(供上) 감면 등의
   조치와 함께 내탕금을 내려 주린 백성들을 먹이기도 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도
   내탕금을 사용했다. 이장지인 수원 화산 부근의 244호(戶)를 신읍으로
   이주시키면서 내탕금 1만냥을 하사해 각 민호에 나눠 주었다. 정조는
   이장지 부근에 거주하던 20호에는 이미 후하게 계산해준 땅·집값에
   50냥을 더 얹어주었으며 특별히 가난한 민호들에게는 땅·집값의
   2~4배로 보상해 주었다. 또한 이사갈 지역의 집까지 내탕금으로
   지어주니 백성들이 임금의 이런 자상한 배려에 대해 감읍했음은
   물론이다.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도 내탕금을 긍정적으로 사용한 임금이다. 그는
   재위 7년(1731)과 8년에 거듭 흉년이 들자 내탕금을 대대적으로 풀어
   백성들을 구휼하게 했다. 그러나 영조의 내탕금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어야 할 아전들이 유령 호구를 만들어 대거 착복함으로써 내탕금은
   백성들의 주머니보다는 아전들의 주머니에 흘러들어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조가 사망한 후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관직 매매가
   많아지면서 뇌물은 조선을 빈사의 상태로 빠뜨린다. 실로 조선 멸망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부정부패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조선
   말 대원군이 등장해 부정을 일소하려다 며느리에게 축출된 후 민씨
   일족은 나라 전체를 거대한 부정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이 때는 고종도
   뇌물수수 대열에 합류할 정도로 국가 기강이 문란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대신은 물론 무당, 심지어 백정들까지 돈을 싸들고
   고종 주위를 맴돌았다고 적을 만큼 국왕의 부패는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구한말에 외국인들이 철도부설권이나 광산 등의 채굴권을 경쟁적으로
   따낼 수 있었던 것은 고종에게 건네 준 막대한 비자금의 힘이었다.
   국왕의 부정은 이처럼 국가의 이권을 외국인에게 넘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모친인 엄씨는 그나마 진명여학교와
   숙명여대를 설립하는 등 부정하게 획득한 자금을 올바르게 사용해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속담을 실현한 격이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개처럼 번 돈은 개처럼 쓰는 견자(犬者)들이 더 많은 것이
   문제다. 

   연산군이 황음에 빠지면서 발생한 현상은 고위층 부패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숙원과 흥청(興淸) 등이 연산군에게서
   받은 명호를 패면(牌面)에 써서 서울 안의 큰 집을 골라 바깥문에 못
   박고 집주인을 쫓아냈다. 

   집주인이 설사 사대부일지라도 임금이 관련돼 있기에 허둥지둥
   달아나느라 재산도 다 거두지 못했다. 거리의 부랑배들이 이들
   궁인(宮人)에게 뇌물을 주고 멋대로 남의 집을 골라서 패면을 걸고
   내쫓으며 남의 처첩(妻妾)을 거리낌없이 겁탈하니 지목된 집주인은
   갈피를 못잡고서 오히려 집을 뺏는 부랑자에게 뇌물을 주고 빌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가에 가서 고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국왕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부정부패는 그 사회를 도덕적 불감증에 물들게 한다.
   외국인들에게까지 조롱을 받는 우리 사회의 부정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척결해야 할 대상이다. 부정과 부패의 성장사이기도 한
   우리 현대사에서 부정의 자취를 씻어내는 일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며, 단순히 깨끗한 사회를 만들자는 구두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존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국기(國基)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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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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