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27일 일요일 오전 01시 35분 51초 제 목(Title): 월간중앙/ 박제가 역사인물 탐구 / 박제가 제 41호 1998.10.01 ------------------------------------------------------------------------------- - 삶과 문학 새시대 패러다임 제시한 용감한 비주류 김경미 연세대 강사 ------------------------------------------------------------------------------- - ‘어릴 때부터 읽은 책은 반드시 세번씩 베껴 썼고, 변소에 가면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하거나 모래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박제가는 학자적 소양이 풍부했으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서얼 출신의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년. 그래서 그는 사회적 소외감 속에서 내적 갈등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자아와 이상의 괴리를 딛고 개혁을 외친 문인이며, 화가·경제학자인 박제가의 지난한 삶을 살핀다. 박제가(朴齊家)는 역사적 전환기에 치열한 삶을 산 뛰어난 문인이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주류를 거슬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용감한 비주류였다. 그는 나라 살림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할 것 등 중상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대부분 비주류의 경우가 그렇듯 그의 주장은 주류의 ‘무관심’에 묻혀버렸다. 그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울분 그리고 정신적 성숙 등이 그의 문학작품에 고스란히 표현돼 있다. 문학은 삶의 전체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한다. 문학작품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삶을 진실하게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시대를 뜨겁게 살았고, 안타깝게 마감한 박제가의 작품은 시대를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감동이 있다. 박제가는 1750년 11월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씨이며 아버지는 부승지(副承旨)를 지낸 박평(朴坪·1700∼1760)이었다. 박평에게는 이미 제도(齊道)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전주 이씨(1721∼1773)와 사이에 제가를 낳았다. 제가는 자(字)를 재선(在先)·차수(次修)·수기(修其), 호(號)를 초정(楚亭)·정유(貞 )·위항(葦杭)이라 했다. 그의 유년기에 대해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세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 변소에 가면 그 옆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스로도 ‘내가 처음 글을 배운 것은 막 젖먹던 때였지’(我初學書尙哺乳<七夕篇>)라는 시구를 남겼다. 그는 ‘열한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묵동 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필동으로, 거기서 묵동으로 갔다가 또 필동으로 전전하며 간신히 연명해 돌이켜 생각하기에도 끔찍스럽다’고 소년시절을 술회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혼자 되신 후로는 드실 음식이 없었고, 해진 솜옷이나마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신 채 새벽닭이 울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셨다’고 애달퍼했다. 하지만 ‘아들이 사귀는 이가 종종 어른과 손윗사람 등 이름있는 분들이었으므로 아들을 위해서라면 있는 힘을 다해 잘 대접했다. 그래서 아들만 보고는 그의 가난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가 17세 되던 해 혼인한 덕수(德水) 이씨(李氏)는 충무공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의 서녀(庶女)였다. 이렇게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바로 이때 그는 자신의 문예활동에 큰 영향을 준 박지원과 이덕무·유득공 등을 만났다. 그는 연암이 당대의 명문장가라는 말을 듣고 탑골 북쪽으로 찾아간다. 