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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3일 일요일 오후 02시 09분 16초
제 목(Title): 도정일/제우스 길들이기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토종이) on 'History'
Title:     제우스길들이기/도정일 
Date:      Thu Aug 20 11:49:39 1998 GMT

제우스 길들이기



                                            도정일   




     1. 괴물의 죽음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 가운데 테세우스는 서구 서사문학에 상당량의 중요한
     소재와 모티프를 제공한 서사적 자료들과 직접 혹은 간접으로 가장 많이 
관련되어
     있는 인물의 하나이다. 그가 직접 등장하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는 여러 다른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이어주는 연결 문맥을
     구성함으로써 ‘테세우스 서사’라 부를 만한 방대한 이야기 체계의 중심 
고리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두번째 아내 파에드라는 그리스 고전극 시대부터 
17세기
     라신느를 거쳐 현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학에 금지된 욕망의 주제를
     끊임없이 제공해온 여자이며, 그의 아들 히폴리투스는 계모 파에드라의 사랑을
     거부했다가 죽음을 맞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실타래의 여자’로 서구 문학에
     살아 있는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사랑하다가 버림받고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되는 여성이다. 근육질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테세우스에게 연상의 친구이며, 
둘은
     많은 모험에 함께 참여한다. 오이디푸스도 테세우스와 관계 있다. 테베 왕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고 장님거지가 되어 유랑길에 올랐을 때 그를
     받아들여 죽을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테세우스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장엄한 죽음의 장면을
     산출하고, 이 의미심장한 죽음의 모티프는 현대 영국작가 포스터(E.M. 
Forster)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 속에 다시 이어진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 
스티븐
     디이달러스에게 그 이름을 물려주는 다이달로스는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기 위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유명한 
미로(迷路)를
     만든 장인이다.

     테세우스와 관계된 이야기들이 일종의 체계성을 갖는 까닭은 그가 그리스 
신화의
     인간 영웅들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인물로서의 상당히 일관성 있는 자질과
     행동강령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헤라클레스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가 
산출한 퍽
     대조적이고 특징적인 두 인간 유형을 구현한다는 점 때문이다.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는 모두 용기 있고 힘세고 의협심이 강하다는 점에서 문화영웅적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근육과 머리를 함께 구비한 반면
     헤라클레스는 힘은 장사이면서도 머리가 없고 성질이 급하다. 이를테면 여름날
     자기를 덥게 한다는 이유로 태양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이 헤라클레스이다. 
급한
     성질 때문에 그는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를 보속하기 위해 또 수없이 
많은
     고생을 감내한다. 그의 생애는 온통 실수의 실라버스(syllabus)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멍에’인 인물이며, 그의 모험 가운데 많은 부분은 이 자기 
멍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가 인간의 한 유형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는 헤라클레스를 통해 ‘인간이 되기 위해 버둥거리는
     인간’이라는 흥미로운 정신적 상향(上向) 투쟁의 주제 하나를 전개한다. 그
     헤라클레스와는 대조적으로, 테세우스는 지혜와 용기, 정치적 역량과 상당 
정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갖춘 인물이다. 민주적 영웅답게, 타인들을 곤경과 억압에서
     구출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테세우스의 주요 사업이고 모험이다. 헤라클레스가
     감성적, 충동적 인물이라면 테세우스는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자기로부터의 해방이 헤라클레스의 주요 노동이라면, 억압으로부터의 타인 
해방이
     테세우스의 주된 노동 내용이다. 이 테세우스적 사업의 성질을 잘 보여주는 
수많은
     삽화들 가운데 하나가 프로크루스테스 처치 사건이다. 서양 문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관용어구를 선사한 이 강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행자들을 잡아다 자기 침대 길이에 맞춰 긴 다리는 자르고 짧은 
다리는
     늘려뜨림으로써(이 강도의 본명은 다마스테스이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름은
     ‘잡아당겨 늘리는 자’라는 뜻) 세상을 자기 기준에 맞추는 폭군적 즐거움을
     추구한다. 아비를 찾아가는 16세의 테세우스가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름의 
폭력을
     제거하는 사건과 그의 후일의 모험적 행적들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다.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것도 테세우스가 젊어서 이룩하는 
또하나의
     주요 업적이다. 이 일은 그가 아직 왕권을 승계하기 이전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서사구조상 설화적이라고 할 성격을 띠는 측면이 없지 않다. 공주설화의 
주인공
     왕자처럼 그도 권력을 승계할 만한 자질과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모험은 능력 시험이며 그는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러 가는 모험은 말하자면 테세우스의 능력 입증 
행위이다.
     크레타 왕비 파시페가 어떤 황소와 사랑에 빠진 끝에 낳게 된 것이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이다. 크레타 왕 미노스는 아내가 
낳은 이
     괴물을 죽여 없애지 못한다. (괴물의 출생에는 해신 포세이돈이 개입되어 
있다.
     미노스가 황소를 제물로 바치라는 포세이돈 신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로 하여금 황소와 간통하고 
괴물을
     낳게 함으로써 미노스를 벌한다.) 미노스 왕은 장인-건축가 다이달로스를 불러
     아무도 탈출할 수 없는 정교한 미로를 짓게 하고 괴물을 그 미로에 가둔다. 
괴물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는 아테네에 명하여 9년에 한 번씩 소년소녀 열네 명씩을 
공물로
     바치게 한다.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스스로 공물이 
되기를
     자청하고 열네 명의 희생자들에 끼여 크레타 섬으로 간다.

