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namsan (Kim S.K.)
날 짜 (Date): 1997년11월20일(목) 02시15분13초 ROK
제 목(Title): [남산 칼럼] 해석은 모든 곳에 숨어 있다.


    키즈가 보여준 id 예우에 답하여 판글 하나를 이곳 역사보드에 올려둡니다.
    발전을 빕니다. 아이구 래구가 심해서 생판글을 쓰기가 쉽지 않구나...
   ...................................................................

   [남산의 해석학론]
   
     
        해석은 모든 곳에 숨어 있다 - 해석학과 대중문화의 이해 (I)


       1. 앞잔소리
       

    내가 한국에서 처음 영화 <ET>를 보고 "이 영화는 바로 예수의 일생을
  상징화한 비블리칼 유폴로지(Biblical Efology)의 하나다"라는 글을 어떤
  잡지에 썼을 때 그것을 처음에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다. 바로 그것은 일반인들의 소양에서 해석학적인 인식과 비평학적 
  지식의 결여에 기인한 결과인 것이다. 내가 비비에스에서 영화나 정치에 대한 
  추상성과 상징성에 대한 해석을 해주고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일본의 어느
  지성이 강조한 것처럼 현대 대중의 지식적 종말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요즈음 세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행하는 대중 문화들이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인식은 아예 포기하고 난무하는 액션에만 치중하여
  아무런 사상분석이나 비평의식도 없이 단지 흥미 위주로 소수의 제작자들이 
  이끌어 가는대로 문화 받아먹기에 급급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영화 <스타트랙 
  펄스트 컨택>에 대한 해석이 나스티시즘(Gnosticism)을 배경으로 파악할 수 
  있거나 또한 그같은 미래적인 SF물에 대한 과거 역사시대의 사건들에 비추어 
  상징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안목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다 과학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컴퓨터 시대의 
  현대 사회에서 나는 인문학 전공자로서 좀더 해석학에 대한 기본적인 해설을 
  해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울러 역사 해석에 대한 일반 
  이해와도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것이기에 바로 해석학의 결여는 역사의식의 
  결여인 동시에 그것은 개개인 현대인들에게는 하나의 영화나 문학 그리고 
  정치적인 현상학에 대한 비평과 그 감상력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들에게 있어서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해석과 인식의 수준이 
  점차 하향일로에 놓여 있다. 그것은 수학을 바탕한 물질문명과 기술문명의 
  영향으로 인문학의 경시풍조로 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인문학의 기초가 없는 
  수학과 과학 위주는 추상성과 상징성이 결여되어 있으면서 역사성의 대입을 
  제대로 못한채 항상 현재적인 대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경과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또 경과 내용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통시적(diachronic)
  현상학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란 일반적으로 콜링우드나 E.H. 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서의 해석이며 현재적인 참여로서 풀이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해석적 
  차원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물과 역사에 대한 이러한 해석학적 접근이 있기까지 인간은 여러 세기 
  동안의 학문적인 과정을 거쳐서야만이 비로소 자연과 초자연 그리고 
  역사에 대한 자기적 해석을 비로소 시도하게 되었으며 초월적인 것과 
  비초월적인 것의 대화와 호환적인 참여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다. 
 
 
  
      2.  옛날엔 어떻게 해석했나 - 해석학 사학사.
 
    주석학이라고도 하는 해석학(Hermeneutics)은 문헌적인 해석면에서 그 
  시원이 이루어져 왔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오랜 고전 해석은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송대의 주시(주희)의 <역경>에 대한 
  해석은 그러한 금자탑을 이룬 것의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의
  해석학은 그저 17세기에서 그 싹이 비로소 성장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서양에서의 해석의 자세란 기독교의 성경 주석에 대한 제한이라는 독선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교회 조직을 업은 교부들의 해석권한의 오랜 관행으로
  인하여 동양보다 훨씬 뒤쳐지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싹트는 근대 정신이 비로소 생기고 나서부터 성서 해석학과 문헌 해석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20세기 말까지 정설로 인정하지 않은 어리석은 문화전통을 병행하여
  왔던 것이다. 그것은 성서에서 지동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동설을
  말하고 있다는 `성서 주석학'에 근거한 오만의 결과였던 것이다.
  
