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28일 수요일 오후 12시 39분 34초 제 목(Title): 윈/허준의 생애와 사상 생애와 사상 의학철학에 바탕‘이상적 인간형’창출 김호 서울대 국사학과 조교 ------------------------------------------------------------------------------- - 서자 출신의 콤플렉스를 딛고 醫聖의 반열에 오른 허준. 의료인의 길을 택한 그는 젊은 시절 조선 당대의 명의 양예수를 만나 의술을 전수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엔 만연하는 질병에 고통받던 민초들을 위해 “동의보감”과 많은 언해본 의서들을 편찬했다. 그는 유교·도교·불교의 자연관을 수용해 당시 의술의 수준을 넘어 의학철학으로 끌어올렸다. ▲양평군 허준을 존경하던 한의학박사 崔光守(1932∼90)씨가 그린“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영정. “동의보감”의 첫장은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라는 인체도로 시작한다. 신형장부도는 인체의 장기와 그 특징을 그린 것이다. 옛 신선과도 같은 단순한 모습의 이 그림은 사실 간단치 않은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인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세가지 요소를 인간의 몸 속에 상징화한 도형이다. 옆으로 그려진 인체의 상반신 그림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 땅을 상징하는 몸 그리고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척추가 있다. 이는 하늘과 땅이 지닌 선천의 기운과 인체 안의 후천 기운이 인체 내부(척추의 길)를 통해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를 보여준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합일하는 지점이 바로 인체라는 설명이다. 바로 이 “동의보감” 서두를 장식한 ‘인간론’은 허준이 의학을 단순히 질병 치료의 기술로 여기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까지 고양시켰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경지는 물론 허준이 유학과 도가(道家)에 충분한 소양을 갖췄기 때문이다. 당시 중인 신분의 직업인이었던 의원이 이처럼 높은 학문 수준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의술을 철학 수준으로 고양시킨 것은 동양의학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허준을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점은 그가 주체성있는 학문으로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사람에게는 그들의 땅에서 나는 약초들이 효험이 있듯, 우리 몸에는 우리 땅에서 자라나는 약초가 적합하다”는 신토불이(身土不二) 이론을 펴 우리의 몸에 맞는 의학을 연 것이다. 허준은 1546년(명종 원년) 아버지 허론과 어머니 손씨(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과를 통해 입신하였으며 부안군수·용천부사 등 지방 외직을 두루 경험했다. 생모 손씨의 아버지는 지방 현령(縣令)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무과 출신의 청주 한씨였다. 따라서 허준의 외가와 친가 모두 무과를 통해 입신한 양반집안이었다. 그러나 허준의 어머니 손씨는 허론의 첫째 부인이 아니었다. 허준은 서자였던 것이다. 서자 출신 허준은 생래적인 콤플렉스를 타고났지만 양반집안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토양이 의술을 철학의 경지로 끌어올려 집대성하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사실 허준의 일생에서는 생모 손씨보다 큰어머니(嫡母) 김씨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큰어머니는 영광(靈光) 김씨로 전라남도 지역에 살았는데 그의 큰어머니 집안과 당시 고관대작이었던 유희춘과의 안면이 후일 허준의 출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의술을 학문경지로 끌어올려 허준의 형제는 모두 이복으로 형 옥(沃), 동생 징(生)이 있었다. 옥은 내승(內乘)이란 낮은 직책을 지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동생 징은 역시 서자였는데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문과에 합격하여 봉상시 첨정·승문원 교검·교리 등 내직과 영월·파주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하는 등 관료로 출세했다. 그러나 당시 문과에 합격할 때 다른 사람의 작문을 베껴 문제가 됐으며 또한 사람됨이 욕심이 많아 관물(官物)에 손을 대 파직당하는 등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허준의 출생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경기도 양천(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출생지보다 젊은 시절 생활했던 장소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볼 때 허준은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10대를 주로 해남과 담양을 축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보냈다. 