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8일 금요일 오후 02시 34분 25초 제 목(Title): 유재건/맑스와 월러스틴 맑스와 월러스틴 유재건 머리말 세계경제의 단일성 자본주의와 근대성 역사적 체제의 인식론 1.머리말 이제 우리 시대를 모종의 세계사적 전환기로 보는 의식이 어느정도 일반화되면서 지금껏 당연시되어온 근대적 전제와 가치들에 대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한결 높아지고 있다. 이렇듯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면서 전환기의 과제를 모색하는 지적 흐름 가운데 1970년대 등장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회연구의 분석단위가 국가가 아니라 세계체제라는, 어찌 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랄 것도 없어 보이는 이런 시각을 토대로 월러스틴은 그간 의심없이 받아들여져온 지배적인 인식론과 가정들을 허물고자 노력해왔고 더 나아가 기존의 역사인식틀에 대해 과감한 도전을 감행해왔다. 사실상 사회연구의 분석단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얼핏 생각하기보다 커다란 함축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위’를 문제삼는 것 자체가 특정한 시공간의 경계를 감안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회인식에서 지배적이었던 보편주의적 인식론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한편, 국가를 분석단위로 전제한 역사인식틀에 대해 다시 되묻도록 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자본주의 극복을 목표로 하는 좌파운동 전략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이기도 한데, 그 극복대상이 국가가 아니라 세계체제라는 명제에 어떤 의의가 있다면 그 전략을 전혀 다르게 설정해야 할 과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1968년 혁명의 산물임을 자처하는 월러스틴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그간의 세계 좌파운동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 지적·정치적 전략을 재평가하고, 그 전략의 준거가 되어온 기존 역사인식틀을 뒤집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근대 자유주의와 맑스주의의 공통적 전제와 패러다임의 구조적 동일성을 비판하면서 양자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흐름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인식틀 하에 거시적인 전체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체제론은 국내에 1980년대 초 종속이론의 한 부류로 소개된 이래註1) 그간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이제 그 골자는 상식처럼 되어 있다.註2) 하지만 그동안의 논의를 보면 많은 경우 새로운 패러다임을 촉구하는 도전에 대한 응대로는 논의방식이 다소 편협해서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지 못한 면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자명하게 생각하던 기존의 인식틀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제안에 대해 그저 기존의 인식틀로 맞서는 식의 대응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월러스틴에 대해 “노예제나 재판농노제와 같이 분명히 자본주의적이라 할 수 없는 생산양식마저도, 거기에 마치 생산수단과 자유로운 노동력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자본제적 생산양식이 성립하고 있는 양 확대 해석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는 비판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註3) 자본주의를 일국적 생산관계에서 이해해서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이런 논법의 대응으로는 제대로 된 대화의 장이 열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전제와 발상을 달리하는 관점들이 맞설 경우 어떤 방식의 논의가 바람직스러운지의 문제를 드러내준다. 『창작과비평』을 통해 전개된 분단체제 논쟁에서도註4) 세계체제론에 대한 이해방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발상의 차이가 논쟁을 다소 혼란스럽게 만든 면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계체제론의 기본시각을 오늘의 세계를 한층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인식틀로 받아들여 이를 원용한 백낙청교수와 그것을 사회적 생산관계를 경시하는 유통주의라고 비판하는 손호철교수 간의 의견차이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발상의 차이에서 오는 개념과 논점의 혼란은 이 논쟁이 좀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註5) 이렇듯 자본주의라는 기본개념에 대해서조차 의견차이가 있는 경우 합리적 토론을 위해서는 월러스틴 자신이 제안하는 평범한 기준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것이 “역사적 현실에 대해 현재 집단적으로 알고 있는 것의 의미를 더 쉽고 더 근사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 현실을 그같이 해석함으로써 현상황에 대해 좀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註6) 그 스스로 세계체제 분석은 사회세계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기존 이론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그 두드러진 특징이 역사과정에 대한 많은 가설들에 기대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예컨대 그는 1989년의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자유주의에 대한 반란이자 레닌주의라는 형태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몰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註7) 기존 통념에 대한 저항에 나름의 역사해석이 밑에 깔려 있다면 그 저항과 맞부딪혀 함께 ‘생각’하는 가운데 쟁점의 위치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본고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을 맑스 사상과의 연관하에 조명해봄으로써 몇가지 쟁점을 분명히하고 그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이다. 애당초 그의 문제의식이 구 좌파운동의 이데올로기와 자유주의/맑스주의의 공통적 전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지적·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면 맑스와 그의 관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맑스와 맑스주의는 다른 것이다. 그는 특히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레닌주의는 이미 끝났으나 맑스의 사상은 21세기 사회생활에서도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가 이제까지의 지배적인 사회과학으로부터 벗어날(unthinking) 것을 역설하면서 그 과제를 위해 다시 찾아가야 할(revisiting) 사람으로 맑스와 브로델(F. Braudel)을 들었듯이 맑스와의 대화는 월러스틴의 사고와 분석 곳곳에 스며 있다. 특히 월러스틴을 둘러싼 논란이 알게모르게 상당부분 맑스 사상과의 암묵적 대비 속에서 전개되어왔다는 점에서도 그를 맑스와 연결지어 논의하는 것은 그 발상법을 일단 이해하고 쟁점을 분명히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2.세계경제의 단일성 월러스틴의 맑스에 대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단순해 보인다. 