     테세우스가 이 모험에서 성공을 거두고 살아나오는 데는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의 조력이 결정적이다. 그녀가 준 실타래가 아니었다면 그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해도 미로를 탈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조력자가 등장한다는 것도 설화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테세우스의 크레타 원정이 갖는 설화적 요소들은 그 정도에서 끝난다. 
테세우스는
     그를 도와준 아리아드네를 어느 외딴섬에 버리고 혼자 귀국한다. 이 배은 
행위는 그
     동기가 잘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로 여겨지기도 하고, 테세우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사건이라는 해석도 낳는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행위가 아주 
설명될 수
     없는 미스터리인 것은 아니다. 그는 크레타의 권력 아닌 아테네의 권력을
     아비로부터 승계할 사람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권력매개로서의 ‘공주’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 공주설화의 경우 공주의 위치와 기능은 그녀가 권력의
     매개자라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프로프가 설화의 ‘통시적’ 연구(이는 
프로프가
     수행한 연구의 또다른 면모이다)에서 설명하려 했듯이 공주설화는 권력이
     친자승계 아닌 ‘여자를 통해’ 승계되던 시대에 그 발생의 뿌리를 갖고 있는
     서사장르이다. 그러나 테세우스 이야기는 권력의 ‘친자승계’라는 가부장적
     질서가 이미 확립되었거나 확립되고 있던 시대의 서사이다. 이 모험 
주체에게는
     공주라는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다. 아테네의 곤경을 해결한 이 영웅에게는
     아비로부터의 인정과 왕권이라는 이름의 보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테세우스의
     아비 에게우스 왕은 아들이 실패한 줄 알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삽화는 왕권승계가 신속히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테세우스의 괴물 죽이기가 지중해 세계의 현실적 세력 관계에 발생한 정치적
     변화를 굴절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크레타의 괴물 황소는
     아테네에 대한 크레타의 지배권을 상징하고, 테세우스가 그 괴물을 죽이는 
것은
     아테네 왕국이 크레타의 멍에로부터 벗어난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테세우스의
     정치적 공로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것은 그가 아테네에 연결된 많은 부족들을
     통합하여 아테네 연방을 형성하고 이 연방이 지중해 동쪽 세계에 강대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게 한 일이다. 후일 테세우스의 두번째 아내가 되는
     파에드라는 아리아드네와 마찬가지로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이다. 테세우스가
     미노스의 딸을 다시 맞아들인 것은 아테네 정치 권력이 크레타와의 새로운 
정략적
     동맹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화는 그 생산의 시간을 지배한 정치적
     동기들과 배경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신화’이다.
     신화의 모든 정치적 모티프들은 서사적 요소들로 대체되고 정치적 갈등은
     비정치화된,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형태로 바뀌어 제시된다. 롤랑
     바르트가 신화를 ‘탈정치화된 언술’이라 규정한 것은 신화의 이런 성격을 잘
     지적한다. 그러나 신화가 탈정치적 언술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탈이데올로기적
     언술’이기도 하다. 신화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의 언어 속에 감추고 환상적
     이야기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반드시 신화서사가 매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환상성과 무의식성은 많은 경우 서사 일반의 비밀이고
     진실이며, 옹졸한 사실주의자만이 그 진실을 모르거나 외면한다. 그러므로
     테세우스 이야기의 정치적 시사를 읽어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괴물
     죽이기’에 보이지 않게 녹아 있는 또다른 어떤 사건에 주목하는 일이다. 
머리는
     황소이고 몸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환상적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그
     환상성의 배후에 모종의 갈등과 모순을 감추고 있다. 그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그
     모순을 제거한다는 이야기이다. 미노타우로스의 신화적 설정에 대한 해부가
     시도되었을 때 이 황당해 뵈는 괴물은 놀랍게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른 
의미를
     띠고 나타난다. 

