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8월 21일 금요일 오전 10시 39분 09초 제 목(Title): 퍼온글,천도교의 사상과 교리/윈 사상과 교리 人乃天·待天主의 자유·평등사상 윤석산 한양대 국문과 교수 오늘 천도교에서 그 종지(宗指)로 내세우는‘인내천’(人乃天)은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선생의 ‘시천주’(侍天主)에 근원한 용어다. 즉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으니 그 사람 역시 이에 한울님’이라는 논리가 깃들어 있다. 시천주는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경신년(庚申年, 서력 1860)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선천(先天)의 모순과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의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내놓은 천도교의 신관, 인간관, 우주관을 함유한 매우 중요한 천도교 용어이기도 하다. 시천주라는 용어가 처음 보이는 곳은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논학문’(論學文) 중에서다. 특히 수운 선생은 이곳 ‘논학문’중 ‘주문’(呪文)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시천주’를 말하고, 또 풀이했다. 즉 시천주라는 용어는 천도교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주문에 담겨 있는 용어이기도 한 것이다. 시천주는 문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다. 즉 한울님이라는 우주적 존재가 다른 초월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모셔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만 한울님이라는 신을 인간 내면에 주체적으로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한 생명체로 태어날 때 우주적 존재인 한울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우리의 본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즉 하나의 생명체로 형성될 때 한울님을 내면에 모시게 된다는 것이 천도교의 가르침이다. 이때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울님의 성품을 그대로 지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한 생명체가 무형의 생명에서 유형의 생명으로 형성될 때, 모든 생명체는 한울님으로부터 본래의 맑고 깨끗한 한울님 성품을 그대로 품부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대부분의 사람은 이와 같은 본래의 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본성이 상실된 삶을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삶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천도교의 종교적 수행은 곧 이와 같은 각자위심의 삶을 청산하고 본래 품부받은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시천주는 다만 한울님이라는 신을 내면에 모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종교적 수행을 통해 각자위심(各自爲心)의 타락한 심성을 극복하고, 본래 한울님으로부터 품부받은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시천주는 다만 한울님으로부터 품부받은 심성을 회복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한 심성에 의하여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또 이러한 삶을 현실 사회에서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천주의‘시’(侍)에 관해 수운 선생은 ‘논학문’(論學文)에서 이같이 풀이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一世之人 各知不移’, 즉 ‘시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氣化)가 있어 온세상 사람이 각기 깨달아 옮기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즉, 안으로는 신령스러운 본래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요, 밖으로는 무형의 생명에서 유형의 생명체로 형성되는, 포태(胞胎)의 그 순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시천주의 시의 순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이 다만 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본성을 지속적으로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 때 진정 시천주의 본의가 실현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회복된 본성에의 사회적 실현과 실천이 없는 한 이는 엄밀하게 말해 올바른 실현이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면 때문에 수운 선생은 ‘侍’에 대한 설명으로 ‘一世之人 各知不移’라는 해설을 붙인 것으로 생각한다. 즉 온세상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그 깨달은 본성을 다른 마음으로 옮기지 않는 것(不移)이 곧 시천주의 본뜻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아 천도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시천주’는 다만 인간의 내면에 주체적으로 신(神)인 한울님을 모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품부받은 본성에의 회복과 이 회복된 본성에 따른 올바른 실천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시천주는 본원적으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신인 한울님을 주체적으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본원적인 면에서 평등하다는 만인평등주의를 내면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평등주의적 종교사상은 조선조라는 봉건사회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것으로 반상(班常), 귀천(貴賤), 남녀(男女), 노소(老少)의 신분적 구분을 뛰어넘는 매우 근대적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천주가 지닌 평등주의는 단순한 근대적 평등주의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모신 한울님의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이룩하는 만인평등’이라는 점을 지니기 때문에 그 ‘평등’이 지닌 가치나 의미의 차원을 다르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평등의 가치’를 다만 어떠한 기준이 없는 무작위의 평등이 아니라, 진정 평등할 수 있는 차원에 이르러야만 진정 그 평등이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천도교가 지향하는 사회와 세상은 다만 평등의 사회가 아니라 본성을 회복하고 또 이를 실천해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 그러므로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평등의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를 수운 선생은 동귀일체(同歸一體)라고 불렀다. 즉 동귀일체는 ‘나’라는 개인, 또는 개인이 지닌 이기주의적 성향을 벗어나, 본성의 회복을 통해 이를 실천하는, ‘우리’라는 일체(一體)의 삶으로 모두 같이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기도 한 것이다. 즉, 천도교의 핵심사상인 시천주는 곧 천도교가 지향하는 세상,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인 동귀일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이는 곧 각자위심의 타락한 이기주의적 삶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 새로운 신념체계의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천도교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을 지니는 사상인 것이다. 어린이날의 뿌리 천도교소년회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고 절대적 공헌을 한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은 한국아동문화운동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된 것은 1921년 5월1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진주소년회, 왜관소년회, 안변소년회 등이 있었으나 이들 단체는 뚜렷한 지도목표가 없었다. 그러나 천도교소년회는 창립하자마자 전국 순회강연회를 마련하고 ‘내일을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라는 연제로 방정환이 계몽강연을 한 것을 비롯해 이듬해 1월1일 평양천도교소년회 주최로 열린 아동문제강연회에서는 ‘10년 후의 조선을 잊지 말라’ ‘신조선과 자손중심주의’ ‘신조선과 소년회’라는 연제로 이돈화의 강연이 있었다. 이렇듯 천도교에서 전개한 어린이운동은 단지 어린이를 잘 기르자는 애호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장래를 내다본 독립준비운동을 소년운동에서 찾은 것이다. 소년회는 1922년 5월1일 창립 1주년을 ‘어린이날’로 선포, 대대적인 문화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오늘날의 ‘어린이날’이 정착됐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함으로써 비로소 ‘어린이’라는 평등호칭이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기 시작해 어린이도 사람으로서의 인격적 예우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천도교청년당의 부문운동 중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것은 농민운동이다. 1925년 10월29일 창립된 ‘조선농민사’를 중심으로 ‘조선농민’ 및 ‘농민’ ‘농민문고’ 등의 간행물을 발행하고 강연회, 농민야학 및 농민학교를 운영하면서 공생조합, 공동경작운동을 벌였다. 특히 조선농민사가 전국적 규모로 전개한 공생조합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 협동조합운동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1924년 3월 창립된 여성단체인 내수단이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1931년 5월 조선노동사, 1927년 12월 조선정형연구소 등이 설립됐다. 또 1932년에는 당학제도가 실시돼 교리, 교사, 조선어, 조선사, 농학, 체육 등을 교육했다. 1934년부터는 기관지 “당성”(黨聲)을 통해 통신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년당은 당(黨)안에 항일핵심조직으로 오심당(吾心黨)을 비밀리에 조직해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중 1934년 일제에 발각돼 핵심간부 1백70여명이 투옥당했다. 이어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자진해산, 지하로 잠적해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