그의 사고의 출발점은 “맑스는 서유럽에 대해 역사적으로 틀렸다”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은 주로 그가 세계경제의 단일성의 정치경제적 결과들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註8) 이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맑스의 주요 명제들은 단일한 세계경제의 시야에서 종합할 때 대체로 맞는다는 뜻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약간 단순화시키자면 월러스틴이 서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인 듯싶다. 맑스 사상을 국가 내부과정에 대한 인식틀로 받아들일 때는 오류이지만 세계체제의 사상으로 이해할 때는 타당할 뿐 아니라 혁명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도 회피하기 십상인 맑스의 주요 명제들을 경험적 사실로 혹은 근본사상으로 받아들인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잉여가치가 부르조아지에 의해 전유되는 체제이자 그 자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구조화된 체제라는 기본인식에서부터 계급투쟁의 중심성, 계급의 양극화, 프롤레타리아의 절대적/상대적 빈곤화의 명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기본 명제들이 옳은 가설이라는 것이다. 다만 세계적 차원의 위계적 구조화와 내적으로 관련된 형태로 그렇다는 것인데, 이렇게 될 때 맑스의 전체적인 논지가 변형되어 그 함의와 결과가 전혀 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핵심 논지는 잘 알려진 대로 근대사에서 자본축적이 자국 노동자로부터의 잉여착취뿐 아니라 핵심 지역에 의한 세계경제의 잉여착취를 통해 진전되어왔고 그 체제의 작동이 가져온 잉여분배의 양극화는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경제의 단일성은 결국 체제의 계급적·지리적 위계화라는 중첩적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로부터 전통적 맑스주의와 종속이론과는 구별되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틀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이 중첩적 과정이 그 체제의 정치적·문화적 복합체, 특히 국가간체제라는 틀 속에 존재하는 국가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국가와 민족의 형성을 위계화된 세계경제의 구조적 작동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국가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기제로서 처음엔 유럽의 핵심부에서 등장하고 그 뒤 지리적으로 팽창하여 나중에는 주변부의 식민지들에서도 그 식민화를 통해 흣날 국가간체제의 제약을 받는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우리가 분석단위로 당연시하는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과 유지의 제도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민족과 국가가 초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비교적 짧은 시간지속을 갖는 새로운 정치적 형성물임은 세계체제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20세기 역사학의 상식이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세계경제의 이중적으로 위계화된 구조를 토대로 그 내부적 틀인 국가간체제의 일원으로 국가와 민족형태가 형성되어갔다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근대국가를 일국적 시장구조 및 계급관계와 연결시키는 이념형적 자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註9) 그럼으로써 그는 민족주의가 그 국가간체제의 진화해가는 경계에 상응해 뒤에 생겨난 산물임을 한층 분명히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응되는 국민경제들을 설정하고 세계경제를 국민경제들의 총합, 국가들간의 교역을 통한 교류체제로 파악하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월러스틴에게 세계경제는 노동분업으로 서로 연결된 생산의 구조들이 있는 공간에서 단일한 시간리듬으로 작동하는 체제, 따라서 단일한 정치·경제·문화 과정의 복합체이다. 결국 이런 틀은 국가를 세계적 차원의 계급구조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으로서 국내적인 것을 국제적 배경에서, 혹은 국가간 상호관련과 상호작용에서 설명하는 틀과 크게 다르다. 한마디로 “복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있다”註10) 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와 월러스틴의 관계를 일국사적 분석과 세계체제적 분석의 대비를 통해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맑스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형성이란 과정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하나의 이행으로 파악하고 사회주의도 자본주의 전체와 동일한 범위를 갖는 단일한 세계경제 안에서만 확립될 수 있는 생산양식으로 보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의 핵심적 발상과 기본 개념들을 맑스에게서 그대로 발견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단일한 세계경제와 그 상부구조로서의 국가간체제라는 기본 발상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민족주의적 노동운동을 제창하는 라쌀주의자를 공격할 때 그 뜻은 아주 분명한 편이다. 계급투쟁이 민족적 내지 국민적이라는 것은 실질 내용상 그런 것이 아니라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대로 ‘형식상’으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민국가라는 틀’, 가령 독일제국이라는 틀 자체는 경제적으로 세계시장의 ‘틀 속에’, 정치적으로는 국가들 체제라는 ‘틀 속에’ 있는 것이다.(19: 23~4)註11) 계급투쟁의 실질적인 장이 세계시장의 틀이며 그 정치적 상부구조가 국가들 체제라는 맑스의 진술이 곧 세계체제 분석의 중심적 골격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임노동제가 아닌 아메리카의 플란테이션을 자본주의 작동의 구조적인 일부로 보았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아마도 맑스는 이 세계시장의 틀과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분리에서 진행되는 자본축적 과정을 어떻게든 결합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생산수단에서 분리된 자유임노동의 존재 여부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핵심적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메리카 플란테이션을 “자본주의적 태도가 지배적인” 곳으로 규정짓고 착취자가 자본가임을 분명히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메리카의 플란테이션처럼 자본주의적 태도가 지배하는 곳에서 이 잉여가치 전체는 이윤으로 간주되기에” 그 소유주들은 자본가들이라는 것이다.(25: 812) 하지만 그것은 자유노동에 토대를 둔 하나의 세계시장 안에서의 변칙형태일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아메리카의 플란테이션 소유주들을 자본가들이라 부를 뿐 아니라 그들이 진짜 자본가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자유노동에 토대를 둔 하나의 세계시장 안에서의 변칙형태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註12) 이렇게 보면 월러스틴의 입지점은 이 변칙형태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정상적이고 구조적인 일부로 파악하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상 맑스에선 그 범위를 망라한 세계시장도, 또 거기서 가능한 사회주의도 염두에 두기로는 타 지역이 주체적 변수는 아닌 유럽이란 한정된 문명공간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오늘의 세계에서 더 심한 기현상들이 많을 때 그 기현상들을 포괄하는 전체로서 자본주의를 재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법한데, 짐작컨대 이것이 월러스틴의 문제제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세계경제의 단일성은 고전적 자본주의로 상정된 현실과 다른 온갖 기현상·왜곡·잔재·비정상이라 해야 할 사태의 확산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계급적·지리적 위계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그간 자본주의의 합리성과 보편주의에 어긋나는 잔재이자 비정상으로 은연중 전제되던 인종 및 성의 차별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생하는 한 쌍으로 파악한다. 