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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9월  4일 금요일 오후 03시 41분 21초
제 목(Title): McCormack/일본 자유주의사관의 정체 


 
일본 ‘자유주의사관’의 정체



 개번 매코맥(Gavan McCormack)註 


‘자유주의적 역사기술’과 ‘올바른 역사’ 
‘위안부’의 도전: ‘끔찍한 성범죄의 나라’ 일본 
사람과 운동 
이해와 해석을 위하여 
결론  




 자신의 과거의 진실을 부정하는 것만큼 오늘의 자신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없다. 
-- 오오오까 쇼오헤이--註1) 
  
 자기 나라의 근·현대사를 교육하는 방식이야말로 한 국민을 국민으로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자랑할 만한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 한 국민의 자기형성은 
불가능하다 -- 후지오까 노부까쯔--註2) 

   
 1.‘자유주의적 역사기술’과 ‘올바른 역사’ 
   
 반세기 전에 끝난 전쟁에 대한 책임문제가 그 전쟁이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지금, 
일본한테 점점 더 급박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두고 생긴 사회적·정치적 
균열은 깊어가고 있으며 그 국제적인 파급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이후로 일본의 식민주의와 침략의 희생자 편에 서서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법적 소송이 토오꾜오의 재판정에 수십 건씩 쌓이고 있다. 이들은 
종군 ‘위안부’, 난징 등지의 대학살의 희생자들, 전시징용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일본이 중국에 사용한 생물학적·화학적 공격의 희생자 및 그 
가족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위안부’ 문제일 것이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률가위원회는 1994년 ‘위안부’ 보고서에서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이 전시 일본의 군사시설에 감금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타와 고문을 당하였고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1996년 2월 유엔의 인권위원회는 ‘위안부’를 ‘성적 노예’로, 이 여성들에게 
일본이 저지른 짓은 ‘반인륜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이 위원회는 일본이 
희생자들에게 보상할 것과, 공소시효에 상관없이 책임자들을 처벌할 것, 아울러 
일본은 교육과정에 이 역사적 사실들을 포함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서울과 마닐라, 자카르타 등 과거 ‘대동아공영권’에 속했던 많은 도시에서 
분개한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50년 전 그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국(남북한 모두)·필리핀·중국·태국·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이름을 
밝히면서 자기들이 겪은 일을 글로 혹은 말로 증언한 여성들이 1997년 초에는 이미 
2만3천명에 달하였다. 전쟁을 반성함에 있어 초점은 이렇게 변하였다. 논제를 
규정하고 토론해온 것이 항상 남성들 -- 정치가·군인·학자 -- 이었던 데 반해, 
1990년초부터는 50년간의 침묵 끝에 여성들이 나서서 일본을 향하여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도덕적·정치적·문화적인 질문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 12월 미국 법무성의 범죄국은 전범이라 여겨지는 일본인들의 이민 
‘부적격자 명단’을 마련하였다고 발표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12명 가운데 3명은 위안부조직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 9명은 
중국에서 미생물전을 행하고 죄수들을 상대로 수많은 참혹한 죄를 저지른 하얼삔의 
‘731부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註3) 말하자면, 사건이 있은 후 50년이 
지난 지금 워싱턴은 일본인들을 나찌전범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범죄가 유달리 혐오스러워서 이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자들은 
공소시효의 보호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셈이다. 
 일본 내에서도, 국가기관 차원에서 이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에서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처음으로 무너진 1993년 수상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이 침략전이며 식민전이었다고 인정했고, 1995년 의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정식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일본 
군인들을 위한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국가기관이 개입하였음이 시인되었고, 
정부는 그곳에서 일하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강제로 그런 생활을 하게 되었음을 
시인하였다. 명목상으로는 민간기금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기관의 막강한 
