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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8월 21일 금요일 오전 10시 11분 27초
제 목(Title): 퍼온글,한국의일본연구,일본의한국연구/윈



                         한국의 일본연구 일본의 한국연구 
                연구수준 높이려면 전문가 대접해야 



                                                         고세훈 月刊중앙 WIN 
기자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지식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나름의 일본관을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정색하고 일본에 대해 이야기하자 할 경우
                            대부분 막연한 인상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식은 어떤가. 한국이 지구상
                            어디에 붙어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일본 학생에
                            대한 기사가 한국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인 일반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일본인은 극소수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한·일 양국의 상대방에 대한 연구수준은
                            단연 일본이 앞선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관심은 많지만 연구수준은
                            낮은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에 관심은 별로 없지만
                            연구수준은 높다는 얘기다. 

     한·일문제에 전문가 대접 않는 한국 

     왜 그러한가. 한국에는 일본전문가가 별로 없다. 일본만 연구하는
     학자는 1백50여명으로 추산되지만 대일문제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런데 일본의 한국전문가는 역사분야에서만
     2백∼3백명으로 추산되며, 한국문제에 관한 한 그들은 절대적 권위와
     영향력을 갖는다. 
     15년째 한국생활을 하는 산께이신문의 구로다 마쓰히로 한국지국장은
     단적으로 언론의 예를 든다. 한·일관계가 발생했을 때 한국 언론은
     일본전문가보다 엘리트 지식인의 글과 견해를 싣는 반면, 일본 언론은
     항상 한국전문가들의 글을 싣는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전문가의 말이
     아니면 ‘가짜’라며 ‘믿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라는 뜻이다. “한국
     언론을 보면 이름 있는 제너럴리스트의 글만 싣는 경향이 다분하기
     때문에 일본전문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게다가 한국
     언론의 논조는 국가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국가정책은
     이성적·합리적이기보다 대일감정에 치우치기 쉽다는 것이다. 
     전문가보다 비전문가의 목소리가 크다 보니 전문가들은 조심스러워
     말을 안하고 사건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실정이라는 호된 비판이다. 

     얼마 전 우리 외교통상부 장관의 ‘천황’이란 호칭 문제가 뜨거운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각계의 지식인들이 언론에 등장해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일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지대함을 보여줬다. 
     그런데 우리의 공식 외교문서에는 ‘천황’이나 ‘일황’(일본 천황의
     줄임말)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계속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문서에는 ‘천황’ 호칭 사용 

     고려대 최상용 교수는 이 사례야말로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는 아직
     감정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외교문서에는
     ‘천황’이란 호칭을 써 국제관례를 따르면서도 국내에서는 이를
     문제삼는 것은 ‘국수주의적 문제제기’며 ‘국내용 감정
     부추기기’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이 앞서는 우리의 일본연구와 일본의 한국연구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일까. 전문가나 일반인 모두 일본의 한국연구가 앞섰다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두 나라간 학문수준 차이는
     짐작보다 훨씬 엄청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배재대 강창일 교수는 “각 분야에 따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60∼7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잘라말한다. 역사분야를 볼 때
     한국인의 손으로 쓴 각국사는 중국사를 제외하고는 전무한 실정이나,
     일본의 경우 이미 1930년대에 한국사를 비롯한 세계사를 직접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일본연구는 주로 번역이나 ‘일본은 있다, 없다’ 류의
     감상적 인상비평 연구수준에 그치고 있다. 과학적, 학문적 접근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시대부터 근대적 학문성과를
     축적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전문적 접근을 시도했다. 

     우선 일본의 한국연구부터 알아보자. 20세기 초 일본은 주로 한국 지배를
     위한 실용적 측면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가 주동이 돼
     한국사·외교사와 풍습 등을 연구했다. 이중 고고학적 연구성과나
     풍수·무당·장터·성씨 등의 연구는 오늘날까지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65년까지 일본의 한국연구는 공백기로 평가된다.
     국교관계가 없는 상태였으며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 복구·발전을
     이루느라 바빴기 때문에 한국을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당시
     도쿄외국어대에 한국어과가 없었다는 것은 사회적 관심이 적었다는
     것을 방증한다(산께이신문 구로다 지국장). 

