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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9일 토요일 오전 10시 24분 02초
제 목(Title): 정현백/독일역사학의 과거청산과 분단극복




실패한 새로운 시작 

  --독일 역사학의 과거청산과 분단극복 



정현백 
  
  머리말 
전후 동독과 서독의 역사학 
독일 역사학의 과거청산 
독일 통일과 독일 역사학의 통합 
맺음말  


    

  1. 머리말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서독의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날 독일인들에 의해 ‘혁명’으로 지칭되는 이 대변혁은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났고, 잘 조직된 지도자집단이 존재한 것도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그 사이 수많은 기도회, 환경운동 그리고 비합법적인 시위가 있었지만, 
동독의 재야세력은 중동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허약했다. 체코의 
‘인민헌장 77’, 폴란드의 ‘단결노조’ 그리고 헝가리의 ‘개혁공산주의’ 같은 
강력한 저항운동의 부재는 동독 공산주의가 개혁에 더욱 적대적이었다는 사실 
외에도 저항세력의 대다수가 서독으로 망명해버렸다는 점에 기인한다. 초기의 
독일혁명에서 대중이 원한 바는 대안적인 경제·사회·헌법 질서를 제시하는 어떤 
유토피아적 이념이기보다는 18세기 이래 유럽사에서 관철되어온 시민사회적 이상의 
회복이었다. 통일에 대한 요구는 혁명이 상당히 진척된 11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 국가적 독립성을 유지하며 서서히 사회를 개조하려던 동독 반체제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하루빨리 서독인과 동등한 생활수준을 누리기를 원하는 
대중들의 조급함에 의해 외면되었다. 이런 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듯 이미 1995년에 
옛 동독 주민의 소득이 서쪽의 70%에 육박했고, 독일정부는 98년이 되면 동서간의 
소득격차는 사라지리라는 자신에 찬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93년 
조사에 따르면, 동독인들의 70% 이상이 통일에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했다.註1) 
  그러나 이런 외양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독일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조용한 전쟁’이 진행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흡수통합의 성격을 
지녔던 통일의 기조에 따라, 지난 몇년간 서독적인 모델을 사회의 각 분야에 
이월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는 헌법·경제·통화·사회 질서에서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일상생활, 정치문화, 사회관계 그리고 의식구조 면에서의 
내적 통일은 거의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통일독일에서는 여전히 
‘한 국가 안에 두 사회’가 공존하는 셈이었다.註2) 
  45년 히틀러의 패망과 더불어 독일민족은 전통적인 독일적 민족주의로부터 
자의반 타의반 결별을 고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을 제공하고 
600만 유태인을 학살한 끔찍한 과거사를 자신들의 의식 속에서 축출하고 싶은 
독일인의 내면적 욕구 못지않게, 서방사회로의 성공적인 통합에 서독 재건의 
일차적 목표를 두었던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 수상의 노력은 미국이 
부러워할 만한 민주주의제도를 서독사회에 정착시키고 경제적으로는 라인강의 
기적을 실현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서독인의 민족주의 의식은 크게 약화되었다.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저항민족주의가 민족해방과 민주사회 실현의 요체로 간주되는 
제3세계에서와는 달리, 독일에서 민족주의는 이제 ‘금기’가 되었다. 
  69년에 수상이 된 사회민주당 당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동독을 
국제법상 주권국가로 인정하기를 거부해온 아데나우어와는 달리, 긴장완화를 
목표로 하는 동방정책을 새로이 추진했다. 동독을 동등한 수준의 주권국가로 
승인하고, 양독간의 실질적인 교류를 내용으로 하는 기본조약이 72년 11월 8일에 
체결되었다. 이는 국제질서상 당분간 양 독일의 현상유지가 불가피하다는 점과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기본조약의 결과 서독인의 
가족이나 친지 방문이 허용되고, 동독인도 연금생활자에 한해 서독 방문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인적 교류나 서독정부의 경제원조 등은 통일을 촉진하는 
기능을 하였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서독인들에게 서독을 일시적인 분단상태의 
국가로 파악하기보다는 민주적인 헌법을 지닌 독자적인 국가로 인식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서독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탈각시켰다. 이제 독일인의 
민족주의는 유럽공동체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되었다.註3) 
  전후의 동독에서도 사회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국가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쏘비에뜨 애국주의의 기치 아래 민족주의는 설 땅을 잃었고, ‘사회주의적 
인간형’ 실현이 최고목표로 간주되었다. 60년초에 추진된 동독의 경제개혁과 
독자노선 추구는 프라하사태로 인한 소련의 통제 강화로 실패했고, 이후 
동독정부는 수세적인 분단고착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맞이한 통일은 독일인에게 빠른 시일 내에 집단적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통일비용의 부담이 늘어나고, 물가가 
폭등하고, 주택난이 심각해지자, 서독인들의 민족적 유대감에는 한계가 드러났다. 
92년말의 여론조사에서 서독인의 동독인에 대한 호감도는 그들이 평소 좋아하지 
않던 미국인이나 러시아인보다 떨어졌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이 게으르고, 
독립성과 자발성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한다.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이 거만하고, 
돈밖에 모르는 몰인정한 인간들이라고 분개하고, 일터에서의 격심한 경쟁의식과 
비인간적 분위기에 곤혹스러워한다.註4) 게다가 동독인의 1/3에 해당하는 
300만명이 실업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양독 출신들간의 심리적 
갈등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독일인들의 ‘내적 통일’(innere Einheit)의 
실패는 94년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서, 동독 통일사회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은 옛 동독지역에서 17.7%의 득표율을 달성했다. 이에 비해 
연방의회에서 민주사회당의 득표율은 4.4%에 불과하여 연방의회에의 진입은 
실패하고 말았다.註5) 
  여전히 미완성인 내적 통일을 성취하고자 할 때,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은 역사학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역사학은 집단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해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독일 통일을 전후하여, 혹은 
통일과정에서 역사학이 수행한 역할을 주시하게 된다. 물론 큰 테두리에서 보면 
양독 역사학의 통합과 재구조화는 1989~90년 이래로의 통합정책에 적용되었던 
기본모델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독일 학문이 지닌 자치의 전통, 그리고 
학자들의 활발한 정당활동이 체제비판적인 연구에 대한 보호막의 기능을 해주었던 
서독의 현실이 통합과정에서 역사가들에게 상대적으로 약간의 자율적인 행동공간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북한의 위기에 대한 불길한 소식이 흘러나오면 나올수록, 통일에 대한 기대에 
못지않게 그에 대한 공포감이 한국의 식자층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을 
좀더 직시하자는 의미에서, 그리고 통일과정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높이자는 
의도에서 이 글은 독일 역사학이 경험한 과거청산과 통합과정을 제도적인 측면과 
실제 내용적 측면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전후 동독과 서독의 역사학 
   