이덕무를 통해 이미 박제가를 알고 있던 연암은 제가보다 열세살 손위였으나 옷매무새도 가다듬지 않고 뛰어나와 옛친구처럼 손을 잡고 자기 글을 모두 꺼내 읽어주었고, 몸소 밥을 지어주며 오래 살라고 술까지 부어주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탑골 근처에 살던 이덕무와 유득공·이서구·서상수·유련 등과 함께 어울리며 스스로의 말처럼 ‘한번 가면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돌아올 줄 모르는’ 사이가 됐다. 그가 얼마나 이들을 그리워하고 소중히 생각했는가는 ‘신혼 초야를 지내자마자 장인의 말을 빌려 타고 처가에서 빠져나와 이들과 술을 마셨다’는 일화라든지 ‘형제라도 같은 기질 아닐 수 있고/부부라도 한 방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사람은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마치 좌우 손을 잃은 것 같네’라고 읊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 양손을 잃은 것 같네’ 이덕무나 유득공과는 신분적 동질성과 시(詩)·서(書)·화(畵) 전반에 걸친 공통적 예술취향으로 평생의 지기(知己)가 된다. 박제가는 자신의 시집에서 호를 초정으로 삼은 연유를 밝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초사”(楚辭) 읽기를 좋아해 ‘초정’(楚亭)으로 호를 삼는다. 그 시는 대개 깊은 근심과 느꺼워 탄식하는 소리가 많다’고 했다. ▲박제가가 그린 ‘연평초령의모도 ’. 청나라 초기 명나라 부흥투쟁으로 이름을 떨친 무장 鄭成功의 어린시절을 그렸다. 한표욱 유엔한국협회 고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나라를 위해 고심하며 울분을 글로 삭인 “이소”(離騷)를 유독 즐겨 읽은 것은 그가 평탄하지 못한 삶 속에서 겪는 갈등과 고뇌를 문학을 통해 해소하려 함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중 특히 이덕무는 박제가보다 아홉살 위였으나 의기투합하는 사우(師友)로서 가장 돈독한 관계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에 대해 백동수의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수줍고 내성적이어서 남에게는 별로 말이 없었는데 내게는 말을 잘 했다. 비바람 들이치는 집에서 등불을 밝히고 있는 속 그대로 조금도 숨김없이 이야기하다 격해지면 서로 슬퍼하고, 좋아지면 서로 기뻐하면서 조용히 바라보고 웃었다’고 썼다. 박제가가 이덕무와 함께 지내면서 지은 시 중에는 ‘날 개자 빗물 졸졸 흐르고/바위 틈엔 물소리 쉬지 않고 울려오네//빈 산은 무엇을 소유하리오/구름이 솟아본들 그저 그렇지//시든 버들은 먼지 뒤집어쓰기 쉽고/고고한 소나무는 먼저 그늘 보내는 법//붉은 누각에서 여름날 보내면서/한 선비가 외로운 매미 보고 느꺼워하네’라고 읊은 것이 있다. 재주가 있어도 세상에 쉽게 쓰이지 못하는 자신들의 외로운 심경을 담아낸 시다. 그는 이덕무를 중심으로 문학동인 활동을 하는 한편 박지원을 통해 홍대용을 알게 되면서 선진적 문명의식을 키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의 문학활동은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과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두 책으로 일단 마무리된다. “백탑청연집”은 현재 그가 쓴 서문만 남아 있으며 “한객건연집”은 유금(柳琴)이 청나라에서 엮어냈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네사람은 연경(燕京·베이징) 문단에 사가(四家)라고 소개되면서 중국 문인들의 높은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이들의 시는 우리의 현실감각으로 생활감정을 다루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자유분방하나 감정적 색조는 어두운 시 작품들 박제가가 이 시기에 쓴 시들은 감성적이고 감각적이며 때로는 자유분방하다. 활기차고 참신한 느낌이 넘쳐나면서도 감정적인 색조는 다소 어둡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난 뒤의 곤고함과,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한 사회적 소외감이나 내적 갈등이 원인이었으리라. 물론 타고난 재예와 부지런한 글공부, 왕성한 창작욕구와 젊은 패기 그리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과 함께 지냄으로써 개인적 울분이나 한(恨)을 삭일 수 있었기에 이러한 요소들이 직접 시에 표면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갈고 닦은 단아한 기상이 돋보인다. 친교가 있던 인물들에 대한 그리움을 읊거나 서울 근교를 유람하며 자연경관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들도 많다. 임호상의 집에서 썼다는 시에는 ‘바람이 잔잔하니 향은 저 혼자 맑게 날고/단정히 앉아 눈 감으니 세속 인연 드물어라//가을소리 태반은 시 속으로 들어오고/밤빛은 괜시리 술 속으로 돌아드네//가물가물 푸른 등불 작은 방을 감싸안고/팔랑팔랑 지는 잎은 텅 빈 사립에 날아든다//바로 이때 개 한마리 표범처럼 짖어대는데/가지 끝에 걸린 별빛 다투어 옷깃 적시누나’라는 것이 있다. 고요한 가을밤 술잔을 앞에 두고 천지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포착하는 산뜻하고 청신한 감각이 내비친다. 