     이후 70년대까지는 남한의 군사정권을 비민주적, 억압적 정권으로 보고
     남한에 부정적 견해를 가졌다. 80년대 들어 한국의 경이적 경제성장과
     정치사회의 민주화 진전에 따라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이 한국연구에 대거 투입되기 시작했다. 

     고려대 최상용 교수는 일본의 한국역사 연구는 ‘조선사 연구회’를
     중심으로 이뤄져왔으며 2백∼3백명의 연구자가 “조선사연구”란
     저널을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다고 한다. 전근대사 및 근대사를 주로
     연구했으나 최근에는 해방 후·한국전쟁·50년대에 관한 연구 등
     현대사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고 전한다. 배재대 강창일 교수는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 연구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섰다”고
     말한다. 당시 한국사 논문을 보면 일본에는 4백여편, 한국은 1백여편에
     불과했다고 한다. 

     3개월 전부터 여행 준비하는 일본인 

     경제 분야는
     ‘아지켄’(亞細亞經濟硏究所)을
     중심으로 한국의 경제발전과 경제정책
     테마를 정책론 차원에서 착실하게
     추적하고 있고, 80년대 이후 정치분야
     연구도 활성화하고 있다는 것이
     최교수의 설명이다. 
     또 일본인들의 평생교육 풍토로
     비전문가들의 저변이 확대돼 있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기
     3개월 전부터 그 나라에 관련한 강의를
     듣는다는 일본인들이다. 

     와세다대 출신 김현구 고려대 교수가 쓴 “김현구 교수의 일본
     이야기”(1996, 창작과비평사)는 일본인들의 학구열을 소개하고 있다.
     김교수의 은사가 우리의 시민대학과 같은 성격의 익스텐션 스쿨
     학생들을 이끌고 방한하자 김교수는 그들과 동행했다. 
     “익스텐션 스쿨은 시민대학보다 더 전문적이다. 수강생들은 주로
     주부나 퇴직자들로 수강료는 10만엔쯤. 와세다대에만 등록자가 1만명쯤
     되고 실제로 출석하는 인원은 8천명쯤 된다”고 현황을 설명했다. 이어
     “60여명의 학생이 계속 9년째 ‘“위지왜인전”의 세계’ 강의를
     듣는데 대학원 수업보다 더 어렵다”고 김교수는 은사의 말을 전한다.
     김교수는 은사의 말로 미뤄 학생들의 수준이 높을 것임을 알고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이들의 진지함과 학구열로 인해 일본이 갑자기
     거대하게 느껴졌다고 맺고 있다. 

     한국의 일본연구는 어떠한가. 61년 한국외국어대에 일본어과가 처음
     생겼다. 그러나 70년대만 해도 일본 관련학과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일본 유학생도 60∼70년대에는 극소수였고, 여행자유화가 이뤄진 80년대
     중반에야 일본 유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 80년대
     유학생들이 한국에 돌아와 막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난해 대학 학과를 포함한 일본 관련 연구기관은 84곳으로 알려졌다.
     이중 80%가 80년대 이후에 생겼으며, 절반 가까운 48%가 90년대 이후
     설립됐다. 양적으로는 결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구수준을 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발표한 ‘한국의 일본연구 실태’는 한국이
     일본을 얼마나 모르는지 참담하게 확인시켜준다. 
     일본국제교류재단의 의뢰로 이루어진 이 조사결과 일본관계 전문가는
     6백여명으로 추정됐다. 대개 국내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나
     박사학위자, 연구기관의 석·박사학위자들이다. 이 조사를 지휘한
     고려대 최상용 교수는 “일본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는 극소수였다. 이는
     우리의 엄청난 지적 태만이자 수치”라고 말했다. 일본 연구와 관련된
     저작(논문) 3권을 쓰라는 항목은 대부분 빈 칸이었다고 한다. 이는 실제
     연구성과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란다. 

