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8월 21일 금요일 오전 10시 19분 17초 제 목(Title): 퍼온글,일본천황제의 뿌리는 벼농사/윈 강창일 배재대 세계지역학부 교수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지금까지 양국 유대를 눈엣가시처럼 껄끄럽게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 우리는 일본을 ‘파렴치한 족속’으로 봤고, 일본은 우리를 ‘시끄러운 한국인’ 정도로 치부했다. 이제 21세기를 맞으며 달라질 조짐이 보인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와 같이 일국에고이즘을 뛰어넘는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진실과 상식에 의한 관계회복이 기대된다. 근대는 국가를 단위로 구성됐고, 국가는 지고의 가치를 지녔다. 한·중·일의 동아시아 3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결국 일본은 성공했고 중국과 조선은 실패해 반식민지와 식민지로 전락했다. 제국주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소 양대국에 의해 동서 냉전체제가 형성됐다. 그런데 이 체제가 소련의 붕괴로 허물어지면서 세계는 새로운 질서와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세계는 지구적 규모에서 균질화와 일체화가 진행되고 있다. 근대의 산물인 ‘국가’라는 틀 속에서 살면서 통제받고 보호받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람·물건·정보가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대가 다가왔으며,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의 블록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지리·경제적 관계와 문명·인종·종교적 근친성과 유사성을 토대로 미주, 유럽, 서아시아,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권역화가 예견되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국가나 민족도 이러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방기하거나 간과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과연 거기에 주체적으로 대처할 만한 기반이 구축돼 있는가. 결코 낙관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대난망이라고 하는 것이 솔직한 답일 것이다. 그것은 일본과 주변 아시아 여러 민족, 특히 한·일 두민족간에 풀어야 할 ‘과거청산’의 과제 때문이다. 인접한 한국과 일본은 특히 근대 이후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를 맺어왔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그것이고, 그 이후 ‘과거청산’을 둘러싼 상호 불신과 오해, 파행적이고 왜곡된 ‘새로운’ 관계가 그것이다. 일본 정부와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과 일본이 지난 65년 한일협정을 체결, 국교를 정상화했고 이때 모든 과거 문제는 청산됐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 시끄럽게 한다고 말한다. ‘과거사’ 문제가 나오면 귀찮다는 태도다. 일본인에게는 ‘시끄러운 한국인상’이 부조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끄런 한국인’, ‘파렴치한 일본인’ 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과거사’ 문제가 전혀 해결된 적이 없고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채 아직도 침략자의 모습을 그대로 견지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에게 일본인은 ‘파렴치한 일본인상’으로 각인돼 있다. 어찌하여 이처럼 상호간에 상이한 인식을 갖게 됐고 불신과 오해가 표면화됐으며 감각과 심리의 심연에까지 침투해버렸는가.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기간, 특히 중·일전쟁 이후 한민족에게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피해와 희생을 안겨줬다. 노동력의 해외 강제연행, 침략전쟁의 소모품인 군인·군속 징발, 성노예로서 군 위안부 연행, 물적 자원의 공출 등이다. 일본은 패전 후 미국 주도하에 ‘평화헌법’을 토대로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했다고 한다. 재벌 해체, 천황의 세속적 정치권력 박탈, 천황제 군대 해체 등. 따라서 일면에서는 1945년의 시점이 단절의 기점으로 자리매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국은 동서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일본을 동아시아 전략의 거점으로 설정했고, 일본 내의 ‘과거사’문제를 방치한 채 지나쳐버렸다. 일본 내부에서 진보세력의 부상을 두려워해 전쟁 책임자인 천황에게 전혀 책임을 묻지 않고 ‘상징적’이라는 명분으로 천황제를 온존시켰다. 이와 함께 전쟁 당시 군인 및 경찰 출신 일부는 제외했지만 제국주의시대의 ‘황국’ 관료들을 재기용, 반공의 전위로 삼았다. 다시 등용된 구시대 관료들은 현대 일본의 정·관계를 장악하고 통치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은 현대 일본이 제국주의 일본의 정치구조와 인맥을 그대로 계승했고, 이후의 역사 왜곡과 그에 따른 교육에 의해 제국주의적 정신구조가 재생산돼 왔음을 뜻한다. 