연표 1750 영조 26년 1세 서울 출생. 1760 영조 36년 11세 부친 坪 타계. 1767 영조 43년 18세 덕수 이씨와 혼인. 1768 영조 44년 19세 박지원과 처음 만남. 1778 정조 2년 29세 이덕무와 함께 중국에 사신으로 감. “북학의” 저술 1779 정조 3년 30세 이덕무·유득공·徐理修 등과 초대 검서관으로 선발됨. 1786 정조 10년 37세 검서관 그만둠. 1790 정조 14년 41세 두번째 중국행. 1792 정조 16년 43세 부여 현감 제수. 1800 정조 24년 51세 정신적 지주 정조 승하. 1801 순조 1년 52세 유득공과 함께 중국행. 신유사옥과 연루돼 함경도 경성부로 유배됨. 1805 순조 5년 56세 유배생활에서 해배됨. 타계. ▲ 1998.10월호 ▶▶ ------------------------------------------------------------------------------- - 선진화된 중국 문물을 직접 경험하고자 했던 열망은 그가 스물아홉살 되던 해에 이루어진다. 채제공(蔡濟恭)의 배려로 이덕무와 함께 사행(使行)길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당시는 청(淸) 건륭(乾隆) 연간으로 문화사업이 한창이었으므로 석학들이 연경에 모여 있어 이들 중국 학자나 문인들과 자연스럽게 친교할 수 있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겪던 사회적 구속은 그로 하여금 드넓은 문명사회에 더욱 심취하게 했을 터다. 중국문화를 두루 열람하고 돌아온 뒤 그는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완성했다. ‘자라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기술을 좋아했다’는 그의 말처럼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던 경제에 대한 의론(議論)과 중국에서 체험한 문물을 기록했다. 청을 오랑캐라 여기던 고루한 관습에서 벗어나고 빈곤에 처한 민생(民生)을 구제하자는 개혁의지가 구체화됐다. 이러한 뜻은 ‘우물 위에 도르래 매달고/바퀴와 덮개 만들어 보세//양쪽에 두 줄로 밧줄 내리면/그 힘이 두 배로 늘어나리라’하고 읊은 시나‘ … 육지물건 중국과 유통 못하고/바다장수 일본에 가지 못하면//들판 한가운데의 우물 같아서/퍼내지 않으면 저절로 말라버리지 … ’라는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民生 구제의 개혁의지 구체화 이듬해 정조(正祖)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서얼 출신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n뽑았다. 그에게는 검서관으로서의 7년간이 실무 외에도 왕실의 서적을 마음껏 읽고 관료문인들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이 시기에 쓴 시들은 대체로 후박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 향 사르면서 거문고 타는 일을/혼자서 즐긴다면 참 말할 바도 못되지//날씨는 찬데 서너 사람 모여들고/날 저물자마자 생각 서로 딱 맞아//산 속 사립엔 촛불 그림자 흩어지고/눈 덮인 집에선 차 달이는 소리//매화는 가지마다 싹을 막 토해냈고/앉은 자리마다 맑은 기운 감돌아//거문고 튕겨가며 노래도 이미 부른 터라/동이술을 마시면서 웃고 서로 위로하네//해학은 천기를 드러내주는 것이니/진솔한 성품 거리낄 것 없어라.’ 마음이 통하는 벗과 세상 일을 주고받으며 밤새도록 함께 하는 즐거움은 얼마나 클까. 더구나 피끓는 젊음이요, 암울한 세상인 것을…. 시주(詩酒·시와 술)를 주고받으며 천진한 심성을 드러내고 인위적 수식이나 허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순연한 상황을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41세 되던 해와 그 이듬해 다시 연행(燕行·중국에 감)하게 된다. 그는 중국의 석학들, 특히 당시로서는 꺼리던 안남·만주·몽고인들과도 두터운 교제를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분방함은 주위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정조가 박제가를 아낀다는 사실과 박제가 자신의 지나치게 날카로우며 직선적인 성격 등이 어우러져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 같다. n그는 연행 몇년 후 심한 눈병을 앓고 나서 더이상 글을 베껴 쓰거나 교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방관을 자청해 부여현감이 된다. 그는 농민생활의 고충을 직접 보고 들은 대로 보고하면서 놀고 먹는 양반들을 도태시킬 것, 중국으로부터 기계와 기구를 배워 받아들일 것, 곡식을 적절한 방법으로 저장할 것 등을 상소했다. ▲중국을 세차례 왕래한 박제가는 천주교에 대해 편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 베이징의 천주교회 북당. 이 시기에 그는 연행(燕行)길의 새로운 풍물과 여행 노정에 관련된 시들을 쓴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회고하거나 청나라에서 함께 지내던 문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읊기도 하고 ‘발로 밟는 국수기계 쩔꺽거리자/국수가 그 속에서 펄펄 나오네//주인양반은 편안히 앉아/맷돌 가는 나귀만 움직이라 소리치네’처럼 문명화한 선진 사회를 동경하기도 한다. 