    
  영국이나 미국 역사가들에게 독일의 역사가는 공공의 토론에서 무언가 발언을 
해야 한다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또한 그 발언들이 많은 사회적 
주목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 역사가들의 발언에 실리는 사회적 무게는 
학자들이 ‘국민의 공복’으로서 국가와 가까웠던 전통, 혹은 그들이 
교양시민계급으로서 주도하였던 사회개혁운동의 역할과 연계되어 있다. 종종 
일간신문에서 전개되는 역사가논쟁은 공론의 장에서 역사가가 지니는 비중에 
못지않게 독일사회 전반의 역사학과 역사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학의 비중 때문인지 동독 역사학의 과거청산과 양독 역사학의 
통합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어느 학문분과에서보다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동독 역사학의 과거청산을 위해 선행돼야 할 작업은 먼저 지난 45년간의 양독 
역사학을 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먼저 독재체제 하에서 동독의 역사학은 자율성이 
결여되는 등 큰 상처를 입었다. 역사가의 인선에는 출신성분과 정치적 충성도가 
잣대가 되고, 여행 및 정보수집의 기회가 차단되어, 역사학의 질적 저하가 
뒤따랐다. 게다가 정치적 길들이기와 검열은 역사가들의 연구 의욕을 떨어뜨렸다. 
동독에서 역사학은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인 형태로 맑스·레닌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동독에서 역사가의 수는 대단히 많았다. 쏘비에뜨체제를 받아들인 동독에서는 
대학 바깥에 ‘아카데미’나 다양한 연구소가 건립되어, 연구의 중심을 형성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은 연구보다는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동독에는 무려 
130~40개의 아카데미가 존재했고, 그 인력은 대학의 두 배를 상회하는 3만 
2천명이었다. 특히 동독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학술원(Akademie der 
Wissenschaft)은 2만 4천명의 연구원과 직원을 거느렸는데, 그중 500명이 네 개의 
역사관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 많은 역사가들의 연구분야는 주로 
근현대사와 정치사에 기형적으로 집중되었다.註6) 
  안병직교수는 지난 40여년간 동독 역사학의 동향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註7) 첫번째 시기는 1945년에서 사회주의 독일민주공화국이 성립되는 
40년대말까지이다. 역사연구의 중점은 나찌청산 작업이라는 사회분위기에 
부응하여, 루터, 프리드리히 2세, 비스마르크의 권위주의적이고도 반민주적인 
역사적 전통이 히틀러로 이어지는 과정을 분석하는 데 두어졌다. 자연히 
역사가들은 독일의 과거에 대해 비판적인 노선을 택했다. 이 시기에는 
비맑스주의적 역사가들의 상당수가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5, 60년대에는 맑스·레닌주의 역사학이 뿌리를 내리고,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에서 제도의 개편이 추진되어 역사가들에게도 당의 노선에 
대한 철저한 추종이 강요되었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위해서 자국사 내에서 
진보적인 전통을 발굴해낼 필요성이 제기되어, 프로이쎈적인 전통과는 다른 독일의 
과거를 찾기 시작했다. 농민반란, 1848년 혁명, 제국독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운동,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그리고 반파시즘 저항운동 등에 
연구를 집중하면서, 서독과는 대립되는 역사관의 정립을 시도하였다.註8) 세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1970~80년대 이후에는 동독 역사학에도 큰 변화가 왔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던 종래의 편협성을 
뛰어넘어, 다양한 계층이나 계급이 역사연구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십수년 
전에는 그리도 비판되었던 마르틴 루터는 혁명운동의 창시자로, 관헌국가였던 
프로이쎈 역시 긍정적인 유산의 일부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동서독간의 기본조약 
체결은 분단고착화로 이해되었고, ‘두 개의 국가’가 공존하는 한, 동독 내에서도 
민족사에 대한 ‘무비판적일지라도 실리적인 해석’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註9) 
  그러나 이 세번째 단계에서 동독 사회사 연구가 교조주의를 탈피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원래 동독에서는 사적 유물론이 역사발전의 
일반사회이론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므로, 사회학이나 사회사가 설 땅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사이에 거대이론을 벗어나서 사회나 문화의 실증적인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전히 동독 역사학의 주조를 이루는 것은 
정치와 경제의 연관 속에서 정치사를 다루는 것이었다. 사회사는 주변적인 
현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자유공간을 확보하고, 학문적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80년에 출간된 위르겐 
쿠친스키(Ju¨rgen Kuczynski)의 『독일민족의 생활사』(Geschichte des 
Alltags des Deutschen Volkes) 6권, 하르트무트 쯔바(Hartmut Zwahr)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형성』(Zur Konstituierung des Proletariats als 
Klasse), 헬가 슐쯔(Helga Schultz)의 『베를린 1659~1800 -- 주거의 
사회사』(Berlin 1659~1800: Sozialgeschichte einer Residenz)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사회사 연구는 특이하게도 5,60년대에 활발했던 경제사가와 민속학자의 
