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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3일 일요일 오후 02시 06분 03초
제 목(Title): 도정일/혼돈의 상상력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토종이) on 'History'
Title:     혼돈의 상상력/도정일 
Date:      Thu Aug 20 11:58:56 1998 GMT

혼돈의 상상력 

                               - 그리스 창조신화의 내적 논리들 


                                            도정일   





                                     1. 오비디우스의 왜곡



     신화를 ‘변신의 이야기’로 파악한 것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이다. 
변신(變身)의
     가장 치열한 형식은 가시적 형태 변화―어떤 형체가 다른 형체로 변하는 몸 
바꾸기
     또는 몸 바뀌기이다. 오비디우스가 자신의 운문 신화집에
     ‘변신(Metamorphoses)’이라는 제목을 단 것은 그의 관심이 ‘몸 바뀐 것들의
     이야기’를 푸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신화집은 변신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아폴론의 겁탈을 피해 달아나던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한
     이야기, 여신 아르테미스(다이애나)의 알몸을 훔쳐본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바뀌어
     사냥개 밥이 되는 이야기, 걸신들린 에리직톤이 먹고 먹고 한없이 먹다가 
먹을 것이
     없자 마침내, 자본주의처럼, 제 몸을 뜯어먹어 자기를 없애는 이야기―이런 
것들이
     오비디우스의 소재이다. (신화를 변신의 이야기로 본 이 오비디우스적 
접근법의
     중요성은 그것이 세계와 인간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변화의 서사’로
     파악하는 데 있다. 변신과 변화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문학은 무엇인가?)
     오비디우스에게 신화는 “세계의 시초에서부터 지금 이날까지” 몸 바뀐 
것들의
     이야기, 곧 변화의 서사이다. 그 변화를 노래하기 위해 그는 
헤시오도스에서부터
     시작된 ‘뮤즈 불러내기’(인보케이션)의 전통을 따라 “변화를 있게 한 
신들이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초혼사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세계의 시초? 누가 세계의 시초를 보았길래 그 시초를 이야기하는가? 신화가
     아니라면 인간은 세계의 모든 아침을 있게 한 최초의 아침을, 세계의 모든 
어둠을
     있게 한 최초의 어둠을, 말할 수 없다. 신화는 태초와 기원과 시작에 대한
     상상력이며 ‘최초’에 대한 증언을 공급하는 서사이다. 세계의 주요
     신화체계들이 세계의 최초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최초가 모든 변화의 시초이기
     때문이며, 이 시초에 대한 기술(코스모고니) 없이는 인간이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전모가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화작가는 무엇보다도 
태초의
     목격자여야 하고 최초의 아침에 대한 증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되려는
     자는, 그러므로, 태초에 대한 상상력 훈련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신화작가가, 또는 시인이, 태초의 일들을 마치 제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한 
언어로
     서술하고 묘사해주지 않는다면 인간 세계는 어디에서도 그 최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고 이 결핍은 하루 열 끼를 먹어도 메울 길 없는 공복, 허기, 
궁핍이다.
     신화작가는 과거를 보존하고 있는 기억의 여신을 통해 먼 과거의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 다시 창조에 참여한다. 『변신』의 첫 대목에서 오비디우스가 신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들려주는 태초 이야기는 일단은 그리스 신화 전통에 
따른
     창조서사이다. 유태 신화와는 달리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라 말하지 않고
     “태초에 혼돈(카오스)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것이 그리스 신화의 
창조서사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혼돈은 어디서 왔는가”라거나 “혼돈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그리스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말고도 이집트, 
인도,
     중국 등 세계의 주요 신화체계에서 우주의 기원 지점에 혼돈이 설정(현대
     천체물리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르네
     지라르는 혼돈이 신화의 기원이라는 관찰을 내고 있다. 서사적 상상력이 
세계에
     대한 인간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할 때, 그 사유와 상상력의 가장 먼 확장 
지점에
     혼돈이 설정되고 그 혼돈의 상상력들 사이에 유사성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진지한 화두이다. 문학의 경우 혼돈에 대한 상상력은 왜 중요한가? 
혼돈이
     뭐길래? 혼돈은 신화의 기원일 뿐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의 작동 기초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는 이 질문을 다루지 말기로 하자. 우리의 당면 관심은 혼돈에 
대한
     오비디우스의 묘사이다. 

