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2월27일(월) 11시23분47초 KST 제 목(Title): [문학] '임꺽정'과 '장길산'의 비교.. 역사 교실 담당 : 신현길 () 제목 : [문학] '임꺽정'과 '장길산'의 비교.. #19/56 보낸이:신현길 (toaya ) 10/01 08:12 조회:44 1/6 다음은 '장길산'의 저자인 황석영씨가 인터뷰에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과 자신의 소설인 '장길산'을 비교해서 말한 부분을 옮겨온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역사상은 현재의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 수준에서 미루어 볼 때는 상당히 틀린 점도 많지만 저자 자신이 말하는 두 소설의 비교라는 점에서 한번 읽어볼만 합니다.. <임꺽정>과 <장길산>의 비교 고찰 먼저 이 둘은 명정조와 숙종시대 사람으로서 큰 차이를 갖습니다.즉 이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정유호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사적 사건을 체험하기 전 시대와 후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조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분수령이기 도 했던 이 전쟁은 당대 민중의 사상사적으로도 큰 차이를 갖습니다. 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허깨비와 같은 봉건 지배층의 붕괴를 목격했 고 각처에서 광범위한 의병 활동을 벌이지 않습니까? 사실 이순신의 전설 적 승리도 남도 의병의 눈부신 활약에 의하여 가능했던 것이지요. 지배계 층은 전후 처리에서 우선 전쟁 중에 장성한 초야의 의병세력들을 거세하 는 데 주력하게 됩니다. 당시의 생산력으로 볼 때에도 동아시아 3국이 이 좁은 땅안에서 벌인 전쟁은 아마도 6,25에 맞먹었던 것 같습니다. 연이어서 호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제는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지배층까지도 사대종주국이었던 중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되지요. 백성들은안팎으로 자주적 의식 에 눈을 뜨게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둘의 활동양식과 범위와 기간의 차이를 들 수가 있겠습니 다. 먼저 임꺽정은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일대에서 3년여쯤 화적당을 하 다가 구월산에서 토포사에 잡혀 죽습니다. 그가 봉건정부에 대항 무법자 로서 반항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만 철저히 도적으로 시작하여 ' 도적답게' 최후를 마칩니다. 반면에 장길산의 활동은 그가 관의 기찰에 포착되고 나서도 20여년동안 계속되며 그 행동 반경은 함경도, 강원도 일대에서 북의 압록강 국경 일 대와 평안도,황해도 지역 그리고 가까이는 파주,문산에서 철원,한양과 여 주,이천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이력의 변화는 노비에서 광대로,그 리고 구월산의 화적으로, 나중에는 마상에 의거한 상단으로, 드디어는 산 간의 미륵승병들과 결탁하고 조정에서 물러난 남인 선비 세력들에 줄을 대어 '병자역란'이라는 역성혁명에 가담하게까지 됩니다. 장길산은 오랫동안 자료 속에 묻혀있었고, 연산군 때 실제로 충청,강원 일대의 도적이었던 홍길동과 명정 ㎖의 도적이던 임꺽정이 유명해진 것은 그들이 토포되어 관의 '정식기록'에 남았기 ㎖문입니다. 장길산의 특이한 점은 그가 끝내 잡히지 않고 역모에 가담까지 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점입니다.매우 '낭만적'이지만 자료에는 그렇게 나와있지요. 사실 임꺽정은 도적 그 자체였던 데 비해서 장길산은 좀 복잡합니다.근 대적이라서 복잡한 모양이지요. 사실 소잡는 백정과 재간을 파는 광대는 신분은 똑같은 최하천이지만 삶의 양태는 전혀 다르겠지요. 다음에는 양자가 살던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 다. 예를들어 숙종조의 가장 큰 변화는 지방 향시와 대저 저자의 발생을 들 수가 있겠고, 후기에 시작된 화폐의 통용과 대외 무역의 주요 물품인 채취 산삼의 인삼으로의 재배 전화, 앞의 화폐통용과도 관계가 있지만 광 산의 개발과 광공업의 발전, 그리고 이앙모식의 농사작법의 발전과 개간 지의 확대 등등이 있으며 중요하게는 민속 연희의 출현을 들 수가 있겠으 며, 도망 노비를 중심으로 한 신분층의 분해와 이조 시대에서 정조조와 함께 가장 혹심한 흉년이었던 '팔년 왕가뭄'을 두번씩이나 겪고 전 인구 의 절반쯤이 죽는 재해까지 겪고나서 농민층은 다양한 유민으로 전변됩니 다. 도적이냐 영웅이냐 하기 전에 그려면 미륵사상과 같은 당대의 진보적 이념과의 연결이나 봉건 왕조를 뒤엎고 중원까지 도모하겠다던 자료를 기 초로, 어떻게 해야 '도적답게' 그린다는 것인지 모를 소리입니다. 이를테면 임꺽정이가 산채에서 지내기 갑갑하고 거점도 마련할 겸하여 한양에 나가 양반 첩들을 거느리고 한량처럼 지내는 장면들을 두고 반민 중적이라느니, 아니 사실적이라느니 이론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과객민담'의 유형을 벽초가 활용한 것인데 장길산에서도 한양 성내 중인층 풍속도로 나오고 있지요. ... 이제부터 평자들이 서구 평론이나 과학도 좋지만 제발 민담 재미도 좀 붙였으면 싶 습니다. 그것도 고리타분하게 말고 생기발랄하게 했으면 더욱 좋겠소. 꼭 그대로 해야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벽초의 소설에서 배울 것은 우리 말 이야기체의 '흐름'과 '호흡'이라고 보며 또한 민담의 능숙한 소 화능력이라 생각합니다. 출전 : <사회평론> 1991년 10월호 .. 저자 인터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