공동작업을 통해 진척되었는데, 이러한 동독의 사회사 연구가 지니는 강점은 
민중문화의 사회적·경제적 연관성을 분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사 연구는 서방과의 교류를 촉진하였다. 물론 70년대 이래 동독 
역사학의 개방에는 국제적인 인정과 명성을 얻고자 하는 동독정부의 의사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독 역사학이 일상생활사에 대한 관심과 민중문화의 
사회경제적 맥락의 추적이라는 방법론상의 공통점을 갖지 못했다면, 서로간의 
교류는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통일 전 거의 15년 동안 동독 역사학은 
‘아래로부터의 역사’ 그리고 ‘전문적 역사가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도 참여할 수 
있는 일상사 연구’를 표방하던 서베를린의 
‘역사작업장’(Geschichtswerkstatt)운동과 교류하면서, 연구의 진행과 방법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을 시작했다. 상호간의 대화는 동독의 개방뿐 아니라, 서독 
역사학의 변모, 즉 일상생활사가 한층 각광받는 연구주제로 대두됨으로써 
가능하였다. 동독 역사가들의 국제회의 참여도 증대되었다.註10) 물론 쿠친스키, 
쯔바, 슐쯔 등의 뛰어난 동독 역사가들은 체코의 동료들처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거나 감옥에 가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여행할 수 있는 
특권층’(Reisekader)이었기 때문에 당과 국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동독의 사회사를 교조적 맑스주의에서 개방적인 맑스주의로 
이행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에 비해 45년에서 89년까지 서독 역사학은 어떤 경로를 밟았는가? 물론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독일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현존 정치질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족국가의 통일이라는 지상과제 때문에 그들은 독일민족의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역사를 서술하였다. 
  1945년 파시즘체제의 패망 후 서독 역사가들은 어떤 단절도 경험하지 않았다. 
연구소나 대학의 인적 구성은 전혀 변화를 겪지 않았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찌의 역사학에 대한 정책을 지지했던 역사가들은 그대로 남아 있거나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추방당하거나 또는 나찌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독일을 떠난 역사가들은 독일의 강단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전후 독일에서 역사적 
청산작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독일 대학의 위계적인 
구조는 정교수에게 그 후계자의 미래를 좌우할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즉 독일 
특유의 제도인 ‘대학교수 자격제도’(Habilitation)는 신진 사학도에 대한 
정교수의 감독을 강화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註11) 
  45년 이후 서독 역사가들은 나찌의 역사적 책임을 독특한 독일적 전통과 
관련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게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는 나찌즘을 현대 
대중정치와 대중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독일적 
현상이라기보다 유럽적 현상의 변종으로 파악하면서, 히틀러에 대한 시민적 저항을 
부각시켰다. 긍정적인 민족적 전통에 대한 선전은 냉전기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었다. 50년대 아데나우어 치하의 서독에서 역사학의 체제 영합은 동독보다 
훨씬 교묘하게 진행되었다.註12) 
  이런 민족사적인 전통에 단절이 온 것은 60년대에 ‘피셔논쟁’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함부르크대학 교수 피셔(Fritz Fischer)는 유럽과 
세계제패를 향한 열망은 19세기초 이래로 독일 외교정책의 일관된 의도였고, 
따라서 빌헬름제국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역사적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개진하였다. 피셔의 『세계열강을 향한 돌진』(Der Griff nach Weltmacht)은 
독일민족사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의 기폭제가 되었다. 
  70년대 이래 역사학의 해방적·비판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등장한 ‘비판적 
역사학’(Kritische Geschichtswissenschaft)은 역사적 사건의 구조와 과정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요인과 결합하려 했다. 사회사가로 
불리기도 하는 벨러(Hans Ulrich Wehler)나 코카(Ju¨rgen Kocka)는 역사가 
사회과학에서 분리될 수 없고, 사회과학의 연구 역시 구조나 기능만으로는 진행될 
수 없으며 시간과 변화가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독일민족사는 
서구적 모범으로부터의 일탈, ‘독일적인 특수한 길’(deutscher Sonderweg)을 
걸었다는 것이다. 즉 제국독일에서 실패한 부르조아혁명과 봉건적·농업적 
엘리뜨의 강고함이 19세기 독일에서 민주화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민족사가 나찌로 귀결된다는 이들의 주장은 지난 20여년 동안 소장역사가들에게 
광범한 지지를 받아왔다. 이는 60년대말 학생운동의 여파로 70년대초에 대학들이 
신설되고, 새 역사학 교수직에 젊은 학자들이 충원되고, 대학위원회의 결정이나 
교수채용에도 조교와 학생대표가 투표권을 가지게 된 대학 분위기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민족국가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였다. 
   