     혼돈을 묘사할 수 있을까? 개념적 언어를 동원할 때 혼돈은 대체로 분화와 
차별의
     없음, 곧 ‘차이의 부재 또는 무화(無化)’이며 차이가 없으므로 형태, 질서, 
구분이
     불가능한 무정형, 무질서, 무구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마치 괴물처럼,
     정의(定義)의 방식에 의한 개념화가 불가능한 것이 혼돈이다. 시인의 작업은 

     무정형의 혼돈에 대한 개념화가 아니라 구체적 이미지의 제시이다. 
오비디우스가
     시도하는 것도 그런 생생한 구체적 묘사이다. 혼돈 속에서는 “바다와 땅과 
하늘은
     아직 나뉘지 않”았으므로 거기에는 “우주를 비출 태양도, 은색의 
초승눈썹으로
     서서히 제 몸을 키워가는 달”도 없고 “사람이 설 땅, 헤엄칠 물, 숨쉴 
공기도
     없다”. 오비디우스가 그려 보이는 혼돈은 이처럼 무정형­무질서의 것임과
     동시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반대 성질의 것들이 ‘한 몸뚱어리 안에 뒤섞여 
싸우는
     어지러운 혼란’이기도 하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축축한 것과 마른 것,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 무게를 가진 것들과 무게 없는 것들이” 한데 
뒤섞여 서로
     쟁투한다. 이것은 대립물(opposites)들의 ‘미분화적 혼재와 투쟁’으로서의 
혼돈
     이미지이다. 무정형, 무질서, 대립물의 혼재와 쟁투―이것이 시인 
오비디우스가 본
     혼돈의 모습이다. 

     이 대목까지 오비디우스에 의한 혼돈 묘사는 대체로 그리스 신화의 상상력이
     포착한 혼돈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그가 혼돈을 『변신』의 첫번째 
에피소드로
     올려놓은 것은 어지러운 혼돈의 ‘몸뚱어리’가 질서 있고 정돈된 세계로 바뀐
     것이 모든 변신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몸을 바꾼 것, 
그것이
     ‘혼돈의 변신’이다. 그것은 모든 변화를 선행하는 최초의 변화, 다른 모든 
변신을
     있게 한 최초의 변신이다. 그러므로 오비디우스의 변신서사가 혼돈의
     변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혼돈에 질서를 도입하여 
변신을
     일으키게 한 자는 누구인가? 오비디우스 서사가 그리스의 창세서사와 갈라지는
     것은 이 대목에서부터이다. 기묘하게도 (왜 기묘한가는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자)
     오비디우스가 제시하는 질서 도입자는 그가 (특별히 무어라 이름 붙이지는 
않지만)
     신, 조물주, 창조자 등으로 표현하는 어떤 존재이다. 그가 시집 앞머리 
초혼사에서
     “변화를 있게 한 신들이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한 것에 비추어보면, 
혼돈의
     몸을 바꾸게 한 힘으로 ‘신’을 등장시킨 것은 알레고리의 층위에서 일단
     일관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가 ‘조물주 신’을 창조자로 상정하는 것은 
그리스의
     상상력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며 이 왜곡은 신화의 이해방식을 결정적으로
     오도한다. 

     오비디우스의 기술에 따르면, 우주에 질서를 가져오고 그 우주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시초에 땅을 빚어낸” 것은 ‘신’이다. 이 창조의 주인은 혼돈의
     몸뚱어리 속에 들끓고 있는 분쟁들에 종지부를 찍고 “하늘과 땅, 물과 흙”을
     갈라놓는다. 땅은 “하늘의 오래된 불로부터 갈라져 나오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오비디우스는 노래한다.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모든 짐승들은 땅을 향해 고개를 떨구지만, 오로지
     인간만은/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네”라는 것도 『변신』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끝구절이다. 『변신』의 이런 구절은 후일 많은 작가 시인들이 즐겨
     인용하거나 변용시켜 사용한 시적 절창의 하나이다. (예컨대 아나톨 프랑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말하면서 “베르제르 선생의 강아지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 일이 없다”고 쓰고 있다.) 오비디우스가 막연하게
     태초의 에로스를 ‘신’으로 지칭한 것이라는 관점은 성립하지만, 그 에로스는
     오비디우스가 그린 ‘신’과는 다른 존재이다. 그리스적 코스모고니에 따르면
     태초의 에로스는 혼돈으로부터 나온 존재이다. 이 태초의 에로스를 변신의
     동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에로스는 혼돈의 바깥에서 혼돈에 
작용한
     별개의 창조력이 아니라 내적 갱신의 힘이다. 

