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7일 목요일 오후 04시 23분 45초 제 목(Title): [퍼온글] 정조의 개혁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seody (Beyond the Mind's Eye) on 'Library' Title: [인문학의 쟁점] (6) 정조의 개혁 Date: Mon Nov 25 03:09:44 1996 [인문학의 쟁점] (6) 정조의 개혁 “당시의 정승이 왕실 의사 심인으로 하여금 (정조에게) 독약을 올리게 했다. 이 역적을 내 손으로 몰아내지 못함이 한스럽다.” 다산 정약용의 `고금도 장씨네 딸에 관한 기록'에 인용된 어느 선비의 말이다. 이 글은 조선후기 자료 가운데 `정조 독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가 독살당했다는 이야기는 남인계열 학자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정약용의 글로 미루어 보면 정조가 죽은 직후부터 이미 독살설 이 항간에 떠돌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만 가지고는 정조가 병사했는지 독살당했는지 확 정할 수는 없다. 노론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던 순조 연간에 편찬된 <정조 실록>에는 정조가 한 달 정도 병마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진 채 서서 히 죽어갔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당시 주치의 심인은 임금이 병사했으 므로 관례상 유배 당했다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남인계열 학 자들은 그에게 사약을 보낸 것도 독살과 관련한 노론 벽파의 입막음 조처 였다고 본다. 정조 독살설은 정조 연간의 개혁이 당시 보수적 노론 벽파의 제동으로 좌절됐음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정조 연간에 이뤄진 개혁작업과 그 좌절은 그 당시까지 쌓여온 근대 지향적 세력의 역량과 그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정조 연간의 개혁은 △`신해통공'(1791)을 통한 중세적 독점상인제도의 철폐 △서얼에 대한 차별 철폐 △농정개혁에 관한 여론 수집(구언교) △ 왕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설치를 통한 왕권 강화 △왕실 도서관·강학기 관인 규장각의 설치를 통한 학문 진작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개혁 작업은 상업 발달, 신분제 혁파, 농업 생산력 발달 등 근대 지향적 방향 과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왕권 강화는 대지주·벌열 귀족들의 반대 를 뚫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로 이해할 수 있다. 정조의 개혁 작업과 더불어 진행된 화성(수원성) 축조는 `독살설'과 함 께 그를 둘러싸고 있는 또하나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표면적인 이유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이하는 1804년 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에 홍씨와 함 께 내려가 살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막대한 왕실 재정을 축내면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우성 전 성균관대 교수(한국사)와 정석종 영남대 교수(한국사) 등은 당시 한양이 노론 벽파들의 생활 근거지이므로, 이들을 무력화시키고 더 욱 철저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화성 건설 당시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총동원됐고 △화성을 신흥 상공업도시로 만들기 위해 화성의 상인들에게 특혜를 주었 으며 △본부가 한양에 있는 장용영의 주력부대를 화성에 주둔시킨 점 등 을 든다. 최근 <꿈의 문화유산, 화성>(신구문화사)이란 책을 펴낸 유봉학 한신대 교수(48·한국사)에 따르면 `1804년 세자에게 임금자리를 양위하고 화성 으로 내려간다'는 정조의 계획은 당시 조정을 출입한 웬만한 벼슬아치라 면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안이었다. 천도 여부와 관계없이 신도시 화 성의 축조가 노론 벽파에게는 일종의 압박으로 다가왔음은 틀림없다. 노 론 벽파의 영수 김종수는 화성 축조를 진시황의 토목사업에 빗대 비판하 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정조가 죽자 그의 개혁 작업은 많은 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 등은 유배 당하고, 화성 건설을 주도한 정 민시·서유린은 국가재정 고갈과 민생 궁핍화의 원흉으로 지탄받았으며, 왕실 친위군 장용영은 혁파됐다. 정조의 죽음 이후 무기력한 보수 정객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세 도정치' 시기가 도래한다. 연구자들은 정조 연간의 개혁이 조선후기 자생 적 근대화의 중대한 고비였으며, 그의 의문의 죽음은 그대로 자생적 근대 화 역량인 실학파의 좌절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상수 기자 기사등록시각 1996년 11월 25일 17시 27분 한겨레신문 제공 -- 콘벡스님이 퍼오신것인데, 다시 퍼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