    
  
  3. 독일 역사학의 과거청산 
   
    
  1989년 11월 9일, 예상치 못한 혁명이 발발하자 양독의 역사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문제는 역사가 어느 누구도 이런 대변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 내에 이런 사건의 
발생가능성을 기대하거나 계산하지 못한 데 있었다. 해롤드 제임스(Harold 
James)는 이런 사실을 들어 그간 역사가들이 냉전하의 세계질서, 즉 냉전으로 
인한 균형이 가져다준 내적 안정과 복지국가의 혜택에 얼마나 자족하고 있었던가를 
꼬집었다.註13) 현존사회주의 국가의 실제 현실에 대한 통찰에 -- 주로 동독 
정부에 의한 선전과 미화를 통하여 -- 체계적인 왜곡이 있었고, 서독 
역사가들에게도 역사적·정치적으로 조건지어지는 인식상의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의 과거청산은 제대로 실행되기가 어려웠다. 1990년 1월 
15일 시위군중이 슈타지(Stasi) 본부를 습격했을 때, 이미 중요한 근거자료들은 
공산당 수뇌에 의해 파기되었다. 이에 못지않게, 빠른 통합을 위해 철저한 
과거청산을 망설였던 연방정부의 의중도 과거청산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최고위층 몇 사람에게만 과거의 책임이 추궁되었고, 
정치·경제·학문 그리고 매스컴 분야에서 최고위층 바로 아래의 지도급 인사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변혁의 한계였다. 
  1989년 가을의 대변혁에 기여를 못하기는 동독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이나 아카데미는 이 격동기의 인권운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이미 당원,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 정치적으로 뛰어난 집안 출신, 
훈장수여자를 우대하는 대학 및 연구소의 선발기준 자체만 보아도 여기에서 어떤 
저항적인 움직임이 나오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통일 후 역사가들의 
최초의 반응은 90년 2월 역사가연맹을 재조직한 것이었다. 역사가집단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들이 그대로 이 조직의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기성 역사가들은 붕괴한 체제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거리를 두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과거 동독공산당이 공허하게 외치던 ‘사회주의 휴머니즘’ 혹은 
‘반파시즘’ 등의 공식을 내세울 용기도 없었다.註14) 그러나 동독 역사가들의 
대다수는 직업을 잃을지 모른다는 염려와 역사의 승리자들에 의해 자신들은 종속적 
지위로 떨어지리라는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에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자신들의 약점을 공개하려 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註15) 
  이에 반해 1990년 4월 21일, 동독의 일부 젊은 역사가들은 
‘독립역사가동맹’(Vereinigung unabha¨ngiger Historiker)을 출범시켰고, 
동독 역사가들의 정치적 체제영합을 비판하며 그 도덕적 책임을 물었다. 90년 
9월말 통일 직전에 열린 역사학대회에서 소장 역사가들은 많은 동독 역사가들이 
체제에 대한 외형적인 충성심을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체제의 
논리를 수용하거나 내면화했고, 비판적이거나 주관을 가졌거나 혹은 혁명적인 
역사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음을 폭로하였다. 특히 이들은 몇차례에 걸친 
사학과에 대한 탄압의 물결, 예를 들면 68년과 71~2년 그리고 76년의 동베를린 
훔볼트대학의 탄압에 관여했던 역사가들에 대한 조사위원회의 구성을 요구했다. 
자신의 학생들이 처벌받는 동안 탄압의 조력자였던 교수들은 승진하였고, 뿐만 
아니라 처벌은 고발당한 자만이 아니라 학과 전체 구성원을 길들이는 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파이 행위를 통해 동료를 탄압한 역사가들도 철저히 
색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역사가동맹의 소장 역사가들은 그래서 동독 
역사가에 대한 엄격한 개인별 심사를 요구했다.註16) 
  철저한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동독 출신 소장학자들의 목소리와는 달리, 서독의 
사회사가들의 반응은 신중하다. 이미 1990년의 역사학대회에서 역사학회장인 
볼프강 몸젠은 “역사학이 지배학문으로 기능하는 동독에서 활동하던 역사가들이 
경우에 따라 정치적 양보를 했을지라도, 그들은 사회사나 경제사 등에서 진지한 
학문적 업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들어, 동독의 ‘여행특권층’을 옹호하였다. 
하버드대학의 매이어교수(Charles S. Maier)도 동독 사회사가의 업적을 
공개적으로 찬미하면서, 이 여행특권층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에서 동독 공산당의 
이념적 전파자라 할 만한 내용은 발견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매이어는 개별 
역사가의 능력에 대한 신중한 심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학문적 능력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으면서 동시에 정치적 행위 자체가 적극적이지 않았던 역사가를 학계에서 
축출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개별 
역사가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공정한 심사였다.註17) 이에 대하여 동독의 개혁적 
소장학자들은 과거청산의 과정에서 서독의 68년 운동세대 혹은 서독 사회사가들의 
지원하에 과거의 여행특권층이 비호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경고를 보내고 
있다.註18) 
   