     우주 창조에 관한 그리스적 코스모고니를 제시하는 일보다는 후대 시인의
     입장에서 변화의 내러티브(서사)를 풀려는 것이 오비디우스의 관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게 그리스적 상상력에의 과도한 충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더구나 오비디우스는 체계적 사유보다는 감성적 표현 층위에서 
탁월성을
     발휘한 시인이다. 문제는 오비디우스의 혼돈 묘사와 질서 생성의 과정 기술이
     혼돈과 창조에 대한 그리스 신화의 상상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왜곡하거나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왜곡과 간과는, 비록 『변신』을 
창조의
     코스모고니로 읽을 필요가 없다 할지라도, 혼돈에 대한 그리스적 상상력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경박성이라 부를 만한 결점이다. 그러므로
     오비디우스에 의한 신화의 왜곡에 일단 주목하는 것은 그의 시적 성취를 
폄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신화적 상상력의 감춰진 내적 논리에 다가서는 일이 된다. 이
     부분은 그리스 신화서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서 일실되고 없는 것들의
     중요성과 함의에 주목하는 일이기도 하다. 



                               2. 하늘을 낳는 땅―반역을 향하여



     천지 창조에 대한 그리스 신화의 상상력은 여러 지점에서 중요한 특징들을 
갖고
     있다. 우선 ‘창조(creation)’의 개념 자체가 그러하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가 만들어졌다”라는 것은 그리스적 창조 개념이 아니다. 
“무(無)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는다(ex nihilo nihil)”는 것이 그리스적
     사유이며, 따라서 창조는 무로부터의 유(有)의 생성이 아니라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의 만들어짐이다. 그리스 신화가 태초에 혼돈을 설정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경우 혼돈은 ‘무’가 아니고 ‘공(void)’도 아니다. 
(혼돈이 ‘입
     벌린 공’으로 표현되는 대목들이 있지만 이 공은 무가 아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의 헬레네적 의미는 “창조 이전에 이미 혼돈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혼돈 이후의 사건이지 혼돈 그 자체의 창조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창조 개념은 유태 신화적 창조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둘째, 그리스 신화는 ‘외부로부터’ 혼돈에 개입하여 질서를 만들어내는 
우주의
     장인(조물주)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서를 있게 한 자는 누구인가? 
적어도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Theogony』에 기술된 창조의 과정들을 그리스적 
상상력의
     본류로 잡을 때, 최초의 질서잡기가 발생한 것은 “혼돈으로부터 가이아(Gaea,
     대지)가 나온” 사건, 곧 땅의 출현이다. 그런데 이 새로 만들어진 
땅(가이아)은
     카오스 그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지 어떤 외부 창조자가 카오스를 주물러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카오스는 가이아의 어머니이다. 아니, ‘어머니’라는 것이 
어떤 남성
     원칙을 상정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표현은 이 경우 적절하지 않다. 모종의 
남성
     원칙이 카오스를 찔러 가이아를 낳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이아의 
출생은
     말하자면 카오스에 의한 ‘무성생식’이며, 따라서 혼돈은 대지의 아비임과
     동시에 어미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용어로 풀면 카오스는 
‘양성성(兩性性)’의
     패러다임이다. 오비디우스에 의한 중대한 왜곡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우선 이
     지점이다. 그는 ‘조물주 신’이 “혼돈으로부터 우주에 질서를 만들어
     넣고/혼돈을 나누고 그 나눈 것을 또 나누어…… 시초에 땅을 빚어내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무질서로부터 어떻게 질서가 나오는가라는 것은 명백한 개념적 어려움과 
모순을
     제기하는 문제이다. 차이와 차별 부재로서의 혼돈은 일종의 ‘엔트로피’
     상태이며, 이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엔트로피적 균등 상태에서는 아무 
일(사건,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신화는 무엇보다도 서사적 상상력이며, 이 
상상력의
     작동 논리는 철학의 그것과는 다르다. 신화와 철학은 같은 문제나 사건을 다룰
     때에도 서로 다른 논리를 따른다. 신화의 논리는 “일이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되었다”라는 사건 발생의 계기적 논리이다. 대지 출현의 경우에도, “처음에
     카오스가 있었고 다음에 가이아가 있었다”고 말하는 일로 소임을 다하는 것이
     신화이다. 그러나 신화적 상상력이 그 자체의 내적 조직 논리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조직 논리는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의 배면에 숨겨져 있다. 
그리스적
     창조서사에서 발견되는 이런 흥미로운 내적 논리의 하나는 “어떤 것은 그것과
     같은 것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의 것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사물과 반대물의 생산이라는 논리이다. 혼돈으로부터 땅이 산출되는 것은
     반대물의 생산에 해당한다. 대지는 딱딱한 땅의 형체 생성이라는 점에서 형태 
없는
     혼돈의 반대물이다. 무형태(카오스)로부터 그 반대물인 형태(땅)가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먼저 카오스가 있었고 거기서 가이아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반대물의
     생산이라는 논리로 조직된다.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왜
     나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화가 들려줄 수 있는 것은 “반대물을
     생산하니까”라는, 합리적 인과성이나 목적론적 논리로 따지면 바보의 언어 
같아
     보이는, 우둔한 답변뿐이다. 신화서사는 이 우둔성에 의해 그것의 의미를
     증폭시킨다. 

