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9월 29일 화요일 오전 07시 56분 13초 제 목(Title): 퍼]일본의 적대적 자주독립정책-김용덕(교� 이 글 읽으시기 전에 광고말씀 드립니다. 지난 9월 25일 타결된 한일 어업협정에 독도와 관ㄹ련해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련 기사를 HotIssue 보드에 퍼다 놓았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부터 퍼오기 시작하겠습니다. ------------------------------------------------------------ 번호 : 69/209 입력일 : 98/09/28 13:46:17 자료량 :77줄 제목 : <포럼>일본의 적대적 자주독립정책-김용덕(서울대교수) 자료원 : 문화일보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된 뒤 국가의 자주 독립을 궁극적 목표로 내세우며 대외정책을 추진해왔다. 그 정책이 방어적이었든 공격적이었든 간 에 항상 일본은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국론을 통일시켜 왔 으며, 이를 위해 대외적 위기 의식을 고취해 왔다.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을 목표로 하고 假想敵(가상적)의 존재를 상정하 지만 역사상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주독립이란 실현 불가능한 관념이고 환상 인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간의 타협과 세력 균형이 현실적인 자주독립 의 방편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종속적 개항 이후 서양세력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는 위기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그 극복의 방향도 다분히 외국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공격적이었다. 메이지(明治)유신의 元勳(원훈)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萬國公 敵論(만국공적론)’이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主權論(주권론) ·利益線論(이익선론)’은 이같은 일본의 대외적 위기 의식과 국가적 자립 의 수준을 보여주는 초기의 주장이며,이후 국책의 방향에 대한 기본적 입장 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항 직후 자주독립의 수준을 국가적 주권의 훼손을 모면할 수 있는 선으 로 상정했던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동아시아에서 중 국을 뛰어넘어 우위를 차지해야만 일본의 자립이 보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의 간섭으로 좌절과 수모를 겪어야했던 일본은 이후 자립의 수준을 서양 열강의 힘을 배 제하면서 동아시아를 일본의 독자적 세력 범위로 확보하는 것으로 올려 놓 았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제 아시아지역을 일본 영향 권 아래에 둘 수 있는 세계 열강의 하나로 자임했다. 1917년 랜싱-이시이( 石井)협약으로 아시아지역에서 미국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려 한 일본은 191 8년 1차대전의 종전 및 시베리아에 대규모 출병을 감행함으로써 이러한 의 도를 분명히했다. 1929년에 발생한 세계 경제공황은, 일본을 중심으로한 자 급 자족적 경제권(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일본에 제공 했으며, 1941년에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궁극적인 자립’을 위 협하는 마지막 대상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부터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 발효될 때까지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상실한 상태에 빠지게 되 었다. 이처럼 일본이 대외 관계에 있어 하나의 매듭이 지어질 때마다 그 다 음 단계로 자립의 수준을 과도하게 상향 설정해간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타율적 개항에 따라 근원적으로 자주독립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었 던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萬國公敵觀(만국공적관)에 따라 ‘일본의 이익보호 ’라는 선에서 자립의 수준과 범위 설정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정해 나갔다. 둘째, 서양에 대한 열등 의식과 함께 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우월감을 노골 화하면서도 경제 관계에 있어서는 원료 공급이나 수출시장이란 측면에서 아 시아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정치·경제가 내포하고 있던 이중적 의존성이 일본의 ‘항상적’ 위기의식을 유발했다. 셋째, 일본이 조선과 조약을 맺을 당시 미국이 지원한 예에서 보듯, 이후 에도 일본은 국제정치적 세력다툼 속에서 세력 확장의 묵인 또는 요청을 열 강으로부터 받은 경우가 많았다. 넷째, 국내에서 일고 있는 위기 의식을 국론의 통합 방향으로 끌고간 데에 는 일본적 국가주의의 영향이 컸다고 보인다. 국수주의로 불리는 이 이념의 제공자들은‘日本神國論(일본신국론)’ 등에 바탕한 서양 배척의 주장을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수준에서, 현실적인 대안으로까지 제시하려했던 것이 다. 다섯째, 일본은 정치지도자들에게 항상 이러한 위기 의식을 의도적으로 고 취시키려고 했다. 근대일본의 대외 인식에 있어 심각한 문제는 實際(실제· 실체의 인식)와 관념(환상)이 유리되는 경향이다. 즉 외국의 힘(외부적인 조건)과 일본의 국력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인식을 할 경우 일본은 신중하게 방향을 정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환상적(관념적)으로 국가를 인식 하고 自國(자국) 중심으로 국제 관계를 고려한 경우 일본은 과격·무모한 정책을 취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자국의 이익만을 절대시해 일 국적 특수주의에 집착한 일본은 공생적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닫아버렸던 것 이다. <이 글은 金容德(김용덕)서울대교수가 25일 ‘제49차 한·일문화강좌’에 서 발표한 주제강연을 발췌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