대체로 안온하고 담담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면서도 현실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개혁의 의지조차 허망하다는 인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다고 해서 천성적으로 날카로운 성격이나 기벽(奇癖)이 누그러진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시에서는 이 시기부터 현실의 질곡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탈속(脫俗)한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이 함께 드러난다. 큰아들과 주고받은 시에는 자연 속에 흔연히 어우러질 동시적(童詩的)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정조 승하로 후원자 잃음 ‘밭 갈고 우물 파 자연 속에 머무르면서/이 속에서 시 읊으며 홀로 천년 지내리라//앙증맞은 제비란 놈 재잘재잘 말도 많고/깜찍한 비둘기는 오디 먹고 취해 자네//누런 그루터기 아래에는 거문고 타는 사람들/나도 장차 술 사들고 구름가에 노닐고파//매서운 바람, 신선들 뗏목에 한번 들이치니/오악의 진면목이 내 팔 뒤에 매달렸네’ 그가 51세 되던 해 정조가 승하했다. 더이상 그를 특별히 대우하거나 배려할 이를 잃게 됐음을 의미한다. 박제가가 사용하던 ‘정유’라는 호는 정조가 그의 집 소나무에 ‘애어송’(愛御松)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데서 비롯했다. ‘태어나서 밥 먹은지 오십년인데/세상살이 모래맛 같아 삶아도 묽지 않네//누대 앞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었지만/푸른 빛 변치 않는 것은 오직 정유송’이라는 시를 통해 그의 울적한 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사가(四家)를 후원하던 정조가 없는 상황에서 이미 이덕무는 세상을 떠난 뒤였고, 유득공은 급격히 몰락했으며, 이서구마저 실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신유박해와 시(時)·벽(僻)파의 대립 속에서 윤가기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연루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게 된다. 이 시기에는 유배행로에서 본 풍경과 풍물에 자신의 비감함을 부쳐 읊었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적 안목으로 나그네의 정회를 엮어내기도 한다. ‘훌륭한 관리는 다른 재주 아니라/먼저 돈 생각부터 끊어야 하네//문관의 책임이란 더더욱 각별해서/온 땅 백성을 함께 가르쳐 길러내는 것’이라든지 ‘지방벼슬에는 후하고 박한 자리가 있어/후한 자리는 유난히도 자주 바뀌지//관청의 살림조차 제집 것인 양/공공의 곡식을 사채로 바꿔놓네’에서처럼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직접 보고 들은 현실을 고통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써내려갔다. ‘훌륭한 관리는 돈 생각부터 끊어야 하네’ 한편 말년에 쓴 시에서는 다소 체념적이고 자탄적인 심정을 토로한다. 문장 수련을 통해 이름을 얻고 나아가 자신의 뜻을 온전히 실현함으로써 소외된 신분과 고단한 삶을 극복하고자 했던 그였다. 그러나 갈등이 심화되고 반복될수록 자아와 이상의 괴리를 인식할수록 위축됐던 듯하다. ‘좋은 농사는 천년간 이어온 뜻/길게 한숨 쉬며 빈풍장을 읊어보네//남을 따라 문장에 뜻을 두었고/때때로 번화한 거리도 밟아보았지//이 몸은 남의 모욕도 달게 받았고/지혜 없어 주머니 속만 털어보았네//우스워라, 내 스스로 졸렬하게 살아온 것/말똥 안고 가는 말똥구리와 마찬가질세’ ▲박제가는 김정희의 영재성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다. 충남 예산에 위치한 추사 고택. 이 시에서는 노력해도 소용없음과 재주없음에 대한 참담한 자괴감이 그려져 있다.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3경(經)을 주석하던 약 4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1805년 4월25일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스스로를 가리켜 ‘영화도 굴욕도 없는 처지/밭 갈고 곡식 심을 수도 없는 신세’라고 한 것이나 ‘아아, 풍류도 그쳤고 아름다운 말도 끊어졌으며, 덕을 살피고 학문을 하는 것도 이제는 다 허무해졌다’고 쓴 글은 안팎의 괴리를 절감했던 한 작가의 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제가는 사회의 다양한 변혁을 직접 체험했다. 보다 나은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고 절실한 문제들에 대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합리적이지 못한 사회제도나 문명적이지 않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감정의 유출을 유보하고 내면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했다. 