이것들은 불평등한 잉여가치 분배의 기본조건이자 자본주의적 작동에 필수적인 구조적 부분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간 세계적 규모에서 진전되어온 민족주의·종교분쟁·종족분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위 게마인샤프트적인 것의 우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현상들을 해명하는 방식은 물론 세 가지가 있을 법하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발전을 안 해서 남아 있는 잔재로 설명하는 방식, 원초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 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및 국가간체제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고 해명하는 방식일 텐데, 불가분한 관계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엄청난 비합리성을 유기적 일부로 갖는 체제이고 그 팽창과 발전에 따라 그 비합리성이 제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듯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일부로서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 관련을 갖는다면 지리적 위계화의 공간을 감안하는 자본주의의 정의가 새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 시공간 범위의 경계를 정해서 노동분업이 존재하는 장소, 서로 연결된 생산의 구조들이 있는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시 단기적 시간 속에서 부분적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전체로 보지는 않았는지, 자본주의의 전형성이라 생각되었던 것이 일부의 전형성인지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듯 통합된 전체에서 자본주의를 다른 체제와 구별시켜주는 종차가 무엇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결국 이윤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자본축적이 체제의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 종차를 찾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세계체제론은 지금껏 사회의 내적 생산관계의 역동성과 차이를 무시하고 국제적인 외적 관계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유통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註13) 그러나 이런 비판이 쟁점을 제대로 설정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우선 월러스틴의 분석단위의 문제제기가 바로 안과 밖으로 가정했던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묻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분석단위로서의 역사적 체제는 그 안에서의 삶이 주로 자족적이고 그 발전의 동력이 내적일 때 개념화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곧 내적 동력의 틀의 경계가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국가와 계급이 모두 다 세계경제의 내적 현상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인 것이다. 결국 그 비판이 세계체제론이 국내 관계에 대한 설명이 미진하다는 비판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아무래도 비판 쪽의 입장이 국가라는 실체를 언제나 내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또한 그의 자본주의 개념은 으레 교환체계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유통주의적 해석으로 간주되어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그것을 정의하는 맑스의 입장과 뚜렷이 대비되곤 한다.註14) 이런 극명한 대조 역시 어딘가 평면적이란 느낌이 든다. 이는 월러스틴이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확장으로 인식하고 자본의 순환, 생산구조들간의 상품연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리 있어 보이지만 정작 맑스와의 차이점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우선 맑스에게 상품생산과 유통이 자본주의의 종차를 판별하는 범주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범위와 정도는 다를망정 아주 다른 생산양식에도 속하는 현상이고 특정한 사회적 관계들을 감안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내적 연관성만큼은 맑스에게도 역시 중심적인 것이다.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통일이고 자기확대하는 자본은 생산수단이되 사용가치 아닌 교환가치와 연관된 것이다. 자본은 생산수단에서 분리된 노동자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수단이지만 그것 자체가 시장기제 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월러스틴 역시 자연경제/화폐경제, 자급생산/시장생산의 대립구도의 맥락에서 자본주의를 이윤추구와 상품생산의 시장경제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이전 체제에서도 종종 광범위한 상품생산, 이윤추구 생산자와 상인들, 임노동자, 심지어 자본주의와 일치하는 세계관까지도 있었다고 본다.註15) 그리고 월러스틴에게도 자본주의는 체제의 주된 동력인 끊임없는 자본축적이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 착취와 지배를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다만 그것은 부분적 임노동화에 의해서 오히려 제대로 작동하기에 인종과 성의 차별주의, 그리고 비자유노동과 결합된 형태가 오히려 구조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맑스와의 주된 공통점, 즉 자기확대하는 자본에 의한 지배와 착취라는 양상은 남는 것이다. 따라서 이 쟁점은 자본주의의 전체 역사에서 동일한 자본에 의한 지배와 착취라는 동질성 하에 그 안의 연결된 여러 착취방식을 고찰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그 방식들의 차이를 구분짓는 것이 더 본질적이냐의 쟁점으로 바꾸어볼 필요가 있다. 월러스틴에게는 끊임없는 자본축적이라는 현상이 세계적 차원에서 부분적 임노동화에서만 유지된다는 것이기 때문에(장기적 추세로서는 확대되지만) 여러 착취양식이 결합된 세계적 생산관계에서 자본주의의 작동양상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註16) 그리하여 그는 계급관계와 투쟁을 잉여가치 착취와 지배로 보는 관점에서 구 사회주의권의 노멘끌라뚜라와 노동자들의 대립 역시 계급관계와 투쟁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월러스틴은 노동의 상품화가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생산성 증대의 원인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 자본주의가 언제나 세계적 규모로 세계적 자원과 잉여를 착취하는 독점들에 의존해왔다는 인식이라면 그때는 어떤 귀납적 분류방식이 자본주의의 작동양상을 제대로 설명하고 실천적 의의를 갖는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쟁점이 제대로 자리잡혀야 생산적 논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유통과 생산관계의 대비는 계급관계와 계급투쟁을 자기 사고의 중심에 놓는 월러스틴의 문제의식을 제쳐놓기 쉽다. 