지원을 받은 생존 ‘위안부’에 대한 보상기금이 마련되었고, 1996년에는 희생자 
중 일차적으로 몇 사람의 여성들에게 위로금과 함께 수상이 쓴 구체적인 사과 편지 
또한 전해졌다. 
 그러나 이같은 온건한 해결책에 맹렬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의회에서는 
그들의 전쟁이 정당한 명분을 가진 전쟁이었으므로 어떤 사과도 필요치 않다고 
주장해온 자민당 의원들이 1994년 12월 (전 문교장관이었던 오꾸노 
세이스께奧野誠亮를 필두로 하는) ‘종전50주년 국회의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의 이름으로 1995년 8월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이 가운데 ‘아시아 
공생의 제전’이라는 행사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 대표를 초청하여 “전몰자들에게 
감사하고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에 기여한 바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註4) 1996년 4월 이 모임은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대응하여 야당인 신진당(新進黨, 오자와 이찌로小★一郎가 이끄는 
보수파로 당원의 일부는 1993년 자민당에서 갈라져나온 사람들임) 의원들은 
1995년 2월 (오자와 타쯔오小★辰男의 주도하에) ‘올바른 역사를 전하는 
국회의원연맹’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의회 바깥을 보면, 이 두 개의 의원모임은 1981년에 결성되어 1990년대에는 
작곡가 마유즈미 토시로오(黛敏郎)에 의해 주도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전국적으로 긴밀한 공조를 이룬 것이었다. 국회 안팎의 민족주의 단체들은 대체로 
전통 우파나 민족주의 성향을 띤 여타 단체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데, 가령 
신사본청(神社本廳), 일본유족회, 통일교와 그 산하조직인 ‘평화교수협의회’ 
‘세계승공연맹’ 그리고 ‘성장의 집’ 같은 종교단체들이 있었다.註5) 
 그러나 1990년 중반 무렵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토오꾜오대학 교수인 후지오까 
노부까쯔가 1995년과 1996년에 꾸려낸 ‘자유주의사관연구회’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같은 전국적 조직들이다. 이 새로운 조직들이 불만에 찬 많은 
학생과 교사, 연구자들을 전선으로 결집하여 국회 안팎의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 
곁에 세울 수 있다면,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해질 것이다. 
 후지오까(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가 중심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와 그가 내건 대의명분은 문인·언론인·학자·사업가 등 광범위한 
집단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여기서 눈에 띄는 역할을 한 사람은 만화가인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와 독문학자인 니시오 칸지(西尾幹二, 
電機洞信大學)이다. 그들의 운동은 일본민족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재평가하는 
일과 그중에서도 특히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를 언급하는 모든 조항을 
삭제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이미 베스트쎌러 목록에 오른 일련의 저작들, 
예컨대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註6)『오욕의 근현대사』註7) 같은 책을 
출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다. 대중잡지들은 이들의 분석과 활동을 정기적으로 다루었고, 전국 규모 
일간지인 『산께이신문』도 이들을 활발하게 보도하였다. 코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는 잡지 『사피오』(SAPIO)에 연재되어 젊은층의 인기를 얻었다. 전쟁 
기억과 교과서 문제, 그리고 특히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밤샘토론회가 1997년 
2월 1일 아사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는데, 이 토론회에서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은 이름난 역사학자 및 자신들과 반대되는 명분을 위하여 싸우는 많은 
단체의 대표들과 토론을 벌였고 이는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언론이벤트였다.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진부하고 해결점 없는 전후 담론의 양극단으로부터 탈피한 뭔가 새롭고 
신선한 입장인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혹자는 이런 탈피가 1990년대 중반에 어차피 
시도되고 있었고, 따라서 후지오까의 작업은 불필요하거나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전쟁책임을 인정하고 보상금(전쟁피해자에게 줄 보상금 ― 
옮긴이)을 확보하는 일에 대해서 -- 1993년 호소까와(細川) 수상이 선언한 
이후로 현재 수상인 하시모또(橋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입장인데 
-- 국민적인 동의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지오까는 이런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인 사유는 아직도 좌우 이분법에 갇혀 