    서양의 해석학에 대한 근대적 자세는 성서 주석적 이해, 문헌학적 방법론, 
  언어 이해의 학문, 정신과학적 방법론, 실존론적 이해의 현상학, 그리고 
  신화나 상징의 배후에 있는 의미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회상적이고 
  우상파괴적인 해석의 체계와 단계들을 거쳐왔다. 
  
    해석학에 관한 저술들은 상대적으로 별로 많지 않다. 그것은 역사적
  해석방법론들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 마당에 작품의 해석학적인 내용을
  따로 다루는 저술들의 나이브성을 우려하여 그러한 결과가 생긴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Robert W. Funk and Gerhard Ebeling ed., <History 
  and Hermeneutic>(Journal of Theology and the Church series, Vol.IV.
  (1967)이나 Richard E. Palmer의 <Hermeneutics>(1968) 그리고 Frederic
  W. 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Grand Rapids, Michigan: 
  1961)은 아직도 해석학의 기본 이해를 위한 고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1654년 J.C 단하우어는 <성서 주석의 방법으로서의 성서 해석학>에서
  심오하고 은폐된 의미를 밝히는 해석학적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한 이래
  에드워드 버태트 타일러의 <Primitive Culture: 1871)는 "어떠한 전설이나 
  비유 그리고 동요도 철저한 신화학 이론가의 해석학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 라고 강조하여 해석학적 접근의 우주성을 열게 된다.

   서양의 역사에서 17세기 이전 서양 고대에도 해석학적 접근은 있었으나
  기독교의 등장 이래 그 명맥은 억압되고 배제되었다. 신약은 구약의 
  해석학적 문헌이다. 그렇기에 성서에 대한 해석은 그대로 `거룩한
  해석'(holy interpretation)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요받게
  되었으며 여타의 모든 학문에 대한 해석의 자세에까지 제한과 억압으로
  인하여 서양해석학은 오랜간 커다란 정체(inertia)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계몽주의 선각자들은 그러한 제한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으며 그것은 볼태르나 괴테 등이 앞장서 동양학에 대한 눈을 뜨고부터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같은 르네상스적인 시각은 글자 그대로 고전 고대
  사상의 복고적인 운동이었다. 해석학은 그리이스 동사 헤르메네웨인과 명사 
  헤르메네이아에서 기원한다. 
  
     The word hermeneutics was coined in the 17th century on the basis
     of the Greek hermeneuein, ``to interpret,'' which signified equally a
     declamation of a text, an explanation of a situation or a translation
     from a foreign tongue. Hermeneuein itself derived from the name of
     Hermes, the winged messenger god of ancient Greece, who both delivered
     and explained the messages of the other gods.
     
     
    아리스토탤레스는 그의 작품 <기원: Organon)에 있는 주요 논문인 
  <해석학에 관하여 Perihermeneias)에서 이 해석학의 문제성을 제기하였다.
  그는 해석을 언명(enunciation)이라고 정의했다. 즉 `말하다,' `천명하다'
  라는 의미로서의 해석이었다.

   헤르메뉴틱스는 날개달린 사자(使者神) 헤르메스(Hermes)가 그 시원이
  되고 있는데 신화시대의 신의 뜻을 인간이 이해하도록 그 사자가 풀이해
  주는 역할로서의 헤르메스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르메스는 인간의 
  이해능력을 초월해 있는 것을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도록 전환시켜
  주는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으로 말하자면 헤르메스는
  바로 무당이 신의 뜻을 풀이하여 전달하는 굿의 언어를 말하는 것으로
  살풀이의 그 풀이인 것이다.
  
