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8일 금요일 오후 02시 17분 05초 제 목(Title): 임형택/19세기 西學에 대한 經學의 대응 19세기 西學에 대한 經學의 대응 --丁若鏞과 沈大允의 경우 임형택 경학의 시대적 의미 정약용 경학 -- 신독(愼獨)의 논리 심대윤 경학 -- 복리(福利)의 사상 맺음말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서구 주도로 전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 바야흐로 그 지구적 완결이 지어지고 있다. 인류역사를 되돌아보면 먼 옛날에 씰크로드로 동서가 통했던 터이며, 징기스칸에 의해 유라시아 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이 건설된 역사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오늘날과는 관계가 소원한 이야기라서 지리상의 발견으로 개시된 서세동점(西勢東漸)과는 현재적 의미가 판이한 것이다. 이 근대세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 민족은 지구상의 다른 여러 민족 국가들과 함께 무한한 어려움을 겪었던바 이 때문에 생긴 왜곡을 아직껏 바로잡지 못한 실정이다. 하지만 현 정권이 ‘세계화’ 논리를 제기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조할 만큼 한국은 지구적 체제에 대해 이젠 피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진취적으로 나서는 판이다. 서세동점의 근대사는 그 완결편에서 무언가 새로운 변혁이 일어날 것도 같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의 사상전통, 동양의 사상전통이 서양과 처음 부딪쳤던 무렵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가기도 한다. 오늘과 연계된 과거지사를 반성하는 뜻이 있지만 앞으로 도래할 변혁의 바른 도리를 생각해보는 데도 필요하지 않을까. ‘19세기 서학에 대한 경학의 대응’이란 주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한번 떠올려본 것이다. 요즈음 너나없이 지구에서 인간이 사는 환경에 대해 우려들을 하고 있다. 지구적 위기로 널리 공감하는 문제다. 이는 서구주도로 전개된 세상, 후기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현상이다. 그런데 지금 인간의 환경도 문제지만 인간 자신이 또한 문제다. 근래 인간 문제가 여기저기서 불거져나오는데 그때마다 호들갑들을 떨다가 이내 물질의 번화 속으로 바쁘게들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인간다운 삶이니 도덕성의 회복이니 하고 주장들은 하지만 공염불로 돌아갈 밖에 없다. 인간문제를 정말 본격적으로 반성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이 문제를 사고하는 데도 본고의 주제는 연관이 될 것 같다. 경학은 여러 위대한 학자들의 평생의 공부가 축적되어 있는 곳이다. 필자의 얕은 식견이 미치기 어려운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 소고는 경학의 저작들을 약간 읽고 생각한 바를 엮어본 것에 불과한데 오늘의 현실이 당면한 문제를 역사적으로 사고함에 있어 한 가닥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 경학의 시대적 의미 유교 경전이 이땅에 들어와서 필독서로 읽혀지고 경전적 지위를 실제로 확보한 것은 유래가 깊다. 그에 비해 경전을 비판적(학문적)으로 따져서 해석하게 되기는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 『한국경학자료집성(韓國經學資料集成)』을 훑어보면 경학의 본격적 저술은 17세기를 지나서야 나오는 것이다. 이후 18세기부터의 경학 저술은 그야말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을 이루고 있다. 특히 19세기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한국 경학사의 종점이 되고 말았는데 오히려 이때의 성과가 풍년의 추수마당처럼 가장 볼 만하였다. 중세기에 있어서 경전은 통치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었을 뿐 아니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범이요 지침이었다. 그러기에 경전의 해석권은 결코 자유로 방임해둘 사안이 아니었다. 주희(朱熹)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및 『시·서집전(詩·書集傳)』과 『주역본의(周易本義)』에 독존적 권위가 부여된 것은 이 때문이다. 종래 학자라면 응당 경전에 치력하였으나 집주(集註)·집전(集傳)의 해석을 정확하고도 충실하게 이해하려는 데 바쳐졌다. 요컨대 관방적(官房的)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것이다. 그런데 18세기로부터 19세기에 이르러 하필 경학으로 경도된 학적 관심은 무슨 의의를 가지며, 그 성과는 어떤 성격을 띤 것이었는가? 한국 경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실학파의 경학은 개혁(改革)과 경장(更張)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뜻이 있었다.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정치제도 및 삶의 질서가 온통 이완되고 문란하여 당장 전면적으로 손을 쓰지 않으면 금방 붕괴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현실인식이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자기의 평생의 학문을 총괄하여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로 수기(修己)를 삼고 1표 2서(一表二書: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로 천하 국가를 위한다”고 말했던바, 그의 위대한 학문의 체계에서 경학은 ‘본(本)’으로 설정되어 있다. 바야흐로 무너지는 세상을 바로 세우고 죽어가는 동포를 구제하려는 사회과학적 기획에 대해 경학은 실로 본원적 중요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학은 한마디로 말해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당시 위기의식은 물론 내부 상황에 기인하였지만 외부의 영향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서학이 한자유교문화권의 중심부인 중국에 유입된 것은 16세기 말엽부터다. 그것이 한반도상에도 이내 파급되었으나 문제시되기는 18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다. 