그의 주된 문제의식은 산업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을 특권화하고 다른 관계와 투쟁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의 견해와 계급관계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적대를 단일한 원천이 없는 고유한 것으로 인식하는 다원주의, 가령 포스트맑스주의 및 신사회운동들과 같은 다른 한편의 흐름에 반대하면서, 다른 투쟁들을 계급투쟁의 다전선전략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적 차원의 잉여착취와 지배가 복합적·사회적 관계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고 특히 남북문제나 인종문제, 혹은 핵심부 국가에서의 인종적 계서화, 성, 세대 등에서 계급관계가 다면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계급투쟁들이 필연적이고 근본적이라는 명제는 다른 형태의 투쟁들의 분출에 의해 전혀 반박당하지 않는다. 후자가 전자의 엄폐된 형태라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맑스의 명제는 많은 계급투쟁들이 ‘민족들’(peoples)간의 투쟁이란 이름 하에 수행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강화되는 것이다.”註17)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발리바르처럼 월러스틴의 입장을 생산력에 대한 사회적 생산관계들의 우위의 관점이라고 보면서 세계 부르조아지 같은 개념의 적실성을 문제삼아 비판한다면註18) 토론의 터가 자리잡을 수 있지만, 유통이냐 생산관계냐 하는 것은 그 대비가 다소 공허하게 생각된다. 결국 동일한 자본에 의한 착취 하에 그 안의 여러 착취방식을 고찰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자유임노동과 다른 방식들의 차이를 구분짓는 것이 타당하냐의 문제에서 맑스에게는 당연히 후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임노동제를 통해 유럽 내부사회의 역동성을 설명하고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정치적 변화, 노동자의 소외와 집단적 운동 가능성을 중시하는 맥락에서이다. 특히 이는 노예제·농노제·임노동제의 순차적 진행의 불가피성과 자본주의의 진보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부르조아 사회의 자유주의에 대한 맑스의 관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맑스의 관(觀) 자체를 월러스틴은 문제삼고 있다. 3.자본주의와 근대성 월러스틴은 맑스의 역사인식틀이 어느정도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주의가 제공해준 지배적 신화에 얽매여 있었다고 본다. 그 가운데 맑스의 오류는 무엇보다 근대사에서 부르조아지를 진보의 담지자로 보는 점과 자본주의의 정상상태를 자유경쟁으로 파악하는 점,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자본주의의 진보성과 필연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하여 그는 맑스와 자유주의의 합의에 의해 근대사를 중세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와 성장이라는 모델로 파악하는 인식틀이 의심없이 받아들여졌음을 주목한다.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 기존의 역사인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보기에 맑스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단일성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가졌으면서도 그 정치·경제적 결과를 과소평가한 것은 근대성에 대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 함몰된 부분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맑스가 자본주의를 그 전의 체제에 비해 진보적인 것이고 유럽 봉건체제에서 불가피하게 자라나온 정상적 과정으로 인식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자본주의적 근대를 역사적 필연성 속에 자리매기면서 생산력의 진보, 정치적·법적 해방, 새로운 사회계급의 대두가 가져온 자유의 진보를 확신했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역사의 구조적 인식이라는 것이 으레 함축하는 필연성의 개념에 도전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발생에 대한 다른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봉건적 생산양식은 역동적 발전 가운데서도 오래 지속된 자기모순 때문에 붕괴가 필연적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출현 자체는 결코 필연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대안이 없었는지 묻는 물음이 그간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한 일이라는 것이다.註19) 그리하여 그는 그 논란많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중심 가설로 하면서 새로운 역사해석에 기대어 기존 통념을 뒤집고자 한다. 브로델의 역사 저작에 힙입어 그는 자본주의를 예사롭지 않은, 유별나고 기이한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제까지 근대사 해석의 가장 큰 오류는 무엇보다 새로운 부르조아계급이 봉건귀족을 타도함으로써 지배집단의 사회세력이 교체되었다고 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부르조아지가 귀족을 타도했듯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아지를 타도하리라는 함축을 담고 있기도 한 이 통념이 잘못된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이 봉건 귀족계급을 타도하기는커녕 귀족계급이 부르조아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봉건제의 위기 기간에 농민들의 봉기와 인구감소, 정치구조의 취약성과 귀족들의 내부상쟁 가운데 토지제도가 한층 평등한 체제로 나아가고 있는 추세에서 위기에 몰린 귀족계급이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기존하는 시장기제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잉여를 착취하는 체제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후진적 원시경제도 아니고 아시아와 같은 생산력과 체제결속력, 그리고 지식 면에서 비교적 높은 수준을 갖춘 지역도 아닌 중간수준의 유럽에서 쇠퇴해가는 지주 귀족계급이 부르조아지로 변신함으로써 하층 계급과 다른 지역 대중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지속시킨 체제인 것이다.註20) 워낙에 불합리하다 보니, 또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다 보니 귀족계급은 그만큼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고 체제의 위기가 가져온 혼돈과 분기에서 이런 노력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성장하는 생산력을 토대로 진보적 부르조아지가 주도해 이루어진 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맹아는 중국을 비롯해 여기저기 있었지만 그것의 성장을 가로막은 제동장치로서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 혼돈기에 제동장치가 풀린 결과 등장한 것이다. 물론 월러스틴의 이런 가설은 중세세계의 역동성에 대한 최근 수십년 간의 연구성과, 그리고 중세는 암흑/자연경제요 근대는 계몽/시장경제라는 단순주의 이미지를 교정시켜준 20세기 역사학의 성과에 어느정도 힘입은 것이다. 브로델의 다음 진술도 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큰 불행을 보게 된다는 단순론자들의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민중들의, 다시 말해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대해 말하자면 그 반대가 사실이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세의 ‘가을’에서 멀어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 19세기 중반에까지 사정이 계속 나빠지는 곳도 있었고 동유럽의 일부 지역들, 특히 발칸 지역에서는 20세기까지도 계속 악화되었다.註21) 그런데 단일한 세계경제 하에서 그 후로 물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계급적·지리적 위계화가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면 이것은 다수 대중에게 진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에게 자본주의는 결코 진보적인 것이 아니며 대안적인 역사적 가능성들이 제거되어버린 것으로서 퇴보의 역사이다. 