박제가에게는 행장(行狀·일대기)이나 묘비명이 남아 있지 않으며 문집도 오랫동안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지적 노력은 삶의 궤적을 따라 1천7백여수에 달하는 문학작품으로 지금의 우리와 함께한다. 그는 철저한 작가의식을 가지고 문학세계를 구축해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는 한편, 논리적 시론가(詩論家)로서, 진보적 의론가(議論家)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지녔던 인물이다. 동아시아 침략·피지배 역사 없었을 것 김승일 동아시아미래연구소장 ------------------------------------------------------------------------------- - ▲중국 베이징의 고서점·골동품점 거리인 유리창. 박제가는 이곳에서 서책을 구입하고 학자들과 교유했다. 조선왕조는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선택해 유교적 세계상을 인간이나 사회적 상호관계, 또는 국제관계에 적용해 고유의 사대교린체계를 구축했다. 이 사대교린체계는 중화세계질서라는 이념을 내재화한 위에 그 하위체계적 기능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체적인 독자적 중화세계질서로 기능하는 이중적 성격을 지녔다. 그러다가 조선은 16세기 말 회유(懷柔)와 기미(羈靡)의 대상이던 일본에 침략당하는(임진왜란)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자체적인 발전 및 국제적 움직임 등에 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적(夷狄)왕조인 청조(淸朝)가 무력으로 명나라를 평정하고 조선에 새로운 국제관계를 정립할 것을 강요하게 됐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교린 상대국이었던 청국이 사대(事大)의 상대국으로 변모하자 이념과 현실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해야 했고,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나가야 할지 중대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즉, 현실적으로는 이적국가라 하더라도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에 조공(朝貢)과 책봉(冊封)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됐고, 내면적으로는 명나라의 뒤를 계승해야 하는 중화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로 인식해 청나라를 중원으로부터 구축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청국과 조선의 관계는 갈등의 괴리가 심각해져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어야 했고, 그 결과 인질로 잡혀갔던 두명의 왕자 중 봉림대군(鳳林大君)이 괴사한 형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대신해 왕위(孝宗)에 올랐다. 효종은 등극하자마자 북벌을 추진해 서로의 이질감을 극명하게 드러내놓게 됐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신하적 예의를 취하면서 사상적으로는 배청적 북벌론을 대의명분으로 하는 조선 유학계의 이중적 태도는 당시 근대를 지향해 노력하던 국제상황과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 이는 형이상학적 ‘허학’(虛學)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현실과 동떨어진 허학에 반대하고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현실적 시무학인 ‘실학’이 제창되는 것이다. 국제정세 국내에 알리려 노력 당시 조선은 16세기 말 정부의 인사담당 중요 부서인 전랑(銓郞)을 중심으로 사림파(士林派)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사색당파로 고정된 이래 권좌를 둘러싼 당파간의 경쟁과 보복이 반복되면서 국정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후 비록 당쟁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탕평책(蕩平策)이 실시되기는 했지만 이 조치는 각 당파간의 균형을 맞추는 데 초첨이 있었기 때문에 당쟁은 여전히 계속됐다. 그러나 당파간의 경쟁은 과거와 같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음성화했다. 그 결과 국가적인 문화사업과 여러 가지 개혁이 행해지게 됐고 서얼 출신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실학파 계열의 인재들이 정치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중국에서 보고 경험한 생활상과 경제철학을 기록한“북학의”. 