     미국이 한국보다 일본연구 앞서 

     사실 한국의 일본연구는 미국보다 떨어져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미국은 30년대 로만의 일본역사 저술에 이어 2차대전 당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일본과 일본인을 인류학적 측면에서 연구하도록
     당시 컬럼비아대 교수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의뢰했다. 2년 뒤인 46년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집단주의 의식과 기회주의 속성 등 극단적
     이중성을 분석한 “국화와 칼”을 써 미국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 2차대전 때 일본어 교육을 받은 어학요원 출신 도널드 킨은
     도쿠가와 막부 말기 일본인들의 유럽사회 탐구 노력을 다룬 “일본인의
     유럽 발견, 혼다 도시아키와 그밖의 발견자들”을 저술했다. 케네디
     정부와 존슨 정부 때 5년3개월에 걸쳐 주일 미 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도 일본사 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60년대 말부터는 개인 차원의 본격 연구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럴드
     커티스가 69년에 쓴 “중의원의 탄생”은 일본의 선거운동을
     미시적으로 분석한 대표적 연구서로 평가받는다. 66년 일본의 선거운동
     연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그는 당시 자민당의 유력정치가인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소개로 자민당 공천을 받으려는 사토 분세이를 알게 된다.
     그는 사토의 집에서 1년간 지내며 사토가 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되기까지 지켜본다. 현장경험을 토대로 한 그의 연구는 일본인도
     하지 못했던 성과로 인정받았다. 

     배재대 강창일 교수는 “현재 일본사 연구는 미국이 장악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도 일본연구에 투자를 많이 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무용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사회에서 평가받는 한국인들의 연구서는 별로 없는 편이다.
     그나마 김소운씨의 “하늘 끝에 살아도” 이어령씨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정도지만 이 책들은 본격 사회과학 연구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관심은 많은데 한국의 일본연구는 왜 이렇게 저조한가. 구로다
     지국장은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고대부터 일본과 관련을 맺어온
     한국인들은 문화적 우월감과 동시에 ‘일제 36년’으로 인해 일본인을
     멸시·무시하고픈 감정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한국은 싫든 좋든 일본에 대해 묘한 근친증후군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 대해 그다지 친근감을
     안느낀다.”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일본연구에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실용성에 있다. 최상용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본연구로는 밥먹고 살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일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토 때문이다. 따라서 학위 이후 지속적
     연구가 이뤄지기 어려웠다. 최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박사학위는
     연구를 위한 운전면허에 불과하고 이후 10여년 정도는 더 연구해야
     전문가라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인과 일본 사회가 가진 불가사의성도 한몫 한다고 최교수는
     덧붙인다. “일본은 동·서양이 절묘하게 융합된 나라다. 한·일이
     똑같이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한국은 정신을 강조하는 데 비해 일본은
     무(武)를 중시한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정치에 대해 30년 넘게
     공부했으나 더욱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라고 털어놓는다. 

     연구태도의 차이도 지적된다. 한국 학생은 연구테마를 광범위하게 잡는
     반면 일본인은 아주 미세하게 파고든다. 따라서 한국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지 않아 후학들이 매번 같은 경로를 걷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평가한다. “1년간 한·일
     양국을 왕래하는 인원은 3백만명 정도”라는 고려대 최상용 교수는
     “일본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됐고, 한국 학자들의 연구방법론이
     일본을 앞지르기 때문에 미래가 밝다”고 말한다. 배재대 강창일 교수도
     “80년대 이후 일본연구자들은 역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일본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권위주의의 해체와 세계적
     차원에서의 학문적 접근으로 일본의 한국연구는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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