유럽은 “다른 모든 문명들이 현명하게 피했던” 불합리한 모험의 길로 들어감으로써 “후퇴의 길을 밟았다”는 것이다.註22) 이 점에서 그는 역사를 성장곡선으로 인식하는 통상적인 메타 역사 대신에 다른 메타 역사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인류 역사를 단순화된 곡선으로 그린다면 “곡선은 이른바 농업혁명과 더불어 본질적으로 올라갔고(그 사회적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도래와 더불어 내려갔고(그간 아주 과장되어온 어떤 플러스들에도 불구하고)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미래의 붕괴와 더불어 다시 올라갈 수 있다(그러나 그때도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註23) 그리하여 월러스틴은 서양근대사에 관한 역사학계 내의 일련의 논쟁에서 막다른 길에 부딪힌 문제들에 대해 분석단위의 문제제기를 통해 과감하게 나름의 논리를 찾는다. 부르조아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부르조아 혁명일 수 없는 것이 이미 장기의 16세기 이래 이미 부르조아지가 지배계급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대신 대안적 해석으로 프랑스혁명을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영국과의 쟁탈전에서 1760년대 패배한 프랑스의 상층 부르조아지의 일부가 국가를 혁신하고자 시도한 혁명인 동시에 이와 함께 분출된 직접생산자층의 봉기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런 해석은 오랫동안 맑스주의적 정통해석과 수정론적 해석이 맞서온 논쟁에서 부르조아지와 귀족이 서로 다른 사회계급이 아니었음을 끈질기게 주장해온 수정론의 도전과 반론을 의미있게 받아들여 정통론을 넘어서되 동시에 정통론이 중심틀로 갖고 있는 사회경제적 계급 갈등의 측면을 되살리는 시도라 할 수 있다. 18세기는 이미 부르조아지가 지배한 사회였고 영주의 반동은 사실상 이미 자본주의적 기제를 이용한 반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기에 나온 반봉건주의 구호도 실상은 반부르조아 구호였던 셈으로 브로델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것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새롭고 놀라운 상황을 다룰 자본주의의 언어를 찾지 못한 프랑스 농민들이 이미 낯익은 오랜 반(反)봉건주의라는 언어로 돌아갔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註24) 따라서 그는 프랑스혁명을 지배계급 내부의 투쟁인 동시에 직접생산자들, 민중의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파악하고 있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우애는 봉건제와 봉건귀족을 겨냥한 부르조아지의 저항 구호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겨냥한 구호라는 것이다. 이것을 『자본』의 다음 주장과 비교해보면 그 대조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직 자유, 평등, 소유, 벤삼(Bentham)이다. 자유! 이것은 어떤 한 상품, 가령 노동력의 구매자나 판매자가 오직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규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 평등! 이것은 그들이 오직 상품소유자로서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교환하기 때문이다.”(23: 189~190) 맑스는 자유경쟁시장에 걸맞은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부르조아지가 목표로 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의 자유, 평등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맑스에게 그 구호는 봉건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통한 평등인 반면 월러스틴에게 그것은 부르조아지들에 대항한 “위험한 계급들”의 구호이다.註25) 이렇듯 맑스와 대립되는 그의 관점은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대립된 해석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자유주의가 귀족과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신장시켜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유주의는 프랑스혁명 이후 분출된 반자본주의적인 위험한 계급들의 저항과 요구를 막기 위해 등장한 자본주의의 정치적·문화적 방패막이다. 이러한 뒤집기와 함께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발전에 의한 물질적 진보와 정치적·법적 자유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단일한 세계경제의 시각을 통해 다시 바라본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과 인권 및 민주주의의 신장을 연결시키는 논의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 국가일수록 인권 등이 옹호되는 것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있는 한편, “그것은 세계체제의 어느 한 지역에 유리한 결과들이 집중하고 그밖의 다른 지역에는 부정적인 결과들이 집중하는 또 다른 방식을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견해로는 서구의 자유주의는 하층계급의 저항에 직면해 핵심부 국가들에서 얼마간의 사회복지와 법의 지배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더 열악한 노동계급을 최대한 착취할 수 있는 주변부의 창출에 의존해왔다는 것이다.註26) 대체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인식틀이 근대 유럽사에 대한 특정 해석에 토대를 둔 것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 일반 의식을 이루는 전제라 할 수 있다면 이런 뒤집기는 일단 그 함축하는 바가 막대한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지배집단의 사회세력 교체로 인식하면서 이를 진보의 중심적 지표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역사학의 기본 전제이자 사회인식의 기본틀, 어쩌면 하나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인식의 기본틀이 일국사의 내적 발전론으로 자리잡은 셈인데, 여기엔 가령 우리나라에선 왜 시민혁명을 달성할 부르조아계급의 성장이 늦었는가 하는 질문이 전제하는 믿음, 즉 각 나라가 따로따로 동일한 진보의 길로 간다는 필연성의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월러스틴에게는 이러한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 발전론적 역사관 바로 그것이 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누려온 중요한 지리문화이다. 그리하여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를 기본적으로 반민주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변신한 새로운 영주제로 대두한 자본주의의 핵심은 시장경제를 억압하는 독점에 있다는 브로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맑스가 아담 스미스와 같이 자본주의를 자유경쟁시장으로 본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15~18세기의 자본주의를 연구하면서 브로델은 독특한 자본주의관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에서는 언제나 독점이 정상적일 뿐 아니라 중심적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논리로 넓은 의미의 경제를 일상적 생활로서의 물질문명과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3층집 모델에 비유하면서 물질문명이라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나누어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독점으로 파악했다. 