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8일 금요일 오후 01시 15분 22초 제 목(Title): 홍윤기/ 현실적 진보의 확증과 진보된 현실 현실적 진보의 확증과 진보된 현실의 위기 --막스 갈로 외 지음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 당대 1997 홍윤기(洪潤基) 숭실대 이대강사,철학 유럽 시민혁명을 전후해 시작된 진보담론의 전통적 주제는 현실에 없는 진보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현실이 진보하지 않았을 때 진보의 위기는 없었다. 『르몽드』가 던진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식인들이 다양하게 대답한 기고문들을 하나로 묶은 이 책(홍세화 옮김)은 진보사상의 역사적 근원지인 프랑스에서 현재 그 사상이 처한 현실적 문제구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이제 진보가 없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이미 현실은 엄청나게 진보했는데, 그런 진보의 궁극적 목표, 즉 ‘현실이 (진보하기 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문명 -- 서양문명뿐이 아닌 -- 에 진보가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베르구니우A. Bergounioux) 더구나 “그것은 각 대륙에 퍼져나갔고 아시아에선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까싸노바J. C. Casanova) 따라서 ‘현실의 진보’에는 전혀 위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얻을 것을 파악하기 전에 잃어버릴 것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라뚜르B. Latour) 이에 원래 이 문제제기를 선도한 미국 평론가 윌리엄 파프(W. Pfaff)는 “미래가 현재보다, 아니면 좀더 격하게 말해서 과거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근거가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따라서 ‘진보의 현실과 그에 대한 사상적 자의식’이 위기이다. “어찌됐든 이제 진보의 개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모랭E. Morin) 유럽에서 진보사상은 단지, 내일이 오늘보다 반드시 더 나아지리라는 식의 낙관주의와 이상향 건설이라는 유토피아주의의 소박한 절충이 아니었다. 진보사상은 현존 사회를 상대로 바로 이런 이상향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가장 현대적인 의미에서 실현할 수단과 방식, 그리고 목표점을 명확히 지적하는 역사철학상의 대기획이었다. 프랑스에서 이 기획은 “과학으로부터의 예측, 예측으로부터의 행동”이라는 실증주의자 꽁뜨(A. Comte)의 삼련(三聯)논법으로 요약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사상의 핵심은 “과학적 지식이 사회의 기능과 제법칙을 밝혀줌으로써 그 사회의 진보를 보장하도록 요청”하는 데 있었다.(페렌지T. Ferenczi) 따라서 진보의 기획은 그 추진력으로서 ‘과학’의 진리능력을 확신하는 가운데, 그 사회적 수단으로서 ‘기술’을 극대화한 ‘산업’과 그 가치실현의 장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이성’이 모든 문제를 총괄적으로 제어하리라는 분절구도를 갖춘다. 즉 “진보사상은 여러 변칙적인 형태로 현대 과학주의와 일체를 이루”면서(르꾸르D. Lecourt), “과학·기술·산업이라는 삼총사”(모랭)의 진보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진보를 보장한다. 이런 구도에 입각하여 진보사상은 역사에 과학을 적용하여 “동질에서 이질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그리고 무질서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법칙”을 발견했다고 자처함으로써, “진보란 그 법칙에 따라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주장하는 “진화의 보편법칙”을 “강변하기”에 이르렀다.(르꾸르) 진보의 위기는 바로 이 기획에서 설정된 각 분절요소들의 위기이다. 우선 그것은 진보의 핵심추진력인 과학과 그 기술적 실천의 타당성이 의문시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엇보다 과학과 기술은 그것의 진보가 거듭될수록 “유난히 모호한 자신의 성격을 확실히 드러냈다.”(모랭) “기술은 보다 더 좋은 것에도, 더 나쁜 것에도 이용될 수 있는 단순한 수단으로, 목적 없이 비어 있는 그런 것”이다.(브르똥P. Breton) 과학과 기술의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그것들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인간들의 좀더 인간적인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생각은 더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이 정도로 진보의 위기를 거론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진보 위기론의 핵심은 바로 이 진보의 추진력이 역설적으로, 인간이 기대했던 그런 진보의 장애물이 되어버렸다는 인식에 있다. 