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20일 일요일 오전 11시 27분 27초 제 목(Title): 이규성/ 실증,경세 그리고 사상/ 청대철학 실증, 경세 그리고 사상 --王茂 외 지음 『청대 철학』, 신원문화사 1995 이규성(李圭成)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내재의 철학: 황종희』가 있음. 1 지금까지 중국철학에 대한 통사적인 서적은 여러 권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시대별로 나누어 한 시대의 철학의 흐름을 다룬 책은 『청대 철학(淸代哲學)』(김동휘 옮김)이 처음일 것이다. 이 책은 청대 철학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청대의 철학에 한층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청대 철학』은 모두 3편 24장이며 886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으로 장대년(張岱年)의 서(序)가 맨앞에 붙어 있다. 번역본에는 서가 빠져 있고, 역자 서문과 함께 3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청대 철학』은 청초부터 1840년 아편전쟁까지 200년간의 철학을 다루었다. 아편전쟁 이후의 철학은 근대에 속하기 때문에 청조 초기와 중기의 철학을 다룬 것이다. 이 책은 사상사적 관점보다는 ‘철학’을 강조하여 인물별로 나누어 서술하고, 장대년의 지적처럼 많은 자료를 동원하여 주제별로 각 인물의 철학을 세밀하게 서술하는 가운데 저자들의 비평을 첨가하였다. 그러나 『청대철학』은 저자들의 주장과 같이 철학의 역사를 다룬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철학’를 다룬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철학의 유파구분, 연원의 변이, 작용과 영향 및 유관되는 시대배경, 학설의 상호관계, 사승(師承)관계에 치중하지만, 역사상의 철학은 학설에 대한 주해, 분석에 치중한다(서론). 이렇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철학의 성격 파악과 연관된 것이다. 양계초(梁啓超)와 같은 사람은 청대의 학술을 ‘연구방법의 운동’이지 ‘주의(主義)’의 운동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배격한다. 여기서 ‘주의’란 ‘의리(義理)’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정주학적인 좁은 의미의 ‘의리’가 아니라 사상 내지는 철학적 주장을 의미한다. 양계초도 그러했지만 흔히 청대에는 고증학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대진(戴震, 1723~77)에게서 보이듯이 고증만을 맹목적으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고증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저자들은 바로 이 점을 중시하여 청대가 이전의 철학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주며, 근대에 이르는 사상적 운동의 연속적 맥락에 있었음을 부각시킨다. 저자들이 철학의 형성에서 다음 세대로의 발전·진보라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점에 대해서는 방법상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대에도 철학이 있었으며, 그 특징을 실사(實事)를 중시하는 원시유학의 부흥이라는 측면에서 한 차례의 ‘복고이자 해방’이라고 본 저자들의 관점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명대의 등잠곡(鄧潛谷)이 ‘이학(理學)’과 ‘심학(心學)’이라는 어휘를 창안한 이후 이 말들은 현재에도 그대로 정착되었다. 청대의 철학은 이학과 심학에 대한 반대로 특정지어진다. 농민반란에 의한 명조의 붕괴, 만주족의 침략이 가져온 한족지배의 종결은 학자들로 하여금 송·명의 이학과 심학이 공허할 뿐만 아니라 마음과 사회에 해롭다고 판단하게 하였다. 특히 문화적 원인을 과장하는 사상가의 습성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명대의 심학 그리고 그것이 가진 급진적 해방의 정신은 명조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고 지탄받기도 하였다. 송·명의 철학에 대한 반대는 명말청초의 왕부지(王夫之)·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에게는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다. 저자들도 밝히듯이 왕부지와 고염무에게는 송의 이학이 근간에 있으며, 황종희는 심학에 경도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명말의 고학(古學)운동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으며, 사회의 혼란을 해결하려는 경세(經世)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들의 고전주의와 경세론은 청대 고증학적 학문의 경향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저자들은 강번(江藩)의 「한학사승기(漢學師承記)」를 인용하여 황종희와 고염무를 청학의 개산조사로서 인정하고 있다(3권, 22면). 그러나 저자들은 청대학술의 정신은 한두 사람의 영향관계로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2 저자들의 철학사 서술의 관점은 이전의 다른 철학사에 비하면 약화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변증법적 관점에 있다. 