     ‘괴물’을 구성하는 것은 비동일성의 원칙이다. 미노타우로스는 반은 
황소이고
     반은 인간인 존재, 아주 황소도 아니고 아주 인간도 아닌, 그러므로 어느 
쪽으로도
     동일성을 확립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황소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황소이며, 또 황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그는 정의(定義)되지 않는다.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황소 부분이 배제되고,
     “미노타우로스는 황소이다”라면 인간 부분이 배제된다. ‘황소’와
     ‘인간’이라는 두 성질은 상호배타적일 뿐 아니라 두 자질이 동시에 
진(眞)일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 인간이면서 황소일 수는 없고 
황소이면서
     인간일 수는 없으므로 서로 동시에 진일 수 없는 배타적 조건들을 결합하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는 동일성의 논리로는 정의되지 않는 모순 존재, 곧 
‘괴물’이다.
     A이면서 동시에 B(“그는 인간이고 황소이다”)라는 모순 논리만이 이 괴물을
     기술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호 병립할 수 없는 모순의 신화적 
형상화’가
     괴물(monster)이고 이 괴물을 구성하는 비동일성의 원칙이
     ‘괴물성’(monstrosity)이라는 관찰에 도달한다. 괴물은 정의할 수 없는 
것의 탄생,
     병립할 수 없는 것의 병립, 상호 배타적-모순적인 것의 무차별적 혼합이다.

     이 모순 존재는 위협적이고 파괴적이다. 그것은 질서의 위반, 파괴, 
무화(無化)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차이’들을 소멸시킴으로써 세계를
     질서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며 세계를 불안하게 한다. A이면서 동시에 
B라는
     모순성의 공존은 A와 B를 무차별화하고 고유 자성(identity)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하며 세계에 혼돈을 끌어들인다. 질서는 파괴되고 안정은 깨어진다. 괴물은 그
     존재의 순간에 이미 충돌을 선포한다. 그것은 동일성과 비동일성, 차이와 
무차별,
     질서와 반질서, 비모순의 논리와 모순 논리, 동질성과 비동질성, 연속과
     비연속―이런 반대 세력들 사이의 충돌이다. “A는 A이다”가 비모순의 동일성
     논리라면, “A이면서 B이다”는 비동일성의 모순 논리이고, 두 논리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웅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대면하는 것은 이 
상반된
     원칙들 사이의 갈등 현장에 그가 나타나는 일이며, 그가 괴물을 죽이는 것은
     동일성의 원칙과 비모순의 논리가 그 반대 논리와 원칙들을 제거하는 일이 
된다.
     미노타우로스는 방향도 출구도 없는 ‘미로’ 속에 있다. 미로는 이미 
반이성적
     세계이며, 따라서 괴물의 존재 현장은 그 자체로 무질서, 무방향의 혼돈 
상태이다.
     영웅 테세우스는 그 혼돈을 다스리기 위해 혼돈 속으로 뛰어든다. 여기서
     테세우스의 행위는 다만 억압 제거라는 층위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심장한 
의미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는 정치적 영웅일 뿐 아니라 이성적인 영웅―더 
정확하게는,
     이성적임으로써 정치적인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보면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를 디오니소스가 거두어 아내로 삼는다는 것도 우연한
     에피소드 같지 않다. 디오니소스는 흔히 이성적 질서에 반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읽기는 그리스 신화가 그 이야기의 잡다성에도 불구하고 한 층위에서는 
매우
     은밀한 논리적 체계성을 갖고 있다는 가정을 유혹적인 것이게 한다.)