    
  
  4. 독일 통일과 독일 역사학의 통합 
   
    
  동독 역사가들의 내적 갈등이나 대립과는 상관없이, 연방정부는 통합조약 38조에 
따라 동독의 학문과 연구를 서독의 연구체제에 통합시키는 과업에 착수했다. 이미 
서독 연구기관에 대한 평가를 집계한 경험이 있는 
학술위원회(Wissenschaftsrat)에 의해 동독의 연구기관들에 대한 평가가 
신속하고도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학술위원회는 전문가로 구성되는 25개 분과를 
조직하고, 90~91년에 130개 기관의 3만명을 방문 조사하였다. 무려 500명의 
학자들이 평가단에 참여했는데, 그중 대다수는 서독 출신이고, 일부만이 동독이나 
해외에서 차출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동서독간의 구조적인 불평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평가단의 몰이해·오만 그리고 상황에 대한 순응이 심심찮게 
드러났다. 아마도 정치적 고려가 평가의 윤곽을 결정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체 진행과정에서 학자들의 진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독 학문구조의 
대원칙과의 양립성 여부 외에도 학문적 자질과 업적이 중심적 기준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학자 개개인에 대한 평가보다는 연구소, 그 구조, 분과, 작업집단 그리고 
프로젝트 등이 대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학술위원회는 거의 130여 개에 이르는 
아카데미를 해체하고, 대신에 90개의 대학 밖의 연구소를 새로 창립할 것을 
결정했다. 정신과학분야에서는 7개의 중점연구소(Forschungs-schwerpunkte)가 
설립되었는데, 그 재정은 95년까지만 확보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과거의 
기관보다 규모가 작았고, 서독 연구소의 체제가 도입되었다.註19)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연구자의 절대적인 숫자를 축소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동독에는 학술분야에 서독보다 더 많은 인원이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註20) 결국 연구소 직원의 1/3, 연구원의 1/2만이 계속 취업할 수 
있었다. 평가단이 대체로 어떤 집단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권고할 수 있었겠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개별적인 지원과 평가에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대학의 재구성은 조금 늦게 진행되었고, 이 작업은 새로 구성된 
주정부에 일임되었다. 자매결연을 맺은 서독 주정부와의 긴밀한 협력과 서독 
연구소에서 온 학자들의 참여 아래 진행된 대학의 재구성은 놀라우리만치 
분산적이어서, 주·대학·전공에 따라 그 절차나 결과에서 상당한 차이가 
드러났다. 그러다 보니 평가과정에서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나 정치적인 영향력이 
행사되었다. 학술위원회는 단지 몇몇 규정의 작성과 절차의 진행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대다수의 동독 연구소와 대학 들은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통일 
후 제도상으로는 동독의 대학들은 연속성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축소되었다. 동독 대학의 종사자는 절반으로 감소하였다. 교수들도 89년에 비해 
94년에는 60%로 감소했지만, 이는 향후 몇년 안에 충원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대폭 
감소된 것은 중간 위치의 연구자들, 예를 들면 대학조교나 연구원이었다. 이를 
통해 중간층위에서 일했던 여성연구자들이 특별히 큰 타격을 입었다. 여성의 
지위에 관한 한 독일 통일은 역사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다시 
한번 음미할 대목인 것 같다.註21) 
  그러나 대학은 질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우선 맑스·레닌주의와 관련된 
분과들, 특별히 비대한 경제학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학과들이 폐지되었다. 
대신에 그간 동독에는 존재하지 않던 사회학·상법·경영학·언론학 등 새 학과가 
생겨났다. 서독의 경쟁체제의 도입과 더불어 교수의 자질도 새로이 평가됐고, 
교수직은 대다수가 새로 충원되었다. 기존의 교수들은 새로 공채에 응모하여, 
일련의 선발과정을 거쳐야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좀더 나은 학문적 업적을 지닌 
서독의 경쟁자들이 몰려와서, 94년초에 이르면 대학의 연구직이나 교수직의 1/3이 
서독 출신으로 채워졌다. 90년 이후 동독 학계에서의 엘리뜨 교체는 탈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한 동구의 어느 나라보다도, 그리고 45년 이후의 서독에서보다도 더 
심대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렇게 엄청난 변화에서 정치적인 숙청은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해고된 학자들의 10%만이 
정치적·도덕적 이유로 물러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정치적·도덕적인 심사가 각 연구소나 대학에 자체적으로 형성된 위원회, 즉 
동독인 스스로에 의해 진행되었다면, 학문적 업적의 심사는 서독에서 온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註22) 또한 연구와 교육을 일원화하여 대학에서 