저자들은 청대철학이 송명의 유심주의를 배격하고 원시유학으로 돌아온 것을 부정의 부정 과정을 거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유물론으로의 진보과정이다. 역사는 과거로 회귀하면서도 미래를 지향하고, 지향해야 하는 과거와 미래의 싸움이다. 청대에 나타난 회의와 비판의 정신은 시대적 한계 때문에 원시유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3권, 478면), 그러한 정신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추동하였다. 물론 저자들은 서양과 중국의 역사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계몽’이나 ‘문예부흥’이라는 어휘사용을 조심스럽게 제한한다. 그러나 ‘유심주의적 몽매주의’라는 표현에서도 나타나듯이 저자들은 유심과 유물의 투쟁을 철학사의 기본현상으로 전제한다. 문제해결방식의 차이를 보려는 저자들의 착안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적 관점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단순화가 저자들이 의거하는 풍부한 자료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그치게 하고, 그것과 철학적 문제들의 유기적 혹은 갈등적 연관에 대한 풍요로운 분석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왕양명 심학과 그 전개를 유심주의이지만 시대적 해방의 의의가 있다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한 예다. 이것은 유심론의 복잡한 의미연관들을 끊어버리는 것은 물론, 철학적 문제들을 객관적 역사의 의미로 환원함으로써 문제제기와 그 해결을 위한 모색과정이 가진 철학의 창조적 성격을 약화시킨다. 과도한 역사주의의 폐단은 철학적 문제 자체를 이해하고 그 문제의 주체적·논리적인 조건들을 해명하는 것을 차단한다. 철학적 문제는 후대에 다른 방식으로 다시 물어질 수 있는 창조적 원천이 되는 것이지, 객관적 역사의 의미로 환수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또한 문제의 창조를 무시했을 때, 이론이란 단지 해답만을 추구하거나 이미 주어진 문제를 푸는 학생의 학습작업으로 변질될 것이다. 사실 철학사를 유물론과 유심론의 투쟁사로 본 것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지만, 그것의 철학사적 연원은 그리스의 플라톤에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트」는 존재를 둘러싼 철학사적 투쟁을 천상의 신들과 지상의 거인족과의 싸움으로 묘사한다. 전자에 속하는 철학자는 초감성적 존재를 주장하는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자신이며, 후자에는 자연철학자와 원자론자 및 헤라크레이토스와 소피스트가 속한다. 후자에 공통된 것은 물질과 자연 및 생성을 강조하는 내재적 사고방식이다.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투쟁은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집약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의 성장은 근대 이후의 과학발전을 수용한 과학주의적 세계관과 변증법의 결합이었다. 이 세계관은 개념과 법칙을 중시하는 태도가 근저에 있으며, 자신의 관점을 인간 이성의 가장 진보적인 산물이라고 스스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유일화의 과정에서 철학은 문제 창조운동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비창조적 운동으로 이해되거나 이미 주어진 근본적 해답을 인식하여 상황에 응용하는 과정으로 되어버렸다. 따라서 ‘복잡성’의 체계인 어떤 사태연관들도 하나의 개념적 원리에 의해 단순화되거나 제거되는 폐단을 면치 못하였다. 풍요로운 삶과 문제 창조운동으로서의 철학은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빈곤화되고 보수화되었다. 이러한 점을 의식한다면, 천상과 지상의 투쟁이 중국에서는 첨예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차이점은 차치하더라도, 중국철학에 대한 유심 아니면 유물이라는 수사관적인 잣대는 자제되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자신이 주장하는 원리에 대해서까지도 회의할 수 있어야 한다. 플라톤도 초감성적 ‘존재’ 개념의 무규정적 공허성을 인식하고 다른 이론의 엄연한 현존을 수용하여, ‘비존재’의 다른 것들을 존재로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천상적 학설의 전복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청대 철학』은 청대 철학의 한 특징으로서 ‘이성적 비판과 회의’의 정신을 들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고증학은 그 발달과정에서 맹목성을 탈피하여 철학을 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것은 경세치용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이성의 책임의식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도식을 회의하고 새로운 형이상학이나 정치론을 탄생시켰다. 