     2. 플라톤의 제우스 길들이기

     테세우스가 신화 공간에서 괴물을 처리하고 있는 동안,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로
     구성되는 아테네 고전철학의 담론 공간에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플라톤이
     괴물성의 처리에 몰두한다. 물론 그 두 사건은 동시대적이지 않다. 그러나 
테세우스
     서사는 신화 공간에 이성적 세력이 개입하는 한 순간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작업 혹은 고전철학의 이성주의와 어떤 평행세계적 관계를 갖는다.
     이성적 편향으로의 전환이라는 점말고도 테세우스와 플라톤 두 사람은 
‘반(反)
     제우스’적이라는, 크게 내세울 수는 없지만 무시할 필요도 없는 공통성도 
갖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지 못했지만 테세우스가 맞서 싸우는 크레타 왕 미노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다. 플라톤의 제우스 비판은 정확히 말하면 제우스 신의
     부정이기보다는 ‘신화가 그려내고 있는 제우스’에 대한 반대이고 부정이다.
     그의 철학적 작업은, 그가 ‘이야기 지어내는 자들’(fable-makers)이라 부른
     신화작가들의 제우스 ‘재현방식(representation)’을 격파함으로써 
신화로부터
     제우스를 ‘구출’하고 그를 ‘신다운 신’으로 재확립하는 일이다. 그가 
제우스
     구출에 나서는 것은 신화가 제우스를 ‘옳게’ 재현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틀린 재현방식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신으로서의 제우스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신화와 철학의 대립’ 혹은 양자의 ‘오랜 
앙숙’
     관계이다. 그의 제우스 구출 사업은 제우스의 신화적 재현방식에서 그가 
문제삼은
     괴물성을 제거하는 일로 시작된다. 

     제우스는 정의의 신, 징벌의 신, 권위의 신이다. 신화적 상상력이 그려낸 
제우스의
     모습은 근엄하다. 그는 부권(父權)의 신답게 긴 수염을 기르고, 주재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홀(忽)을 들고 있다. 그의 충실한 전령 헤르메스는 빨리 나는 
샌들을 신고
     늘 대기 상태에 있다. 제우스의 명령과 말씀을 온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서다.
     제우스의 어깨에는 언제나 벼락이 준비되어 있다. 지상에서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자, 신들에게 대들거나 스스로를 신과 비교하는 오만한 인간, 질서 파괴자 
등을 그는
     벼락으로 징벌한다. 인간 세상이 도덕을 잃고 난장판이 되었을 때 제우스는 
몸소 그
     세상을 시찰한 다음 홍수를 내려 인간을 벌하고 한 쌍의 남녀(두칼리온과 
피라)만을
     남겨 새로운 종족을 구성하게 한다. (올림포스의 제신들은 인간을 물로 
벌하느냐
     불로 벌하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제우스가 ‘물’로 결정하는데, 까닭은
     지상을 불태울 경우 신들의 엉덩이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그림에 따르면 원래 자웅 양성을 겸비하고 팔 넷, 다리 넷의
     기민한 존재였던 ‘총체 인간’은 제우스의 권능에 도전하다가 그의 도끼에 두
     동강이 나서 지금의 모습으로 쪼개진다. 