利用厚生의 실학자들을 북학파라 부르는 것도 이 책에서 연유한다. 1776년에는 문화사업의 중심기관으로 왕실 내에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되고 박제가는 다른 세명과 함께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됐다. 이때부터 박제가 등은 실질적 학문의 중요성을 감지하고 청국 고증학파의 문헌들을 대량 수입, 출판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조선 사상계에 정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박제가는 책 구입을 위해 베이징을 세차례(1778, 1790, 1801)에 걸쳐 다녀왔다. 그곳에서 청조 고증학의 대가인 “사고전서” 편찬 총책임자 기윤(紀田勻)을 비롯해 진전(陳魚亶) 등 청국 학계의 많은 학자들과 교우관계를 맺고 베이징 유리창(琉璃廠)의 오유거(五柳居)서점 등에서 교류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익혔다. 박제가는 이런 과정을 통해 직접 보고 느낀 청국의 사정과 국제정세를 어떻게든 국내에 알려 실질적인 생활개선 및 국가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네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서양인 학자(西士)를 초빙해 ‘이용후생’의 방법을 배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베이징을 이미 세차례나 다녀온 박제가는 서학 및 서사(西士)들의 학문이나 기능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서양서를 구입한 일에 대해 국내에서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 초빙 문제를 상소했다. 당시 정조는 이들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불경사서’(不經邪書)의 구입과 보급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제가는 1786년 정월 상소를 올려 “서사를 초빙해 관상감(觀象監)에 채용하고 젊은 학자들에게 그 학문을 배우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즉 “중국 흠천감(欽天監)에서 책력(冊曆) 꾸미는 서양 사람들은 모두 기하학(幾何學)에 밝으며 이용(利用)·후생(厚生)하는 방법에 정통하다고 하는데 국가에서 관상감(觀象監)에 쓰는 비용만큼을 들여 그 사람들을 초빙해 우리나라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그들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게 하면 두어해가 못돼 세상을 잘 알고 다스리는 데 알맞은 인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박제가가 이러한 상소를 자신있게 올릴 수 있었던 것은 1773년 로마 법왕청이 예수회의 해산을 결정하자 예수회 선교사들이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해 잘 준비된 인재들이었기 때문에 학문과 재능이 대단했다. 동·서양의 학술과 사정을 소개하고 연계시켜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국제통들이었기에 이들의 활용방안은 대단한 착상이었다. 동시에 당시 소속을 잃은 이들에게 도움을 베품으로써 그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현실적 측면도 아울러 고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감각은 당시 조선의 다른 실학자들과 구별되는 매우 특출한 것으로 조선의 실학을 국제화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제시했던 것이다. “국제통인 예수회 선교사 활용하자” 두번째는 국내에서만 인재를 양성하지 말고 외국에 파견해 국제적 감각이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지금 서둘러야 할 일은 경륜있고 재능있는 선비를 선발해 매년 열사람씩 중국에 파견하는 사절의 통역 속에 끼워 넣어 예전의 질정관(質正官·사신을 따라가 글의 음운이나 사물의 의심나는 점을 중국에 질문해 알아오던 직책)처럼 중국에 들어가 그들의 법을 배우고, 그들의 기(器)를 구입토록 하며, 혹은 그들의 기예를 전수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국내에 보급할 수 있는 국(局)을 설치해 이를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적을 사정해 상벌을 규정해야 하고, 한사람을 3회 파견해 효과를 올리지 못하면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선발해 파견하면 10년 내에 중국의 기술을 모두 배워 … 3∼4년동안 수확할 곡물을 단 1년만에 모두 수확하는 것처럼 될 것이다”라고 보았다. 이러한 의견을 보면 배청론을 주장하는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현실적으로 필요한 이기를 배워 실생활에 이용토록 함으로써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려는 그의 목적의식을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외국에 인재 파견을 요구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것은 청나라가 비록 이적국가라 하지만 한족의 문화를 계승 발전했음을 직접 체험한 그의 통찰력에서 비롯됐음을 잘 보여준다. 