비록 서자였지만 그는 부모님이 모두 양반 출신이라서 어려서 유학의 기본 소양과 글을 배우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후일 허준이 경사(經史)와 의학에 모두 밝은 드문 의원이라는 칭송을 받은 것은 바로 어려서 유교 수업을 받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9번지에 있는 허준의 묘소. 이 묘소는‘허준 선생 기념사업회’가 지난 91년 국방부의 허락을 받아 DMZ 안에서 찾아낸 뒤 복원했다. 그러나 서자라는 꼬리표는 그가 양반으로 출세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는 결국 대부분의 서자들이 택했던 양반 아래의 중인, 즉 기술관의 길을 걷고자 다짐했다. 특히 기술관 가운데서도 어려운 한문 실력을 겸비해야 했던 의관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허준은 한가지 결심한 일은 꼭 이루어내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라도 지역의 심약(審藥·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검사하기 위해 지역에 파견했던 종9품 벼슬)직을 수행하는 한편 의학 공부에 전념하여 지역사회의 의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10대에 그의 의술은 전라도 지역에서는 내로라 하던 의관들도 모두 칭찬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특히 큰어머니의 삼촌이었던 김시흡은 그의 의술을 보다 드높이기 위해 서울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전라도 출신 고관이었던 유희춘에게 허준을 소개했다. 유희춘과의 만남으로 허준은 일생일대의 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1568년 그의 나이 22세 때 허준은 드디어 서울에 입성해 유희춘을 찾아갔다. 이미 전라도 지역에서 의술로 이름을 날리던 허준이라 유희춘은 서울에서도 그의 의학적 포부를 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언젠가 서울에 올라 오면 자신을 찾으라고 말해 두었던 참이었다. 허준과 유희춘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허준은 유희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정도였다. 전라도의 다른 지역으로 몸소 왕진하여 유희춘의 친구들을 치료해주었다. 또 유희춘이 관직을 제수받아 서울에 상경하거나, 하직해 담양이나 해남으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또한 유씨 집안의 병치레는 허준이 도맡아 치료할 만큼 주치의로서의 역할도 했다. 이듬해인 1569년 윤6월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의 내의원직(內醫院職) 천거를 부탁했다. 허준의 첫번째 내의원 출사였다. 그동안 그의 의술이 서울의 양반들에게 매우 훌륭한 것으로 정평나 있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직함을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제 비록 말단이기는 하지만 모든 의원들의 선망의 대상인 내의원에 출근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희춘이 양예수에게 허준 소개 조선시대 서울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의술의 경우 최고 수준인 내의원 의원들이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한다는 사실은 이같은 높은 의학 수준에 접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당시 내의원 의관 중에서도 최고의 의원은 어의 양예수였다. 유희춘은 당대 최고의 의관 양예수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양예수 역시 유희춘이 서울에 거주하면 매번 문안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관계였다. 1570년 6월 양예수는 유희춘을 찾아가 유희춘의 보약을 의논하고 돌아갔다. 1573년에도 양예수는 유희춘의 부인이 질병으로 고생하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유희춘의 집에 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병문안 부탁도 들어주었다. 유희춘이 서울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월 양예수가 그를 문안했으며 1570년 8월에는 양예수와 허준이 모두 유희춘을 방문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유희춘을 매개로 자연히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으며, 허준의 내의원 입사 후에는 더욱 친밀해졌다. 당시 양예수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에서 50대였다. 