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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bonjovi (방통)
날 짜 (Date): 1995년03월22일(수) 03시43분57초 KST
제 목(Title): [고것을 알고 싶다]  도끼만행사건(2)






 

  그래서 "김일성과 맞붙고 싶다"고 벼르던 판인데 북으로부터

8.18 도끼공격이 있었던 것이다.  칼을 번득이도록 갈고 나면

휘둘러보고 싶은 건 검객만이 아니다.

  박대통령은 보복 특공부대로 박희도준장이 이끄는 1공수특전

여단을 떠올렸다.  청와대 작전 차장보로 불려간 전두환준장이

두 달 전인 76년 6월까지 거느리던 김포 1여단은 박대통령 스스로

막강 전투력의 근위 부대라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역사에

있어서 김포공수단은 61년 5.16을 성사시키는 돌파구를 열었고 79년

12.12때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 5공정권 창출의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정권의 지렛대로 작용했다.)

  여단장 박희도는 사건발생 하루 뒤인 19일 오후 합참본부장 유병현의

방에 불려갔다.  특전 사령부도 까맣게 몰랐다.  때마침 사령관 정병주(공수

인맥의 대부임.  나중에 12.12때 부하들(전두환, 노태우, 박희도 등등)에게

철저히 배신당함.)는 스페인에서 열린 각국 공수부대 스카이 점프대회에

요원들을 데리고 가고 없었다.

  "정예요원을 선발해 특공작전을 펼 준비를 하라.  기밀이므로 어디에도

보안하라"고 유장군은 명령했다.

  주한미군도 바빴다.  8.18 사건 발발시 8군사령관 스틸웰은 일본에서

휴양중이었다.  그가 돌아온 건 발생 10여시간 뒤인 18일 저녁 8시.  미

본토 대통령 포드는 예비선거 때문에 캔자스 시티에 가 있었다.  워싱턴에선

국무장관 키신저가 특별대책회의를 열어 몇가지 조처를 포드에게 건의했다.

  F4 전투기 1개대대 오키나와서 한국에 재배치.  주한미군 전투태세 강화.

미본토의 F111 전폭기 1개대대 한국 배치준비.  항공모함 미드웨이호 한국

해역으로 이동...

  사건발생 24시간만인 19일 오전 10시.  국방장관 서종철과 스틸웰이

박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스틸웰은 한미군 공동 대응을 요청했고

박대통령은 선뜻 박희도 1공수여단을 점찍었던 것이다.

  19일 오후 5시.  평양방송은 북한군 전투태세 돌입을 알렸다.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정규 비정규군에 전시사태를 선포하고

전국적인 등화관제 및 주요부서 후방소개를 단행했다.  30만 평양시민을 

지방으로 분산시키고 대학생들의 학업을 전폐, 교도대에 투입했다.  가정과

직장의 비상배낭을 재점검했고 밤이면 탱크 등 중무장 장비들이 평양시대를

질주했다.

   그 시각 남한 전역, 휴전선뿐만 아니라 부대가 있는 모든 곳에서 군인은 

군장을 점검하고 실타을 분배받았다.  모든 전투부대는 진지로 투입되었다.

박희도 여단의 특공부대는 64명으로 편성되었다.  부대 지휘자는 김종헌소령.

  그러나 미8군은 벌써 보복공격의 범위를 좁혀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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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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