역사인물 탐구 / 박제가 제 41호 1998.10.01 ------------------------------------------------------------------------------- - ‘박제가 실학’실현됐다면 동아시아 침략·피지배 역사 없었을 것 김승일 동아시아미래연구소장 ------------------------------------------------------------------------------- - ▲박제가의 정신적 후원자 정조의 최고 치적 중 하나로 꼽히는 수원성. 근대적 과학기술이 집약됐다는 평을 듣는다. 세번째는 해외통상론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는 외국 상선들과 대항하기 위해 선제(船制)를 개선하고 대외무역을 위해 수로를 정비해 교역에서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외 무역을 통해 선제·차제(車制)·궁실·집기 등의 이용후생법을 외국으로부터 배우게 되며, 천하의 서적(書籍)들도 들여올 수 있어 습속에 얽매인 선비들의 편벽하고 고루한 소견을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즉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작고 백성들이 가난하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먼저 먼 지방의 물자가 잘 유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재물이 늘어나고 온갖 도구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레 1백차에 싣는 양이 배 한척에 싣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육로로 천리를 가는 것이 뱃길로 만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서쪽으로는 중국의 덩라이(登萊)와 직선으로 6백여리이고, 남해의 남쪽은 오(吳)지역의 입구와 초(楚)지방의 끝과 마주하고 있다. 송나라 때 배로 고려와 교류할 적에 밍저우(明州)에서 7일이면 예성강(禮成江)에 닿았다 하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외통상론은 그가 이미 근대적 세계로 전향하고 있던 세계적 움직임을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러한 국제적 추세에 대해 조선내 지식계층의 소우주적 가치관 내지 편협성이 조선의 미래에 커다란 부작용을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제교역을 통한 국익의 중요성을 이미 다른 나라의 경우를 통해 알고는 이를 실천에 옮길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만약 박제가의 이런 건의가 받아들여졌더라면 조선의 근대화는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또 18세기 조선에서의 자본주의 발달을 일층 가속화하거나 안정시켜 근대 들어 피지배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겠다. 근대세계 움직임 통찰하고 해외통상 주창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 정세와 근대적 시대정신을 통찰한 박제가는 서양 선교사를 입국시켜 근대문물을 배우자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였다. 근대 천문학을 받아들인 중국 베이징의 흠천감 관상대. 네번째는 그의 보편적 인식체계가 당시의 당파나 사회풍속 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했으며, 동·서양의 사상이나 종교를 초월해 자신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국가의 발전을 꾀했다는 점이다. 박제가는 “말 많은 자들이 항상 하는 얘기로 ‘한나라 명제(漢明帝)가 불교를 받아들여 천고(千古)의 폐단이 되었고, 중국과 9만리 거리에 있는 유럽은 천주교(天主敎)라는 이교(異敎)를 신봉하는 이단자들이며, 해외 여러 오랑캐들과도 통한다’고 말한다”면서 “그런 주장은 믿을 게 못된다”고 잘라말했다. “그 사람들은 혼인도 벼슬도 아니하고 물욕을 물리치면서, 먼 나라에 와서 저희들의 교(敎)를 전포(傳布)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교가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을 독실하게 믿는 것은 불교와 다름없지만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방법을 불교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고 했다. 동아시아 전반의 발전과 미래 예측 이러한 인식은 당시 서구지역에서 풍미하던 계몽주의 및 합리주의적 인식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그가 이미 세계적인 보편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근대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거해준다. 