안정복(安鼎福, 1712~91)은 그 사이의 정황을 대략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서양 서적은 선조 말년에 동녘으로 들어온 이래 명경(名卿) 석유(碩儒)라면 누구나 읽어보았지만 제자서(諸子書)나 도(道)·불(佛) 등처럼 여겨서 서실에 완상물로 놓아두었으며, 취하는 바는 단지 상위(象緯: 천문 역학)·구고(句股: 기하학)의 학술뿐이었다. … 계묘(癸卯) 갑진(甲辰) 연간(1783~4)에 재주있는 젊은이들이 천학설(天學說)을 창도한 것이다. (「天學考」 『順庵集』 권17) 천주교는 서양 제국의 세계전략을 배경에 깔고 드디어 극동으로까지 침투하고 있었거니와, 조선왕조의 관헌 및 사대부들은 천주교라는 존재에는 별로 주의하지 않고 단지 거기 끼여들어온 천문 역학 및 기하학에 더러 관심을 두고 섭취했다는 것이다. 이 천주교에 대해 사상적 측면을 최초로 거론한 것은 안정복의 스승인 성호 이익(李, 1681~1763)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서양 사람들은 대저 특이한 인물이 많다. 자고로 천문 관측, 기구의 제작과 수학 등은 중국문명이 따라갈 수 없는 정도다”註1) 라고 저들의 과학기술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마두(利瑪竇, 마테우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거론해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리지 않고 옥석을 가려 취할 점은 취하려는 태도를 비치고 있었다.註2) 당시 정부 당국이나 지식인들이 천주교라는 종교사상에 대해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방관하고 있었던 데는, 그것의 배경이나 작용에 아무런 지식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현상적으로 아직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런데 안정복이 연도까지 명기했듯이 한반도상에서 이제 천주교는 종교신앙으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박지원(朴趾源, 1737~1806)이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그쪽에 휩쓸린 자가 “나라의 거의 반이나 되며 … 장차는 온 나라를 들어 맡기게 될 것이다”(「答巡使書」 『嚥巖集』 卷22)라고 한 것이다. 18세기 말엽의 정황으로서는 상당히 과장된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런 과장이 성립할 정도로 그 형세는 불과 10여년 사이에 불꽃처럼 번졌던 모양이다.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는 지경에 부닥친 것이다. 이에 왕조 당국은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국헌으로 ‘금지’한바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적인 탄압조처를 계속 취해나갔다. 그래서 금지가 되었던가? 소위 신유사옥(辛酉邪獄)에서 정치적 희생물이 된 이가환(李家煥)은 폭압적 대응방식을 두고 “몽둥이로 재(灰)를 두드리는 격이니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더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註3) 과연 이 말은 적중했다. 천주교는 위에서 두드릴수록 밑으로 더욱 번창해서 정부는 두드리는 강도를 계속 높여나갔다. 1801년의 신유사옥으로부터 1839년의 기해사옥(己亥邪獄)으로, 다시 1866년의 대박해로 이어져 병인양요를 불러들이고 마침내는 박지원의 예언처럼 되어간 것이다. 천주교가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쉽사리 파고들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사회에,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었음이 물론이다. 박지원은 이 증세에 대해서 지식층의 경우 “새로움을 숭상하고 구검(拘檢)을 싫어하는 자들은 눈이 환해진 듯 좋아한다”고 했으며, 서민층의 경우 “빈궁에 시달리고 재리(財利)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휩쓸리듯 좇는다”고 진단을 내린 바 있다. 덧붙여 말하면 지식층은 성리학의 이념에 대한 사상적 회의감이, 서민층은 양반지배의 현실에서 겪은 고통과 불만이 천주교로 돌아서고 끌려가도록 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응당 사상적 해결을 모색해야 하고 정치사회적으로 강구해야 할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당국은 오직 물리적 폭력으로 일관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다른 배경이 있었다. 집권세력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정적의 제거 및 권력의 장악·유지 수단으로 써먹은 것이다. 당초에는 서학에 대해 그 과학기술적 측면은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 대해서도 학문적 차원에서 논의가 제기된 바 있다. 그러다가 정치적 탄압으로 치닫게 되자 ‘벽위(闢衛)’의 논리로 경직되고 말았다. 사학(邪學)을 배척하고 정학(正學: 성리학)을 보위한다는 ‘벽위’의 논리는 천주교 탄압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봉사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서학의 과학기술적 측면까지 무분별하게 불온시되는 데 싸잡혀서 거기에 대한 관심마저 함께 차갑게 식어버렸던 것이다.註4) 박지원은 일찍이 일반 사람들의 천주교 신앙에 대해 탄압으로 일관하는 것을 두고 “내가 좋아하는 바 선(善)이요 내가 신앙하는 바 천(天)이다. 어찌 선을 가로막고 천의 신앙을 금지하는가라고 대들면 어찌할 것이냐”고 언급한 바 있다.註5) 박지원의 이 발언은 성리학적 정신전통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폭력적 대응방식의 한계를 지적한 셈이다. 한편 나름으로 사상적 대응인 ‘벽위’의 논리를 가지고는 실제 효험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요컨대 사상적 반성과 사유의 전환이 심각하게 요망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한자유교문화권의 사상전통을 포기하지 않는한 경학의 고유한 과제였다. 이 과제를 감당하여 19세기 초반에 위대한 학적 성과를 남긴 것은 정약용의 경학이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이 과제와 관련하여 심대윤(沈大允, 1806~72)의 경학이 또한 흥미로운 것이다. 2. 정약용 경학 -- 신독(愼獨)의 논리 정약용 경학(經學) -- 232권의 호한(浩瀚)한 세계에 갈피를 잡아보자면 아마도 신독(愼獨)이란 개념을 요체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독’의 의미는 요컨대 자기수양의 방법론이다. 