동서냉전 때문에 ‘과거청산’불발 한민족은 해방 직후 동서 냉전의 시작과 함께 남북 분단의 상황을 맞이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체제 아래서 매국자와 부일(附日)세력은 반공의 ‘투사’로 다시 등장해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61년에는 일본 육사 출신인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됐다. 그때부터 철저한 ‘황국신민’ 교육을 받은 식민지시대의 부일세력은 한국의 지배세력으로서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게 됐다. 한·일 양국은 모두 자국 내의 ‘과거청산’ 문제를 동서 냉전 때문에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독재정권, 친일파의 재등장을 허용했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우경적인 자민당 일당독재체제가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해 새롭게 국교를 수립했다. 그런데 양국 정부는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 ‘과거사’ 문제를 처리해버렸다. 예를 들면 양국은 ‘1910년 8월 이전에 맺은 모든 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데 합의했다. 이 문구는 일본측 주장처럼 일제의 조선 지배는 조약을 통해 이루어진 합법적 조치고 48년 대한민국을 수립하면서 무효가 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측에서는 이에 대한 해석을 두루뭉실하게 넘기면서 경제협력자금을 약속받았다. 이는 배상·보상청구권을 경제협력자금으로 둔갑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진실에 상치하는 이러한 인식과 조약 내용을 전제로 한다면 ‘과거청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양국 정부는 자기들의 현실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범죄행위를 공모한 것과 다름없다. 불신·오해의 확대재생산 과정 겪어 양국간 역사인식의 상이성과 갈등은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자기나라의 사회 및 정신구조의 문제와 뒤엉켜 이제는 구조화돼버렸다. 한국인의 감정적 대(對)일본 인식과, 일본인의 비상식적이고 반역사적 역사인식의 구조화는 불신과 오해를 확대재생산했고, 이러한 인식과 규정에 토대를 두고서는 양국간 ‘과거사’ 문제는 전혀 해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호간 불신과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할 것이 자명하다. 실제로 양국 관계는 그렇게 돼왔다. 일본에서는 제국주의시대에 ‘황국신민’ 교육을 받은 전전(戰前)세대가 자연적 세대교체로 정·관계에서 물러났고 새로운 전후세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천황제’의 주술은 아직 강고하게 무의식의 심연 속에 남아 있지만, 그나마 이들은 상식과 보편적 가치를 체득한 세대이기도 하다. 물론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면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위기 속에서 전체주의적 언설을 쏟아내는 우익·반동적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늘 있는 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하고 싶다. 상식적·양심적 세력이 변혁 유도할 것 근대 천황제와 달리 현재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서만 자리매겨져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초월적이고 무오류의 존재로서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신앙·정신적으로 군림한다. 그러한 정신구조에서 과거 천황의 책임을 묻는 역사해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보편적 가치와 상식에 상치하는 역사 왜곡과 인식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세력에 의해 일본의 역사인식과 정신구조는 앞으로 변혁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난한 과제일지 모르나 그것은 공생공영의 지구촌시대, 좁게는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서 일본의 책무이자 자구책이기도 하다. 구조적 한계에 대한 절망과 함께 새로운 세력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 교차한다. 한국에서는 냉전의 산물인 권위주의체제, 군사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시대를 맞았다. 식민지 1세대는 사회에서 은퇴했다. 통제와 억압은 모든 분야에서 사라지고 성숙한 시민사회, 통일국가를 준비하고 있다. 지구촌시대의 도래를 체감하면서 구조변혁의 시험대에 올라있기도 하다. 대일 콤플렉스와 감정적 반일주의 혹은 그 이면인 맹목적 친일주의도 힘을 잃고 있다. 일본을 자기로부터 분리해, 객체화해 보는 시각과 과학적 인식틀이 자리잡고 있다. 손님으로 일본인을 맞이하고 벗으로 함께 지내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올바른 관계 수립의 밝은 징조라 하겠다. 