     흥미롭게도, 반대물의 생성이라는 이 서사 조직 원리는 매우 일관성 있게, 
적어도
     제1세대 신들이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는 시대까지의 그리스 신화를 
숨은
     차원에서 지배하고 있다. 오비디우스가 기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물주 
신이
     하늘과 땅을 분리하고 땅이 하늘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 곧 
“땅이
     하늘을 낳았다”라는 것이 그리스 신화가 들려주는 ‘하늘 탄생’의 서사이다.
     하늘(우라노스)은 땅(가이아)의 아들이다. 이 절묘한 서사의 배후에는 두 가지
     의미에서 반대물의 생성이라는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하늘은 땅과 대극 
관계에
     있다는 의미에서 땅의 반대물 혹은 대립물이고, 가이아가 여성 원칙일 때
     우라노스(하늘)는 남성 원칙(가이아는 그 아들인 우라노스와 결합한다)이라는
     점에서 역시 상반적 관계에 있다. 그러니까 “땅이 하늘을 낳았다”라는 
서사는
     신화적 상상력의 조직 원리상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땅으로부터 그 
반대의 것이
     나온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신화의 이 중요한 조직 원리를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낮’(헤메라)의 탄생서사도 반대물과 유사물의 생산이라는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창조서사에서는 낮이 먼저 있고 다음에 밤이 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
     관계, 곧 밤으로부터 낮이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밤은 그 반대물인 낮을 
낳는다.
     “밤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낮이 있었다”가 그리스적 창세의 순서이다. 
밤은
     어디서 왔는가? 『신통기』에 따르면 밤은 혼돈의 딸이다. 카오스는 땅을 
낳을 뿐
     아니라 ‘어둠’(에레부스)과 ‘밤’(닉스)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어둠과 
밤은
     혼돈의 유사물이며, 따라서 이 경우에는 ‘유사물의 생산’이라는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말하자면 혼돈이 가이아를 낳은 것은 ‘반대물의 생산’이고,
     어둠과 밤을 낳은 것은 ‘유사물의 생산’에 해당한다. 또 혼돈의 소생인 
어둠과
     밤이 결합하고, 이 결합으로부터는 어둠의 반대물이자 밤의 반대물인
     ‘빛’(아이테르)과 ‘낮’(헤메라)이 탄생한다. 어둠과 밤이라는 두 유사물의
     결합으로부터 그 반대물들인 빛과 낮이 탄생한 것이다. 신화의 이 구조 
논리에서
     보면 어둠과 밤의 관계(유사성)는 그 다음 세대인 빛과 낮의 관계(유사성)와 
같고,
     어둠/밤, 빛/낮의 두 쌍은 서로 반대쌍의 관계에 있다. 또 카오스가 땅, 
어둠, 밤을
     낳고 땅이 하늘을 낳는 태초의 사건 단계까지는 무성생식의 원칙이 적용되고, 