이 단어가 『대학(大學)』에는 성(誠)의 실천과 관련해서 나오고 『중용(中庸)』에는 바로 제1장의 천명(天命)·성(性)·도(道)로부터 중화(中和)로 연결되는 문맥에 핵심어로 놓여 있다. 신독은 유교철학의 중요한 개념들과 논리적 고리를 맺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이 이들 문구를 통해서 해명한 신독은 정통적 해석과는 그 방법론상에서 차이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의의를 훨씬 중시하여 경학의 총체 속에 관건적 위치를 부여한 것이다. 『사서집주』에서 주희는 신독을 인간의 내면에서 암세포처럼 번져나갈 ‘악의 요소’를 미연에 제거하는 자기억제책으로 풀이하였다. 은미(隱微)한 단계,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자기만 감지된 초동에서 아무쪼록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그것이 곧 신독이다. 이때 ‘악의 요소’란 다름아닌 인욕(人欲)이다. 인간은 자기자신의 마음속에 악의 싹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욕’을 배제하고 천리(天理: 性)를 준수하여 잠시라도 도(道)를 위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신독’이 마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주희의 신독론에 대해 정약용은 인간현실에 비추어 의문을 제기한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못된 마음을 품고 남모르게 못된 짓을 저지르는 자들, 그러고도 버젓이 의로운 척하고 잘났다 뽐내는 자들,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이런 철면피의 위선자들에게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하라는 가르침이 과연 얼마나 주효할 것인가. 정약용은 “종신토록 거짓을 행하는 자가 당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얻거나 은밀히 악을 조장한 자가 후세에 최고로 떠받들리는 등의 사례는 천하에 종종 있다”고 탄식을 발한다. 이네들은 주로 도학자를 자처하는 가도학자(假道學者)를 가리킬 터이니 「호질(虎叱)」에 등장하는, 낮에는 인의(仁義)를 설교하고 밤으론 이웃의 과부와 놀아나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은 그런 부류의 전형이다. 도학자 스스로 주희가 가르친 신독의 방법으로는 별 무효과임을 증명한 셈이다. 주희가 해석한 신독론에는 감시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빈말로 돌아갈 밖에 없다는 것이 정약용의 지적이다. “성인이 빈말을 남겨서 세상 사람들에게 본받으라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경전의 원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고구하고 사색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고로 군자는 그 보지 못하는 바에 계신(戒愼)하고 그 듣지 못하는 바에 공구(恐懼)하나니라.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 恐懼乎其所不聞: 『中庸』 『집주』는 이 『중용』의 경문을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으로, 비록 보고 듣지 못하는 일이라도 소홀히 지나치지 말도록 하라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듣도 보도 못하는 대상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의 해답을 『집주』에서 찾자면 애매하다. 딱히 지칭하는 대상이 없는 것도 같다. 하지만 ‘계신’은 혹 그럴 수 있겠으나 두렵고 두려운 공구의 마음이 인간심리상 과연 아무런 대상물도 없이 혼자서 일어나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체다. 들리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소리다. (『中庸自箴』 卷1 『與猶堂全書』 제2집 제3권) 정약용은 이와같이 꼬집어서 밝혀낸다. 계신(戒愼) 공구(恐懼)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상은 다름아닌 하늘〔天〕이다. 하늘〔天〕은 우리 눈에 형체가 보이고 우리 귀에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지만 그의 영명(靈明)이 우리들 마음에 통하고 그의 강감(降監: 내려다보며 감시함)이 우리를 위벌(威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천에 대해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 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다. 군자가 어두운 방 가운데서도 전전율율하여 감히 악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제(上帝)가 내 앞에 다달아 있는 줄로 아는 때문이다.(위와 같음) 이러한 상제의 존재가 정약용의 신독 방법론에는 감시기능으로서 전제되어 있다. 정약용 신독론에서 특이한 면모, 감시기능을 수행하는 ‘천’의 존재는 ‘지존지대(至尊至大)’의 신격註6) 으로 상정되어 있다. ‘천’의 관념이 주목되는 것이다. ‘천’이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늘 해와 달이 뜨고 지며, 때로 비가 떨어지는 하늘이다. 우리는 언제부턴지 “비가 오신다” 혹은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말해왔다. 그것을 자연적 존재로 바라보면서 또한 그 이상의 의미를 느끼고 나아가서 경외의 대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전래의 관념일 터이지만 중국 고대의 천관과도 상통하고 있다.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 『論語·八』)”라고 부르짖었다. 이 문맥에서 ‘천’의 의미를 정약용은 상제(上帝)를 가리킨다고 하였다.註7) 천=상제는 최고의 신격이기 때문에 하늘에 죄를 지으면 달리 용서를 구할 곳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주희는 “천은 곧 이(理)다”라고 못박았다. 천=이는 절대자이므로 이치를 어겨서 안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천이란 존재에 이(理)의 개념을 대입해서 우주의 시원과 만물의 생성을 해명한 성리학의 이론과는 논리체계가 이미 다르다. 정약용의 신독론은 성리학적 천관과는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선 것이다. 