     그러나 이 정의의 신 제우스는 신화 텍스트에서 전혀 일관적이지 않다. 
신화에는
     아주 다른 모습의 제우스가 동시에 등장하며 이 제우스는 세계를 다스릴 만한
     정의롭고 근엄한 주재신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 제우스는 바람둥이, 
간통의
     대가, 거짓말쟁이, 변신의 천재, 그리고 변덕꾼이다. 그는 수많은 여신과 
요정들을
     유혹하고 지상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끊임없이 좇아다니며 납치, 겁탈한다. (이
     때문에 그의 아내 헤라는 남편의 외도를 감시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다.) 
변신은
     그가 지상의 여자들을 유혹할 때 곧잘 써먹는 기술이다. 이를테면 그는 백조의
     모습으로 스파르타 왕비 레다를 덮쳐 헬렌을 낳게 하고, 황소의 모습으로
     에우로파에게 접근한 뒤 그녀를 업고 크레타로 달아난다. (크레타 왕 
미노스는 이
     결합의 소산이다.) 제우스가 관계맺은 여자들의 수는 너무 많아 계산할 수 
없다.
     자기만 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모습을 바꾸는 것도 그의 기술이다.
     아름다운 처녀 이오를 유혹하다가 아내에게 들킨 그는 이오를 흰 암소로 얼른
     바꾸어버린다. 그는 거짓말을 잘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가끔 속아넘어간다.
     프로메테우스의 간계에 속아 제물들 중에서 비곗덩어리를 움켜쥔 것은 그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실수이자 스캔들이다. 그는 변덕꾼이기도 하다. 그의
     침상머리에는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행운의 단지와 불운의 단지가 놓여
     있는데, 그는 어떤 때는 행운의 단지에서 아무렇게나 제비를 뽑아 인간들에게
     던져준다. 그가 행운과 불운 어느 쪽 단지에 손을 넣는가는 반드시 일정한 
원칙을
     따른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변덕’이 자주 그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제우스를 그려내는 신화의 이 두가지 재현 양식들 사이에는 일관성, 연속성,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신화작가들에게 분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다. 플라톤적 관점에서 보자면 신화에 묘사된 제우스는 아닌게 아니라
     미노타우로스와도 같은 비동일성의 괴물이다. 정의의 신, 징벌의 신, 심판의 
신은
     동시에 거짓말쟁이, 변덕꾼, 속는 신, 제비 뽑는 신, 간통꾼, 스캔들의 신이 
되어 있다.
     플라톤이 스스로 시급하다고 생각한 작업은 제우스를 이런 식으로 그려낸 것이
     신화의 ‘오류’임을 밝히고 그 오류를 바로잡아 제우스의 ‘본질’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는 이 작업 가운데 신화 비판은 주로 『국가론』에서, 그리고 신을
     확립하는 일(이것이 그의 주사업이다)은 『국가론』을 비롯한 다른 많은
     대화편들에서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 갈 것은, 신화가 보여주는 
제우스의
     상반된 성질들이 신화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제우스의
     진실이자 올림포스 신들의 일반적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우호적인 일이건 인간을 골탕먹이는 일이건 간에 어떤 사건의 규모가
     적어도 주재신 제우스의 개입을 상정해야 할 정도로 웅장하고 난해한 것일 때
     사람들은 “그래, 제우스가 그랬어”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믿은 것이다. 
세계와
     신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 인간적 규모를 넘어서는 사건의 배면에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신들의 의도와 동기가 개입해 있다고 믿어졌던 시대, 그것이
     신화시대이다. (훨씬 후일, 기독교 신약의 사도 바울이 서방전교를 위해
     바르나바스를 데리고 그리스의 한 촌락에 나타났을 때까지도, 검은 수염의
     바르나바스를 본 마을 사람들이 “저건 헤르메스야”라며 경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신화 속의 제우스는 신화작가들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환상적
     제우스가 아니라 헬레네 사람들 모두가 머리에 담고 다닌 민중적 제우스이다. 

     사실로부터 우리는 신화의 제우스를 바로잡으려는 플라톤의 작업 자체가 
당대의
     지식과 믿음으로부터 매우 과격한 단절을 시도하는 혁명적인 지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확인해두어야 한다. 플라톤이 전개한 신화 비판(이것이 서양에서의 
체계적
     문학비평의 효시이다)은 그러므로 단순한 신화 비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인식론을 뒤집어엎고 그 자신의 시대까지 사람들이 믿어온 
제우스(신)를
     두들겨 바로 펴려는 작업―곧 플라톤에 의한 ‘제우스 길들이기’이다. 

     플라톤의 신화 비판은 깐깐하고 강력하다. 그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대목들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제우스의 ‘변신’에 관계되는 질문, 곧 “신이 모습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그의 논의가 중요하다. 요약했을 때 그의 논의는 간결한 
것일 수
     있다. “신은 완전성이며, 완전성이 모양을 바꾸어 지상의 존재물로 
변신한다는
     것은 완전성의 훼손, 곧 불완전성으로의 이동이다. 신은 완전성이므로 
불완전해질
     수 없고 완전성의 훼손을 용납하지 않는다. 불완전해질 수 있다면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우스가 모습을 바꾼다는 것은 이야기꾼들의 엄밀하지 못한
     상상이며 그 상상의 소산에 불과하다. 신화는 제우스를 잘못 재현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 논리는 신화에 대한 그의 여러 항목에 걸친 비판들을 이해하는 
데로
     쉽게 연장될 수 있다. 예컨대 ‘속는 신’은 가능한가? 거짓말쟁이 신, 
바람둥이
     신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결함(지적, 도덕적)은 완전성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의 신이 동시에 불의의 신일 수 있는가? 정의는 불의를 
포함하지
     않으므로 정의와 불의가 동시에 신의 성질일 수 없다. 변덕의 신은 가능한가?
     변덕은 일관성 결여, 곧 불변성의 결여이다. 그러나 신은 불변성이지 불변성의
     결여가 아니므로 그가 변신을 허용치 않듯 자신의 변화(변덕)와 비일관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변화는 우연의 영역이며 신은 이 우연이라는 이름의 
스캔들에
     영향받지 않고 그 스캔들의 세계로 내려서지 않는다.