그러니 20대 전반의 젊은이에 불과했던 허준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특히 양예수의 의술은 당대 최고였으며 그가 남긴 “의림촬요”(醫林撮要)가 후일 “동의보감”의 기초가 됐던 점을 생각한다면 양예수를 만난 것은 허준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미 내의원 의원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지닌 양예수와 함께 근무하게 된 것만으로도 허준은 양예수의 의술을 전수받을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허준 연표 1546 명종 원년 1세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출생 1575 선조 8년 30세 명의 안광익과 함께 왕의 병 진찰 1581 선조 14년 36세 纂圖方論脈訣集成 4권4책 교정 개편 1590 선조 23년 45세 왕자의 병 고침. 당상관에 오름. 1592 선조 25년 47세 임진왜란 발생, 임금의 파천에 함께 따라감 1596 선조 29년 51세 왕이 의서의 총정리 편찬 명령 1604 선조 37년 59세 扈聖功臣 3등으로 책록돼 양평군에 봉해짐 1607 선조 40년 62세 언해구급방 상하 2권2책 개편 1608 선조 41년 63세 선조의 별세에 따라 수의로서 책임 묻는 요청 잇따랐으나 광해군이 듣지 않음. 언해태산집요 찬술, 언해두창집요 개편 1610 광해군 2년 65세 14년만에 동의보감 완성 1615 광해군 7년 70세 8월에 서거. 보국숭록대부로 추증됨 사실 양예수에게도 허준과의 만남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이 시기 내의원에 양예수의 의학적 맞수라 할 만한 어의(御醫) 안덕수(安德壽)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처방을 고수했다. 양예수는 강한 약재를 사용해 빠른 효과를 기대하는 준한제(峻寒劑) 처방을 선호했고 안덕수는 이를 비판해 강한 약재보다 지속적이고도 꾸준한 효과의 처방을 선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예수에게 허준과 같은 젊고 능력있는 제자를 키워 자신의 의학론을 전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양예수의 준한 전통이 승리, 허준에게 계승됨으로써 조선의학의 전통으로 성립됐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피·부자·인삼 등 강하고 효과가 빠른 약만 찾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양예수는 허준을 통해 자신의 의학 전통을 이어가도록 한 것이다. 어쨌든 허준에게 양예수와의 돈독한 친분은 의학이론의 전수와 함께 임금 선조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당대 최고의 의사 양예수는 허준에게 스승이자 곧 넘어야 할 산이었다. 또 신분적 제약을 극복해 출세길을 제시해준 인물이었다. 27세에 정3품, 내의원 내 입지 굳힘 1571년 11월 잠시 지방에 내려갔던 유희춘이 다시 서울로 올라오자 허준은 곧 그를 방문했다. 이때 이미 그는 종4품 내의첨정(內醫僉正)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573년 11월 27세의 젊은 허준은 정3품직에 해당하는 내의정(內醫正)에 올랐다. 내의원 안에서의 위치가 확고해졌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다시 2년 후 그는 의과에 합격했다. 아마 천거로 내의원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의과에 정식으로 합격함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내의원에서의 지위를 굳히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의원으로서 활동이 무르익을 때였기 때문에 허준에게 의과 합격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허준이 30세가 되던 1575년부터 “조선왕조실록”에는 내의원 의원으로서 왕의 진찰에 참여하는 허준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비록 안광익(安光翼) 혹은 양예수 등의 다음에 거명되기는 하지만 내의원 어의로서 직접 임금의 질병과 건강을 살피는 데 동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허준의 내의원 생활은 36세가 되던 1581년 왕명에 의해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맥경”(脈經)을 직접 교정, 출간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1581년 36세의 나이로 당시 의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경락서 “찬도맥”(纂圖脈)을 교정하고 개편한 허준은 그 발문에서 인체의 경락은 곧 나라의 기강과 같다는 논리를 펴면서 지금까지 의론(醫論)이 미숙하여 이와 같은 기본서를 정리하지 못하다가 이제 자신의 손으로 가능해졌음을 은근히 자축했다. 이로부터 허준의 내의원에서의 위치는 더욱 상승했다. 대개의 입진(入診)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으며, 1590년에는 당시 왕자(후일 광해군)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의 가자(加資·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명(命)받기에 이른다. 이해 12월 광해군이 천연두(痘瘡)에 걸려 고생하자 다른 사람들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그가 구활(求活)했던 것이다. 