     다음부터는 양성 결합의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땅이 그 아들인 하늘과 
결합하고
     어둠과 밤이 결합하는 창세 단계에서부터는 양성 결합이 (약간의 설명 가능한
     예외와 함께) 생산의 원칙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리스 창조­창세 신화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서사 조직의 논리는 억압, 
반역,
     거세(去勢)의 반복 원칙이다. 아들­딸의 세대가 아비­어미의 세대와 
충돌하고
     반역을 일으켜 선행 세대를 거세한다는 것이 그 원칙이다. 예컨대 
낮(헤메라)과
     빛(아이테르)은 밤(닉스)과 어둠(에레부스)에 반역하고 이들을 거세, 
추방한다.
     어둠을 몰아내지 않으면 빛이 들어설 수 없고 밤을 몰아내지 않으면 낮이 올 

     없다. 거세와 추방은 후속 세대가 태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의 
확보이고
     기회의 쟁취이다. 그것은 열어제끼기(opening)임과 동시에 장애물의 제거이며 
공터
     만들기(clearing)이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숲을 쳐내어 빈터를 내야 하듯, 
어둠과 밤을
     쳐 빈 자리를 쟁취하지 않고서는 빛과 낮이 태어나 활동할 공간은 없다. 이 
논리에서
     보면 밤이 그 상반물인 낮을 낳는다는 신화적 사건 플롯은 오히려 아주 정연한
     질서를 갖고 있다. 그 질서가 창세의 질서이다. 신화는 명징한 개념적 언어로 

     질서를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밤이 낮을 낳았다”라는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창세의 순서와 질서를 감추면서 암시한다. 신화의
     사건질서는 창세질서의 알레고리이다. 

     “땅이 하늘을 낳고 그 다음에……”로 이어지는 가이아 서사의 경우에도 
충돌,
     반역, 거세의 모티프는 어김없이 적용된다. 땅과 하늘의 결합으로부터 
거인신들인
     타이탄들이 출생한다. 거인신들은 양성 원칙의 결합에서 태어난 제1세대 
신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아비인 하늘(우라노스)은 아들 세대가 언젠가 반란을 일으킬 
것임을
     알고 아이들을 아내 가이아의 뱃속에 감금한다. 어미의 몸 밖으로 나올 수 
없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또 아내의 몸 구석구석을 뒤덮고 온종일 그 위에 엎어져 단 
한순간도
     아내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들 크로노스의 반역이 시작되는 것은 이 
대목에서이다.
     아이들의 감금에 불만을 품은 가이아가 막내아들 크로노스와 작당하여 
우라노스를
     거세하게 하는 것이 크로노스의 반역이다. 이 반역은 문자 그대로 ‘아비
     거세’이다. 크로노스는 큰 낫으로 아비의 성기를 잘라내어 바다로 내던지고,
     거세당한 우라노스는 아내 가이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것이 ‘땅과 
하늘의
     분리’이다. 이 분리는 감금되었던 후속 세대의 해방이고 새로운 가능성의
     열림이며 빈터 만들기이다. 우라노스가 계속 가이아의 몸을 뒤덮고 있다면 
그의
     아이들인 타이탄들로서는 천지간에 운신할 틈이 없다. 억압에 대한 신세대의
     반역은 불가피하다. (참고로, 하늘과 땅은 원래 맞붙어 있어 사람이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도 없고 농사 지으러 나다닐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꾀를 
내어 땅과
     하늘을 떼놓았다는 이야기들이 세계 여기저기 신화들에서 발견된다. 이런
     이야기들은 가이아 서사와의 흥미로운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헬레네 신화에서와
     같은 연속적 체계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억압과 충돌, 모반과 반역, 거세와 축출의 패턴은 크로노스의 다음 세대인 
제우스
     대에서도 반복된다. 아비 우라노스로부터 통치권을 찬탈한 크로노스는 누이인
     레아와 결합하여 제2세대 신들을 낳는데, 스스로 아비를 거세한 
크로노스로서는
     자기 역시 아들 세대의 손에 축출될지 모른다는 거세 공포에 시달린다. 
더구나 아비
     우라노스가 쫓겨가면서 “너도 같은 꼴을 당할 것”이라 경고한 것은
     크로노스에게 항구한 불안의 연원이다. 그 반복의 예언을 좌절시키기 위해
     크로노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강구하는데, 그 방법은 태어나는 아이들을 
자신이
     직접 집어삼켜 자기 뱃속에 감금한다는 것이다. 반역의 반복을 막기 위해 그는
     억압을 반복하고 이 반복은, 잘 알려진 이야기대로, 결국 그의 거세를 
반복시킨다. 