     우연성의 제거와 통제라는 문제는 플라톤의 철학 기획에서 핵심적(이 점에 
관한 한,
     『시학』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인 것이다. 그가 제우스를 ‘제비 
뽑는
     신’으로 둘 수 없는 까닭은 제비뽑기라는 우연성의 게임이 제우스의 행동을
     지배할 경우 그 제우스는 이미 항구하고 불변하는 정의의 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거나 심판자의 변덕 또는 통치자의 권력에
     좌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공간적 제약, 한계, 조건에 종속되지 않는 
보편적
     정의만이 정의이며, 신은 그런 정의이다. 만약 정의가 우연에 종속된다면, 
오늘
     정의인 것이 내일은 정의가 아닐 수 있다. 이것은 혼란이고 혼돈이며 이 혼돈 
속에는
     어떤 질서도 안정 원칙도 불변 실재(Reality)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불변
     실재는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실재를 ‘알 수’ 있다. 신화가 제우스를 변신과 
변덕의
     신으로 제시하는 것은 신의 모든 본질에 위배되고 신의 실재를 정확하고 옳게
     재현하지 못하며, 따라서 신화작가들의 제우스 재현 방식은 오류이고 그 
모방적
     재현은 허위이다. 신화적 세계 인식의 방법은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허위-허상을 실재로 오인하는 착각의 절차이다.

     이런 비판의 끝에, 플라톤의 손에서는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제우스가 
탄생한다. 그
     제우스는 모순적 괴물성이 세탁되고 불순한 혼합성이 제거된 순수한 본질의 
신,
     이성의 신이다. 이 깨끗해진 제우스는 물론 그리스의 제우스, 호메로스의 
제우스가
     아니다. 그는 플라톤의 제우스이다. 이 제우스는 더이상 바람둥이, 
거짓말쟁이,
     변덕꾼, 속는 신일 수 없다. 그는 더이상 변신을 시도할 수도 없고 여자들을
     좇아다닐 수도 없다. 이 제우스는 “성적 교합이 주는 희열은 남자 쪽이 더 
큰가,
     여자 쪽이 더 큰가”라는 문제를 놓고 아내 헤라와 한가하게 패설성 실랑이를 
벌일
     수 있는 제우스(오비디우스, 『변신』)가 아니다. 그 제우스는 플라톤의 
손에서
     완전히 거세되었다고 해야 옳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듯 플라톤은
     제우스를 죽이고 새로운 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마침내 알게 
되듯이,
     이후 서양세계가 겪는 일련의 주요 정치적 변화들을 거치며 지배적인 지적
     담론으로 올라서는 것은 바로 그 플라톤의 신이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의 신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신으로 바뀌고 길들여진 신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바뀌고
     길들여진 신이 사실은 이전의 제우스보다도 더 엄격한 가부장의 신, 권력 
지향의
     신이라는 점이다. 신은 더 강해지기 위해 훈육된 것이다. 


     3. 에르(Er)의 신화―하늘을 보고 오는 혼

     『국가론』을 끝내면서 플라톤은 그 권말에 ‘에르의 신화’라는 특별한 
이야기
     하나를 덧붙여놓는다. 이야기의 주인공 에르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사람이다.
     플라톤이 장엄한 이상국가론의 끝에다 이 에르 이야기를 첨가한 것은 에르가 
죽어
     ‘어디로’ 가고 ‘어떤 세계’를 보고 왔는가를 에르 자신의 입으로 기술하게
     함으로써 이상국가의 존재론적 기초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에르가 죽어서 간
     곳은 하데스나 타르타로스 같은 지하세계가 아니라 ‘하늘나라’(플라톤의 
체계
     용어로는 이데아계)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대목은 “사람이 죽으면 땅으로
     간다”라는 신화 세계의 지형도를 뒤집어엎고 그 반대 토폴로지(topology), 곧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간다”를 내세우려는 플라톤의 각별한 의도를 
담고
     있다. 플라톤은 시지푸스, 오르페우스, 오디세우스, 테세우스 같은 영웅들이 
모두
     ‘지하세계’를 보고 온 이야기를 풀고 있는 신화전통에 정면으로 맞서서
     ‘하늘’을 보고 온 인간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그는 신화가 들려주는 
‘하데스
     방문기’의 전통을 중단시키고 대신 인간의 새로운(그의 관점에서는 
‘진정한’)
     기원과 고향으로서의 ‘하늘 방문기’를 내놓고자 한다. 이 점에서 에르 
이야기는,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서사문학에서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하늘 서사’의 
시초이며, 서구
     서사가 땅의 서사에서 하늘의 서사로 전환하는, 또는 그 전환을 예비하는, 한 
중요한
     순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파에드로스」, 「파이돈」 같은
     대화편에서 인간 혼의 기원과 역사(지상으로의 혼의 추락, 육체 뒤집어쓰기, 
윤회),
     그리고 혼이 돌아갈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체계 안에서는 에르 이야기가 반드시 최초의 하늘 서사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늘에 갔다온 ‘주인공’ 인물과 그 ‘증언’이 등장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처음이다.〕 에르 이야기의 동기와 중요성은 이처럼 신화전통과 아카데미아
     철학의 대립이라는 역사적 갈등 문맥이 참조되었을 때에만 선명하게 드러난다.

