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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2월27일(월) 11시34분37초 KST
제 목(Title): [동학] 『새야 새야 파랑새야』 ( 2)


 역사 교실   담당 : 신현길  ()
 제목 : [동학] 『새야 새야 파랑새야』 ( 2)
 #36/56  보낸이:신현길  (toaya   )    11/09 06:06  조회:19  1/9

새야 새야 파량새야 :2

- 주산마을에서의  하룻밤 / 동학1백주년 그 숨결을찾아



◎「사발통문」  작성한  그「봉기의  집」엔  농부가/“뒷마당서  불에
  탄 군량미  나왔죠”/조병갑  늑탈에  농민들  원성은  날로  커지고…


  해거름  무렵,나는  주산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한눈에  들판  풍경이  들어왔다.그 풍경이  도무지 범상치
않다.  비산비야(비산비야),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풍경들이  한동
안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뜻밖의  풍경이었다.고부라고 하면  김제  만경의  들과
함께  나라  안의 가장  너른  평야지대라는 것이 기왕 내가  지닌  사고
방식이었다.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곳, 소설가  정
도상의 표현에  의하면  평야 위에  무지개가  뜨는 곳이 바로  이곳  땅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바라본 풍경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평선은  분명  있으
되  그것은 수평이 아닌  일정한  굴곡을  지니고  있었다. 그 굴곡  위
에 몇 그루의  조선솔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자라고  있었다. 조선솔의
굽은등이 비산비야의 지평선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구부정한
저 선.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한없이  포근해지면서도 또한  금
세  몇  방울의  눈물이  배어날  것  같은  저  선.

  나는 비로소 풍수쟁이들이 이 땅을  후천개벽의  땅이라  부르는  것을
이해했다.  선천의  어지러운 땅 기운을  수습하고  광명천지의  세상을
이  이승의 땅위에 세우고자  했던 염원은  왕조시대  모든  민초들의 꿈
이었던  것이다.

  조선솔과 지평선의  굽은 등.그것은  학정과  주구에  시달려온  숱한
인민들의  굽은  등이었으며  그  곤혹스런  삶의  끝없는  파장이었다.

  나는 대여섯 그루의 소나무에  둘러싸인 「동학혁명모의탑」으로  걸음
을 옮겼다. 탑은 이곳  고부면  신중리 주산부락이  동학농민전쟁을  최
초로 모의했던  땅임을 말없이  일러준다.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 임
두영씨(63)는 찾아온 불청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면무식인  그와
늦은  시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동행한 은관동씨(69)덕분이었다.
모의탑을  둘러보던중 만난 그는 향토사학자로  농민전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임두영씨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임두영씨는 우리를  5칸  접기와집의  맨  오른쪽  끝  사랑으로 들게
했다.  자리를  정하자마자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방이 바로 사발통문이  작성된  바로  그  방입니다. 계사년(1
893)당시  이  지방의  큰  부호요  동학  접주인  송두호(1829
∼1895)옹이  거처했던  방이지요.  10여년  전만  해도  이 집의
뒷마당에서  불타버린  그날의  군량미들이  나왔어요』

  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꼭  1백년  전  늦가을의
어느  밤, 이 방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핏발  선  눈망울  하나  하나
가  되살아나는  듯  싶었다.

  매일 란망을 구가하던  민중들은 처처에  모여서  말하되  「낫네  낫서
란리가  낫서」  에이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현대어  표기  필자)

  이렇게  시작된  사발통문은 고부 송두호가에  도소를  설치했음을 알리
고  저  유명한 네  가지의 결의사항(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한다.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한다.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탐학한  아전들을 징치한다.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곧장  서울로 진격한
다)을  선포하게  된다.

  사발통문의  머릿글에  있어  주의를  요하는  대목은  원문에 꺾쇠묶음
표기까지하여  강조를  한 「낫네  낫서  란리가  낫서」 부분과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들은  그  당시 고부들에
삶을  펼친  사람들의  억하심정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  보아 무방할
것이다.

  당시  고부의  사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892년5월  고부천에  핀  창포꽃잎이 한창 푸를 때  조병갑이  고
부  군수로  부임을 하게  된다.당시의  목민관치고  애민사상에  충일한
관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조병갑은 가렴주구에  있어서  거의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했다.

  부임한  첫해  겨울  그는  기왕의  만석보(보가  있는곳의  지명을 따
예동보라고도  부르며  웬만한 가뭄에도  끄덕없이 풍작을  이뤄낸다는 뜻
에서  만석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래에  새로운  보를  쌓기 시작했다
. 농민들은  만석보만으로도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
나  고을 군수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보를  쌓는 동안  그
는  이미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있었다. 동원한 백성들에게 그는  한
푼의  노임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근 산의  수백년  묵은 나무들
을  마구잡이로  베어다  씀으로서  산주들의 원성  또한  높았다.여름이
되자  기존  만석보  바로  아래의  상급논들은  새  보의  영향으로 미처
물이  빠져  나가지  않아  침수가  되는  역효과까지를  경험해야  했다.

  가을이  되자  그는  새  보의 수세로  한  마지기에 좋은 논은 두말,
나쁜논은 한  말의  수세를 강제징수하여  무려  7백섬의  쌀을 거둬 들
였으니 이는 당시 군수(종4품)의  연봉(중미·조미·전미 합32섬)
으로  따져 20년  이상에  해당되는  분량이었다.(경국대전호전) 한
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석집을  세운다고  1천여냥의 돈을
징수했으며,  조금 여유가 있는  농민층에 대해서는 불효·불목·음행·
잡기  등의  온갖  애매한 죄목을  둘러  씌워 2만여냥의 돈을 늑탈하기
에  이르렀다.  그밖에도 국세로 내는 쌀인  대동미를  민간에서는 1등
품  정백미로  징수하고  국고로  보낼  때는  하등품으로  대치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는  등  그  행태의  고약함이  동서고금 가렴주구의 전형
으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

  여기에  나라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탐학  또한  어우러졌다.  균전사
김창석은  황무지를  개간한  농민들에게  5년  동안  면세토록 한 국법을
어기고  그해부터  균전세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원통히  여긴  농민들이
이듬해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균전세를  받아들였다. 대동미
를  서울로  운반하는 관리인 전운사  조필영은  배삯으로  세미  한  섬에
석되의  쌀을  거둬들였으며  또 운반 도중의  손실분이라  하여  미리  가
승이라는  명목으로  또  한  섬에  석되의  쌀을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다시  서울에서  측량하여  또  석되의 쌀을 부족하다는  명분으로  재징하
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아예  국법이 존재하지 않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것이다.

  새삼  덧붙여  무엇하랴.당시의  서울  장안에서  불리어진  한  동요는
「자식을  낳아  호남의 벼슬아치  하는  것이 소원이다」고  노래함으로써
당시의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그리고 이러한  형편은  비단  고부
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나라 안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으
며  곡창인  고부의  경우  가렴주구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극심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황은에  감사하고  살아야하는  왕조시대의
무지렁이  백성이라  할지라도  들고 일어 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
(재위31년)까지 전국  46개 장소에서  47회의  민란이 일어났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임두영씨의  이야기는  어언  사발통문의 진위문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정이  한참  지나도록  그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1백년  전
이 방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창호문밖
으로  가을밤의  별자리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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