있고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소설가인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郎)의 표현을 빌려 그는 이러한 이분법을 
‘좋은 편과 나쁜 편’이라 부른다. 한편에는 이른바 ‘토오꾜오 전범재판식 
역사관’이 있다. 이것은 전전(戰前)과 전시의 일본을 좋은 편인 미국과 
비교하여 나쁜 편으로 보는 역사관으로 미군정에 의하여 일본에 강요된 
정통사관인데, 후지오까가 믿기로는, 그후로 좌익 역사학자와 교육자들 덕분에 
일본사람들이 이 사관을 내면화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자민당까지도 이에 
휘둘려 근본적으로 잘못된 1990년대의 사과의 정치를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립하는 다른 시각으로는 흔히 ‘대동아전쟁 긍정론’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가장 유명한 대변물은 역사학자 하야시 후사오(林房雄)의 
1969년의 연구작업일 것이다. 그는 이 연구에서 아시아의 해방을 달성하는 데 
일본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후지오까는 이 두 사관 모두를 거부한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 그의 포화는 
전자에만 집중되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와 그의 동료들은 하야시가 30년 전 
외쳤던 바로 그 긍정론에 더욱 근접해왔다. 새로운 차원의 객관성을 달성하고 
상대주의적이며 다양한 인과관계의 틀을 밝혀내겠다는 자유주의의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후지오까의 메시지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많은 사람들은 5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아무런 
해결의 기미도 없는 (혹은 그렇게 보이는) 교착상태에 지쳐 있었고,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을 놓고 아직도 책임소재를 묻고 보상 운운하는 것이 짜증스러운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은 또한 이제 전지구적 경제초강국이 된 일본의 위치에 걸맞는 
긍정적인 정체성과 역할을 원하는 듯하다. 
 '자유주의’라는 딱지라든가 한결 뛰어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쳐놓고 보면,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의 메시지의 핵심에는 ‘일본 고유의 
역사의식’이 희미해졌다는 개탄에서 비롯된 역사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책임은 
이들이 전후의 정통적이고 ‘자학적인(自虐てき)’ 역사관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註8) 객관적이고 열려 있는 상태에서 인과관계의 다양성을 찾는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그들은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註9) 그들에게 역사는 상이한 해석을 해결할 수 있는 (진리나 증거 같은) 
내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는 그것이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궁극적인 도덕적 과제에 종속되는 
것이다.註10) 특히 그들은 1997년 4월부터 사용하도록 승인된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 강제연행’(그리고 난징대학살과 그밖의 다른 잔혹행위까지)을 
언급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한다. 이런 내용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그들 생각에는 
‘우리의 독자적인’ 역사관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과서는 ‘올바른 
역사’(正史)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註11) 
 후지오까가 정치적 ‘올바름’을 호소하는 자신의 입장을 그런 입장과 상반되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의 기치하에 피력하면서 그 모순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그가 아주 진지하고 중요한 사상가로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사실을 보면, 일본의 
담론이 얼마나 바깥세계와 어긋나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올바른 역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될 것을 주장함으로써 후지오까는 억압해야 할 ‘그릇된 
역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시사한 셈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좋은 편/나쁜 편’의 이분법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밖의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 즉 정치적으로 옳은 것을 지키는 수호자의 반열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은 
셈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위험한 사상들’을 제거하고 참되고 영광스런 
일본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데 헌신한 전전의 관리들은 모두 ‘자유주의자’였던 
셈이다. 
   