저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청대 철학의 진보’이며, 이에 비해 송·명의 철학은 ‘비이성주의’이다. 왜냐하면 정주학(程朱學)은 합리적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에는 돈오의 관통으로 가며, 심학은 마음〔心〕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송·명의 철학은 마음에 의한 마음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통해 세계나 인간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정신이 깃들여 있다. 특히 양명학의 발전은 이러한 정신을 더욱 세속적으로 급진화하였다. ‘심체(心體)’는 어떠한 사회적 위치나 기능이 부여하는 규정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작용방식은 구속과 억압이 아니라 쾌활성이며 저항성이다. 마음이란 이제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을 긍정하면서 주장하는 일종의 ‘주체’이다. 그것이 참된 ‘나’이지, 인류적 규정에 의해 형성된 자아는 아니다. 이런 자아는 파괴되어야 했다. 장자와 선종의 수용에서 발전된 이러한 벗어나는 자유의 주체는 과도하게 주장될 경우에는 객관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청대의 철학이 보기에는 확실히 그러했다. 새로운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경세론은 인간의 자연적인 감성적 본성의 충족을 수단으로 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 보면 주체만을 강조하는 것은 비이성주의로 비칠 뿐만 아니라 공허한 것으로 판단될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비판적 사용은 비판적 자유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 역동성의 차원에서 사회를 본다면, 이성은 자신을 사회통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주체를 형성한다. 사회의 역동적 생성의 맥락에서는 이성과 주체는 서로가 서로를 존속시키고 사회의 압력에 저항하도록 서로를 도울 수 있다. 청대의 비판적 사고에는 개혁적 사회통합을 위해 공자적 실천주의를 강조하는 정신이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정신 속에 이미 비판적 주체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송·명의 철학이 심적 본체〔心之本體〕를 중시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형이상학적 본체로 삼아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해명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주체 발견의 의의까지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청대 철학』 저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송·명의 관념론을 단순히 몽매주의로 보려는 충동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자가 보기에 청대의 철학은 이성과 함께 주체의 공존관계의 가능성을 연 역사적이고도 철학적인 의의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청대 철학』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교훈도 이것이다. 그러면 다음으로 논의할 만한 것만 선택하여 세부적으로 『청대 철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3 1,2장에서 저자는 청초 정주학자와 그 성격을 논의한다. 특히 심학을 옹호하는 모기령(毛奇齡)과 이학을 옹호하는 장열(張烈) 간의 논쟁에 관한 소개는, 자료상의 한계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국내에서는 주목받지 못해왔던 부문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청초의 이학은 관학화되어 이미 참신성을 상실하고 기존 이학의 개념만을 되뇌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대부를 조종하려는 강희황제의 폭넓은 식견에도 못 미치는 경직된 어리석음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양명학을 옹호하기 위해 고증작업을 한 모기령을 상세히 취급하고 있다. 청대 고증학에 대한 그의 기여는 큰 것이었다. 이에 비해 장열의 이학 옹호 태도는 독창성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 저자는 장열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희의 인식론은 육상산·왕양명의 인식론에 비해 한 걸음 앞섰다”고 한다. 왜냐하면 육·왕의 심즉리(心卽理)는 ‘내향적이고 폐쇄적이며 따라서 보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열이 육·왕을 핵심없는〔無頭〕 학문이라고 비판한 것은 ‘정곡을 찔렀다’는 것이다(1권 2장, 104~5면). 이러한 평가는 주희가 객관적 법칙에 대한 인식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객관적 법칙에 대한 개념적 파악을 선호하는 것은 저자들의 기본 관점 중의 하나이다. 