    이른바 `풀이' 또는 `썰'(說)의 한 형태로서 `썰풀이'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무당들의 `살푸리'는 신의 숨은 카르마(karma)의 비밀을 풀어
  문제의 근원을 풀어낸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살푸리는 고대의 해석학적인
  차원인 것이다. 이것은 중국 은나라 시기의 갑골문자가 점술로서의 해석의
  결과로 생긴 연유와도 상통한다. 해석학의 출발은 바로 숨은 뜻을 바로
  전달하고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해석학이란 표현, 설명, 번역의 의미에서 출발하였는데
  그 가장 기초적인 의미로서 헤르메(herme)는 to say 즉 `말하다'의 뜻인 
  라틴어 sermo(세르모)와 관련 있고 verbum(베르붐) 즉 `말'이란 것과 
  연관한다. 이것은 교회가 모든 사회와 사물에 대한 해석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서양의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의 성직자가 지니는 해석의 권위 즉 
  `하느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교회가 사회의 정신적 해석권을 독단적으로 장악했던 
  시대의 그릇된 지연을 가져왔다. 그래서 성서의 많은 내용들이 그릇 신화화
  되고 신비적인 의식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되게 되었던 것을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서야 탈피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르네스티(Johann August Ernesti)는 1761년에 이미 해석학적 수칙에서 
  "성서의 언어적 의미는 우리가 다른 책에서 하는것과 꼭같은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F.W.Farrar,  History of Interpretation 
  p.402). 그동안 다른 세속 문헌에서의 `처녀잉태'는 신화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반면에 성서에서의 그것은 하나의 기적적 사실로 해석할
  것을 강요한 것에 대한 문제 등이 지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스피노자도 
  "성서 주석의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두에게 공통된 이성의 빛
  밖에 없다"라고 하여 불트만의 탈신화의 신학을 이끌어내는 영향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서양 해석학은 성서 주석학의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의 해석학은 문헉학적인 해석 이상의 보편적 해석학(Allgemeine 
  Hermeneutik)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보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 언어 
  이해로서 학문의 해석학에서 모든 해석을 망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의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이 등장하여  
  빌헬름 딜타이 쉴라이에르마르의 19세기의 정신과학은 헤겔의 정신철학을 
  계승한 오늘날의 인문과학 사화과학을 총망라하게 된다. 모든 사물의 해석이
  인문과학과 사회현상으로서의 해석을 요청받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현대 해석학은 현상학으로서의 해석학으로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재적 참여의 의미와 존재론적 관계로서 작품에 작가와 분리된 독립성을
  부여해주면서 해석자의 자율적 해석의 길을 트면서 변증법과 역사의식을 
  해석학에 동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모든 작품이나 문헌 그리고 
  예술과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여하한 우상적인 신비나 틀에 박힌 인식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우상파괴로서의 해석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뽈 리꾀르는 그의 해석론(Ed l'interpretation: 1965)에서 "우리가 
  해석학이라고 할때 이는 주석, 즉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는 기호들의 
  집합체에 대한 해석을 지배하는 규칙들의 이론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우상파괴적인 해석학은 일의적인 상징과 다의적인 상징을 포괄한다. 
  모든 해석은 the 해석인 동시에 a 해석이며 다의적 해석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은 동양사상의 화엄사상과도 연관한다. 그것은 바로
  일즉다(一卽多) 또는 일체즉일(一切卽一)의 의미에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오늘날 서양의 새로운 신과학(New Science)의 경향이기도 한 해석방법이다.
  말하자면 선문답에서 자주 나오는 말로서 "국솥의 국맛은 고기 한점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의 그런 의미의 기호적 해석을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아울러 해석학은 우상파괴적 기능으로서 상징의 의미 해석과 숨겨진 가면을 
  벗기고 탈신비화(demystification)의 해석을 강조한 것이다. 탈신비가들은 
  모든 작품과 예술 그리고 사건들에 있어서 고정상징을 파괴하고 고발한다.
 
   그런 면에서 리꾀르는 그의 반성철학(reflective philosophy)에서 회의의 
  합리적 성격과 회상적 해석의 신앙적 성격을 포괄하고자 한다. 이 방법론은 
  추상화에 빠지거나 단순한 회의만을 일삼지 않으며 신화와 상징에 대해 
  해석학적인 도전을 수행하면서 언어와 상징 그리고 신화 등의 배후에 있는 
  실재를 반성적으로 주제화 하는 방법이다. 
 
    이성계의 왕(王)자 꿈을 해몽한 무학대사나 구약성경의 요셉이 파라오의 
  꿈에서 7년 가뭄을 해석한 것은 그 싯점의 자연과 사회 역사의 대입적인
  의미 파악으로서의 해몽으로서 하나의 역사적 참여로서의 상징적인 해석의
  의미 부여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무학대사의 신앙이나 요셉이
  믿고 있는 신앙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서양이나 미국의 헐리우드의 
  영화들은 바이블의 서양사상의 상징적 반영으로서 복합적인 작품의 다중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미드라쉬(Midrash) 전통에서의 해석학은 한 사물에
  대하여 여러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나중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은
  오직 싱글 해석으로 진리화를 독단적으로 강조하고자 했다. 
   