그에 의하면 역사과정을 볼 때 언제나 대자본가들이 진정한 자본가들이자 동시에 상인·금융가·생산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그간 사람들은 투기적인 비합리적인 자본주의에 시장경제 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붙이는 오류를 범해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위계제를 의미하는 것이다.註27) 월러스틴은 브로델의 ‘시장경제’가 이미 통용되는 일상적 의미와 혼동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그대로 활용하는 데는 조심스러워하지만註28) 자본주의 내에 경쟁적 시장과 독점 간에 일종의 긴장이 있다는 브로델의 근본사상을 받아들이고 체제의 규칙적 팽창을 이 독점의 우위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특징은 국가의 개입에 반하는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시장기제가 정치권력체들의 벡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註29) 결국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반민주주의적이긴 하되 반국가주의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 하에 그는 자신의 독특한 역사적 자본주의관을 제시한다. 내가 경고하려는 것은 그간 이루어져온 논리적 비약이다 …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우리의 이미지 안에 있다. 자본주의가 생산요소들 -- 노동·자본·상품 -- 의 자유로운 흐름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가 완전히 자유로운 흐름을 요구하거나 적어도 자본가들이 바랬다고 가정하는 데 반해 실상은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은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흐름을 요구하고 열망한다 … 자본주의는 소유권의 법적 토대 위에 세워져온 체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이 소유는 신성한 것임을, 사적 소유권이 더 많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요구하고 열망한다고 가정하는 데 반해 실제로 자본주의의 전체사는 소유권의 점진적인 쇠퇴의 역사였지 확대의 역사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이 언제나 순전히 경제적인 근거에 의한 경제적 결정권을 옹호했던 체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실제 그들의 결정에 대한 정치적 간섭에 거부반응을 보여왔다고 가정하는 반면에 그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국가기구를 이용하려 해왔고 정치적 우위의 개념을 환영했다.註30) 결국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실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의 부분적 현상을 현실의 총체성 자체로 오인해 이념적 자본주의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보편주의적으로 확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시간지속과 공간범위의 단위를 잘못 설정해서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에 대한 이념적 상을 가지고 완성된 형태의 자본주의의 표준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대신 그는 역사적 체제 안에서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 장기적 추세와 주기적 변동을 감안할 것을 촉구하면서 그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진전과정을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 자본주의가 특정한 시간성 안에서 형성·유지·소멸된다는 의미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맑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맑스야말로 그 역사성을 강조했던 사람이고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출발점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공간에서 실재하고 진전되어온 과정을 해석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그 자신이 말하듯이 복잡성을 해석하는 과학에서 근거를 찾는 개념이다. 그는 어떤 현실이든 복잡한 현실적 총체에서 그 복잡성을 최소 상태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전통적인 사회과학에 대해서 시공간의 경계를 감안하면서 그 복잡성을 해석하는 과정해석의 과학을 제시한다. 이 과학은 역사적 제약의 요소들을 정식화 과정에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반적 진술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추상을 과정의 맥락에서 정의하고 그것의 분석단위인 특정 시공간 안에서 단일하면서도 복잡한 과정을 분석하는 하나의 과학이다. 바로 여기에 월러스틴의 독특한 과학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역사적 체제의 인식론 분석단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것이 ‘단위’에 대한 문제제기인 한 애당초 특정한 공간범위와 더불어 특정한 시간길이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월러스틴에 대한 브로델의 영향력은 물론 결정적인 것이다. 브로델에 의하면 시간은 물리적인 외적 변수만이 아니라 유동적인 사회현실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생활에는 다양하고 상충되는 시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80년 광주항쟁이란 사건이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간지속도 막상 따지자면 다층적이듯이, 혹은 ‘우리 시대’라 할 때 그 시간지속도 어떤 사회적 시간을 염두에 두느냐에 따라 달리 설정되듯이,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그대로 자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역사를 시간지속의 변증법으로 일컬었던 브로델은 인간생활에서 느리게 변하는 구조의 시간을 의미하는 장기지속을 심오한 차원의 역사이자 현재와 과거를 연결시켜 불가분한 전체로 만들어주는 개념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사회분석에서 맑스가 갖는 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맑스의 천재성, 그가 갖는 끈질긴 힘의 비결은 그가 최초로 진정한 사회적 모델들을 구성해내고 역사적 장기지속에서 출발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모델들에 법칙, 모든 곳 모든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완성된 자동적 설명의 의미를 부여해 단순형태로 고정시켜왔다. 하지만 이것들은 시간이 이루어낸 흐름들에 비추어봄으로써 그 구조가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 결국 사람들은 지난 세기의 가장 강력한 사회분석의 창조력에 족쇄를 채워버렸다. 오직 장기지속 안에서만 그것은 힘과 젊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註31) 여기서 브로델이 강조하는 바는 무엇보다 맑스의 힘이 보편주의와 경험주의의 가운뎃길로서의 역사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데 있다는 것이다. ‘장기지속’은 한편으론 단기적 사건의 시간에, 다른 편으론 시간과 무관한 보편적 모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브로델에게 이 용어는 전통적 역사학과 법칙정립적 사회과학 양자를 겨냥하는 것이다. 이 장기지속이란 용어를 통해 그는 1950년대에 전통적 역사학뿐 아니라 대학의 사회과학과 정통 맑스주의가 공유하는 보편주의의 전제에 대해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물론 브로델의 장기지속은 대체로 역사의 받침대이자 장애물로서의 구조들이다. 이 점에서 맑스와 브로델의 거리는 분명해 보인다. 지리적이든 생물학적이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 주어진 틀은 제동과 관성으로서의 구조이고 눈에 잘 띄는 진보와 사건들 뒤에서 수없이 제동하고 지체시키고 유산시킨 힘으로서의 구조들이다. 