     불만과 모반 : 우라노스­가이아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불만은 여자 쪽에서
     터져나온다.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는 막내아들 제우스가 태어났을 때 남편이
     삼키지 못하게 아이를 딴 곳으로 빼돌리고, 대신 남편에게는 강보에 싼 
돌덩이를
     건네준다. 계략에 넘어간 크로노스는 돌덩이를 아이로 알고 집어삼킨다. 
감금을
     면한 제우스는 크레테의 한 동굴에서 염소젖을 먹고 자란다. 때가 되자 
레아는 아들
     제우스를 부추켜 아비 축출을 모의한다. 그녀는 남편을 속여 보약을 
먹이는데, 사실
     그 약은 먹은 것을 토하게 하는 토악질 촉진제이다. 

     반역과 거세 : 약 먹은 크로노스는 뱃속에 감금했던 아이들을 몽땅 
토해놓는다.
     제우스는 그렇게 풀려난 형제들과 힘을 합쳐 아비 크로노스의 타이탄 
거인신들과
     맞선다. 십 년간 온 우주를 뒤흔든 이 ‘신들의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는 
자는
     제우스이다. 그는 아비를 내쫓고 타이탄들을 타르타루스에 감금함으로써 
세계를
     평정한다. 이 평정도 ‘열어제낌’이다. (크게 내세울 만한 읽기는 못 되지만,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추방한 것이 ‘공간의 횡포에 대한 시간의 
반역’이라면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거세한 것은 ‘시간의 횡포에 대한 반역’이라 말할 수도
     있다. ‘크로노스(Kronos/Chronos)’의 어원 의미는 ‘시간’이다. 만물을 
만든
     시간이 제 손으로 그 만물을 파괴하듯, 크로노스는 자기 아이들을 
집어삼킨다.)
     인간의 출현 이전에 있었던 이 대회전의 결과 ‘올림포스 신들의 통치시대’가
     열리고 인간이 등장해서 살 수 있는 안전하고 질서 잡힌 세계의 기초가 
확립된다. 

     안전하고 질서 잡힌 세계의 기초? 그 기초는 도대체 얼마나 안전하고 질서 
잡힌
     것인가? 이 지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리스 신화 
읽기의 매혹
     가운데 하나이다. 『신통기』 등에 전해지고 있는 창세의 신화들은 
카오스로부터
     제우스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어떤 사건들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고 혼돈의 
세계가
     어떻게 질서의 세계로 바뀌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는 그
     질서의 정점이며 완성 지점이다. 결국 그리스 창세 신화는 “그렇게 해서 
인간이
     신들의 통치 아래 살 수 있는 질서의 세계가 만들어졌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질서 만들기의 과정은 억압과 투쟁, 모반과 반역, 거세와 추방 등 
작죄(作罪)적
     행위를 내용으로 하는 불안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반역과 
거세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 패턴이다. 반역에 의해서만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고
     또 그 반역은 부단히 반복된다는 것이 신화가 보여주는 세계의 질서라면, 그 
신화
     체계에서는 ‘반복의 질서’만이 확실할 뿐 항구하게 안정적 기초를 가진 
질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질서의 기초는 안정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이며, 모든 질서는 
전복의
     가능성이라는 위기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제우스는 예외인가? 인간은? 