   The field of hermeneutics began as the interpretation of Biblical
   texts, but unlike the Jewish tradition of Midrash, which emphasized
   numerous possible interpretations, the Christian hermeneutical tradition
   was concerned with finding the single spiritual truth entailed within a
   particular Biblical passage.
   
   그러나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서의 해석학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Johann Martin Chaldenius의 <Introduction to the Correct Interpretation 
  of Reasonable Discourse and Books>이래 19세기의 해석학의 전통은
  Shleiermacher, Humboldt, 그리고 Dilthey 등의 해석의 시스탬에 대한
  소위 해석학적 사이클(hermeneutical circle)은 하나의 해석에서 다른
  해석을 이끌어내는 동적인 해석의 과정을 강조한다. 

    This process continues around in a circle, moving from one 
    subprocess to another, until the interpreter is convinced of a
    satisfactory interpretation.

   20세기의 해석학은 온톨로지(ontology)에 촛점을 맞추는 하이데거의 
  <Being and Time> 출판으로 해석학에 있어서 여러가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먼저 19세기의 에피스테몰로지칼한 관심(epistemological concerns)을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관심으로 변환시켰다. 둘째로 그것은 
  작자와 그의 작품의 오리지날 감상자들의 관계 설정에 대한 재조정이다. 
  즉 현재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George Jensen의 말은 의미 있다.
   
    "Heidegger's theory of the historicity of Being, that history is not 
    something occurring in the past but something being lived in the 
    present, a continuing-to-be, does not tolerate a romantic notion of
    recapturing the past." 

   하이데거의 관점은 언어적이기보다도 경험적이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그것을 일컬어 해석학적 경험(hermeneutic experience)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에게 배웠다. 그러나 1960년대 가다머는
   그의 스승과는 달리 그의 <Truth and Method>에서 예술작품이 어떻게
   인간의 경험에 깨우침을 줄 수 있는 `진리의 현현'(emergence of truth)으로 
   표현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하버마스(Habermas)는 가다머의 이러한 전통과 경험의 권위에
   너무 치중함을 지적하고 자기반성적 방법론(self-reflective methodology)을 
   객관적 사회이론에 어프로치하고자 한다. 하버머스는 사회적인 선입견이
   철저히 분석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the systematic distortions in communication which bias an initial 
    understanding of society can be analyzed and reduced using 
    generalization from empirical knowledge of society, quasi-causal 
    explanation (deductive verification), and historical critique. 
    
    그러나 하버마스의 이같은 선이해에 대한 거부의식에 의한 개인들의
    자기반성적 방법론은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의 일반론적 이론이 선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가질 수 있다. 결국은 이같은 해석의 태도는 이론적 
    도구의 해석이 사회 해석의 문화적 전통에 거스르는 다른 해석들에 종속될
    수 있는 위조된 이론으로 함몰될 수 있다. 그러나 전통과 역사 그리고 경험을
    토대로 하는 해석은 아직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해석학의 역사문화 비평적 적용
  
    그런 의미에서 영화 <일 포스티노>가 한 사람의 시인과 우체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 작품적 상징적 플랏은 바로 바이블의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을 작품화한 메타포르를 내포한 이탈리아의 카토릭 신앙의 베드로 
  신앙을 반영하기도 했다는 나의 해석은 이같은 해석학적인 기본 역사인식을 
  바탕하고 있는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전에 만화영화 <제임스와 거대
  한 복숭아; James and The Giant Peach>에 대한 내가 쓴 영화사상 평론은
  바로 하나의 서양영화 사상을 알기 위하여서는 그 작품이 모사했거나 패
  러디화 했을 수 있는 동양의 무릉도원의 사상이나 서유기 그리고 일본의
  모모타로 전설과 더불어 대동아 전쟁시에 일본의 싱가폴 전쟁을 묘사한
  전쟁 당시의 일본의 만화영화의 이해와 더불어 특히 한국의 고전문학인
  심청전의 구조적인 이해없이는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의 작품 분석을
  명쾌히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최근에 내가 영화 사상 비평으로 쓴
  <스타트랙 펄스트 컨택>에 대한 해석은 바로 크리스토폴로지와 소피올로지에 
  대한 역사 신화적인 해석으로서의 해석학적 접근을 통한 비평을 한것도 
  이같은 해석학적인 접근에서 가능할 수 있다. 해석이란 바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작품의 `자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나의 문화적인 
  평론들이나 특히 영화사상 평론들과 정치현상학적 평론은 이와같은 나의 
  해석학적 분석에서 비롯하고 있다.
  