이제 그의 인간관에 대해 유의해볼 필요를 느낀다. 정약용의 인간학은 성기호설(性耆好說)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성기호설에 대해서는 정약용 자신이 독창적인 견해로 자부하였었거니와, 그의 중형인 정약전(丁若銓) 또한 “‘성(性)’의 의미가 기호에 있다는 설을 듣자 구름을 헤치고 청천을 보는 듯했다고 격찬해 마지않았다.註8)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의혹이 풀리는 열쇠로 인정한 때문이다. 정약용은 자기의 이 학설을 『중용』의 해석에도 적용하여 첫머리부터 “천명지성(天命之性) 또한 기호로 말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하늘이 인간에게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향을 부여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성선’의 본뜻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인성은 본디 이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는 고로 ‘성’을 그대로 따라서 밟아가는 그것이 곧 도(道)라고 논변하였다. 지금 논리는 인간 문제를 대단히 낙관하는 듯 들린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정약용에 있어서 “인간은 선을 좋아하는 품성을 지니고 있다” 함은 어디까지나 잠재적 경향성일 뿐이다. 인간 현실, 즉 실제로 표출되는 행동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선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요, 악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다.” 이것이 인간 육신의 형세라고 『맹자요의(孟子要義)』에서 거듭 역설한 바 있다.註9) 인간 앞에는 선과 악의 두 갈래로 길이 개방되어 있는데 거기서 갈 길은 각자에게 맡겨진 자유선택의 과정이다. 그는 여기에 ‘자주지권(自主之權)’이란 개념을 부여해서 비상히 주목한 것이다.註10) 내 앞에 의롭지 못한 물건이 놓여 있다고 치자. 욕심이 불끈 생기게 마련인데 이때 내가 취할 행동은 ‘자주지권’에 속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서 이르기를 “먹지 말라. 의롭지 못한 것이 아니냐” 하여, 나는 마침내 그 물건을 집어넣지 않고 물리칠 수 있다.註11) 하지만 악은 내리막처럼 빠져들기 쉽고 선은 오르막처럼 행하기 어렵다 하지 않았던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실로 내적 갈등으로 칼날 같은 극기를 요하는 선택이다. 성현은 이 점을 우려한 나머지 신독을 자기수양의 필수과정으로 부과한 셈이다. 사실상 방임된 나의 마음속의 선택 과정에서 하늘의 강감(降監)을 염두에 두어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도록 하는 뜻이다. 이 곧 신독의 공부다. 신독은 요컨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바 선을 좋아하는 품성을 따르도록 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정약용은 말하기를 “태어나서부터 죽음에 이르도록 밟아나가는 그것을 가리켜 도라 이른다” 하였다. 이때 도란 무엇인가. 주희는 “도란 것은 일용 사물의 당행의 이치(當行之理)”로 정의하고 있다.註12) 곧 선험적인 원리로 규정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정약용은 “도란 것은 여기서부터 저기에 이르는 도로(道者, 自此之彼之路也: 『中庸自箴』 卷1 張4)”로 정의한다. 근대 중국의 혁명적 문학가 루 쉰(魯迅)은 길은 사람이 다니면 생기는 것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정약용에 있어서 도는 새로 개척하는 길을 뜻하지는 않지만 오직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사물당행의 이치’로 전제되어 있는 도와는 개념범주가 크게 다르다. 도는 원리의 차원이 아닌 실천의 범주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정약용 경학의 일부분을 엿보았는데 『사서집주』와는 실로 구조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느 쪽이 원문에 맞는 해석일까? 어학시험의 답안지 채점처럼 가려질 성질은 물론 아니다. 사상체계에 따라, 그리고 시대배경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게 되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동일한 경전의 원문을 놓고 각기 해석이 달라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봄직도 하다. 그러나 나의 식견으로는 어느 쪽의 해석에 의거해서 원문을 접하건 각기 다 그럴듯해서 아직 판정할 수 없다. 다만, 정약용의 해석은 좀더 설득력을 갖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경문을 해석할 때 그 경전 및 다른 여러 경전에서 증거를 찾아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이경증경(以經證經)의 방법이다. 특히 ‘천’과 관련해서는 『시경』 및 『서경』에서 적절한 증거를 많이 동원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는 공자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자. 청나라의 전대흔(錢大)이란 학자는 천을 이(理)로 해석했던 주희의 설을 반박하여 “하늘에 빈다는 말이지 어떻게 이(理)에다 빌겠는가”라고 주장한 바 있다.註13) 이(理)는 결코 비는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위의 문맥에서 천은 정약용처럼 상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분명히 맞다. 주희는 공자의 본의로부터 이탈해서 자기류의 해석을 한 셈이다. 하지만 천이란 존재로부터 고대적 신비성을 제거한 점에서 주희의 해석은 사상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음이 물론이다. 정약용에게 천 - 상제의 개념은 옛 경전에 있었던, 그러다가 중간에 바뀌어진 것을 회복한 성격이다. 이 고대적 개념을 회복한 해석 역시 정약용 그 자신의 사상적 지향이다. 정약용의 ‘천’을 향한 관념은 신앙적 색채를 띠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말하기를 “군자의 학(學)은 사친(事親)에서 출발하여 사천(事天)으로 종결된다”(『中庸講義』 卷4 張22)고 하였다. 