당시 허준은 내의정(內醫正)이라는 3품직에 근무하고는 있었으나 당하관직(堂下官職)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는 가자 자리는 가벼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서자로서, 그것도 의관이라는 천직(賤職)의 기술관인이 당상관의 품계를 받는 일은 많은 양반 관리들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가자 품계를 받은 다음달부터 3개월간 사간원은 허준의 가자 품계 환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선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광해군을 구료함으로써 선조의 굳은 신임을 받았던 허준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궁을 떠나 선조를 의주까지 모시게 됐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내의원내 최고의 의사였던 양예수는 이미 나이가 많아 임금을 따르기 어렵게 됐는데, 허준에게는 이 점이 오히려 호기였다. 노쇠한 양예수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내의원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실록”에는 왕실의 모든 침구를 허준이 수의(首醫)로서 도맡아 입시(入侍)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1595년 4월 선조의 침구 시술도 허준이 수의로서 입시했는데 한달여동안 거의 이틀에 한번씩 왕을 만났으며 그때마다 선조에게 의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1596년 3월3일 선조는 허준에게 동반(東班·문과 양반)직을 제수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양예수는 더이상 활동하지 못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 따라서 허준이 의학에 가장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서 수의 역할을 확정받게 된 것이다. 이로써 내의원에 줄곧 봉직하던 허준은 드디어 내의원 수의라는 최고의 직책에 올랐다. 나아가 민간에서도 내의원 내 의관의 서열이 거론되면 허준이 항상 먼저 운위되는 상황이 됐다. 허준이 55세 되던 1600년(선조33) 스승이자 당시 최고의 명의였던 양예수가 사망한다. 허준은 스승 양예수의 그늘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수의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주로 “동의보감”을 비롯한 의서 편찬에 주력함으로써 조선시대 최고의 의사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1601년(선조34) 봄 선조는 허준에게 하교(下敎)한다. 이미 세종대부터 “태산집”(胎産集) “창진집”(瘡疹集) “구급방”(救急方) 등 긴요한 의서들이 세상에 간행됐으나, 임난 후에 모두 인멸되었으니 이를 다시 연구하여 책으로 편찬할 것을 명했다. 사실 이보다 앞서 왕자(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했던 1590년께 선조의 의서 편찬에 관한 언질이 한차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민중 대상의 언해본 의서 편찬 물론 처음부터 새로운 의서의 저술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만 흩어져 있는 의서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허준이 정리를 끝내자 다시 이를 언해하여 반포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의 언해된 3종의 의학서적이 출간됐다. 바로 “언해태산집요”(산부인과용 의서) “언해두창집요”(소아용 의서) “언해구급방”(장부용 의서)이 그것이다. ▲좌:경기도 파주의 묘소에서 발견한 비석의 탁본. 서울시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 보관된 것을 찍었다. 우:양천허씨의 시조인 許宣文의 출생지 설화가 전해오는 허가바위. 구암공원안에 있으며 사람이 1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다. 언해본 의서들은 주로 민중을 대상으로 저술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는 “동의보감”과 같이 종합적이고 완전한 체계를 갖춘 의서를 기획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용으로 보급할 의서를 준비한 것이다. 허준은 언해본 의서를 저술한 이후 계속해서 “동의보감”이라는 종합의서의 편찬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동의보감”의 편찬은 쉽지 않았다. 1596년(선조29) 이미 선조로부터 “동의보감”의 편찬을 명받았지만 전쟁 등으로 인해 우선 구급용 언해본 의서의 편찬작업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발발함으로써 의관들은 모두 흩어졌고 “동의보감”의 편찬작업은 잠시 중단됐다. 내의원 의원들의 지지부진한 작업에 불만을 가졌던 선조는 허준에게 의서 저술을 단독으로 맡기는 한편 왕실 내의 모든 책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전권을 주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1608년 갑작스럽게 선조가 승하했고, 사헌부 등 관련기관은 관례대로 수의로서 허준의 책임을 물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간원과 대사헌의 관리들은 허준의 죄를 묻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 허준은 결국 파직과 함께 도성 밖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사간원 등에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를 위리안치하도록 계속 종용했다. 