     플라톤이 인간 혼을 왜 하늘로 보내고 있는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장황하게 
얘기할
     필요도, 그럴 틈도 없다. 그의 영/육 이분론, 혹은 혼과 육체의 분리론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진부한 정보이다.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 플라톤적 
이분법의
     등장 문맥, 다시 말해 그 이분법이 그리스 신화라는 강대한 서사전통을 상대로
     전개한 흥미로운 역사적 갈등의 드라마이다. 그가 확립하고자 한 것은 그의
     시대까지 그리스를 지배한 신화적 상상력, 인식방법, 사유형식과는 전혀 
다르고
     낯선 새로운 패러다임―곧 인간과 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이다. 그가 
인간
     혼을 하늘로 보낸 이유는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완전히
     소멸하거나 기억 없는 혼령의 모습으로 하데스에 유폐되는 존재가 아니라
     ‘불멸성’을 가진 존재이며 육체는 스러져 소멸해도 이 불멸의 요소는 
소멸하지
     않는다. 혼은 그 불멸성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 몸뚱이는 땅으로 가지만 
혼은
     하늘로 간다. 그 하늘은 불멸의 이데아 세계이며, 혼의 기원지이자 최종 
귀속지, 곧
     혼의 고향이다. 혼의 고향이 존재의 본향(本鄕)이다. 기원과 귀속지는 
동일하다.
     육체는 죽어 그 기원인 가변성의 땅으로 돌아가고, 죽지 않는 혼은 그 기원인 
존재의
     본향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현상계의 시간 속에 혼을 가두는 ‘망각의 
자루’이다.
     육체가 스러지는 순간 혼은 그 자루를 벗어나 그가 기억하고 있던 그의 영원한
     본집으로 ‘귀향’한다. 귀향은 “이쪽 세계로부터 저쪽 세계로의 혼의
     비상”(『테아이테투스』)이다. 이 혼이 인간의 본질이며, 그것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부단한 귀향운동(‘실재에 대한 기억과 관조’)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적 실천(praxis)이다. 이 실천의 정도가 인간들 사이의 
차이와
     ‘등급’을 결정한다―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가 
제우스를
     두들겨 팬 작업과 마찬가지로 우연성의 경험적 가변세계가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변성의 이성적 세계(실재)를 보임으로써 불안한 인간계를 안정된 
존재의
     문법으로 단단히 비끄러매고 그 세계를 튼튼한 기초(Grund) 위에 
정초시키고자 한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인간 설명은 인간을 안심시키기임과 동시에 ‘인간
     길들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 길들이기의 경우, 그 동기는 제우스 길들이기와 동일한 반면 그 
절차는
     제우스 세탁 방식과는 좀 다른 복잡성의 국면을 갖고 있다. 제우스 세탁에서
     플라톤이 매달린 문제는 가변적 현상계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완벽하고 완전한
     독립 실재의 입증이다. 그러므로 제우스를 재확립하는 데는 신화가 그에게
     입혀놓은 가변성의 누더기들을 벗겨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생로병사의 모든 가변성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불멸성을 지닌 존재이다. 여기서 일이 다소 복잡해진다. 혼과 육체의 
명확한
     분리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혼과 육체가 애당초 무슨 
이유로
     결합해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인간이 혼과 육체라는, 그 성질과 속성들이 서로
     판이하게 다른 두 구성소의 결합체라는 설명은 “그럼 그 둘이 왜 
붙었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여기서 플라톤의 인간 설명은 불가피하게 인간 
생성의
     비밀에 관한 해명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생성의 비밀은, 질문 
형태로
     바꾸면, “불멸성(혼)이 어떻게 가멸성(육체)과 섞이고 결합하는가”라는 
것이다.
     이 비밀(이것은 서양 예술사상이 2천 년 넘게 매달린 화두이기도 하다)이 
해명되지
     않으면 경험적, 감각적 현상계에 왜 인간 존재 같은 창조와 생성이 있게 
되는가가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티마에우스』에서 플라톤이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는 이 창조와 
생성의
     비밀 속으로 지금 당장 뛰어들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별개의 화두를 
구성하며
     그의 욕망론, 모방론, 영감이론들과의 연결관계 속에서 얘기되어야 하는 광역
     문맥을 갖고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전개될 우리의 읽어내기가 ‘철학적’
     작업이라 생각하는 독자는 이 글을 잘못 읽고 있다. 플라톤은 ‘철학’으로 
신화를
     대체하고 ‘로고스(이성)’로 ‘뮈토스(mythos, 이야기)’를 장악하려 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의 텍스트가 가진 근본적인 서사적 성격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는 것은 플라톤 철학이 아니라 그의 서사(narrative), 그가 지어낸 뮈토스, 
그의
     신화이다. 인간 혼에 관한 그의 모든 이론화는 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고,
     오디세우스 이야기처럼, 혼의 ‘귀향서사’이다.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며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그가 한편으로는 매도해마지 않았던 ‘은유’의 비밀을 
알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의 철학 담론은 서사적 은유에 기초하고 그 위에서 
작동한다.
     『티마에우스』에서 플라톤이 풀고 있는 것도 자그마치 세계가 있게 된 
내력―곧
     ‘창조신화’이다. 이 신화는 여러 다른 신화 체계들에 등장하는 
창조신화들과의
     대비라는 작업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스 전통 신화들과의 관계 양상(이 양상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플라톤 철학과 신화적 상상력 사이의 교섭과 
협상관계―다시
     말해 그의 탈시간적 존재론이 어떻게 시간에 매이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을 볼 수 있게 한다. 또 집단적 신화 아닌, 플라톤이라는 한 개인이 
지어낸
     신화가 어떻게 그토록 강대한 힘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도 
흥미를
     자극한다. 특히 이 대목은 플라톤 서사의 지배적 구조와 서양세계의 권력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모종의 친화관계에 주목하게 한다.