이는 단선적인 역사적 진보의 불가피성이 아니라 왜 그 방해를 제치고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그는 역사적 필연론 및 계몽주의 진보관을, 더 나아가 현대인의 사고에 깊이 젖어 있는 역사의 가속화의 관념을 제어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다소 비관적인 현실관과 맞물린 구조의 포로로서의 인간관은 그의 사고에서 상당히 뿌리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맑스의 관심사는 당대의 지적 조류에 맞서 주어진 현실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 역사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변화한다는 데 있었다. 그가 보편주의와 경험주의의 역사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길은 장기지속의 용어가 아니라 바로 개인들의 ‘활동과 관계’라는 용어였다. 그에 의하면 “소위 객관적 역사학이라는 것은 역사적 관계를 활동과 분리시켜 파악하기에 반동적이요”, “이 활동적인 삶의 과정이 제시되면” 역사는 죽은 사실들의 수집도 아니요 관념적 역사철학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었다.(3: 40,27) 하지만 맑스가 역사적 장기지속에서 출발함으로써 보편주의에서 벗어났다는 브로델의 언급은 맑스가 자신의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과 꽤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헤겔의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자로 출발했던 맑스가 일생 동안 누누히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거니와 어쩌면 관념론에 대립된 유물론이란 것이 그 이름에 걸맞으려면 특정 시공간을 감안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맑스가 평생 자신의 사상에 ‘체계’라는 용어를 붙이는 데 대해 지나칠 정도의 거부반응을 보이고 자기 연구를 언제나 비판이자 분석으로 일컬은 것도, 과학은 오직 하나, 역사과학이 있을 뿐이라 주장한 것도 사실상 보편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註32) 이는 월러스틴이 자신의 이론을 ‘세계체제론’이 아닌 세계체제 ‘분석’이라 즐겨 쓰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사실상 이 ‘분석’이란 평범한 용어야말로 맑스가 언제나 보편주의 역사철학을 공격할 때마다 (그것이 헤겔주의든 프루동이든 아니면 다윈주의자든) 자신의 방법으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을 관념론자로 오해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분석적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그너는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특정한 시대에서 출발하는 나의 분석적 방법이 개념들을 연결하는 강단 독일식 방법과 아무 공통점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19: 375, 강조는 맑스) 과거에 필자도 보편주의와 경험주의의 가운뎃길로서 맑스의 ‘특정성’의 원리를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맑스의 총체성 추구와 보편주의를 구분짓기 위해, 맑스의 기본전제가 “‘보편’이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한 개인들의 삶과 관련되어 드러난다”는 데 있기 때문에 “보편을 실재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확장되는 보편의 장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註33) 그가 세계사를 언제나 존재한 것이 아니라 16세기 이래 형성된 하나의 역사적 산물로 파악하는 것도, “역사가 공식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근대 공업의 형성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예로 든 것도 이런 뜻일 터이다. 월러스틴에게도 시간은 사회적 산물이며 장기지속 개념은 사회구조와 역사적 이행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다. 그 역시 브로델을 따라 역사와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의 중심축인 보편과 특수의 긴장 문제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변수를 끌어들여 해결하고자 한다. 이제까지의 법칙정립적 사회과학과 개별기술적 역사 양자는 사회분석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해 진지한 고려를 하지 않는 똑같은 지적 태도라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브로델의 시간지속에 대한 공간적 대응물로 공간범위를 설정하고 사회적 실재로서의 ‘시공간’(TimeSpace)이란 범주를 만들어냈다. 시간과 공간은 분석적으로 분리불가분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다층적이지만 그 가운데 “장기지속은 ‘세계체제’의 공간적 특질에 대한 시간적 상관물”이고 “‘세계’라는 공간과 ‘장기지속’이라는 시간이 한쌍으로 어울려 모든 특정한 역사적 세계체제를 구성하는 것이다.”註34) 이러한 ‘역사적 체제’의 개념은 역사와 사회과학들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어차피 보편법칙과 개별기술의 거짓 대립을 넘어선 사회과학은 특정 역사적 체제의 과정을 해석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하나의 역사과학이 있을 뿐이라는 맑스의 주장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역사가도 사회과학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특정한 체제들의 일반법칙들 그리고 이 체제들이 거쳐온 … 특정한 연쇄과정들을 분석해내는 역사적 사회과학자만이 존재할 따름이다.”註35) 또한 월러스틴은 사회과학의 현존하는 내부경계의 구분에는 전혀 타당한 준거가 없으며 전체 인간행위의 세 영역인 경제적 영역, 정치적 영역, 사회적 또는 사회문화적 영역은 자율적인 사회행위의 장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그 어떤 생산체제들도 특정한 신념체계들을 구현하는 일련의 사회적 관계들로서 조직되듯이 단일한 영역의 단일한 논리를 갖는 가장 복잡한 구조가 인간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활동의 대상은 보편법칙들의 진술이 아니라 일종의 절제된 해석인 것이다. 결국 그의 해석의 과학은 한편으로 역사과정의 객관적 실재나 그 인식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나 전통적인 과학의 실체론적 객관주의를 배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역사적 세계체제라는 것이 초역사적 보편이론과 개별기술 사이의 중도에 자리잡은 인식론적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보편주의 인식론을 탈피하되 지적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것을 대신하는 인식론이다. 그에 의하면 개념과 이론이라는 것은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시공간의 매개 안에서만 타당성을 가진다. 그런데 현실이 언제나 시간에 따라 유동적이기에 그 어떤 개념과 이론도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만 타당성을 가진다면 개념과 이론이 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특정한 시공간, 즉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총체를 상정해야 하는데 이것이 ‘역사적 세계체제’ 혹은 ‘역사적 체제’이다. 그리하여 월러스틴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역사적 체제의 제도적 구조들, 즉 국가·계급·민족·가계 같은 것을 제각기 자기완결적인 실체로 간주하고 그 이전 체제와의 연속성을 무비판적으로 상정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가 비판하는 물화(reification: 고정된 실체화)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컨대 ‘자본주의 국가’와 같은 개념상의 오류들을 범하게 되었는데, 이런 개념은 ‘국가’라는 말 속에 분석상 변치 않는 무언가가 있어서, 봉건국가니 자본주의국가니 사회주의국가니 하는 것이 마치 단일한 유(類)에서 나온 세 가지의 종(種)들인 것처럼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제도적 구조들은 그것 전체의 산물이며, 따라서 이 특수한 대규모 체제 전체의 작동들에 대한 설명을 떠나서는 분석될 수도 없고 심지어 확인될 수조차 없는 것이다.