아마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 세계관만이 선진적이라는 중국의 현대 교육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과학적 태도가 객관성을 우월시하는 것이고, 이것이 주관성의 위기와 소멸을 가져옴으로써 오히려 삶을 폐쇄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객관성의 우선성은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존의 죽은 개념이나 메마른 법칙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광범위한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주관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요구된다. 개방된 마음으로 현상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개념과 사고 유형이 창조될 수 있다. 이러한 개방과 창조의 지평을 연 것이 육상산과 왕양명의 심학이 가지는 철학적 의의라고 본다면, 이것을 폐쇄적·보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일면적인 지적일 것이다. 오히려 마음의 개방에 의한 현상과의 감응, 상상력과 의지의 최대화, 감성적 감수성의 충격적 자각이 창조적 개념형성의 기초가 되는 것이지, 그러한 능력들을 개념이나 법칙 아래 종속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다른 능력을 개념에 종속시키는 것이 더 비창조적이고 보수적이며 독재적이다. 3장은 청초의 사회비판 사조를 개술하고 있다.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 보이는 황종희의 봉건군주에 대한 비판은 “명조 망국의 교훈에 대한 총결이고 청초 정치투쟁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곧 초래하게 될 봉건사회 역사의 종결을 예시한 것”이다(1권 3장, 136면). “천하의 치란은 한 성씨의 흥망이 아니라, 만민의 우수와 환락에 달린 것이다(天下之治亂, 不在一姓之興亡, 而在萬民之★樂)”라는 그의 견해는 실로 봉건독재의 갈등과 멸망의 원인을 감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것이다. 송유(宋儒)들의 태극설에 대한 청초학자들, 황종희·황종염(黃宗炎)·방매(方邁)·모기령·주이존(朱彛尊) 등의 주장에 대한 4장의 소개는 중국철학의 기초 지식으로서 읽어둘 만하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청초의 ‘태극도(太極圖)’에 대한 비판은 만물의 궁극적인 것에 대한 표덕(表德: 별명)인 태극의 문제를 취소함으로써 철학의 발전에 불리한 작용을 끼쳤다(253면). 그리하여 한조 이전으로 돌아가 이(理)를 기(氣)로 대체하여 우주본원을 설명할 뿐이었다(253면). 이러한 비판은 귀기울일 만한 것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내적 연관과 운동의 추동력으로서의 ‘힘’과 연관하여 생각해본다면, 전통의 압력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기’의 철학적 의의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있다. 질료의 역할을 하면서도 운동인의 기능을 하는 것을 추구할 때 ‘기’ 개념만큼 편리한 것은 없을 것이다. 6장부터는 각 대가들의 학설을 다룬다. 왕부지는 상하로 나누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왕부지의 ‘기’를 본체의 ‘기’와 작용의 ‘기’로 나눈다. ‘화기(和氣)’는 전자에 해당하고 ‘원기(元氣)’는 후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311면).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왕부지는 주희의 이원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장횡거(張橫渠)를 ‘정학(正學)’으로 삼는다. 그런데 장횡거도 무형의 본체로서의 신묘한 기〔神〕와 현상화하는 기〔氣〕를 분리하는 측면이 있다. 이에 비해 왕부지는 양자를 통일하여 작용의 성질을 본질로서 가지는 ‘기’를 말하려 한다. 이렇게 본다면 굳이 ‘기’를 본체와 현상으로 나누어 서술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원기’는 태허(太虛) 본체의 본질적 성격이 아닐까? 또한 왕부지는 주기론자이지만 가치관에서는 주희의 옹호자이다.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서도 감통(感洞)의 경지에서 성인이 된다는 이학의 궁극적 관심이 지배적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가 왕부지의 ‘천지를 본받는다’는 견해를 순자(荀子)나 유우석(劉禹錫)의 자연이용과 지배에 속한다고 평가(344면)한 것은 왕부지 철학의 형이상학적이고도 이학적인 성격을 너무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고염무는 기본적으로는 이학으로 기운 인물이지만, 송·명의 이학과 심학이 가지는 사변적 성격을 배척하였다. 사변적 ‘내학(內學)’은 경전과는 관계없는 그래서 근거없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주희의 ‘상달(上達)’이 아닌 ‘하학(下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들도 지적하듯이, 일체 사물에 대한 “추상적 사고를 포기하고 원시유학의 소박한 몇가지 준칙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면, 이는 퇴보이고 복고이다.”