                                  3. 혼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자체의 내적 조직 논리에 충실할 때, 그리스 신화는 제우스에게조차도 
항구한
     안전을 부여할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제우스도 예외가 아니다. 거세와 
추방이 다시
     반복되리라는 예언은 제우스에게도 떨어져 있고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누가 제우스를 뒤엎을 것인가를 알고 있는 자는 ‘인간의 친구’
     프로메테우스뿐이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이 비밀을 제우스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가 제우스에게 거듭 핍박당하는 것은 인간계에 불을 훔쳐다준 일
     때문만이 아니라 반역의 비밀을 제우스에게 실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그리스 신화서사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반역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이다. “반역은 계속될 것”이라고 신화는 암시한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신들의 통치권이 확립되는 시대까지만을 다루고 있다. 그 
이후는?
     반역과 거세의 반복이라는 모티프로 인간 세계의 역동성을 해명하려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지그문트 프로이드이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프로이드의 
작업은
     신화를 계승한다. 그러나 열린 서사로서의 신화 전통을 잇는 것은 무엇보다도
     문학이며, 이 경우 문학의 핵심적인 암시적 화두는 “인간은 안전한가? 인간의
     질서는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조직하는 숨겨진 세번째 논리는 연속과 보존의 원칙이다. 앞서
     우리는 반대물과 유사물의 생산이라는 신화 조직의 방식을 얘기했는데, 이
     유사물의 생산이라는 원칙과 연결되면서도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 연속과
     보존의 논리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 그것은 “모든 질서는 그 내부에 혼돈을 
가지고
     있다”로 요약 가능한 논리이다. 태초에 무정형의 혼돈으로부터 그 반대물인
     정형의 가이아가 나왔으나, 이 가이아의 몸 속에는 혼돈의 요소가 남아 있다는
     상상력―이것이 연속과 보존의 상상력이다. 혼돈에서 혼돈의 유사물인 어둠과
     밤이 나왔다는 것은 연속성 논리의 강화된 표현이다. 신화에서 이 상상력은 
흔히
     잡다해 보이는, 그러므로 얼른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괴물들의 탄생 
에피소드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를테면 가이아는 열두 명의 거인신(타이탄)들만 낳는 것이 
아니라
     외눈박이 괴물들인 세 명의 키클로페스들과 헤카톤케이레스라는 손이 백 
개씩이나
     달린 괴물들도 낳는다. 가이아가 이런 ‘괴물들’을 낳는 것은, 말하자면, 
그녀가
     혼돈의 딸이기 때문이다. 혼돈의 괴물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다. 그
     괴물들은 타이탄의 동기들이지만 (모두 가이아의 소생이므로) 후일 제우스가 

     아비 세대와 싸울 때 괴물들은 타이탄 족을 돕지 않고 제우스를 돕는다. 
신질서의
     세력은 혼돈의 아이들로부터 결정적 조력을 얻는 것이다. 

     이 신화적 논리에 따르면 세계에서 혼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질서 속에
     이미 내재해 있으면서 구질서를 위협하고 신질서의 탄생을 돕는 힘으로 
작용한다.
     질서는 혼돈의 완벽한 제거도 부정도 아니다. 혼돈은 오히려 질서와 법의 
기초이며
     모든 법은 그것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입 벌린 혼돈’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혼돈의 벌어진 입은 새로운 열림을 위한 구멍이고 그 구멍의 욕망이다. 
플라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법과 질서의 기초로서의 혼돈’이라는 이 신화적 
상상력의
     암시이다. 법과 질서가 혼돈에 기초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법도 질서도 
아니며,
     따라서 법과 질서는 다른 안정된 기초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이것이 
플라톤으로
     하여금 신화의 창조서사와는 다른 그 자신의 창조신화를 만들게 한 이유이다. 
법은
     영원한 불변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하고, 이 기초는 당연히,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혼돈을 선행하여 혼돈보다 먼저 존재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창조신화가 맨 먼저 착수하는 것은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를 “태초에 형상(Form)이 있었다”로 고쳐쓰기이다. 형상은 
몸을
     갖지 않으므로 ‘변신’하지 않는다. 변신의 서사는 궁극적으로 허위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그 많은 변신들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변신은 왜 
발생하는가? (이
     대목까지의 이야기를 다루자는 것이 이번 호 이 글의 구도였지만 종이를 
아끼자는
     강력한 시대 요청 때문에 변신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호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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