 2.‘위안부’의 도전: ‘끔찍한 성범죄의 나라’ 일본  
  
 실제로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격렬히 부인하는 것은 바로 ‘위안부’이다. 
그들의 존재 자체도, 일본제국주의 군대에서 노예와 같았던 그들의 처지도, 그들이 
겪은 고통도, 그리고 그들이 일본으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것도 모두 부인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증진시키지 않으므로 
‘위안부’ 이야기는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모두 ‘나쁜 편’이다. 더욱이 ‘자유주의자들’이 부인하는 근거는 
근본적으로 경험적이라기보다는 선험적이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도대체 대규모의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같은 범죄를 저지를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순전히 가증스러운 날조라고 열광적으로 신봉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는 것은 ‘반일’ 행위이며 ‘자학적’인 행동이어서 일본을 
“갉아먹고(腐食) 부숴서(挫滅) 녹여(溶解) 없애버리는(解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註12) ‘위안부’라는 ‘그릇된 역사’를 가르치는 학교는 
거대한 ‘카미꾸이시끼무라’(上九一色村, 오옴진리교 본부), 즉 전체 국민을 
반일본적 이데올로기로 오염시키는 마인드컨트롤쎈터가 된다는 것이다.註13) 
후지오까에게 ‘위안부’ 문제는 “일본을 모욕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1990년대에 조작된 근거없는 스캔들”이다.註14) 아니, 그것은 “외세와 협력하여 
일본을 파괴하기 위한 거대한 음모”이다.註15) 이같은 거짓말이 교과서에 
수록된다면 일본은 “비길 데 없이 음란하고 어리석으며 광적인 민족으로 비치게 
되리라”는 것이다.註16) 
 종군 ‘위안부’라는 복잡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유주의사관’ 학파는 
전쟁사연구로 익히 인정받고 있는 역사학자 하따 이꾸히꼬(秦郁彦)의 작업에 
대폭 의존한다. 하따와 후지오까는 ‘위안부’는 본래 매춘여성〔公娼〕으로서 
일본제국 군대의 장군보다도 수입이 많았으며, 그들의 고객인 일반병사의 100배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다고 날조하였다.註17) 하따에 따르면 그들의 일은 
“위험부담이 큰 대신 대가가 좋았다”는 것이다.註18) 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여성들은 이 기회를 “복권당첨”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 돈을 탐내서 소송을 
제기하였다는 것이다.註19) 하따와 후지오까는 강제동원이나 공식적인 책임소재를 
입증할 문서가 없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들은 이 여성들의 증언은 선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일축하며 심지어는 위증법에 저촉된다고까지 하고 있다. 그들은 
사설 계약에 의해 운영되던 ‘위안소(慰安所)’와 일본제국 군대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하자고 제안한다. ‘위안소’는 문부성 건물 안의 식당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건물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임대료·위생관리 등은 건물에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하지만 그 운영이나 직원관리는 근본적으로 독립된 그런 곳 말이다. 
이럴 경우 문부성이 그 건물의 식당에서 일어나는 노동관계나 써비스에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군대도 매매춘이 합법적이고 가치와 
기준들이 지금과 판이하게 다르던 시절의 과거 일본제국의 섹스산업에 대해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註20) 
 하따는 또 재정적인 고려에 근거한 논거도 편다. 위안부 보상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가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느라고 일본 국가재정이 어려워지리라는 
것이다. 예컨대 강간행위 한 건당 3백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할 때, 수년간 
일어난 이런 강간행위 숫자를 전부 감안한다면 한 여성 당 700억엔까지 받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전체 보상 청구액은 곧 일본의 국채에 필적하게 되리라고 그는 
어림하였다.註21) 그의 주장의 근거가 이처럼 원칙과 진실에서 재정적 고려와 
실리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겠지만 바로 이런 말바꿈은 논리와 
도덕의 근거가 박약한 담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 그들이 제기하는 항의의 밑바닥에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후지오까와 특히 그의 동료 니시오 
칸지(西尾幹二)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일본이 비슷한 범죄나 난폭행위를 
저지른 다른 근대국가들과 비교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본은 나찌 독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註22) 니시오의 장황한 항변에 따르면 일본의 
신권정치 국가체제하에서 천황은 대사제로서 “약간 고압적인 애국전쟁”을 
수행했을 수도 있으나, 나찌 독일과 함께 “역사적 유례가 없는 테러국가”의 
범주에 포함될 만한 “반인륜적 범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註23) 아울러, 
후지오까는 일본은 테러리스트 국가도 “끔찍한 성범죄국가”도 아니라고 
덧붙인다.註24) 
 문제는, 인종학살계획 자체는 나찌 독일에만 있었던 것이지만 아시아전쟁의 
사상자 수와 파괴 범위는 유럽전선에서의 피해에 맞먹거나 심지어 그보다 웃돈다는 
데 있다. 범죄행위 또한 끔찍하였다. 위안부의 경우 특히 더 했지만, (731부대의 
기록이 충격적으로 밝히고 있는 대로) 일본의 의료 및 과학 엘리뜨층이 저지른 
범죄라든가, 인종이데올로기와 ‘우생학’에서의 나찌와의 유사성에서,註25)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는 전시의 ‘강제노동’(징용) 등에서 가공(可恐)할 
것이었다. 나찌와 일본의 이데올로기와 그 실행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지만, 어떤 
면에서 일본은 나찌조차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감행하였으니, 미생물과 독가스를 
살포하고, 괴뢰정부의 활동자금을 위해 마약을 밀매매하였으며, (중국에서도) 
광범위한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 소개(疏開)하는 등의 잔혹한 범죄를 서슴지 
않았다.註26) 
 그러나 과거의 나찌와 현재의 정부 사이에 역사적인 간극이 존재하는 독일과는 
달리, 현재의 일본은 전시국가를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거니와, 전시에 
국가원수이던 인물에 대한 전쟁범죄 책임문제 일체가 정치적인 이유로 기각되면서 
그는 1989년까지 계속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 비교를 좀더 끌고가보면, 
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시인하지 않고 731부대와 관련된 모든 잔혹행위를 부인하는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은, 독일(그리고 프랑스)의 재판에서 ‘유태인 집단학살 
부인’을 금지하는 조항을 어긴 사람들과 한통속이라고 할 수 있다. 
   