     플라톤은 그가 그린 이상국가의 꿈을 실현해보려는 실험까지도 해본 
사람이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의 사후 제자 두 사람이 어떤 도시국가의 권력 
정상에
     오르지만 이들은, 플라톤이 그토록 강조해마지 않은 ‘순수성’의 열정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부패’ 혐의를 쓰고 쫓겨난다.) 그러나 이런 당대적 실패 
때문에 그의
     서사가 지닌 강력한 권력의지가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 자신의 
당대
     문맥에서만 보더라도 그의 담론은 아테네 궤변가들과의 정면 대결을 통해 
“어느
     쪽이 진리를 말하는가”의 경쟁에 돌입하고, 신화전통과의 대결에서는 
현실적으로
     “아테네 젊은이들의 교육권을 누가 쥐어야 하는가”라는 콘테스트에 
뛰어든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 교육권은 말할 것도 없이 ‘진리를 말하는 
자’(철학자)가
     잡아야 한다. 결정적으로, 권력은 누가 쥐어야 하는가? 권력의 기초는 마땅히
     진리여야 하며, 국가는 불변성의 진리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져야 하고 따라서
     권력은 진리를 아는 자의 것이어야 한다. (국가의 구성 원칙과 세계 창조의 
원칙은
     동일하다.) 이것이 권력, 진리, 지식(진리 알기)의 3각 동맹이라는 서양적 
권력구조의
     탄생 모멘트이다. 이 권력 구조의 탄생 순간이 사실상 플라톤의 담론이고 
그것의
     절정이 서양의 근대이다. 『국가론』이 서양 문명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입문서가
     되는 이유는 거기 있다. 

     서양적 권력 담론을 해부하려는 것이 우리의 이해관계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하게 신화를 읽을 따름이다. 그 읽기에서 우리가 불가피하게 만나는 것은
     ‘욕망’의 문제이다. 신화는 이 욕망이라는 것이 어떻게 세계를 만들고 세계 
속에
     다양한 몸들을 탄생시키며 또 그 몸들을 이리저리 바꾸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곧 욕망과 변신의 이야기이다. 신화서사는 욕망과 변신의 이야기이고
     문학은 궁극적으로 이 환상적 변신 서사의 전통 속에 있다. 이것이 창조신화를
     다루는 다음 차례 이 글의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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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