    본래 해석학(hermeneutics)이란 바로 herme 즉 `말하다'에서 그 뜻을
  출발하고 있듯이 사람의 입으로 말해지는 `소리'로서의 들을 수 있는
  언어적 표현의 중요성이 그 중요한 기초인 것이다(Don Geiger, The Sound, 
  Sense, and performance of Literature 참조) 그것은 보다 인간적인 
  이해를 위한 구어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본래 인도의 고대 종교들이 
  베다를 중심하고 `듣는' 소리의 경전이었다. 창세기의 `있으라! 하시매'
  라고 하는 창조적 음성은 바로 로고스의 싸운드적 원천인 것이다.
  그러한 소리에 대한 것이 빛에 대한 것보다 선제하면서 그 후에 빛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모든 해석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울과 루터가 복음과 바이블의 평신도화에 기여하고자 풀이와 이해의
  의미로서의 구원을 강조한 것은 신의 뜻을 풀이하는 의미에 대한 보다
  인간적인 해석을 시도한 것이며 예수가 구약성서의 문제들을 재해석한
  것은 하나의 인간화된 휴머니즘의 해석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누가복음 24/25-27 참조). 바이블의 계시록은 모든 내용이 그대로 하나의
  해석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시대에 있어서 그대로
  당시대적인(contemporary) 현재적 해석으로 상징과 그 숨은 의미를 해석해
  왔다.
  
    성서의 세레요한의 `광야의 소리'나 공관복음의 `복음'은 바로 그 `소리'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인 선포인 것이다. 케류그마
  (kerygma)는 어떤 의미에서건 그것은 말로서 선포되어져야 할 메시지이며 
  그것은 현재적 공명을 기초로 하고 있다. 더 이상 신만이 간직한 기호가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소리'로서의 메시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해석학은 시학, 수사학이 아니라 비교하고 종합하고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이나 현상의 겉과 속에 나타나는 참과 거짓이 판별 가능해야 한다. 
  아울러 해석학은 모든 예술이나 문학 그리고 사건 자체의 독립된 의미가 
  부여되면서 그 해석자의 해석 자체에 있어서도 독립된 해석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작품이 작가의 작가적 의도 이상 그 해석이 더욱 
  심오하게 되는 경우는 그때문인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그의 
  <대화>(Ion)에서 호머를 해석하면서 호머의 원작 시보다도 더 심오한 해석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은 해석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불트만은 "하나의 관점을 선택하게 되면 이미 내가 역사와의 실존적인
  만남(existential encounter with history)이라고 불렀던 것이 작용한다.
  역사는 역사 속에 들어가 역사에 참여할 경우에만 의미를 획득한다"라고 하여
  이같은 그의 의식은 역사가 콜링우드의 역사의식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콜링우드는 "역사적 사건들은 역사가의 정신 속에서 재생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R.G. 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p. 218)

    서양의 신학과 해석학은 바로 불트만의 이같은 비신화적 해석학이 그
  신해석학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신학 이전적(pretheological) 
  형태의 해석학에 촛점을 맞추어서 성서 주석학(exegetics)이나 일반 해석학
  또는 석의(釋義: hermeneutics)의 발전을 이룩하게 된 기초가 되었다. 

   철학이나 비평은 그자체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이해와 역사적 해석의 접근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리차드 팔머는 
  그의 해석학(Hermeneutics)에서 오늘날 미국의 비평학에 있어서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저급한 객관성, 정태적 개념화, 그리고 역사의식 
  부재를 들고 있다. 

