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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1일 일요일 오전 01시 31분 33초
제 목(Title): 이도흠/신 아는만큼 보는 것이 아니라, 읽�


 
                                                                  



                            ○ 문화초점 ●

                   한 국문학자의 유홍준 공식 비판 

          아는 만큼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만큼 보인다 


   이도흠 〈한양대 강사·국문학 박사〉 


       「아는 만큼 본다」 라는 명제는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이제는 유행어가 됐다. 그는 이 저서에서
   미술, 특히 우리 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최선의 묘책」으로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를 제시했다. 그는 실제로
   아는 것을 바탕으로 문화유산 텍스트를 해석한 것에 자신의 예리한
   인상(印象) 비평을 더해 우리 문화유산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이것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그 타당성에 대해서는 유홍준교수가 이
   저서에서 탁월한 시각과 문체로 입증하였다. 

   하나의 돌에 피를 돌게 하고 온기를 담아 아주 가깝고 친밀한 살붙이로
   느끼게 하였다. 그가 아니면 누가 풀만 무성한 폐사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돌조각에, 이제는 잊혀버린 산골 식당에 이토록 따뜻한 말들을
   던져 존재하게 하고 그토록 깊은 의미를 새겨 가슴에 각인시킬 것인가.
   그의 이 저서로 부식되고 스러지던 우리의 문화 유산이 대중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으로 떠올랐으니 박찬호나 박세리 100여명이 한 것보다도
   더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감히 평하련다. 

   그러나 그가 문화유산을 하나의 텍스트로 놓고 읽는 방식에는 동조할
   수 없다. 유교수가 취한 텍스트 읽기 방식은 유교수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석한 틀에 독자들을 가두며, 이는 유교수의 막강한
   영향력과 권위 때문에 강력한 신화를 형성한다. 

   더구나 「아는 만큼 본다」라는 명제는 광고 카피로 쓰일 정도로
   지배적 담론이 되고 있고 이것 또한 엄청난 신화를 배출하고 있다.
   지식인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신화로부터 대중을 구출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분께 흠집을 내고 어설프나마 몇 자
   끄적이려는 의도가 여기에 있다. 우선 그의 글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제3권)「익산 미륵사터」편에서
   『백제 30대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실증으로 하여 「서동요」의 작자 서동을 백제의 무왕으로
   보고 있다. 

   유교수는 백제와 신라 양국이 적대국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라는 타인의 반론을 적으면서, 이에 대해 『당시 양국의
   관계란 근대의 민족국가 같은 폐쇄성이 아니라 마치 유럽 근세에
   왕통이 끊기면 이웃나라에서 왕을 모셔다 앉히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와 유사한 분위기로 이해해야 옳다』라며 어떤 근거도 없는
   추정으로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서동이 무왕이 될 수는 없다. 백제와 신라가 서로 국혼을 맺을
   수 없는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왕이 선화공주는
   물론이거니와 신라의 여자와 혼인한 예는 이 기록을 제하고는 없으며,
   무왕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실증인 『삼국유사』의 기록은 일연의
   착각이기 때문이다. 일연 스스로 이 부분에서 『옛 책에는
   「무강왕(武康王)」으로 적고 있으나 백제에는 이런 왕이 없으므로
   이를 무왕으로 본다』라고 부기하고 있는데, 백제 임금의 한자 표기는
   무강(武康)과 무령(武寧)이 통한다.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은 신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왕15년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자 신라가 이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라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비지와 혼인한 주체를 명시하지 않고
   있으나 나이나 지위, 관례를 고려할 때 당시 왕자인 무령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이의 주체는 무령왕으로 봄이 합당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확증은 아니다. 서동과 관련된 기록은 역사라기보다
   역사성을 갖는 설화로 봄이 더 합리적이다. 『삼국유사』 자체가
   역사와 설화가 공존하는 텍스트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이와 거의
   유사한 설화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내 복에 산다」 형
   민담, 「탄소장자담(炭燒長者譚)」이라는 장르로 구분될 정도로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내용도 「딸의 쫓겨남-마퉁(서동), 또는
   숯쟁이와 만나 부부가 됨-금의 발견-부자나 왕이 됨」으로 거의 같다. 