정약용의 ‘신앙적 천’ - 상제와 기독교적 천주의 개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비교해서 따지자면 관념의 차이가 크지만 유사점 또한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최고의 신격으로서의 천은 가장 보편적 존재다. 당초 예수회 선교사들이 기독교적 천주 개념을 중국 고대의 천관에 용이하게 접합시킬 수 있었던 요인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학의 논리체계 속에서의 천은 기독교적 천주와는 지향처가 전혀 다르다. 정약용에게 하늘을 섬기는 목적은 그 자신이 썼던 표현을 빌려서 밝히자면 ‘요순지역(堯舜之域)’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註14) ‘요순지역’이란 세상을 바로잡고 인민을 구원하려는 유교적 이상 그것이다.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로 수기(修己)를 삼고 일표·이서로 천하국가를 위한다”는 그의 학문세계의 총체에서 천의 의미는 실천 주체의 확립에 긴요한 관련이 있다. 정약용은 20대 젊은 시절에 서학서(西學書)를 읽었다 한다. 우연히 한번 읽어보고 치운 것이 아니라, 그 독서경험은 자기에게 굉장한 충격이었고 경이로운 감명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註15) 우선 ‘천’의 관념도 그렇지만 그의 이론에는 서학의 영향이 은근히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학기술적 측면뿐이 아니었다. 당시 사상적 회의와 종교적 공백으로 인한 천주교로의 경도에 직면해서 그는 신앙적·사상적 대응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그의 위대한 경학에서 이 문제의식이 특히 신독론에 각인되어 있다. 그는 자기 경학의 성과를 총정리하고 끝맺는 대목에서 “매양 하나의 오해(悟解)가 떠오를 적이면 신명(神明)의 묵유(默: 말없이 깨우쳐줌)가 있는 듯했다”(「自撰墓誌銘」)고 술회하고 있다. ‘신명의 묵유’라는 표현에서 종교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신의 존재가 실재하여 일일이 그에게 가르쳐주었다는 것일까? 필시 학문과 사색에 바쳐진 그 자신의 지극한 정성이 문득 신통한 생각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믿기를 우리 상제는 마음속에 내재해 있으며, 신독은 곧 성(誠)이라고 하였다.註16) 이러한 인간 자세는 더없이 고매하고 진실하지만 대중적 흡인력을 갖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심대윤 경학 -- 복리(福利)의 사상 심대윤(沈大允)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쯤에 경학으로 상당한 업적을 남겼으나 그 이름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번 『한국경학자료집성』의 편찬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난 학자다.註17) 그의 생애는 1806년에서 1872년에 걸쳐 있는바 인간 면모나 삶의 자취는 거의 파악이 되지 못한 상태다.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심수현(沈壽賢)이 그의 고조부이고 증조부 때 당화(黨禍)를 혹독히 입었던 사실로 미루어 그의 가계는 소론(少論)의 명문으로서 폐족(廢族)된 상태에 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약간 언급한 데 따르면 그는 서울의 도성 안에 거주하여 생계에 골몰하다 보니 학문에 겨를이 부족했다 한다.註18) 그의 필생의 저술들은 공간되거나 타인의 평판에 오른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데 언젠가 초고상태로 흘러나와 다행히도 현재 국내 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37세로부터 57세에 이르는 동안 사서(四書, 『孟子』에 대한 저술은 전하지 않음)와 오경(五經)에 대한 저술작업에 전력하여 경학관계의 저서 44책을 남겼고 또 따로 『동사(東史)』 6책, 『전사(全史)』 58책이 전한다. 그는 실로 ‘남산골 딸각발이’의 한 전형이었던 듯싶다. 심대윤은 정약용의 다음 세대 경학자로서 정약용과는 학통 및 당파가 다르고 경전 해석의 논리체계 또한 같지 않다. 뿐 아니라, 학문수준으로 따지면 격차가 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경학을 하는 문제의식, 특히 본고의 주제와 관련해 보면 서로 대조되면서 상통한다. 생각컨대 ‘우리 도’(吾道: 유교를 가리킴)가 불분명하게 된 것은 맹자 이후 수천년이라. 세속의 패란(敗亂)이 극에 달했다 하겠는데 근래 서학(西學)이라 일컫는 일종의 사설(邪說)이 틈을 타서 일어나 우리 백성을 침혹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이 형편없이 되어가는데 바라만 보고 앉아서 구하려 하지 않기는 차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1842년에 착수하여 1851년에 완성한 『논어』 해석서에 붙인 글의 한 대목이다. 그는 서학―천주교가 민중에게 파급되는 현상을 이단적 사교에 미혹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런데 동양세계는 맹자 이후로 도가 어두워져서 바야흐로 패란의 극에 달했다고 판단한다. 사회의 위기, 인간의 위기로 인식하고 있다. 고문운동을 제창했던 한유(韓愈)는 일찍이 “8대에 걸쳐 쇠퇴한 문을 일으킨다(文起八代之衰)”고 부르짖었거니와, 심대윤은 맹자 이후 ‘세속의 패란’을 사상적으로 바로잡아 서학의 무서운 침투에 대항하겠다고 당당하게 기치를 세운 것이다. 심대윤이 진단한 바 ‘세속 패란’의 소이연은 어디에 있었던가? 양(楊)·묵(墨)·노(老)·불(佛)이 이단으로 있어왔으나 그들 스스로 설을 전하는 데 그칠 따름이다. 지금 ‘성인의 서’를 모두 갖다가 멋대로 도색하고 진면을 바꿔치기해서 세상을 속이고 있으니 폐단은 옛날보다 훨씬 심하다. (『논어』 해석에 붙인 발문) “성인의 서를 갖다가 멋대로 도색하고 진면을 바꿔치기”한 그것은 다름아닌 경전에 대한 주석작업을 가리킨다. 그는 ‘세유(世儒)의 설(說)’에 의해 어지럽혀진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과 눈이 흐려지고 막히게 되었다고 통박한다. 그의 경전해석을 보면 곳곳에 ‘세유’라는 표현을 써서 기존의 설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때 세유는 정자(程子)· 주자(朱子)를 가리키는 사례가 대부분인 것 같다. 요컨대 그는 정·주(程朱)의 경전 해석을 ‘세속 패란’의 원인제공자로 지목한 것이다. 심대윤은 ‘세유’에 대해 ‘오성무세(誤聖誣世: 성인을 왜곡시키고 세상을 속임)’의 죄목을 적용했다. 하지만 그네들은 원인제공자였으니 따지자면 ‘세속 패란’에 직접 관련된 자들을 심대윤은 따로 치부하고 있었을 터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각기 직분으로 먹고 산다.” 