 3.사람과 운동 
  
 그렇다면 후지오까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그가 벌인 운동과 그 운동의 
계보는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1943년에 태어난 후지오까는 전쟁이 
패배로 접어들 바로 그 무렵 ‘노부까쯔’(信勝), 즉 ‘승리확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젊은 시절 그는, 스스로 술회하기를, 좌익집단과 관계있는 
‘일국평화주의’를 신봉하였고註27) 홋까이도대학에서 연구하던 시절 
교육방법론을 전공하는 학자로 어느정도 평판도 얻었다.註28) 1980년대 초반 그는 
토오꾜오대학으로 옮겼지만 럿거스대학(Rutgers University, 미국 뉴저지주에 
있음 -- 옮긴이)에서 1년간 문화인류학을 연구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註29) 그 1년간 그는 ‘전향’이라 불릴 만한 일종의 
위기를 경험하였다. 걸프전에 대한 일본의 대응방식에 수치감을 느낀 그는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의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Just and Unjust 
Wars)이라든가 리처드 마이니어(Richard Minear)의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 같은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이니어를 읽은 후, “내 눈에서 
꺼풀이 한겹 떨어져나갔다”고 그는 술회했다.註30) 그가 보기에 일본은 
“국가로서 그 안녕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였다. 그는 
‘대동아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전후 일본의 평화헌법을 일본을 속박하는 
굴레요 일본 고유의 민족주의적 감각의 출현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보게 되었다. 
 그가 서술하는 경험은 지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서적인 (또는 
종교적이기까지 한) 경험이기도 해서, 거기에는 논리적인 일관성이 전혀 없다. 
절충주의가 진정 그 특색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일본인들 가운데 그가 가장 큰 
비중을 두는 인물은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1884~1973, 신문편집인·정치인으로 
1·2차대전 사이에 유명한 자유주의자였음),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朗 
1923~1995, 유명한 전후 소설가로 주로 역사적인 주제를 다룸)이다. 그러나 
후지오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시바시는 바로 ‘자유주의’에 
입각해서 1920년대에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일본이 식민침탈을 중지하고 
‘소일본주의’(小日本主義)를 유지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 사람이었다. 또한 
메이지시대를 그토록 생생하게 극화한 시바 역시, 후지오까가 열렬히 찬탄하는 
작품 『언덕 위의 구름』에서 러일전쟁의 위대한 민족주의자 영웅인 노기(乃木) 
장군을 냉정하고 신랄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20세기 제국주의국가 일본에 
동조할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고, 특히 1930년대의 중일전쟁을 가리켜 ‘부당하며 
의미없는’註31) 전쟁, ‘침략적 전쟁’ 또는 석유와 자원을 차지하려는 
식민전쟁이라 부른 것이다.註32) 
 후지오까가 묘사하는 좌우익을 넘나드는 궤적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지만 그의 기술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자신의 변모를 좌우대립의 역사적 
교착상태를 넘어서려는 시도로 그려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2차대전 전에 