   이로 볼 때 이 기록의 원 텍스트는 숯쟁이, 마동(서동) 등 당시 가장
   가난하였던 이들이 왕이나 부자로 오르고픈 꿈을 형상화한 설화이다.
   이것이 무강왕이 왕자 시절에 신라 귀족의 딸과 혼인한 사실에
   부회되었고 일연이 무강왕(武康王)과 무령왕(武寧王)이 같은 호칭인 줄
   모르고 「무(武)」자가 같은 무왕(武王)의 이야기로 적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다. 


                    경덕왕, 문화대통령 될 수 없다


   3권 「경주 불국사」편에서 유홍준교수는 『경덕왕은 통일신라
   문화의 꽃을 피운 「예술의 왕자(王者)」였다. 요즘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문화 대통령」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불국사, 석불사, 석가탑, 다보탑은 물론 에밀레종, 경주 남산의 불상,
   안압지 출토의 판불(板佛)들 … 국립 경주박물관의 불상과 불교관계
   유물 중 뛰어난 것은 모두 이 시기(경덕왕 대)의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유물을 많이 남겼다고 그가 「간절히 바라는
   문화대통령」일 수 있는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경덕왕과 관련된 기록을 일별하기만 해도
   경덕왕이 좋은 왕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경덕왕은 한마디로 말해
   백성들의 삶이 어떻건 상관하지 않고 전제왕권 강화에만 매진한
   왕이며, 순수 우리 말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작업을 필두로 하여 우리
   고유문화를 중국화하여 민족문화를 본격적으로 식민지화한 왕이다. 

   우선 경덕왕 대는 가뭄, 지진, 태풍, 혜성, 메뚜기 떼 출현 등 신라
   역사상 천재지변이 가장 심한 시대였다. 이에도 불구하고 경덕왕은
   구휼은커녕 불국사와 석불사 조영 등 대형공사를 서둘러 백성들에게
   엄청난 조세와 부역의 짐을 지게 하고 중국식으로 제도를 개혁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데만 골몰하였다. 

   이로 인해 김사인, 이순 등 왕의 총신이 벼슬을 버리면서까지 극론으로
   왕의 패정을 따지며, 당대 최고 관직이었던 상대등과 시중들이 몇년을
   못 버티고 퇴직하고, 충담사가 왕사를 거절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백성들의 참상이 얼마나 처절하였고 패정이 얼마나 심하였으면
   백성들이 나라를 버리고 국외로 탈출을 하고 『삼국유사』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에서는 이후 하늘과 교통이 끊어져 신라에 성인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적고 있는가? 

   유홍준 교수가 1000여년 뒤에 다시 태어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다면,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국회의사당과 세종문화회관을 짓고,
   세계 최단 시일에 경부고속도를 완성하였으며, 근대화의 이름으로
   전통문화를 산산이 파괴하고 서구화한 박정희 대통령을 「요즘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문화대통령」으로 추켜세울 것인가? 


                     일방적 해독은 편견을 낳는다


   유홍준 교수는 1권 「동해 낙산사의 영광과 상처」편에서는 의상은
   관음진신을 친견한 반면에 원효는 관음을 만나지 못한 『삼국유사』의
   설화를 싣고 있다. 그런 후에 이를 「악의적인 유언비어」로 단정한다.
   『지배층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의상의 정신인데 대중들은 오히려
   원효의 사상을 더욱 신봉하였으니 그것을 뒤엎을 유언비어가
   필요했었다』는 것이다. 

