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3일 일요일 오전 03시 20분 52초
제 목(Title): 박은봉/국난의 여성,국채보상운동 


집중기획 1 / 박세리의 성공학 제 40호 1998.09.01 

-------------------------------------------------------------------------------
-
 

국난에 더욱 빛난 여성들 
역사의 상처마다 국가 차원에서 협력 




박은봉 역사연구가
-------------------------------------------------------------------------------
-
  

 
▲ 한국 여인은 평소에는 가족을 위해 참고 베풀며 희생하는 삶을 산다.그러다 
국난의 시기에는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지곤 했다. 서해안 안면도 앞바다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해방 후 최대의 위기라 한다. 혹은 밀려드는 외세 앞에 무릎꿇고 만 1백여년 전 
그때와 비슷하다고들 한다. 지금의 우리나라를 두고 하는 얘기다. 

골프천국 미국에서 거둔 박세리의 승리에 골프의 기초상식조차 모르는 이들까지 
뜨겁게 환호하는 이유는 박세리가 추락할 대로 추락한 국민의 자존심을 위로해준 
때문이었다. 모두들 박세리의 꺾일 줄 모르는 승부욕과 강인한 정신력을 칭찬했다. 
그 힘을 닮아 눈앞에 닥친 삶의 위기를 어떻게든 이겨보려는 간절한 소망이 칭찬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국난 극복에 나선 여성들 

우리 역사를 통틀어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활약한 여성은 적지 않다. 
임진왜란 때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든 진주의 논개나, 송강 정철이 머리를 
얹어준 기생으로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 강아 등이 있다. 

절의를 지킴으로써 항거한 여성도 많다. 외적의 침입 때 목숨과 절개를 맞바꾼 
이가 그들이다. 목숨을 버릴 만큼 절개가 과연 가치있는 것인가 하는 논쟁은 
그만두자. 

전근대사회에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 여성에게 허용된 선택이란 둘 중 하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순히 요구를 들어주고 끌려가든지 아니면 맨몸으로 버티다 
죽든지. 후자를 택한 여성의 행동은 그 자체가 곧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식민통치와 해방, 남북분단과 동족끼리의 전쟁을 안고 있는 우리 현대사는 또 
어떤가. 그것이 남긴 상처에서 여성들의 헤아릴 수 없는 눈물과 인내가 진물처럼 
흐르고 있다. 기록에 이름 한줄 남기지 않은 여성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과 헌신을 나라에 바쳤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가족과 이웃과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좌절하려는 
삶 앞에서 끈질긴 강인함으로 희망을 추구하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다. 
지금처럼 나라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여성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협력할 
줄 알았다. 실질적으로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는 등 집안살림을 도맡아 했던 
여성들은 국가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지금처럼 가족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따랐다. 

이러한 행동의 원동력은 외세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억눌린 여성의 지위 
회복이라는 부차적인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1907년 초의 일이다. “대한매일신보”에 눈길을 끄는 글이 실렸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1천3백만원을 빚지고 있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우선 
빚을 갚아야 한다, 그러니 2천만(그때 총인구가 대략 2천만명이었다) 온국민이 
3개월동안 담배를 끊고 한 사람이 20전씩 모으자’는 국채보상운동 취지서였다. 

대구에 있는 출판사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친구 서상돈이 낸 주장이었다. 그렇게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뜨거운 지지를 얻으며 전국으로 퍼져갔다. 

 
▲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입구.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 같은 인물외에도 이름 
모를 여인들이 적지 않은 활약을 했을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에서 두드러진 활약 

특히 두드러진 것은 여성들의 참여였다. 여성들은 아예 ‘국채보상부인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국채보상부인회는 전국에 30여개. 그중 
하나가 이일정(李一貞)이 이끈 조직이다. 이일정은 헤이그 밀사로 순국한 이준의 
아내로 서울 안현동(지금의 안국동)에서 안현부인상점을 직접 경영해 세간의 
화제를 모은 여성이기도 하다. 

“국채로 인해 나라가 태평치 못합니다. 여자도 국가의 은혜를 입었는데 
애국성심이 없으면 신민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여자들도 다소 참여하도록 
동심합력해야 합니다. 본회에다 의연금을 내는 부인은 본회원으로 올리고 
이름성씨와 금액을 신문에 공포하겠사오니 전국 동포부인은 혜량해 주십시오. 광무 
십일년 정미 정월 대안동 사무소(44통 4호) 
발기인 이씨, 송씨, 김씨, 박씨, 계씨, 염씨, 한씨, 정씨, 신씨, 오씨, 윤씨.” 