한다는 계획은 관철되었다. 
  그러나 이런 재구조화가 역사·법학·철학·경제학·교육학 등에서는 더 
과격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정신과학분야에서는 3/4에 해당하는 학자들이 정년 
혹은 조기정년에 들어가거나, 직업을 바꾸거나, 동독을 떠나거나, 실업상태이거나, 
시한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독 학문의 불연속성은 어느 분야보다도 
정신과학에서 심각하다. 이 분야의 교수들은 현재 압도적인 다수가 서독에서 왔다. 
93년초 동독의 사회학과 교수 29명 중에서 4명만이 동독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한다. 
  동독 역사학의 서독체제로의 통합작업에 역사가를 대표하여 참여한 코카는 이 
3년간의 작업을 대체적으로 ‘성공의 역사’로 평가하면서도, 대가와 한계 역시 
지적하고 있다. 우선 개혁이 외부와 위로부터 진행된 단점이 있으나, 자율적인 
개혁의 가능성에 대하여는 코카 역시 회의적이다. 자치는 예전의 구조를 고착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이 지닌 연방제적 전통 때문에 
대학의 재구조화와 연구소의 재구성 작업이 서로간의 협력관계 속에서 진행되지 
못했다. 거기에다 서독의 각 대학들은 연방정부나 대학 밖의 연구소로 무게중심이 
옮겨갈 것을 염려하여, 통합과정에 수세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문제가 많은 서독의 대학제도가 그대로 동독지역에 이식되어야 
했으며, 왜 차제에 서독의 제도도 개선될 수 없었는가’라는 좀더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코카는 첫째로, 시간적 압박이 컸음을 지적한다. 동독 
주민들이 신속한 개혁을 원했고, 게다가 문제시되던 사료보관소들이 파괴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장 익숙한 방법이나 모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예전의 동독체제나 역사가들이 역사 연구와 교육의 갱신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평가하면, 양 학문의 통합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됐으나, 개혁의 방향으로 유도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미 존재하던 서독식 
방식이 승리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기독교민주당 정권에서 
비판적인 역사학자에 해당하는 코카가 학술위원회를 주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독일 역사학이 체제로부터 누릴 수 있는 약간의 자율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인 
듯하다.註23) 
  상기한 역사학의 통합정책에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동독 출신 소장 
역사가들이다. 우선 이들은 평가단 구성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과거의 동독 
역사가 중에서 민주주의적 개혁세력은 극소수이며 학문적 위계구조의 하단에 
위치하긴 하지만, 평가단의 선정에서 그들의 참여가 최소한 고려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90년 3월 18일의 선거로 집권한 정치세력과 옛 서독의 학술관련 
행정기관에 의해 운영된 평가단은 동독 학계 내부의 권력구조나 감시구조에 대한 
내밀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통합과정은 ‘동독의 식민화’로 
전락할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평가단이 전반적으로 
정치적·도덕적인 평가보다는 학문적인 평가만 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동시에 
이들은 동독 역사서술에 대한 평가가 서독의 연구의 질적 수준에 근거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반문한다. 과거 동독에서 공산당 독재에의 협조, 여행의 
특권, 자료접근의 기회가 전제되지 않고는 연구의 질적 수준의 담보가 
불가능하다면, 과연 이 짧은 기간 내에 공산당과 협력하지 않은 역사가들이 어떻게 
높은 질적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생산해낼 수 있겠는가?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경쟁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시간, 즉 과거의 희생을 만회할 시간도 독일정부는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산당 독재하에서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특별조치가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연구소나 대학에서 축출되었던 연구자에게도 복직뿐 아니라 장학금이나 
해외체제 등의 보상조치가 요구되었다. 또한 동독과 서독의 균형잡힌 발전을 
위해서, 저명한 서독의 역사가들이 동독으로 유치되고, 동시에 동독 역사가들의 
서독 대학에의 취업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되었다.註24) 
  과거청산과 통합문제에 못지않게, 통일 독일의 역사학계가 직면한 문제는 
역사서술이 일원화·보수화되어간다는 점이다. 포츠담의 현대사중점연구소에 동독 
역사가들이 참여하게 됨에 따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을 중심으로 
전개된 열띤 논쟁에서도 드러나듯이, 통일 독일에서 과거 동독의 역사학 전통과 
역사서술을 배제하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註25) 매이어는 이에 대해 독일이 