   유교수는 이런 해석의 근거로 몇 가지 실증을 제시하고 있다. 의상은
   진골귀족, 원효는 육두품 출신이라는 양자의 계급에 대한 실증, 의상은
   국가의식이 강한 정치적 인물이고 원효는 대중적 불교를 지향한
   승려라는 점, 통일 이후 새로운 국가 체제의 설립을 위해서는 원효의
   자율성보다 의상의 체제 질서가 더 필요하였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실증에 대해서는 몇몇 신라 화엄사상 연구자로부터 줄기차게
   이견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유교수가 제시한 세 가지 실증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유교수의 해석을 진리로 단정하기에는 난점이
   있다. 

   설화 또는 문학이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기만 하는가? 문학은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프리즘이 한 줄기 빛을 무지개로
   반짝이게 하듯 작가의 의식과 비전을 통하여 현실을 굴절시킨다.
   바흐찐의 지적대로 『굴절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날것인 현실은
   문학의 내용으로 진입할 수 없다』. 마를 파는 장사치들이 왕족처럼
   살고픈, 이룰 수 없는 꿈을 무강왕(무령왕)의 「서동설화」로
   형상화하고, 고통스러운 삶 속에 있는 민중들이 실패한 영웅을
   미륵불로 환생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은 꿈을 꾸기에 존재한다. 최상의 사상가가 최상의 시인이
   될 수 없으며 최고의 사회학자가 최고의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유교수의 지적대로라면 이 설화를 지배층이 악의로 만들어 유포한
   것이 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를 수용하고 수백년간
   구전시킨 것은 당대의 민중이다. 유교수의 지적이 모두 사실이라면
   원효를 더 신봉한 민중이 자신들의 의사와 반대로 원효를 봉변당하게
   한 꼴이 된다. 이는 모순이다. 

   건국설화―건국신화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임―처럼
   지배이데올로기가 텍스트 속에 은폐돼 있는 경우 민중이 이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수용하기도 하지만, 이 설화처럼 텍스트의 표면에
   줄거리로 확연히 드러난 경우 민중은 자신의 비전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세계관에 맞게 텍스트를 변용시킨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교수가 텍스트 자체를 일방적으로
   해독한 점이다. 텍스트를 면밀히 보면 원효를 봉변당한 것으로, 패배한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 이런 판단에는 의상이 관음진신을 친견한 것이
   원효가 속된 여인의 모습으로 화한 관음을 알아보지 못한 것보다
   우월하다는 이항대립(二項對立)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층의 불교,
   또는 정통의 불교를 지향한 의상에게 관음의 진신이 나타나는 것이
   마땅하다면, 민중불교를 지향한 원효에게는 민중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거룩함을 지향하여 그 고고한 모습 그대로 계율을 엄수하는 것이
   엄숙한 의상식 불교수행이라면 때로는 실수도 하고 계율을 어기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정진(精進)하는 것이 인간의 따스한 얼굴을 한 원효식
   수행방법이다. 여기에는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필자의 논문 「삼국유사의 구조분석과 의미 해석」에 따르면
   삼국유사의 모든 설화가 서구식의 이항대립에 의한 우열보다는 차이를
   통한 조화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원효의 화쟁(和諍)사상 또한
   모든 대립과 갈등을 「차이를 통한 공존」을 통해 화해, 조화시키는
   사유체계다. 


                   닫힌 읽기는 닫힌 세계를 부른다


   왜 한국 최고의 미술평론가라 해도 과장이 아닐 유홍준교수가 위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을까? 첫째 오류는 서동이 무왕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검증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논거로
   사용하고 이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는 논거가 아니라 주관적인
   추정으로 반박한 데서 비롯한다. 둘째 사례에서 유교수는 경덕왕에
   대한 관련사료를 검토하지 않은 채 경덕왕대에 불국사 등 여러
   문화유산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만 의존하여 해석하는 바람에 오류를
   범하였다. 셋째 사례의 경우 사회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실증을
   바탕으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이의 시각으로 삼국유사
   텍스트를 해석하는 바람에 편견을 범하고 말았다. 