이일정이 중심이 된 국채보상부인회 취지서다. “대한매일신보”는 
‘불양남자’(不讓男子·남자에게 지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부인회는 강연회를 열어 운동의 취지를 선전하고 가가호호 방문, 
가두선전 등 과감한 활동을 폈다. 

서울의 국채보상부인회는 양반층 여성이나 지역 유지의 아내들이 주로 활약했으나 
지방에서는 훨씬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참여했다. 대구 애국부인회 총무 
염상은은 기생 출신이었다. 당연히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이나 기생들이 만든 
단체도 있었다. 

최초의 여성단체 讚養會 

소중히 아끼던 가락지와 노리개를 벗는 소박한 아낙네, 밤새워 수놓아 판 돈을 
수줍게 내미는 여학생, ‘비록 천업을 하고 있으나 국민된 의무야 무엇이 
다르겠느냐’면서 아낌없이 돈을 내는 기생 등. 사회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위험을 분담하고 국가 살리기에 나선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장롱 속의 금을 꺼내 제값 다 쳐 돈으로 받으며 “나라가 
위급하다는데…” 했던 1백년 뒤 후손들은 그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여성이 국민으로서 의무와 도리를 다하면 남녀동등권을 찾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국채보상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더욱 촉발시켰다. 다음은 반지를 뽑아 빚을 
갚자는 탈환회 취지서의 한 대목이다. 

‘…사람은 남녀가 일반이라. 우리는 한국의 여자로 학문에 종사치 못하고 다만 
길쌈에 골몰하고 반찬에 분주하여 사람의 의무를 알지 못하고 살았다. …국채를 
갚고 보면 국권만 회복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을 세상에 전파하여 
남녀동등권을 찾을 것이니 여보시오 여보시오 우리 여자 동포님네 동성일심하여 
때를 잃지 말고 반지를 한번 벗게 되면 일천만년 무명지에 속박한 것을 벗게 되고, 
자유국권 회복하여 독립을 기초하는 날이 되니 어서 속히 결단하여 한꺼번에 벗는 
날은 나라의 행(幸)이오 생령의 행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온국민의 항일독립정신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애국계몽운동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책략으로 얼마 안가 막을 내리고 만다. 1908년 여름 일본은 운동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을 공금횡령이란 억지 
구실을 붙여 구속했다. 그 서슬에 주춤한 국채보상운동은 뒤이어 한일합방을 
맞으면서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기생부터 양반 부녀자까지 뜨거운 가슴으로 모아낸 돈은 어찌 되었을까? 
“총독부가 그 돈을 압수해 맹아원을 설립하는 데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조선일보”기자를 지낸 최은희는 저서 “조국을 
찾기까지”에서 말했다. 

국채보상운동은 평범한 서민 여성, 천대받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부상한 계기요, 
여성만의 독자적 조직활동을 경험한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규, 세칭 강화도조약을 맺음으로써 문호를 개방한 
우리나라의 당면과제는 자주적 근대화였다. 물밀듯 밀어닥치는 외세, 뿌리부터 
흔들리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그 안에서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며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었다. 

서양의 앞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정권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밀어내고 한반도를 사실상 손에 넣자 나라를 
지키고 독립을 구하려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앞서 말한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인재를 길러 나라를 구하자는 교육운동이다. 

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가르쳐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여성을 가정내 존재로 규정하고, 여성은 집안 살림에 자식 가르칠 만큼만 알면 
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과 삼계(三戒·일생 지켜야 할 세가지 계율)만 
알면 족하느니라. 독서와 강의는 장부의 일이니 부인이 이를 힘쓰면 폐해가 
무궁해진다.” 

그러나 일찌감치 서양 세계를 둘러본 서재필·유길준·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인사, 김양현당(金養賢堂)을 비롯한 선구자 여성들은 앞장서서 여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898년 9월8일 “황성신문”은 ‘하도 놀랍고 신기하여 논설을 빼고 그 대신 
넣는다’는 설명과 함께 이런 글을 실었다. 
‘이목구비와 사지오관 육체가 남녀에 다름이 있는가… 이제는 우리나라도 
여학교를 설립하고 여아들을 보내어 여러 가지 재주를 배우게 하여 나중에 
여중군자들이 되게 하고자 여학교를 세우고자 하니 뜻있는 동포형제는 우리 학교 
회원에 들어주십시오.’ 서울 북촌에 사는 양반 개화여성들이 만든 모임에서 낸 
‘여학교 설립 통문’이다. 말 그대로 여학교를 세우자는 통문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를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선언문이라 평한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