(446면) 그는 다만 “널리 경세의 글을 배워 부끄러움이 있게 한다(傳文有恥)”는 명교(名敎)로써 풍속을 순화하려는 인격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의 『일지록(日知錄)』은 이론적 탐구의 책이 아니라 영감을 주지 못하는 여러 잡다한 단상이나 고증적 사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의 비판정신에도 불구하고 고증의 맹목성의 병폐가 그의 책에서 드러난다. 안원(顔元)과 그의 계승자인 이서곡(李恕谷)을 통해 우리는 실습(實習)과 실행(實行)을 강조하는 일종의 중국식 실용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고증에 의해 고대 중국인이 실행 속에서 지식을 구현하려 했던 정신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강조하고 있지 않지만, 안원의 사고에서 주목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그의 긍정으로부터 인간의 자기부정적인 비관주의적 사고방식의 병폐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안·이 학파의 단점은 송·명의 이학에 비하여 이론이 조잡하고 심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점이 보인다고는 하나 안원의 『사존편(四存編)』의 이론적 체계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안원이 그의 영향을 받은 대진과 함께 이론적 비판을 통해 인간과 그의 생명성에 대한 또다른 이해의 지평을 연 것은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해의 지평을 연 것이었다. 주지유(朱之瑜)는 일본에 건너가 실학을 전파한 인물로서, 원시유학으로 돌아가 경세치용의 학술을 종합적으로 성취하였다. 주지유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실학과 이학의 관계 문제이다. 이것은 한국 사상사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의 “실학과 이학은 모두 유학사상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의 필연적 결과이다.”(2권 12장, 158면) 불가와 도가의 영향 아래에서 원시유학을 표방한 송대의 이학이 청대에 와서 원래 사회·정치·교화를 위해 봉사하려는 유학사상으로서의 기능을 못하자, 유학은 스스로를 개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실학은 이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청담을 논하는 현학적인 측면에 대한 부정이었다. 황종희에 대한 저자들의 서술에서도 보이듯이 청대의 유학은 한·당 시대의 경천위지(經天緯地)의 기개 및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웅대한 도식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217면). 황종희의 본체론은 주기론이다. 그런데 왕양명에 경도된 그는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은 모두 마음’이라고도 주장한다. 이전의 철학사에서는 황종희를 유물론자이지만 여전히 유심론적 잔재를 버리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청대 철학』은 황종희의 ‘마음’은 우주적 본체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활동·정신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평자의 의견으로는 이것은 너무 인위적인 속단이 아닌가 한다. 왕양명 역시 마음을 우주의 본체로 주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그가 ‘생기(生氣)’로서의 ‘기’를 심적인 것, 이성적인 것이기보다는 영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영민하고 신묘한 ‘기’를 비의지적이지만 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것을 혼돈의 물질로 분명히 정의하지 않는 이상,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통념이다. 그의 스승 유종주(劉宗周)도 ‘마음이 곧 이 기(心卽是氣)’라고 하였다. 황종희에게도 ‘기’를 모종의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큰 모순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다. 물질과 정신을 ‘기’의 응결 정도의 차이로 보는 전통적 관점은 오히려 양자의 단적인 경계선을 허물어버릴 수 있는 암시를 주는 창조적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산(傅山)은 명대의 이지(李贄)처럼 청대의 이단적 사상가이다. 그는 ‘무리(無理)’를 형이상으로, ‘이(理)’를 형이하로 규정함으로써 ‘이’의 진부한 억압성을 폭로하고, ‘이’를 전복할 수 있는 파괴적이고 창조적인 ‘무리’의 ‘힘’을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것은 도가와 불가의 영향이긴 하지만, 그가 ‘누유(陋儒)’ ‘노유(奴儒)’라고 평한 정주학과 그 후계자들의 우상숭배적 노예근성을 비난하는 데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저자의 지적대로 이러한 독창적 사고는 왕부지·황종희·고염무·방이지와 같은 청초의 대가들이 낡은 색채를 벗어나지 못한 데에 비하면 살아 약동하는 것이고 대단히 선명한 것이다(474면). 