그는 이렇게 전제한 다음 “사(士)는 도를 행해서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직분인데 … 자기 직분을 비워놓고 먹을 것을 훔치며 명예까지 훔치고 있으니 이는 천하의 대적이다”라고 지적했다.註19) ‘천하의 대적’이란 말의 표적은 당세에 명성이 드높은 유학자들이었을 것이다. 심대윤은 세도정권에서 기생하던 도학자 부류를 향한 분노의 감정이 끓어올라서 거슬러올라가 그 원인제공자에게 ‘세유’라는 말을 감히 쓴 것으로 여겨진다.註20) 내가 알기로 우리 옛 학자 중에 심대윤만큼 과격한 반주자론자(反朱子論者)는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정약용만 해도 경전해석의 논리체계는 전면적으로 주희와 달리하면서도 그에 대한 존모의 마음과 함께 그의 학설에 되도록 의지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정·주에 대해 주저하던 모습이 심대윤에 와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만큼 담론이 격하고 거칠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서세(西勢)의 위협은 갈수록 가공하게 느껴져오는데, 체제는 날로 위에서 경직되고 민심은 아래서 흐트러진 위기상황에 대한 사상적 대응이 이러한 언어표현을 초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심대윤의 경학사상은 ‘복리(福利)’ 두 자로 요약된다. 그는 자신의 경학작업을 결산하는 단계에서 『복리전서(福利全書)』를 저술한 것이다. 지금 경전의 요지를 취해 어투를 간단하고도 자상하게 꾸며 누구나 알기 쉽도록 해서 만세에 보통 남녀들의 진경(眞經)으로 방향을 잡는 지침이 되도록 하였다. 애오라지 천하 만세에 백성들이 모두 복리를 얻어 누리고 앙화를 면하도록 하고자 한 까닭에 책 이름을 복리전서라고 붙인 것이다. (「福利全書序」) 『복리전서』의 서문을 쓴 시점은 1862년이다. 임술민란이 발발한 그 해이며, 최제우가 동학의 교리를 펴던 무렵이다. 이런 즈음에 심대윤은 경학적 입장에서 민중생활의 정신적 지침서로 『복리전서』를 내놓았다. ‘복리’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학술상에서는 생소하게 들린다. 한유(韓愈)가 불교를 배척한 글에서 “선왕(先王)의 법을 어기고 이적(夷狄)의 교리를 좇아 복리를 구할 것이냐”(「與孟尙書書」)고 한 구절이 있다. 이처럼 복리는 유학에서는 친숙한 개념이 아니다. 천주교 신자로 순교한 정하상(丁夏祥)의 글에 “세복(世福)은 한 순간이요 영원하지 않은데 천복(天福)은 영원하여 한 순간이 아니다”註21) 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천복은 물론 지상을 떠난 천당에서 사후에 심판을 받고 얻어지는 세계다. 심대윤이 내세운 복리는 내세에 천상에서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현세에 지상에서 향유하기로 되어 있다. 『복리전서』는 말하자면 현세적 복음서인 것이다. 복리 개념은 복선화음(福善禍淫)의 논리와 연계되어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된다. 『서경』에 “천도(天道)는 복선화음이다”(湯誥篇)라는 구절이 나온다. ‘천’과 복선화음은 어떻게 연계되는가? 심대윤은 이 중간을 기(氣)의 운화(運化)로 매개시키고 있다. 정약용도 “빛나는 천명을 좇아 따르면 선하게 되고 길하게 되지만 태만해서 어기면 악하게 되고 흉하게 된다”고 말한 대목이 보인다. 정약용은 심대윤처럼 복리를 자기 논리의 중심에 끌어들이지 않고 길흉을 어쩌다가 언급한 데 지나지 않지만 심대윤과 마찬가지로 그 결과는 자기자신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그 과정상에서 차이가 있으니 정약용이 최고 신격 - 천의 강감(降監)에 의한 상벌을 상정한 데 반해 심대윤은 기(氣)의 감응작용으로 설명한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화를 입는다.” 이러한 관념이 서양에선 어떤지 알아보지 못했으나 동양인의 심성에는 보편적으로 깊게 얽혀 있는 것 같다. 대중사회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조되는 추세를 보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세속 유교나 불교도 대개 그렇지만 민중 도교는 교리 자체가 권선서(勸善書)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우리 문학사를 보면 장편소설의 출발시점에서 나온 『창선감의록(倡善感義錄)』으로부터 이후 거의 대다수가 복선화음을 소설의 논리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대중화가 우리보다 훨씬 앞섰던 중국문학사에서는 역시 우리보다 먼저 복선화음의 논리에 따른 ‘해피 엔딩’이 소설의 구조로 자리잡혔다. 소설의 권선징악적 구조를 우리들은 종래 천편일률이라고 타박해왔다. 이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는 별도로 사회심리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보다 대중적 정서를 반영한 현상으로 그 역시 형세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심대윤이 중시한 복리는 이러한 대세를 적절히 포착한 개념이며, 그런 면에서 대중노선으로 볼 수 있겠다. 복리란 무엇보다 행복과 이익을 인간이 추구하는 정당한 가치로 인정한 개념이다. 심대윤 경학은 이 복리를 중심에 놓음으로써 인성론(人性論)으로부터 여러 주요 개념의 의미 범주가 수정·개작되기에 이른다. 먼저 인성론을 보자. 성리학의 정통이론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대척적으로 파악하여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배격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인간의 감정적·물질적 욕구가 부정되는 논리로 발전했으며, 결국 인간의 질곡, 사회의 질곡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이에 성기호설을 제기하여 성리학의 역작용으로 인한 질곡을 극복하려 했거니와, 심대윤은 더욱 대담하게 욕(欲)을 긍정하고 나섰다. 그는 말하기를 “욕(欲)이란 천명(天命)의 성이다”고 한다. “사람으로 되어 욕이 없으면 목석과 다름없다.” 언동(言動)·시청(視聽) 및 사고와 식색(食色), 이 모든 것이 ‘욕’의 작용이니 “욕이 없으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고 단호히 주장한 것이다. 심대윤 사상의 논리는 성욕설에 의한 인욕의 긍정적 수용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심대윤에 의하면 욕은 마음의 주동자다. 가령 ‘서로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親與之心〕’의 욕구는 인(仁)의 단서인데 ‘서로 가까이하고 싶은’ 행위가 바른 도리를 얻게 되면 곧 ‘인’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은 성리학에서처럼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인간의 마음속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행위를 통해 성립된다는 견해이다. 