‘한 가지 관점의 과거’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런 일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진정한 통합이란 다원주의적 역사상을 요구하고, 그리고 과거에 대하여 개방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처럼 반강제적으로 단순화된 과거는 진정한 
화해에 장애요인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註26) 
  1989년말 서독의 비판적 역사가들은 민족국가는 이미 종말을 고했다는 그간의 
주장에 근거하여, 동독의 반체제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동독의 국가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독 내부를 개혁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독일은 통일되었고, 그후 독일 역사학계에서는 민족국가의 역사적 연속성을 
인정하고 유럽에서 민족국가의 중심적 역할이 계속될 것임을 강조하는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긍정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서서히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독일적 정체성의 재민족주의화’는 역사해석에서 네 가지 
경로, ① 사회사가나 비판적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독일 특유의 길’ 
패러다임에 대한 공격, ② 나찌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 ③ 과거 서독과 동독의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재서술, ④ 새로운 역사방법론의 요구로 표출되었다.註27) 
  먼저 시민혁명의 실패와 중산층의 허약성이 나찌의 등장이라는 독일사의 
특수성을 낳았다는 해석에 대한 공격은 나찌에 대한 해석과 직결된다. 
독일현대사의 불행을 지정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입장, 나찌의 대내정책이 
근대화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주장, 그리고 나찌가 스딸린체제와 대적할 수 있을 
만큼의 단호함과 통합력을 지닌 유일한 세력이었으므로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단 
하나의 신뢰할 만한 대안이었다는 놀테(Nolte)의 주장 등은 통일전의 반파시즘 
분위기와 비교하면, 독일 역사학의 경악할 만한 자기변신이다. 이제 나찌체제의 
도덕성 문제는 역사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동독 공산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과 폄하는 독일인들이 나찌문제에 
대한 부담과 책임의식에서 슬그머니 눈을 돌리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제 점차 보수화되고 있는 독일 역사가들에게 동독사 전체는 동독 비밀경찰에 
의한 테러정치로 축소되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서독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나타나고 있다. 이 역사가들은 45년에서 89년 사이의 서독은 연합군의 인조적 
창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서독의 서구지향성, 서구 민주주의와의 결합을 
‘민족국가의 정상성’으로부터의 일탈로 해석한다. 이들에게 유럽공동체의 지연은 
‘탈민족주의적 조직에 대한 민족국가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통일은 사회사 혹은 역사적 사회과학의 사관이나 방법론에 대한 공격도 
강화했다. 이들 비판적 역사가들의 대다수는 그간 고집해온 ‘특수성’ 테제를 
수정하거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분단극복과 더불어 독일은 정상적인 서구적 
발전경로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도, 일부 사회사가들 사이에서 좌파적인 민족주의의 새로운 출현이 
시작되고 있다. 브란트(Peter Brandt), 빙클러(August Winkler), 뤼젠(Jo¨rn 
Ru¨sen) 등은 “새로운, 한층 자유롭고 개방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이들은 지역연합과 범유럽주의가 파괴적인 민족주의를 방지하는 
기능을 할 것임에 동의하지만, 경제적 성공과 여전히 강세를 떨치는 환율에 토대를 
둔 물질주의적 민족주의가 팽배하고 통일에 대한 서독인의 열광이 미미한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지니는 통합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까닭이다.註28) 또한 사회사가들 사이에서 그간 소홀히 취급되었던 고전적인 
정치사, 외교사 그리고 문화사의 복권이 이루어지거나 사회사와 정치사의 결합이 
시도되고 있다. 
  결국 19~20세기 독일사에 대한 비판과 탈민족적 정체성(Post-national 
Identity)이 비판적인 역사가들에게조차 포기되면서, 독일 역사학에서는 
프로이쎈주의가 부활하는 듯이 보인다. 바로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는 외국 
역사가들은 역사학의 민족주의화에 대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이들은 
독일사회에서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제거된 나찌즘의 잔재가 대중정서의 깊은 어느 
부분에 여전히 잔존함을 감지해왔기에, 역사적 정체성 형성을 목적으로 역사서술이 
어떤 형태로든지 이용될 위험성을 두려워하고 있다. 
   