저자는 세계의 본원에 대한 (이학적) 연구는 실제적 의의가 없다고 인정한 그의 관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에 앞서 ‘무합리’의 형이상학적 착안점이 가지는 의의를 충분히 서술하는 것이 더 의미깊은 일일 터이다. 합리의 독재가 삶을 비루하게 만든다면, 그것의 극복은 철학의 제일차적 임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진은 안원의 사상을 이어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대한 이학의 착취적 성격을 이론적으로 비판·분석하였다. 이 점은 저자의 인정대로 여곤(呂坤)·왕부지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이론상 심각한 것이다(3권 19장, 137면). 저자에 의하면 대진이 이학의 ‘이’에 대해 ‘변통’의 관점에서 비판한 것은 가치관의 모순을 인식면의 차이로 하강시킴으로써 이론적 비판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사실 대진은 ‘이’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접근 방법을 자연주의적으로 달리한 것이었다. 또한 도가나 불가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는 없었다고 지적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비판적 정신과 봉건위계제에 대한 비난은 그를 진취적 계몽사상가로서 위치짓기에 충분할 것이다. 완원(阮元)은 경전에 대한 고증적 연구와 송(宋)의 이학으로 심성을 함양하는 종합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물론 그도 이학의 공소성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그는 양자의 맹목성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실증과 사상을 추구하는 이러한 태도는 대진과 유사하나, 대진이 경학에서 핵심〔精〕만을 추구한 데 비해 완원은 박대(博大)를 추구하였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공자의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一以貫之)’를 전부는 아니지만 관(貫)의 여러 용례에 따라 ‘오로지 행한다’로 해석한 것이다. 그는 ‘관’을 습(習: 실제 행함)이나 행(行)으로 새긴다. 저자는 이것이 경의 본의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원의 실사구시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라 해도, 원래 실천적 정신과 문화적 활동을 중시하는 공자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해석은 음미해볼 만한 것이다. 또한 완원은 이(理)의 추상성을 꺼려해서 그것을 예(禮)로 대체하였다. 능정감(凌廷堪)은 이 입장을 6경에 이(理)자가 없다는 이유로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자세는 고증을 이유로 경전을 우상시함으로써 철학적 개념의 창조와 사유를 포기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정당하다. 한편 능정감은 “‘성’은 호오양단일 뿐이다(性者好惡兩端而已)”(3권 22장, 322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정다산(丁茶山)이 ‘성’을 ‘기호(嗜好)’로 해석하여 주관주의적 측면에서 윤리를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과 연관하여 음미해볼 만한 것이다. 그러나 완원과 능정감이 주희와 대진을 다같이 이(理)의 함정에 빠졌다고 비난했지만, 그들의 학술태도 역시 실학의 함정에 빠졌다(332면). 장학성(章學誠)은 경전을 모두 일종의 역사서로 파악하였다. 학술은 역사적 관점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대진을 수용하면서도 대진이 주희와 자신과의 단절성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철학의 연속성과 단절성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 점에서 중요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사실 한학의 고증적 방법과 송학의 의리적 방법 간의 투쟁은 사상 사이의 투쟁에서 얻을 수 있는 의의있는 결실을 약화시켰다(339면). 장학성이 고증적인 사실이나 실제사물에서 떠난 이(理)나 도(道)는 없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원칙이다. ‘경전’의 ‘경(經)’에 대한 그의 해석은 매우 흥미로운데, ‘경’은 경륜·경세의 경이다. ‘국가제도는 경제(國家制度爲經制)’라는 그의 주장은 제도의 문제가 경영의 대상이자 경전의 근본문제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 경영과 제도에 대한 고증의 강조는 그의 사고를 봉건제도에 대한 실증주의적 옹호로 나아가게 하였고 사고의 자유를 구속하였다. 이 점은 오늘날까지도 깊이 성찰을 요하는 문제이다. 근대의 문턱에서 금문경학을 가지고 쓰러져가는 봉건제를 개혁해보고자 한 위원(魏源)과 공자진(★自珍)이 『청대 철학』의 마지막에 놓였다. 공자진은 고증적 경학이나 이학에 대한 연구를 배격하였다. 그가 보기에 당시의 시대적 요구는 불학(不學)의 누명을 쓰고서라도 구세를 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것이었다. 