정약용의 사단설과 통하는 것이다.註22) 심대윤의 인욕의 긍정을 통해 도출된 윤리관은 성기호설에 의해 도출된 윤리관과 이론적 발단은 다르면서 합치되고 있다. 인욕 긍정의 논리는 유학의 중요한 개념인 충서(忠恕)에도 적용된다. 공자가 일찍이 “우리 도(道)는 하나로 관통한다” 하고서 그 하나는 곧 충서(忠恕)라고 말한바 충서의 개념을 그는 ‘욕(欲)’으로 해명한다. “자신이 하고 싶지(欲) 않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 서(恕)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충(忠)이다”(『복리전서』 明人道忠恕) 한 것이다. 실로 도를 ‘욕’으로부터 찾은 것이다. 여기서 논리는 응당 이(利)의 긍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仁)은 사람의 행하는 도리이니 충서가 그것이다. 인성은 이(利)를 좋아하니 충서는 이를 추구하는 도리이다. (『논어』 學而篇 “有子曰其爲人章”의 해석) 그는 다른 곳에서 “사람으로서 이름〔名〕을 좋아하지 않으면 곧 금수이며 사람으로서 이(利)를 좋아하지 않으면 곧 금수만도 못하다”(『복리전서』 위와 같음)고도 말했다. 지금 ‘이’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적극 옹호하고 보면 상식에 비추어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의 추구는 모두 긍정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충서는 ‘이’를 추구하는 도”라고 말한 데에 이 문제점에 대한 해답이 함께 들어 있다. ‘이’라는 것은 속성상 남에게 이로우면 나에게는 해롭고 나에게 이로우면 남에게는 해롭기 십상이라는 점을 그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로움이 있는 곳에 다툼이 없을 수 없다. 여기서 관건은 이(利)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남과 더불어 동리(同利)를 추구하는 데 있다. 어떻게 ‘동리’를 구할 것인가? 어떤 일이 나와 남이 함께 이로운 경우 곧 행할 것이요, 나에게는 이롭고 남에게는 해롭지 않거나 남에게는 이롭고 나에게 해롭지 않은 경우 곧 행할 것이요, 나에게는 이로움이 많고 남에게 해로움이 적거나 남에게는 이로움이 많고 나에게 해로움이 적은 경우 또한 행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이로운데 남에게는 해로움이 심하거나 남에게는 이로운데 나에게는 해로움이 심한 경우 행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과 나의 이해를 저울질(權衡)해서 한 편에 치우치지 않는 이것이 동리지공(同利至公)의 도다. (『福利全書』 위와 같음) “충서는 이(利)를 추구하는 도리”란 바로 이렇듯 남과 나의 이해를 저울질해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중용이다. 그에 있어서 더불어 이로움을 추구하는 ‘여인동리(與人同利)’는 ‘지공의 도’이니 또한 최고의 도덕적 가치다. 선이 여기서 판별되는 것은 물론 의(義)의 개념 또한 여기서 성립되는 것이다.註23) 심대윤이 ‘욕’을 인간조건으로 이해하고 ‘이의 추구’를 옹호한 논리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이 기초 위에 세워진 윤리도덕관은 그야말로 현실주의적이며 공리주의적 특징이 뚜렷하다. 우리의 사상사에서 17세기 초엽 권득기(權得己, 1570~1622)란 학자에 의해 공리와 사리를 구분하고 공리는 의(義)로 규정한 학설이 제기된 바 있다.註24) 이(利)와 의(義)는 서로 대척적인 것으로 설정하여 이(利)를 제명처분한 정통논리에 최초로 수정을 가한 것이다. 지금 심대윤이 펼친 이(利)의 사상은 권득기의 공리=의로부터 진전한 경지다. 심대윤이 긍정한 이(利)의 개념 속에 물질적 이익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던가? 민(民)의 부(富)에 대한 욕구는 ‘천’이다. 사람이 하늘을 이기지 못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군자도 역시 사람이다. 어찌 사람답지 못한 군자가 있겠는가. (『論語』 先進篇 子曰回也章의 해석) 공자가 제자 자공(子貢)에 대해 언급한 중에 자공은 화식(貨殖)에 역량이 있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에 대해 정이(程★)는 자공이 화식에 종사한 것은 소시의 일이었고 공자로부터 도를 듣고 나서부터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심대윤은 “민의 부에 대한 욕구는 ‘천’이다(民之欲富天也)”는 논리로 군자는 사람답지 못해야만 되는 것이냐고 정이의 소견을 비웃어준 것이다. 그의 사고는 확실히 물질적 부를 인간의 기본 욕구로 보아 긍정하는 방향이었다. 그는 통상혜공(洞商惠工)으로 부를 이룩하는 일을 바람직한 것으로 사고했는가 하면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일 또한 의지상리(義之常理)라고 말했던 것이다.註25) 심대윤에 있어서 ‘천’의 개념과 함께 ‘민’의 개념이 대단히 흥미롭다. “민은 아래에 있는 하늘이요, 천은 위에 있는 하늘이다.”註26) 신(神)에 대해서 역시 “민이 신의 주인이라”고 정의한다. 신은 민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註27) 동학의 ‘인내천’은 인간주의 사상으로 주목받아온 터이지만, 이 말을 심대윤의 논법으로 바꾸면 ‘민내천(民乃天)’이 된다. 심대윤에게는 인간주의에다 민중성이 좀더 확실하게 표명되어 있다고 보겠다. 요컨대 심대윤이 제기한 복리는 다분히 “민의 부에 대한 욕구”의 충족도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맺음말 이상 19세기 경학을 서학에 대응하는 성격의 측면에 주의해서 논의해보았다. 경학에 대한 고찰의 한 방향을 짚어본 데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이제 결론을 대신해서 위에 논의된 내용들이 사상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 언급해두기로 한다. 정약용의 경우 천 - 상제의 개념이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다. 성리학에서는 천의 존재에 이(理)의 개념을 대입해서 이론을 수립했었다. 고대적 천관에서 종교적·신비적 요소를 소거함으로써 합리론적 사상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정신의 진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정약용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고대적 천관을 부활시켰다. 