   이들 오류는 모두 『삼국유사』의 해석에서 빚어지고 있다. 어떤
   교수는 한 논문에서 『삼국유사』에 대하여 『일연이 민훤(閔萱) 등
   친원적이고 보수적인 권문세가의 후원에 힘입어 국존(國尊)에 임명될
   정도로 반민중적, 친원적이어서 피지배층의 갈등과 대립을 화해적
   분위기에서 해소하려는 의도로 삼국유사를 편찬했다』라고 주장한다. 

   유교수와 위 논문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는
   「아는 것」을 실증들로 놓고 이를 바탕으로 주관적, 또는 인상비평적
   해석을 한 데서 비롯한다. 이들은 원효와 의상, 일연 등 작자나 텍스트
   주체의 계급적 위치와 이해관계, 이념, 작품이나 문화유산을 생산한
   시대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이데올로기를 실증으로 하여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미학적 견해로는 맑시즘 비평과 가까우면서도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은 실증주의와 거의 같은, 우리나라 진보적인 학자들에게
   애용되고 있는 이런 비평방식을 「좌파 실증주의 비평」이라고
   명명하련다. 

   물론 이런 비평방식은 많은 미덕을 지닌다. 사회 현실과 예술 텍스트를
   유기적으로 연관시키고 예술을 삶과 유리시키지 않으며 더 나아가
   현실의 은폐된 모순이나 이데올로기를 인식하도록 한다. 엘리트
   위주로 연구되던 문학이나 예술 연구를 민중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또
   다른 시야를 제공한 것 또한 이 비평방식의 장점이다. 더구나 고대 문화
   예술의 경우 문헌의 고증, 작품을 낳은 역사적·사회 문화적 배경,
   작가나 향유층의 문학관 내지 세계관을 모르고서 작품을 연구할 경우
   주관적 오류를 범하기 쉽다. 아는 것, 즉 작품을 생성하고 향유한
   시대나 작가의 역사적·사회 문화적 실증에 대하여 많이 알수록
   작품을 보는 눈은 좀더 총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은 몇
   가지 문제점을 낳을 수 있다.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한 해석의 오류


   우선 아는 것을 실증으로 놓고 이를 바탕으로 진리를 검증하는 작업은
   끝없이 실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진리는 계속 유보된다. 쉽게 비유해
   이 비평은 끊임없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 해석이 될 수 있다. 

   위의 예에서 보듯, 수많은 사료에서 연구자의 가설을 입증하는 실증을
   찾아 발표된 썩 훌륭한 논문도 이를 반박하는 다른 실증이 발견되면 한
   순간에 무너진다. 필자의 비판 또한 다른 실증이 발견되면 재반박당할
   수 있다. 이처럼 검증은 계속 검증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칼 포퍼는
   검증(檢證)이 아닌 반증(反證)을 통하여 진리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실증주의를 한 단계 높이 발전시켰다. 수억 마리의 검은 까마귀를 잡아
   「모든 까마귀가 검다」라는 것을 검증했다 하더라도 단 한 마리의 흰
   까마귀만 반증으로 제시해도 이 사실은 보편법칙의 타당성을 의심받는
   것이다. 

   완성도가 높은 예술일수록 작가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미, 작가나
   향유층의 이데올로기와 예술 텍스트는 일치하지 않기 마련인데 좌파
   실증주의는 이를 동일시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 반민중적, 친원적
   성향을 가진 일연이라 하더라도 얼마든 자신의 계급적 입장이나
   이념을 떠나 창작을 할 수 있다. 

   삼국유사 설화는 오히려 민중적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 대부분이며
   거기에는 민중의 꿈과 현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것이 삼국유사를
   찬한 일연의 자유로움과 탁월함이다. 철저한 왕정복고주의자였던
   발자크가 당대 사회의 모순을 당시의 누구보다 예리하게 비판하고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었다고 지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맑스주의
   비평가인 루카치이다. 