근래 한·일간에는 활발한 민간교류를 통해 많은 오해가 풀리고, 서로가 교사로서 상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그만큼 진전을 이루었음을 실감한다.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는 이러한 상호이해와 더불어 이웃관계를 더욱 촉진할 것이다. 뜻있는 많은 사람의 기대와 바람이 반동적 세력에 의해 좌절당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양국 정부는 일국에고이즘을 뛰어넘어 대승적·상승적 차원에서 잘못된 환부를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진실과 상식에 의한 관계회복을 이뤄야 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배상·보상 등을 통한 ‘과거청산’은 공생공영의 지구촌시대에 생존을 위한 출발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천황제의 뿌리 1천3백년 천황제 버팀목은 벼농사 권삼윤 문명비평가·여행가 천황은 매년 11월23일이면 궁중에서 신상제(新嘗祭)를 올린다. 신상제란 그해 새로 수확한 햅쌀을 먹으면서 아마테라스(天照大御神)를 비롯한 8백만 신에게 감사드리고 다음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천황의 제사다. 천황의 즉위식 때는 신상제보다 더 성대한 대상제(大嘗祭)를 드린다. 신상제의 기원은 농경의례였던 ‘니이나메’다. 니이나메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에 일본 최초의 천황이라고 기록된 진무(神武)천황이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행한 황실행사 ‘니이나메사이’ 즉, 신상제에서 기원한다. 진무는 천손강림의 땅 규슈(九川)의 히유우가(日向)에서 군사를 일으켜 세토나이카이를 동진해 올라와 야마토(大和) 땅으로 진격, 평정한 다음 천황위에 올랐다. 쌀을 생산하는 벼농사는 국가의 경제적 기반임과 동시에 이에 동원되는 철기는 강력한 무기였다. 이래저래 벼농사는 고대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일 수밖에 없었다. 진무천황이 니이나메를 황실행사로 했다는 것은 벼농사를 천황의 지배하에 두었음과 자신을 국민통합의 중심점으로 삼았음을 말해준다. 쌀은 천황과 신을 매개함과 동시에 천황과 백성을 이어주는 끈이었던 것이다. 진무천황에 의해 시작된 신상제는 11대 스이닌(垂仁)천황이 지금의 미와(三重)현 이세(伊勢)에 아마테라스를 위한 별도의 신궁을 건설함으로써 분화되었는데 그것을 신상제(神嘗祭)라 불렀다. 아마테라스가 직접 햅쌀을 먹는 제사인 신상제(神嘗祭)는 황실의 신상제(新嘗祭)보다 한달 앞선 10월17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거행된다. 그래서 이세는 민중신앙의 메카가 될 수 있었다. 또 이세에서는 20년마다 목조신궁을 헐고 그 주위에 다시 새로운 신궁을 지어 신체(神體)와 장속을 옮기는 식년천궁(式年遷宮) 행사를 지금까지 61회째 계속하고 있다(전국시대 때만 중단). 그러나 신상제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행사로 상징적 의미만 갖는다. 이것만으로는 천황제의 존속을 보장하지 못한다. 어떤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등장한 것이 중국식 율령제도였다. 율령제란 법률에 의한 국가통치방식이다. 농사와 관련, 그때 제정된 것이 반전수수법(班田收授法)이다. 즉, 모든 경작지는 조정의 소유로 농민은 이를 임대해 농사를 짓고 일정한 세를 조정에 납부하도록 한 제도다. 그러면서 새로 개간하는 농토는 3대에 걸쳐 사유를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해 경작지의 개발도 유도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력한 귀족과 사찰들이 농토를 늘리고 또 이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강화함으로써 무사가 권력의 중심이 되는 장원·무사지배체제로 이행하게 됐고, 그 결과 천황은 명목상의 국가원수 지위만 유지하게 됐다. 실질적 지배권은 쇼군(將軍)이 행사하면서도 명목상의 천황제가 메이지유신 직전까지 1천년간(866∼1867)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경작지는 조정의 소유라는 법적 전통과 신상제(神嘗祭)·신상제(新嘗祭) 그리고 식년천궁 행사가 2백년간 중단됐던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집행됐기 때문이었다.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明治)천황이 제일 먼저 행했던 것이 신상제(新嘗祭)였고, 2차대전을 일으켰던 히로히토(裕仁) 천황도 재위시 한해도 거르지 않고 거처에 무논(水田)을 만들어놓고 모를 심는 등 직접 벼농사를 지었으며 지금의 황태자 나루히토(德仁) 또한 결혼식을 마치고 곧장 이세신궁으로 달려가 참배했다(93년 6월). 이처럼 천황은 벼농사를 지켰고 벼농사는 또 천황제를 지켜왔던 것이다. 지난 94년 WTO체제 등장을 앞두고 쌀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자 일본은 “쌀은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자유재가 아니라 일본인의 혼이 담긴 그 무엇”이라고 미국에 항의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쌀을 가볍게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의 저력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