이는 당시 조선 유학자들과는 다른 국제적 감각으로 그의 보편적 인식체계가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를 잘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선진적 사고를 가진 박제가가 신유사옥의 주모자인 임시발(任時發)의 무고로 천주교와는 상관없이 체포돼 장형(杖刑)을 받은 다음 경성(鏡城)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종적이 묘연해진 것은 조선의 불행뿐만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불행이었다. 그의 국제적 감각 내지 인식이 정책적으로 받아들여져 조선의 근대화가 일본이나 중국처럼 진행됐다면 삼국간의 견제와 균형이 어우러져 동아시아의 근대사에 침략과 피침략이라는 상관관계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능력에 대해 그의 교우였던 청나라 고증학의 대가 진단은 그의 문집 “간장문”(簡莊文)초에서 “박제가는 경서(經書)에 통달했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서법도 훌륭해 한번에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며 그의 뛰어난 자질을 흠모했다. 또 기윤은 박제가의 소식을 듣고 위안하려는 마음에서 지은 ‘구유억문주’(舊遊憶文酒)라는 시에서 왕년의 문인 친구인 그의 명철한 생각과 포부를 생각하며 그와 만날 수 없게 됨을 아쉬워했다. 또 일본의 후지츠카(藤塚博) 박사는 김정희를 연구하기 위해 2년간이나 베이징에 머무르면서 자료를 수집하다 박제가에게 심취하게 됐다고 ‘청조문화교류연구의 동기 및 그 과정 - 박제가와 나’라는 강연문에서 피로했다. 김정희라는 희대의 인물을 키워낼 수 있었던 박제가의 탁월한 능력과 그의 원대한 시각 등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평을 보면 박제가는 단지 조선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반의 발전과 미래에 대한 예측을 통해 실질적인 방법론을 제창했던 동아시아적 인물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북학의”는 어떤 책인가 유통혁신 주장한 경제개혁서 실학자 박제가가 1778년(정조 2)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쓴 책. ‘북학’이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중국을 선진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허하게 배운다는 뜻. 당시의 풍조로는 청나라를 선진시하는 것은 매우 과격한 사상이어서, 박제가의 단호한 소신을 알 수 있다. “북학의”하면 북학파를 연상하는 것도 “북학의”가 북학사상을 가장 철저하고 과단성있게 대변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 연경(燕京·베이징)에까지 명성을 날렸던 저자는 3개월의 청나라 여행과 1개월여의 연경 시찰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북학의”는 내·외편 각 1권으로 구성돼 있다. 내편은 수레·배·성(城)·벽(壁)·약(藥)·문방지구(文房之具) 등 30 항목으로 돼 있는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하며 현실의 문화와 경제생활 전반을 개선하려 했다. 외편은 전(田)·분(糞)·농잠총론(農蠶總論)·과거론(科擧論)·장론(葬論) 등 17항목으로 상공업과 농경생활에 관한 기초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본 골격은 중국을 본받아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놀고 먹는 유식양반의 처리문제를 해결하며, 상공업의 발전과 관련해 농경기술·농업경영을 개선함으로써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민부를 증대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박제가는 생산력을 확충해 소비를 늘리고 유통질서를 원활하게 한다는 경제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공급 확충을 위해 선진문물을 적극 습득·보급할 것과 서양학문을 배울 것을 피력했다. 이는 당시 수요억제, 근검절약을 내세우던 통론과는 대치되는 주장이다. 박제가의 사상은 당시 우리나라 농촌의 의식주에 관한 귀중하고 솔직한 기록이며,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이다. 하지만 과감한 개혁 주장의 뒤안에는 아쉬움도 남는다. 중국의 제도·문물을 선망한 나머지 비판없는 도입·수용을 주창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을 철저하게 파악·분석하고 실현가능한 개혁을 부르짖었더라면 그의 사상이 계승·논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1998.10월호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