   실증주의는 이미 객관적으로 인식된 것, 검증된 것, 이해된 것만을
   대상으로 하기에 해석의 지평을 축소한다. 가다머의 지적대로 이런
   이해와 관찰 방식은 선입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철저하게 과거에
   얽매인다. 

   때문에 이 방법론은 예술이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여는 것을 등한히 하며 수용자가 과거, 또는
   기존체제가 만들어놓은 실증에 의존하여 해석과 평가를 내리도록
   한다. 마르쿠제가 칼 포퍼에 대하여 목청을 높여 논쟁하면서
   실증주의가 기존체제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나는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의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을 깨기 위하여
   열 문제를 내는데 그 중 한 문제가 이육사의 「광야」라는 시의 주제를
   쓰라는 것이다. 90% 이상의 학생들이 『암울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내지 초인에 대한 기대…』식으로 토씨나
   어미만 다를 뿐이지 거의 대동소이한 답을 내놓는다. 이는
   「광야」라는 텍스트를 일제시대라는 사회경제적 배경, 이육사라는
   작가의 문학관 등의 실증과 대비시킨 것을 유일한 해석으로 싣고 있는
   국어 참고서에 아직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광야를
   독립군이 말 달리는 벌판으로만 연상하는 한 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한 실증주의적 읽기는 텍스트가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왜곡하며 그것 앞에 선 인간이 자유스러이 해독하는
   것을 방해하고 어떤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닫힌 읽기는 닫힌 주체를
   만들고 이는 또 닫힌 세계를 부른다. 


                        우리는 읽는 만큼 본다


   수용자에게 열린 텍스트일수록 작가의 의도를 떠나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며,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수록 미적 가치는 높다. 그렇기에
   로트만은 『정보는 미(美)이다』라고 선언한다. 

   광주 비엔날레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노부부가 전시장을 찾았는데
   할머니가 『뭔지 알기나 하면서 여기에 온 것이냐』고 핀잔을 주며
   대상을 받은 작품의 뜻이 무엇인지나 아느냐고 물었던 모양이다. 이에
   할아버지는 『내가 왜 몰라? 저것은 우리 인생이 병 위에 뜬 배와
   같다는 게야』하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한 미술평론가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대중의 자유로운 해석을 막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좌우를 불문하고
   실증을 바탕으로 기성 비평가가 해놓은 교과서나 참고서, 몇몇 잡지의
   해석과 그것이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였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를
   자유롭게 읽게 된 이들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기에, 이들 중 최소 반수 이상은 군사정권 시절 보수 언론이 행하였던
   것과 같은 조작이나 극좌나 극우의 이념적 선동에서도 자유로우리라
   확신한다. 

   「아는 것」이 꼭 실증일 필요는 없다. 유교수가 원용한
   유한준(兪漢雋)도 아는 것을 「형기(形器)와 법도(法度)를 차치하고
   먼저 심오한 이치와 그 가운데 숨어 있는 아득한 조화에 통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는 것을 바탕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본다는 것이지, 아는 것을 실증으로 놓고 이를
   바탕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유홍준교수가 김지하의 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비평방식의 눈으로 유한준의 글을 읽고
   기억하여 이를 왜곡시킨 것은 아닌가? 

   비평가 위주의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한 실증적 읽기는 좌우를 막론하고
   해석의 지평을 축소하며, 수용자의 자유를 제한한다. 해방이나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이 텍스트를 전체주의적으로 해독하여 해석의 지평을
   닫아버린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해석을, 텍스트를 창조하거나
   비평하는 몇몇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간주한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제 텍스트의 해석권을 대중에게 열어 놓아야 한다. 우리는 닫힌
   읽기에서 벗어나 열린 읽기로 우리 앞의 텍스트들을 보아야 한다. 그럴
   때 나는 자유로우며 이 세계 또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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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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