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설운도) 날 짜 (Date): 1998년 10월 14일 수요일 오전 11시 48분 13초 제 목(Title): 고종석/자연언어와 자장면문장 [고종석에세이] /국어의 풍경들[5] 자연언어와 '자장면 문장' / ▶프린트 하시려면 연숙, 정숙, 재봉, 상수는 한겨레대학교 국문과의 새내기들이다. 이들 네 사람은 강의실이고 도서관이고 식당이고 록카페고 늘상 어울려 다닌다. 어느 날 이들 넷이 상수네 집에서 함께 중간고사 공부를 하다가 중국음식을 시켜먹기로 했다. 상수: 주문 받을게. 한 사람씩 읊어봐. 연숙: 볶음밥. 재봉: 나두 볶음밥이야. 정숙: 난 짜장면이야. 상수: 연숙이랑 정숙이는 볶음밥이구, 재봉이는 짜장면이란 말이지. 나두 볶음밥이니까, 어디 보자…. 정숙: 어휴, 이 돌머리. 내가 짜장면이구, 재봉이가 볶음밥이라니까! 이 대화에서 정숙이 “난 짜장면이야”라고 했을 때, 그녀가 뜻하는 것은 자신이 짜장면을 주문하겠다는 것이지 자신이 짜장면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두 볶음밥이야”라고 말한 재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난 짜장면이야”는 “난 여자야”와는 다른 심층구조를 지닌 문장이다. 이번에는 우리의 주인공 넷이 해외 여행을 하기로 하고 갈 곳을 정하기 위해 모였다. 연숙: 어디가 좋겠니? 상수: 일본. 정숙: 난 중국이야. 중국이 아니래두 좋은데, 난 일본은 절대 아니야. 이 경우에도 정숙이 뜻하는 것은 자신이 중국에 가고 싶다는 것이지, 자신이 중국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녀가 “난 일본은 절대 아니야”라고 했을 때도 그녀가 뜻하는 것은 일본엔 절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 자신이 일본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환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실은 이런 유형의 문장은 일본어학자들 사이에서 `뱀장어 문장'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일찍부터 주목돼 왔다. 뱀장어를 즐기는 일본 사람들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며 “보쿠와 우나기다”(난 뱀장어다)라고 흔히 말하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뱀장어가 먹고 싶다” 또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뱀장어다” 정도의 심층구조를 가졌을 문장이 표면구조에서 “난 뱀장어다”가 되기까지 어떤 변형규칙이 적용됐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지만, 그런 전문적인 얘기는 접어두자. 어쨌든 이 `뱀장어 문장'은 일본어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기도 했고, 또 그것은 한국어의 `짜장면 문장'에도 제기될 수 있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자연언어도 논리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 세월이 흘러 정숙은 재봉과, 연숙은 상수와 결혼을 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만난 상수가 재봉에게 말했다: “난 내 아내를 사랑해.”. 그러자 재봉이 대꾸했다: “나두 그래.” 여기서 재봉이 뜻하는 바는 모호하다. 그가 사랑하는 것이 정숙인지 연숙인지가 확실치 않은 것이다. 맥락으로 보아 재봉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아내, 즉 정숙인 듯하지만, 재봉이 엉큼한 마음을 품은 채 말장난을 했을 수도 있다. 사실 재봉과 상수의 이 대화는 서양 사람들이 쓴 논리학 개론서에 자연언어의 불투명성의 예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다. 수학 언어로는(또는 심층구조에서는) 명백히 다른 두 문장이, 자연언어에서는(또는 표면구조에서는) “나두 그래”라는 모호한 문장으로 뭉뚱그려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불투명성은 한국어나 일본어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언어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예컨대 어떤 영국 사람이 “old men and women”이라는 말을 했다면,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인지 “여자들과 늙은 남자들”인지가 모호하다. “Flying dishes can be dangerous”라는 문장도 그렇다. `날아다니는 접시'가 위험한 것인지, `접시를 날리는 것'이 위험한 것인지가 모호하다. 앙투안 리바롤이라는 프랑스 작가는 1784년 베를린 아카데미에 제출한 <프랑스어의 보편성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명료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어가 아니다. 명료하지 않은 것은 영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지만, 그 말은 프랑스어가 자연언어가 아니라는 `바보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18세기를 풍미했던 프랑스어의 보편성-명료성에 대한 이런 신화는 명료한 프랑스어를 쓰는 걸로 이름났던 그 시기의 철학자 볼테르에 의해서도 조롱당했다. 어떤 자연언어가 그 자체로서 명료하거나 불명료하지는 않다. 우리는 다만 어떤 자연언어를 명료하거나 불명료하게 쓸 수 있을 따름이다. 에세이스트 ♠위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