일본이 치른 전쟁들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하는 
‘자유주의’라는 딱지를 빼면 그의 사관을 전통적인 우익사관과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없지만 그의 견해는 새로운 자유주의 역사관이 
아니라 낡은 황국사관(皇國史觀)이다.註33) 뿐만 아니라, 이전의 ‘전향자’처럼 
후지오까 역시 우익으로 다시 태어난 다음에도 ‘좌익’ 시절의 구조중심적 사고와 
‘선전선동’(아지프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즉 구조를 우선시하는 성향 
때문에 한때 일본공산당의 공식적 노선에 의존했던바, 그런 그의 성향은 개종 
이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그러나 마찬가지로 독단적이며 
독선적인 형태의 ‘올바름’을 구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새로운 ‘자유주의’의 ‘지적’ 기반이 이렇게 후지오까와 니시오 등에 의해 
구축되는 사이에, 지역과 거리에서 벌어지는 캠페인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들 운동의 특징은 전전이나 전후의 우익집단 및 국수주의 집단이 
흔히 구사한 위협과 폭력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자유주의적’인 그 어떤 
요소도 결코 그 안엔 없었다. 교과서 출판업자들에게 여러가지 협박성 요구가 
쏟아졌다. 우익전위대를 실은 트럭들이 군가를 울려대고 위협적인 구호를 외치며 
비위에 거슬리는 출판사들을 에워쌌다. 반일본적 교과서의 저자들과 출판사의 
이름이 ‘자유주의사관’ 책들과 팜플렛에 대서특필되고 교과서 저자들이 사는 
주택의 확대사진이 살포되는 등 이들은 명백히 위협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1960년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오(★沼稻次郎)를 암살한 극우극렬분자를 
애국지사로 칭송하는 책자들이 출판사에 배달되고 1987년 아사히신문사를 
습격한(이 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다) 세끼호오따이(赤報隊) 같은 파시스트 
폭력조직들이 후지오까를 지지하였다.註34) 이 모든 현상들 중 새롭다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이 언론을 향해 경고와 항의를 퍼붓고 문부성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였지만 그들의 캠페인은 명백히 실패였다. 
지방자치단체들을 끌어들여 토오꾜오에 교과서 개정요구를 퍼붓게 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지만, 단 하나의 현(오까야마)과 작은 지방자치단체 열한 곳만이 이 
결의문을 토오꾜오에 제출했을 뿐 나머지는 결의문 초안을 간단히 보류했다.註35) 
더욱이 오까야마현의 조치는 현의 주민들, 특히 여성들에게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어서 다른 곳에서 이 캠페인이 성공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전국적 운동이 곧 
꾸려졌다.註36) 
 바로 이전의 전쟁과 기억에 관련된 명분들말고도, 이들의 새 전선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벌인 분야들이 있었다. 이들은 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하는 데 
반대하며(이들은 특히 ‘순결교육’을 강조한다), 결혼한 여성들이 본래 자신의 
성(姓)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나 그밖의 다른 ‘가족문제’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개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도모하는 것도 과제로 남아 있다. 
요약하자면, 후지오까의 운동은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고 ‘위안부’ 문제, 
도덕문제, 가족문제 및 ‘밝은’ 역사와 국가적 정체성을 창조하는 과제들을 
중심으로 성공적인 제휴를 이끌어낸만큼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조직체의 출현을 예견케 하고 있다. 
   