그는 청대의 역사가 태평세인 치세, 승평세(升平世)인 쇠세(衰世)를 거쳐 거란세(據亂世)인 난세의 도래를 예시하고 있다고 보고 당시의 관료사회와 대지주들을 혹평하였다. 그는 ‘생기없는’ 사회에서 이제 ‘산중의 백성(山中之民)’이 일어나 봉건지배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지렛대를 인간 특히 선각자 대인(大人)의 ‘심력(心力)’에서 찾았고 부의 불평등을 재조정하는 선에서 대안을 구했다는 점에서 지주계급 개량파로 분류된다. 근대 이전을 고대로 분류한다면 그는 마지막 고대 사상가이다. 그러나 부산과 장학성이 그랬듯이 위원과 공자진이 경전의 신성성을 파괴함으로써 사상의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개념을 찾아 시대를 넘어서려고 한 것은,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깊이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4 이제까지 『청대 철학』을 각 장마다 저자와 평자의 견해를 대비시키거나 음미할 만한 견해들을 강조하면서 논의한 바, 『청대 철학』이 주는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학문의 방법상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삶의 자세와 사상내용까지 규정하는 심각한 것이기도 하다. 청대의 고증학이 사대부 계급을 조정·통제하기 위한 황실의 압력하에서 패기 없는 유생들의 소일거리였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사회의 경영과 극복이라는 경세에 대한 관심 아래 구체적 실천의 정신을 경전에서 찾고자 한 태도가 고증학에 살아있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동기는 과거의 잡다한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전락하는 비이론적 태도를 견제할 수 있었다. 현실극복의 동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과거나 현재의 사실에 대한 실증주의적 접근은 약화되었다. 긍정을 의미하기도 하는 실증과 변혁을 의미하는 부정의 긴장이 청대 철학의 저변에 놓여 있다. 심지어 부산과 같은 사람은 경전에서 실증적인 것을 찾거나 거기서 어떤 ‘도’를 찾거나 하는 학자들이 적군의 침략이나 권세가의 등장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는 비루성을 혐오한 나머지 고증과 도학 양자를 부정하고 경학을 해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독자적 사유경지를 개척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은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의 한국적 조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철학에도 나라별로 나누어진 전공에 따라 각기의 경전이 있다. 고증해야 할 사실과 얻어야 할 사상이 숨어 있는 이 경전의 속박은 전공자 스스로에게도 한스러운 주체 상실로 느껴진다. 『청대 철학』은 이와같은 유형의 긴장과 갈등을 보여준다. 갈등의 진폭이 클수록 그 사상가의 고뇌도 크다. 그러나 그 갈등은 그 자신과 세계에 의미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이념 혹은 사상이 성취될 때 객관현실은 그대로라 하더라도 다소 진정될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사상의 창조와 개념의 형성은 어렵다. 이 점에서 초순(焦循)의 방법적 논의는 재음미할 만하다. 그에 의하면 고증의 폐단은 사유하지 않는 것(不思)이고, 의리(義理: 넓은 의미의 의리로서 일종의 주의나 사상을 의미)를 추구하는 것의 폐단은 사실을 배우지 않는 것(不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실로써 증거하고(證之以實), 자유로운 사고로써 운용해야(運之以虛)”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사실에 의거하면서도 사고의 자유를 물화시키지 않는 이러한 태도를 대진은 “의리를 잡은 이후에야 고증할 수 있다(執義理而後能考核)”는 말로 표명하였다. 여기서 ‘의리’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나 해석을 근간으로 하는 일종의 세계관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더 넓힌다면 세계관을 반성적으로 다시 비판하는 해체적 세계관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세계관은 기존의 이론이나 삶과의 대면에서 그 씨앗이 싹틀 수 있고, 이것이 창조적 의지를 이끄는 것이라면 사실의 정확성에만 의존하는 것은 삶과 철학의 충동을 꺾는 것임은 물론 과거의 문제의식의 산물 안으로 사상의 시야를 가두는 일이 될 것이다. 문제창조를 상실한 허탈한 지식인의 가슴을 위로하는 것은 확실성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고증학으로 동기부여를 하지 않는 이상 고증적 사실은 이론창조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이념이 될 수는 없다. 사실탐구에 의존한다고 하는 과학조차도 그 발전과정에서 각기 고유한 사고유형 혹은 이념이 역사적으로 전변되어왔다는 사실은 맹목적 사실추구의 소박함을 의문시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대 철학』은 과거 경전의 등에 업혀서 걸음마를 배우려는 우리의 오랜 관행에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