註36) 따라서 그는 국가든 계급이든 가계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범위를 넘어서 용어를 초역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기껏해야 아날로지일 뿐이라 주장한다. 특정한 역사적 체제의 다양한 제도적 구조들은 그 체제에 독특한 것이고 체제의 작동구조들을 구성하는 상호관련된 제도들의 세트의 일부라는 것이다. 국가간체제라는 틀 속에 있는 국가는 다른 역사적 체제의 관료적 정치체들과 다른 것이고 20세기 국가를 10세기 국가와 동일한 역사적 연속선 상에 놓는 것은 그 자체 오류이다.註37) 결국 국가든 인종집단이든 원초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 끊임없이 창출되고 재창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역사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대규모적인 역사적 체제이다. 그의 이런 주장이 각 민족의 역사를 제각기 자기완결적 실체들인 것처럼 간주하고 동일한 류의 연속성을 상정하는 일국사적 사회구성체 단계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민족국가들은 각기의 대등한 독자적 역사를 갖는 사회들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는 “프랑스사 같은 것은 없다. 유럽사가 있을 뿐이다”라는 마르끄 블로끄의 말에 대해 “유럽사 같은 것은 없다. 세계사가 있을 뿐이다”라고 되받는 브로델의 수사적 표현의 정신과 어느정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註38) 민족주의를 비롯한 집단의식 속에 깃든 전통적인 연속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그런 의식이 실제로 강력히 존재하더라도 그런 의식 자체는 원초적인 것도 아니고 지속적이지 않은, 역사적 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註39) 월러스틴은 결국 인간현실을 분석하는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 방법의 문제를 제기해 그 해결수단을 “개념들이 그 안에서 의미들을 갖는 잠정적인 장기적·대규모적 전체들을 파악”하는 데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이 역사적 체제의 인식론이야말로 유동적이고 운동중인 현실을 언어의 캡슐에 넣어 포착하기 때문에 빠지기 쉬운 물화, 그리고 법칙정립과 개별기술이라는 비역사적인 세 가지 사고방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도의 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상의 특정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초역사적이고 보편주의적 분석방법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석단위’는 이런 의미에서의 세계체제이고, 따라서 분석대상이 무엇이든 첫 출발점에서 분석단위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체제 분석의 첫째 전제가 “분석의 단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분석자가 부딪히는 첫 질문이라는 점”임을 강조한다.註40) 물론 이것은 다층적인 시공간들 가운데서 분석단위가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체제 분석’이란 명칭이 시사하듯이, 이것은 개별적인 것을 전체 속에서 볼 수 있는 인식론이고 실제적인 방법론에서는 “연쇄적 현실의 대부분을 ‘결정하는’ 지배적 ‘논리들’을 담아낼 만큼 시간적으로 충분히 길고 공간적으로 충분히 넓은, 그런 체제적 구조들 안에서 분석을 추구하는 것이다.”註41) 이렇게 볼 때 ‘역사적 체제’에서 출발하는 그의 인식론은 특정한 시대에서 출발한다는 맑스의 분석적 방법과 같은 것이되 시공간을 함께 감안한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월러스틴의 분석단위라는 것은 맑스의 ‘구체적 보편’의 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필자는 과거에 맑스에게 구체적 보편이란, “특정한 현실적 총체가 주어져 있을 때 그 현실적 총체의 특정한 존재방식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총체의 장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그 내적 논리를 해명해야 한다는 것”을 맑스의 가장 중요한 논지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월러스틴의 ‘분석단위’가 바로 이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註42) 하지만 월러스틴은 맑스가 역사적 체제의 특정성의 분석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시공간을 한층 철저하게 문제삼지 않음으로써 인식론적 긴장에서 헤어나오기가 더 어려웠던 것으로 보는 듯하다.註43) 그리고 자신에겐 언제나 역사를 복잡다단한 것으로 보았던 맑스, 각기 다른 역사적 체제들의 특정성의 분석을 강조했던 맑스, 자본주의를 하나의 역사적 체제로 비판했던 맑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註44) 아마도 다음의 웅변은 맑스 사후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월러스틴이 반체제운동의 스승 맑스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맑스-레닌주의를 쫓아냄으로써 그들은 맑스 자신을 쫓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앞문으로 내던지면 맑스는 슬그머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맑스는 그의 정치적 타당성에서도, 그의 지적 잠재력에서도 그 힘이 다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반대이기 때문이다.註45) 바로 그 100년이 경과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될 것이고 그에 따라서 이전의 이론적 추상개념들이 수정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다. 1848년이 아니라 1948년이었더라면, 그리고 1859년이 아니라 1959년이었더라면 맑스는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을 각각 다르게 썼을 것이다.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註46) 이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진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이 어느정도 성과를 거둔 것인지는 아직 섣부르게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세계체제 분석이 사회세계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기존 이론화에 대한 하나의 저항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요청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이러한 그의 주장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줄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그 역사적 설명이 역사적 사실들에 비추어 부단히 검증되어 수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내놓은 답변보다 그 저항과 문제제기 자체가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사실 그가 내놓은 여러 설명들뿐 아니라 실천적 방안들은 아직 막연한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의 분석시각과 기본 명제들을 그대로 죄다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지금 그가 기여하는 바는 근대세계의 역사과정과 그것을 인식하는 과학의 문제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에서 다시 ‘생각’하도록, 혹은 ‘사고의 모험’을 하도록 도와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의 문제제기와 맞부딪혀 ‘생각’하는 과정에서 그의 시각과 여러 역사학적 명제들은 더욱더 사실들에 비추어 검증되고 비판될 수 있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