 4.이해와 해석을 위하여  
  
 지난 몇년간 후지오까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운동은 전후 일본의 민족주의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되, 탈냉전 시기의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그리고 일본이 모든 
면에서 초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지닌 전지구적 경제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상황에 맞추어 수정되고 개정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걸프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후지오까가 개인적인 깨달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나,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자국의 이미지와 국력을 제대로 지켜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걷잡을 
수 없는 수치를 느낀 것이나 모두 그의 세대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 
세대는 역사에 무지하며 또 관심도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일본의 범죄와 그 
어두운 역사가 언급되고 (’힘들게 벌어들인’ 일본 엔화를 배은망덕한 세계에 
나눠주면서) 정부대변인이 최근 몇년 사이 우스꽝스럽게도 ‘사과외교’를 
추진하는 일본의 상황을 굴욕으로 여기는 세대다. 또한 미국의 세력권 안에 
(그리고 그 우산 밑에) 들어가면서 계속 저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그리고 짐짓 봐주는 듯하면서 또 일본을 공격하는 미국의 처사에 분노를 느끼는 
그런 세대인 것이다. 
 자랑스럽고 순결하며 영예로운 역사를 창조하자는 그들의 부르짖음은 강한 정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원망은 일종의 ‘피해의식’으로 볼 수 있다. 
후지오까의 운동이 이런 피해의식을 적절히 활용하였기 때문에, 남들이 스스로 
희생자라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더욱더 분개하게 되었다. 할머니들이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 정부를 고발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여자들의 주장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따라서 
일본정부에 대한 지나친 모욕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일본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되리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으며 (앞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을 파괴하기 위한 거대한 음모’라 여겼다. 이같은 적반하장의 역할 
바꾸기에 따르면, 희생자인 여성들이 도리어 가해자가 되고 일본의 명예와 덕을 
폭력적이고 위협적으로 해치는 음모꾼이 된다.註37) 
 이들과 유럽 수정주의의 유비점은 명백하다.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을 신화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유태인 집단학살을 부인하는 것과 비슷하며, 두 경우 모두 
희생자가 가해자로 둔갑해버린다. 가령 1980년 프랑스 문학도인 로베르 
포리쏭(Robert Faurisson)의 말은 그 문맥만을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바꾸어 
그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가 가스실을 사용하고 유태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연 두드러지는 역사적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로 
이득을 얻는 것은 주로 이스라엘과 세계 전역의 시온주의고 그 주된 희생자는 
독일국민들이다.”註38) 
 번영을 누리는 부유한 나라 일본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난문제는 이같은 강도높은 
원한의 감정, ‘피해의식’, 순결과 순수 및 위안에의 갈망, 그리고 사람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역사’를, 마치 그것이 역사의 임무인 양 구성하려는 
의지다.註39) 이런 담론의 집요한 주제는 오염으로, 마치 진실을 부인할 때보다 
치부를 드러낼 때 역사가 더 오염되는 것인 양 인식된다. 이 집단은 한 세대에 
걸친 역사가들의 연구결과도 쉽게 무시한다. 때에 따라서는 (텔레비전 방송으로) 
자신들은 그런 연구를 읽은 적도 없거니와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끼(吉見義明)처럼 위안부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를 한다는 것은 도착증 
환자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뻔뻔스럽게 선언하기도 한다.註40) 
 일본의 비평가와 지식인들은 이 현상이 제기하는 문제에 매우 심각하게 접근하고 
있다. 역사학자 나까무라 마사노리(中村正則)는 후지오까 현상을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서구화와 국수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근대사라는 맥락에서 보고 
있다. 전후 50년인 오늘 그는 새롭고 긍정적인 일본의 정체성에 대한 욕구가 
젊은층, 특히 역사를 모르는 채 이미지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생각을 할 능력이 
없이 성장한 젊은층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註41) 사또오 
마나부(佐藤★, 후지오까처럼 토오꾜오대학의 교육학 교수임)가 보기에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은 ‘거품경제 이후, 오옴진리교 이후’ 현상의 ‘일탈된 
자기중심적 민족주의’를 대표하며 이는 곧 (적어도 아직까지는)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안만 들여다보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기묘하게 왜곡된 
민족주의였다.註42) 정치학자 이시다 타께시(石田雄)는 이 현상이 곧 일본 
지식인, 특히 (자신이 정년퇴임 때까지 몸담았던) 토오꾜오대학의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당면한 위기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긴다. 그는 ‘자유주의’ 
역사관이라는 발상을 한편으로 옹호하지만,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 
역사관이란 실천적으로는 세계가 오로지 미일 관계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해석되는 
전후 세계관을 극복하는 운동이자, 다양한 아시아적 주체와 ‘재일(在日)’ 
주체들을 바탕으로, 특히 사회적 약자와 희생자 등 퇴폐적인 공식 강단에서 
무시해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註43) 
그의 자유주의는 ‘올바른’ 역사관을 찾아내고 주입시키자는 후지오까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이시다가 한 비판은 재일 한국인 비평가 
서경식(徐京植)도 제기하였다. 서경식은 후지오까의 명분이 수용되는 그 만큼 
자신이 속한 재일동포 사회와 같은 일본 내 소수민족을 위한 공간이 줄어든다고 
지적한다.註44) 후지오까 현상을 보고 수많은 일본 지식인이 느낀 두려움과 경악을 
쿠니히로 마사오(國弘正雄)는 이렇게 표현한다. 지금 자신이 “일본식 파시즘의 
도래”를 목격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고.註45) 
   
