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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2월27일(월) 11시18분50초 KST
제 목(Title): [답사] 강화도 외규장각..


 역사 교실   담당 : 신현길  ()
 제목 : [답사] 강화도 외규장각..
 #28/56  보낸이:신현길  (toaya   )    10/11 21:25  조회:46  1/4

얼마전 신문 지상에 프랑스로 부터 반환 혹은 영구대여라는
형식으로 병인양요 때 프랑스측에서 약탈해간 문헌 자료를
돌려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 자료들은 강화도의 외규장각 소장 자료들인데..
강화도의 외규장각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고..
어떤 기능을 하였으며..
약탈된 자료들의 내용과 가치는 어떠한 가에 대해
편집해보았습니다..

                                  

                     강화도  외규장각


  원래  「규장」이란  임금이  쓴  글씨와  시문  저술을  말하며 그것을
모아두는  곳이  규장각이다.조선조의  문예 부흥을  일으켰던  정조는  
즉위 하면서  규장각을  설치했으나  처음에는  서고의  구실뿐만  아니라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기획연구기관의  역할도  
담당하도록  했다.

  지금도  비원안에  남아있는  서향각은  당시 서고로  사용한  건물이다.
규장각은  정조의  혁신적인  인사정책을  처음 시행한  기관이었다.서얼
출신을  서적의  교정과  서2를  맡는 검서관으로  등용한  것이다.후에  
실학자로  알려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모두  검서관출신이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등을 관리하는 규장각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강화도에  별고를  지어 보관물의  일부를  옮겼다. 강도 외각이라
고도한다. 외규장각은  1781년  세워졌다.

  규장각의  별관인  외규장각을  강화에 세운 것 역시  학문을 숭상하던
정조의  어진  정책중  하나였다.강화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별관으로  
당시로는  국방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몽고군대가  39년동안이나 
노렸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섬이고  또  이웃에  정족사고도  
있어서  또 하나의  왕실  도서관으로  적합한  장소였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1천42종,6천1백30책이  보관
돼 있었으나  프랑스군이  3백40책은  약탈해  가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사라졌다.  당시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비단으로  장정된  
3백여점만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외규장각  도서는  모두 국내에  없는  희귀본들로 조선조(특히  인조
∼철종) 역사연구에 귀중한  책들이다.그  가운데 「서궐영건도청의궤」
는 경희궁  개축  보수공사에  관한기록과  그림으로  경희궁  복원에  
없어서는  안될  전적이다.

  세자책봉,왕세자의  혼례·제례등  왕실의  의례를 기록한「왕실의궤」
를  비롯,당시  조선의  산업 현황과  물가, 각  지방의  특산물, 정치
적  변란 사실 등을  기록한  전적들이 포함돼  있어  19세기  조선의 
왕실 살림과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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