산성비, 오존층의 파괴, 에이즈나 광우병 같은 새로운 질병의 등장, 가속도가 붙은 핵폐기물의 축적, 그리고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생명조작의 가능성 등, “우리는 진보를 정지시키기는커녕 제어조차 하지 않고 다만 그 결과를 관리”하는 데 그치고 있을뿐더러, “그나마 지나친 관리 소홀로 이 고삐 풀린 성장은 자연과 인간세계를 동시에 위협하는 실정”이다.(핑끼엘크로뜨A. Finkielkraut) 즉 과학·기술·산업의 복합체를 통해 도달한 성장의 결과는 이제 진보의 조건이 아니라 인간 삶의 퇴보조건인 것이다. “역사는 모든 예측을(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기대를 -- 평자) 뒤엎었다. 금세기는 또한 인간관계의 인간화에 있어 진보는 축적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 각 역사적 장면들은 과거의 모든 야만행위의 총합이었다.”(갈로M. Gallo) 이런 와중에서 진보의 위기는 인간의 사고에서 도대체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으로 보는 데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이같은 현실에 직면하여 대환난이 온다고 까싼드라의 외침을 내질러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아무도 이 세계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항할 수 없다. 단지 패주의 절망, 그리고 현실을 탐미적으로 즐기거나 지식의 매혹적인 전진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당섕A. Danchin) “마치 과학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 듯한 이 혼돈상태”(당섕)에서나마 진보의 화두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지적 분투를 목격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재미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프랑스 지성의 저력을 확인한다는 기분까지 준다. 우선 진보사상의 발생사적 동기맥락을 재환기시키는 것이 이채롭다. 즉, “계몽철학의 관심사는 본질적으로 생명과 -- 인간을 포함하여 -- 무생명의 자연 위에 행해지는 지배의 부단한 확장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성과 정의의 발전가능성에 대한 질문과 가설이었다.”(깡바델리스J. C. Cambade′lis) 생산력의 끝없는 성장을 통해 기대했던 것이 “인간의 해방”이었다면, 아직도 해방될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와해된 것은 진보사상이 아니라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며, 해방을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왜곡된 -- 그 자체 목적이 되어버린 -- 진보인 것이다.”(깡바델리스) 결국 진보는 “윤리적 가치를 기준으로 정의되는 하나의 방향”이다.(리삐에A. Lipietz) 따라서 기술 요인뿐만 아니라 인간적 요인까지 진보의 맥락 안에서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면, 진보를 축으로 한 역사진행의 조망도 지금까지의 일직선적인 발전구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역사를 일직선적인 전진이나 나선적인 수렴으로 보는 것 모두 진보의 복합적 성격을 간과하는 목적론의 구도를 함축한다. “진보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국지적 진보로 이루어지며, 더구나 그것들 자체가 역행의 생산자라는 역설”에 항상 직면한다. (브뤼끄네P. Bruckner) 이에 차라리 “역사를 하나의 미로(迷路)에 비유”하여,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실은 전진한 것이며,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믿을 때 실은 길을 잃은 것이며, 두 지점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믿는 순간, 실은 그것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전진한다거나 퇴보한다는 것은 미로에선 의미가 없는 개념”이므로 “전혀 새로운 역사의 기하학을 준비해야 한다”는 발상이 제출된다.(아딸리J. Attali) 그러면서 “순결하고 풍부하며 기지가 빛나는 지성”에 충만하여 “성숙된 의식은 곧 기쁨이요 해방이며필요성”임을깨달을“청년들”에게서 한번 곤경에 빠졌다고 절망하지 않는 그런 (미래)문명의 새출발을 발견한다면(베르구니우P. Bergounioux), 진보는 아직 생동하는 현실이라는 기대와 확신이 충족될까? 또한 이 책은 그 자신 이 물음에 지극히 회의적인 대답을 갖고 있는 홍세화의 번역 솜씨가 돋보였다. 프랑스어의 경쾌함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살리면서 우리말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그 언어감각이 놀라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