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27일 일요일 오전 01시 22분 11초 제 목(Title): 중앙/ 일본에 한국사 자료관을 [글로벌포커스]일본에 한국사 자료관을 ------------------------------------------------------------------------------- - 세상을 떠나면 역시 빈 손이다. 남는 건 평생 모았던 한.일관계사 자료뿐이다. 그러나 그 귀중한 것도 맡겨둘 만한 곳이 없다. 모두 버리고 가야 하는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재일 (在日) 한국 역사학자들이 한숨을 쉬고 있다. 지난 2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박경식 (朴慶植) 씨 소장의 엄청난 자료들이 시가 (滋賀) 현립 (縣立) 대학에 기증되는 절차를 밟고 있다. 해방 전후의 재일교포사, 일제관헌과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등과 관련된 5만여권의 자료가 결국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다. 朴씨가 굶주려가며 50여년동안 수집한 자료들이 우리 학자들에 의해 빛을 보는 즐거움을 우리는 박차 버렸다. 일본에 있는 교포들도, 그들의 단체들도 역사자료엔 관심이 없다. 한국 정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서울의 독지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朴씨의 가족은 몇가지 조건을 붙여 일본의 시골 대학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생각이다. 자료목록을 만들고 장서와 마이크로필름은 반드시 공개해야 하며 후계 연구자를 육성해야한다는 조건이다.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부탁해야 할 것을 일본인에게 거듭 당부해야 하는 아픔을 본다. 올초 78세를 일기로 별세한 한석희 (韓晳羲) 씨의 청구문고 3만여권도 고베 (神戶) 시민도서관으로 이미 기증됐다. 이 문고는 한국종교사와 일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수집된 것이다. 21년 동안 '일본속의 조선문화' 시리즈 12권을 펴냈던 김달수 (金達壽) 씨는 지난해 5월 이런 짤막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 "내 자료를 포함해 한국자료관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 그러나 그의 유언 집행인인 사학자 이진희 (李進熙) 씨는 金씨의 자료를 떠맡아줄 후보를 찾는데 이미 지쳐 버렸다. 남아 있는 재일 사학자들이 터득한 것은 "죽으면 그뿐" 이라는 허망함이다. 일본에서 민족차별을 이겨내면서 잘못된 한.일관계사를 시정해가는 외로운 싸움에서 그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 싸움의 총알이 됐던 자료들이 조국과 동족들에 의해 푸대접을 받고 결국 일본의 대학이나 연구단체에 기증되는 얄궂은 운명을 슬퍼하고 있다. 벌써 70고개를 넘은 이진희씨는 그의 사후 (死後) 를 생각하며 눈물짓는다. '광개토대왕 비문 변조설' 을 뒷받침하는 고고학 관련자료 등 4만여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다. 올해 73세인 강재언 (姜在彦) 씨도 한.일근대사중 특히 사상사 부문에 관한 희귀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근대조선의 사상과 재일 조선인 운동사에 관한 그의 훌륭한 저서들은 오로지 이 자료들에 힘입은 것이다. 재일교포 문제 전문가인 또 한분의 사학자 강덕상 (姜德相.65) 씨도 요즘 매우 우울하다. 박경식씨 소장 자료가 오갈데 없자 이를 시가 대학으로 옮겨가는 방안을 주선하면서 관동대지진 등에 관한 자신의 소장 자료를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이진희.강재언.강덕상씨 세분의 한결같은 바람은 일본에 한국역사 자료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서서 건물을 짓고 재일 사학자들의 각종 역사자료들을 모두 모아 올바른 한.일관계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명예이며 거기에서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학자로서의 운명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오사카 (大阪) 를 본거지로 해서 조선통신사 연구와 자료수집에 열중해 왔던 신기수 (申基秀.67) 씨는 조선통신사 관련 서화 및 병풍 1백20여점을 오사카 시립박물관에 기증하는 문제를 지금부터 생각하고 있다. 한국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바에야 사실에 입각해 이 자료를 평가해줄 것을 조건으로 일본에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일 양국의 왜곡된 역사는 사실적 자료에 의해 검증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역사의 '청산' 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과거의 분쟁에서 교훈으로 배웠다. 역사왜곡을 시정하라는 우리의 대응이 크게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은 자료에 의한 냉정한 대응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군위안부 배상 요구는 70년대 일본의 사료 연구자들에 의해 먼저 제기된 문제다. 역사교과서 왜곡도 80년대 들어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이 앞서 문제화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뒤따라서 문제에 파묻혀 왔다. 한국에 있는 우리의 사학자들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건 이제 진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낙일 (落日) 을 바라보는 재일 사학자들의 귀중한 자료를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은 정말 없을까. 우리가 노력한다면 양식있는 일본인들도 자료수집에 적극 협력해줄 것이다. 최철주 일본총국장 입력시간 1998년 09월 25일 20시 32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