결국 그는 1608년부터 1609년 11월까지 2년여의 세월동안 귀양살이와 복귀를 되풀이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허준은 계속 도성 출입을 하면서 의서 편찬작업에 관련한 여러 서적들을 보고 작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그가 광해군이 어릴 적 앓았던 두창을 치유하였던 공로와 선조의 의주 피난시 왕을 따랐던 호성(扈聖)의 대가였다. 이렇게 해서 허준은 약 2년여간의 귀양시절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했다. 1610년(광해군2) 그의 나이 65세 때의 일이었다. 귀양시절 “동의보감” 완성 “동의보감”을 완성한 허준은 이후 1613년과 1614년 연이어 신종 전염병이 창궐하자 이를 치유하는 새로운 의서들을 저술하게 된다. “신찬벽온방”(新撰酸瘟方)과 “벽역신방”(酸疫神方) 등이 그것이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새로운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자 광해군의 명을 받아 전염병을 치료할 의서 찬간을 담당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바로 전염병 의서 편찬을 끝낸 1615년(광해군7)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허준의 의학사상에서 가장 큰 의미라면 무엇보다 ‘이상적인 인간형’을 창출한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양 고래의 전통적 자연관인 하늘과 땅과 인간의 우주론을 인간의 몸 속에 상징화한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 형상을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지 허준은 이례적으로 “동의보감”의 서두를 그림으로 시작한 것이다. 백마디의 말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인체의 내부 장기 및 특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뭐 대단하겠는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그림은 허준이 25권이나 되는 거질의 “동의보감”에서 서술하려 했던 의학의 정수를 모두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정기의 집적장소인 콩팥(腎)과 머리(泥)의 연결은 바로 정기(精氣·생명력의 정수)가 가득한 남자의 신체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론에 입각해 그는 남자의 신체를 다룬 내경을 시작으로 외경 그리고 산부인과·소아들의 질병을 다루는 잡병편과 마지막으로 약물학의 기초가 되는 탕액편을 두어 새로운 형태의 의서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인의 오랜 심성, 즉 하늘과 땅과 인간을 조화롭게 하는 자연철학의 정신을 의서에서 구현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인 한국의 자연관은 동종(銅鐘)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종은 머리에 용 모양의 음관을 얹어 하늘을 상징하며 또 바닥에 울림장치(땅을 둥그렇게 팜)를 두어 땅을 형상화했다. 여기에 사람이 참여해 종을 울림으로써 천·지·인 삼재(三才)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유교· 도교·불교 및 민간의 심성까지 혼융된 자연관을 허준은 의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동의보감”에서 회통(會通)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의학적 지식을 모두 수집, 정리하는 한편 이를 전통적인 자연철학 위에 위치시킨 허준은 가장 체계적인 조선의학의 전통과 철학을 만들고 또 후세에 물려준 의성(醫聖)이다. 허준의 참스승은 누구 “소설 동의보감”속 유의태 아닌 양예수 우리는 “소설 동의보감”을 통해 허준의 스승을 유의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소설에서는 허준이 유의태라는 스승을 만나 의술을 전수받고 마지막에는 죽어가는 스승의 몸을 비밀리에 해부하여 의학적 완성을 이룬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사실 유의태는 허준보다 2백여년이 지난 18세기에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산부인과와 소아과에 뛰어난 의술을 보유해 많은 민중을 보살핌으로써 전설상의 인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자신보다 앞서 태어난 허준의 스승이 될 리는 만무하다. 또한 조선시대에 의술과 관련해 인체를 해부하는 방식은 절대 일어날 수도, 있지도 않은 방법이었다. 시체 해부에 관한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호기심 많은 한 양반이 시체를 해부했다는 소문이 이익의 “성호사설”에 전해올 뿐이다. 그럼 허준의 진짜 스승은 누구인가. 소설에서는 허준의 적수로 등장하는 양예수가 역사적으로 보면 허준의 참스승이다. 양예수는 당시 최고의 명의로 허준에게 의학기술을 전수했을 뿐 아니라 의술을 학적인 체계로 완성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스승의 이러한 노력이 허준에 의해 꽃핀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