 5.결론 
  
 후지오까는 ‘토오꾜오 전범재판식 역사관’이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면서 일본에 
강요한 것이며, 그후 일본이 수차례의 모욕을 당하게 된 근원이라고 보지만 그것은 
매우 모호한 평가다. 사실 ‘좌익’ 역시 우익만큼이나 전범재판을 비판해왔고, 그 
재판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우선 죄가 패자에게만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 이것은 일본 밖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널리 받아들여진 비판인데 
-- 정치적인 이유로 몇가지 핵심적인 문제들, 예컨대 천황이라든가, 731부대, 
위안부 문제 등을 조사대상에서 삭제하기로 한 결정이 재판을 왜곡시킨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토오꾜오 전범재판 문제에 조명을 가할수록 이 점은 분명해질 
것이고, 그럴수록 이 논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에게서는 환영을 받겠지만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로서는 어찌 손댈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궁극적으로 전범재판의 문제는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만이 아니라, 거의 음모적인 
미일 합의에 의하여 어디서 책임을 은폐하고 회피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점점 국경이 사라져가는 세계에서 국가감각이 실종된다든가, 국가 내의 
세력균형을 보수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다고 개탄하는 것이야 세계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후지오까 등의 남다름은 이 문제에 대한 엄청난 열정에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거센 주장을 굽히지 않을 정도로 전지구적인 경제대국이며 20세기 
성공신화의 주역이란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취약하다고 
생각한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굳이 
비유하자면, 자신들이 정체모를 전지구적인 힘의 피해자가 되어가는 것을 깨닫게 
된 산업사회의 도시대중이 갖고 있는 ‘원한의 정치학’에 가까울 것이나, 일본의 
경우 경제적인 요인은 아주 작은 역할밖에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후지오까를 추동하는 것은 국가권위가 축소되고 그 권위와 상징이 퇴락하고 
해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 후지오까가 유난히도 격렬하게 일본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자민당의 핵심 파벌들 같은 정치적 주류가 이미 입장을 
바꾼 상황에서 자신들이 위축되고 고단한 소수로 전락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망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더욱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입장의 변화이지, 변화가 야기한 열광적인 반대는 아니다. 물론 이 열광적 반대도 
지적 비일관성과 정서적 힘이 결합되어 막강한 효과를 내느니만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은 오랜 역사와 기억에 기인하는 일본과 이웃나라 간의 
거리는 좁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의 반일감정은 너무 
깊어서 “우리가 아시아의 이웃나라들과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관을 확립하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가 무릎꿇는 셈”이라는 것이다.註46) 후지오까의 표현을 다시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일본인이므로 무엇보다도 일본 및 일본 국익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註47) 부인하기 힘든 점은, 일본 역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후지오까의 계획과 그가 일본정부에 촉구한 정책들이 만일 채택된다면 
일본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 간의 친선관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뒷걸음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하여 자신들의 정당함과 편협한 국가적 
자존심을 내세우며 날카롭게 이야기하려 든다면, 그리고 마치 전전의 
도덕교과서처럼, 역사교육 대신 전통적인 덕목과 민족주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지어낸 교훈적 이야기를 선별하여 주입하는 그런 역사교과서를 채택한다면, 일본은 
이웃나라들과 맞서서 그 나라들의 역사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전쟁의 
기억을 서술하는 한) ‘그릇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아시아지역에 끼칠 결과는 예측할 수 없으나 불안을 야기할 것임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 민족주의 감정의 이 20세기말 식 표출은 일본 민족주의의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하나는 천황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으로, 이 둘은 
민족정체성 안팎의 양 축이다. 이 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일은 
일본에서는 금기시되어왔다. 민족적 긍지, 영예, 순결이 독특하게 얽힌 일본 
특유의 현상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정체성을 일본적 자아의 정수 -- 오염되지 않고 
숭엄하며 제국적 본질 -- 를 기반으로 구축해온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자기표현 
방식에 기인한다. 일본이 침략국이나 ‘강간국’으로 표현되어 이런 본질이 
더럽혀진다는 것은 정말로 이들에겐 끔찍한 일이다. 긍정적이고 순수한 일본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이 새로운 시도가 이제 천황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가히 
궁금한 일이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또다른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두려워서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르거나 기껏해야 왜곡된 형태로 표현하는 문제, 즉 일본이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계속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원망이다. 이제 논의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냈고, 특히 일본을 궁극적인 선(善)으로 보는 무작정한 
견해를 풀어놓고 그것에 새로운 위엄마저 부여한 마당이니, 앞으로 이러한 
파급효과는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 후지오까의 왜곡되고 
편협한 민족주의 구호 주창(主唱)에 지지를 보내는 민족주의 단체들은 조만간 
이런 핵심 관계에 내재하는 불균형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일본의 우익민족주의자를 이 최신의 옷으로 감추고 있는 자유주의의 얄팍한 허울 
밑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결국 걱정스러운 것은 ‘자유주의적 역사기술’ 집단이 표방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실제적인 반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분명 독단주의나 정통주의, 
특히 국가의 이름으로 난무하는 모든 정통 입장보다 낫기 때문이다. 냉전체제 
이후의 일본이 자국민으로부터는 충정을, 세계로부터는 존경을 받을 만한 핵심적 
요소를 중심으로 과거·현재·미래를 의미있게 통합해낼 수 있는 그런 일본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강한 열망을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고 해서 반드시 
걱정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런 소망 자체야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진정 불안한 
것은 자유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이름이 반자유주의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인 
사유방법을 가장하기 위하여 남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30년대의 폭력과 
불관용을 불안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정치방식,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국가적’이며 ‘자학적’이라고 딱지를 매기면서 반세기전 군국주의의 가장 
처참한 희생자인 바로 그 여성들을 다시 희생양으로 삼으려 드는 정치방식이 
20세기 후반 일본에서 이같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申敬淑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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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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