천관의 복권은 서학이 종교신앙으로 침투하는 데 대한 이열치열적 대응방식은 되겠지만 사상사적 후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성리학은 주지하듯 천지와 인성을 결부시켜 우주자연과 인간을 연속적으로 사유하는 데 특징이 있었다. 천지 자연의 법칙성과 인간의 도덕률을 혼동한 것이다. 천에 대체된 ‘이’의 개념이 집약해서 대변하고 있다. 성리학에서 ‘이’는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영원하며 지존무대(至尊無對)의 무엇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것은 우주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동시에 펼쳐지면 인간의 도덕률인 삼강(三綱)도 되고 오륜도 된다는 논법이다. 도학자들이 그토록 중시했던 격물(格物)이 과학적 관찰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성리학의 천관은 합리론적인 것 같지만 기실 거기서 도출된 이론구조는 과학적 사고를 제약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인간과 사회의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계몽사상가 대진(戴進)은 이리살인(以理殺人)이라고 성리학적 ‘이’를 성토한 바 있다. 정약용 역시 자기의 철학에서 보편자·절대자로서의 ‘이’는 축출하였다. 그리고 단지 조리(條理: 사물의 구성법칙)의 ‘이’만 인정한 것이다. 그는 ‘이’의 권위를 축출해서 허전하게 된 자리에 천 - 상제를 다시 모셔온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할 사항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 정치현실에서 천의 존재는 황제의 권위를 장식하는 데 독점된 상태였다. 조선국왕은 천제(天祭) 행사를 치르지 못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서 이미 애매해진 천을 일깨우고 진작 빼앗긴 천을 되찾아온 것이다. 천의 의미를 회복한 그의 경학에는 자주적·이성적 인간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창조적 의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정약용의 도덕관이다. 그에게 도는 원리의 차원이 아닌 실천이었다. 윤리도덕은 형이상적(선험적) 원리와 분리된 인간 자신이 영위하는 삶에서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이’의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이 자립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적 사고의 측면이다. 종래 인간을 의혹에 빠뜨렸던 여러 불합리하고 미신적인 사고들을 그가 일체 부정해버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식과 월식에 대해 자연현상으로 터득하지 못한 나머지 인사와 연관지어 항상 외구(畏懼)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는 그 현상이 나타나는 일시까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註28) 천을 신앙의 대상으로 확립한 가운데 과학적 사고가 독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의 사상체계에서 천 - 상제는 윤리도덕적 신앙의 대상이다. 천지만물에 대한 인식과는 별개의 사안이 되고 있다. 천을 도덕적 실천의 담보자로 부활시킨 한편에 과학이 개척할 길을 연 것이다. 심대윤에 있어서 복리의 개념은 민중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민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욕(欲)’을 인간조건의 기본으로 긍정하고 ‘이의 추구’를 옹호한 나머지 “민지욕부(民之欲富)는 천(天)이라”고 역설하는 그의 사상에서 자본주의로 진전할 수 있는 사상의 소박한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심대윤 경학에 정약용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드리워져 있는지는 잘 판명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가까이서 살았지만 교유할 기회가 있었던 것 같지 않고 서로의 저작을 접했던 사실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학적 사고에서 서로 통하고 학설에서 일치하는 면이 적지 않다. 정약용 경학이 갖지 못한 미덕을 심대윤은 (학적 수준과는 별 문제로) 가지고 있다. 그는 좀더 인간조건, 인간현실에 의거해서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대중성에 강점이 있고 민중의 물질적 욕구를 선명히 대변했다는 점에서 근대성이 뚜렷하다. 심대윤의 학적 위치는 실학파의 계보에 입적시키긴 어렵지만 거기에 기맥이 닿고 있다. 실학의 성격과 관련하여 필자가 했던 발언을 다음에 인용해본다. 15세기 이래 오늘에 이르는 지구촌은 유럽에 의해 주도된 것이 결과적 정황입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동아시아는 서세동점의 조류에 수세로 밀리고 말았던 셈입니다. 그러나 전지구적 변화에 무감각했고 주체적 대응의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인도양을 순항해서 아프리카에까지 이르렀던 명의 정화(鄭和)는 동세서점의 움직임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주체적 자아의 각성과 객관적 세계인식을 확고히하고 개혁과 개방의 길을 모색했던 실학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서세동점의 조류에 대한 주체적 대응으로 의미부여를 할 수 있지 않나 봅니다.註29) 실학의 세계사적 성격을 ‘서세동점의 조류에 대한 주체적 대응’으로 파악했던 나 자신의 견해를 지금 이 논고는 구체적으로 입증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경학은 우리의 근대학문에서 유감스럽게도 사람의 눈길이 가장 미치지 않았던 곳이다. 이는 곧 근대학문의 맹점을 가장 선명히 드러낸 현상인데 한국 근대사회의 문제점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작금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로 우리 눈과 귀가 놀랍다. 역사를 바로잡자는 것은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의도일 터이다. 역사를 비뚤게 만든 그 인간을 바로잡으려는 반성과 고뇌가 없이 ‘역사 바로 세우기’가 잘될지 적이 의심스럽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