    
  
  5. 맺음말 
   
    
  급작스럽게 닥쳐온 통일은 독일 역사학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우선 
국가에 의해 고용된 연구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동독에서, 이제 역사가의 
3/4은 직장으로부터 축출당했거나, 축출이 예상된다. 또한 제도상으로도 학술원과 
같은 연구소나 대학의 학과들이 통폐합되고, 대신에 새로운 대학과 중점연구소들이 
출현했다. 뿐만 아니라 대학교수의 경우 대다수가 재임용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과거청산으로 말하자면 전체 동독 역사가의 10% 정도만이 과거의 정치행적이나 
도덕적인 이유로 학계에서 배제되었을 정도였고, 재선발과정은 주로 학문적 
업적평가가 주종을 이루었던 것 같다. 양독 역사학의 통합은 코카의 주장대로 동독 
역사학의 서독 역사학으로의 복속을 의미할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독일 역사학은 
통합의 위기를 체제개선을 위해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역사서술의 
내용도 크나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에 
이르기까지의 독일사를 비판적 시각에서 서술했던 사회사가들의 논리는 공격에 
직면하였고, 나찌를 ‘근대화의 담지자’로까지 미화한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동독사 역시 독일인에게 차라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과거의 공백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반체제운동에 관여했던 동독의 소장 
역사학자들은 양독 역사학의 통합을 “실패한 새로운 시작”으로 규정한다.註29) 
  그간 국내에서 통일 전 동독 역사학의 동향과 통일 후의 동독사 연구에 대한 
글이 발표된 바 있다.註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준비하게된 의도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통일을 전후한 독일 역사학의 고뇌와 갈등을 좀더 총체적인 
시각에서 분석해보고자 하는 바람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학의 통합을 둘러싼 
독일의 논의를 소개하는 데 있어, 우리의 시각에서 비판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미래의 언젠가에 통일이 성큼 다가올 때, 우리에게 독일의 
경험은 어떤 형태로든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독일 역사학의 내적 통합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진정한 내적 통합이란 한쪽에 의한 다른 쪽의 일방적인 흡수가 아니라, 양자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장점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과거 
동독공산당 지배로의 회귀를 원하는 다수 동독인을 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은 지난 선거에서는 전체 인구 중 17.7%에 불과하였지만, 만약 경제가 
악화된다면 4,50%에 육박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 
역사학계에서도 ‘공산당체제와 영합한 오욕의 과거를 지닌, 질적 수준에서도 
낙후된 동독 역사학’과 ‘독일의 과거에 비판적이면서도, 정교한 서독 
역사학’이라는 흑백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이런 이분법 구조 속에서 동독 
역사학은 비판되어야 할, 심사되어야 할, 그리고 청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둘째로, 서독 역사학도 자신들의 과거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검토해야 한다. 
아데나우어시대의 서독 역사가들은 교묘하게 반공주의적 시각에 의해 통제되었다. 
마찬가지로 70년대 이래 비판적 역사가나 사회사가들의 활약상도 사실상 그들과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 연립정권과의 오랜 밀월관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거기에다가 전통적인 독일 역사학의 도제식 전통은 사회사가들의 ‘특수성’ 
테제에 대한 후진들의 도전을 저지했다. 이미 통일 전에 코카나 벨러의 ‘특수성’ 
테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은 독일 역사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68년 학생운동에서 
성장했고 항상 집단적인 토론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영국의 소장 역사가들인 
엘리(Geoff Elly)와 블랙번(David Blackbourn)에 의해 제기되었다.註31) 물론 
필자는 7, 80년대에 서독의 사회사가들이 독일사의 탈민족주의화에 기여한 공로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보수적 역사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 역시 
체제비판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로, 서독 역사학은 양독 역사학의 통합과정을 개혁의 계기로 삼기 위해 좀더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통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독 
역사가들에게 ‘학문적 업적 평가’라는 추상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이었는가? 진정한 역사학의 통합을 원한다면, 비판적 역사가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동독 역사가에 대한 할당제를 요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1989~90년에 
쯔바나 슐쯔와 같은 동독 역사가들에 의한 사회사의 강화를 통한 자구의 노력이나 
‘갱생된 사회주의는 재활성화된 사회주의 역사서술을 필요로 한다’는 동독 
역사가 일부의 비판적 시도를 지원하는 목소리가 서독 역사가들로부터 나왔어야 
했다.註32) 진정한 역사학의 통합은 다원적 목소리를 끌어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상유지적이던 서독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약자의 
실패보다는 강자의 전략을 비판하는 것이 더 발전적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독립역사가동맹을 형성했던 동독의 소장학자들에게도 아쉬움은 남는다. 
이들의 엄격한 과거청산 요구는 그 자체로 높이 살 만한 했지만, 스스로 ‘맨발의 
역사가’(Barfußhistoriker)의 임무를 떠맡으려는 시도가 부족하였다. 서독 
사회사의 역사적 구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역사 속에서 보통사람들이 행하는 
주체적 행위를 도외시하였음’을 지난 10여년 동안 맹렬하게 비판했던 서독의 
일상사가들은 그 대가로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채 ‘맨발의 역사가’를 
자처하며, 그 특유의 주장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주류 역사학의 통합을 거부한 
서독의 소장 역사가들이 감내해온 이 고통을 왜 동독 역사가들은 용기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비판정신을 지닌 젊은 동독 역사가들이 공산당독재 아래 
살아야 했던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사를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지배메커니즘의 
본질을 밝혀낸다면, 이는 계속 폄하되고 있는 동독사의 진정한 복원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註33) 
  대다수의 동독 사람들은 여전히 두 개의 역사상의 중첩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이를 서로 연관지어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상은 여전히 비성찰적인 채 온존하고 있고, 새로운 역사상은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註34) 진정한 양독 역사학의 통합은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동독인들의 내면에서 진행될 적응과 동화의 역동적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만큼, 동서독 역사가들 사이에 내적 통일을 위한 조용한 전쟁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소한 매끈한 외양을 갖춘 독일의 경우보다도 더 조야한 
형태로 진행될 듯한 남북한 역사학의 통합의 미래를 염려한다면, 우리 역시 독일 
역사학계에서 진행되는 이 조용한 전쟁을 분석하면서 우리 현실에 맞는 대안적인 
통합모델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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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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