   모든 작품이나 예술 문학 영화 음악 등의 해석은 바로 역사적 이해와
  미학적 대상으로서 자율적인 대화로서의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작품은 작품으로서 작가로부터 일단 떠나게 되면 그 작품의 존재의 자율성이
  독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에 대한 해석이기 이전에 택스트 분석(textual 
  analysis)으로서 다루어져야 할 학문이 된다. 모든 해석이나 비평은 해부가 
  아닌 작품과의 대화이며 작품에 대한 현재적 참여로서의 해석이다. 그것은
  인문주의적인 해석과 역사적인 이해가 없이는 불완전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팔머의 말대로 해석학은 `역사적인 이해방식과 인문주의적 이해방식을 
  서술하려는 노력으로 성장하였다'는데 있어서 주목해야 한다. 아울러 
  그것은 작품 자체 내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 
  존재(being-in-the world)의 의미의 파악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학은 학문들 상호간의 단순한 연결이 아닌 제반 인문학을 통한 이론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 작품에 대한 해석은 바로 단순한 직관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종합적인 인문학에 의존하여 여러 각도로 다의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할 때에 기독교는 자신의
  믿는바 이외의 종교들은 배척하고 타종교인들이 개종(convert)하기를
  권유한다. 그런 반면에 불교는 여타의 다중적인 종교적 의미에 상대적으로 
  열려있으면서 새로운 종교나 사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자신의
  믿는 바에 다시 다른 추가된 사상이나 종교 이념을 보태는 이른바 
  가종(加宗:ad-version)을 강조한다. 이것을 단순히 종교대 종교로 이해
  하는 종교학적인 대입만으로 해석하려면 기독교와 불교는 영원히 다른 
  극대 극의 해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상호 공존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만약에 보다 객관적으로 미학적인 견지에서 다루자면
  그리하여 그것을 하나의 예술적인 견지에서 파악하자면 기독교의 그같은
  배타적인 자세는 바로 조각가가 조각을 하기 위하여 준비한 석물이나
  나무에 정과 끌을 대어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모두 깨내어 
  `쪼아내기'로 남는 것만 가지고 그 작품의 마지막 완성을 해내고자 하는 
  것으로 상징화시킬 수 있다. 그 반면에 불교의 가종적인 입장은 바로 
  조각과는 대조적인 소조(塑造)로서 중심에 나무 등의 심지를 세워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재료들을 덧붙이고 다시 그 덧붙인 위에 다시 덧붙이는 
  `보태기'의 예술을 해내서 석고상이나 종이붙이기 인형등을 만들어 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인 해석은 어느 한쪽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조각과 소조는 엄연히 공존하고 있는 
  의미를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조각적인 배타성이나 
  불교의 소조적인 포괄성은 하나의 미학적인 해석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비교 상징의 해석 방법은 바로 인문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그 적용에 익숙하지 않는 현대의 분화된 사회인들의 많은 사람들이 자칫
  그릇 편파적인 판단을 내릴 우려가 있는 문제들에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자연과학계통의 학문분야가 늘어나면서 인문학을 모르는 세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사물과 사건, 사회와 역사에 대한 해석에 
  문외한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어 그들에게 있어서 해석학적인 정신적 사고적
  결여성은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해석학에 있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Palmer는 지적한다. 

    "과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혹은 해석학적인 것)간의 구별은 인문학에 
     있어서 해석적 과제가 갖는 독특한 성격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과학에서 행해지는 해석의 성격도 해명해 준다.. 
     우리는 역사를 벗어나서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자기 이해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그리고 시각화 할 수 있고 수학적인 
     참으로 정체적이고 기계적이며 순전히 형상적인 것들의 사이비 객관성을 
     의심할 경우에만 역사성을 알게 된다."

   해석은 불트만이 말하는 탈신화적인 해석(demythologizing)에서 다시
  탈 물질적인 해석으로 나타난다. 즉  사물과 현상의 추상성과 상징성을
  제대로 풀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또하나의 신의(神意)에 대한
  무당의 뜻풀이와 같은 것이며 갑골문의 해석이자 시내산의 토라의 해석의
  현대적인 적용이다. 그것은 바로 인문주의적 해석으로 귀결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신화나 물질 자체가 아닌 언어에 의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에 대한 이해가 아닌 `언어를 통한'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언어'로서 사실과 나와의 대화의 과정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해석학에 있어서 그 방법적인 이론으로서는 오늘날 크게 두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에밀리오 베티는 해석학의 방법과 타당성을 지향하여
  그것의 규범과 정해진 일정한 틀을 강조한다. 그 반면에 게오르그 가다머는 
  모든 사물의 이해에 있어서 그것의 역사성에 촛점을 맞추는 해석학을 
  강조하여 역사 이해의 역동성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역사의 이해란 바로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생기는 어떤 공통
  체험의 컨소시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언어로서의
  해석'은 그것이 확대되어 다른 사람의 지평과 만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사고의 `집'에 도달하여 상호 `처마와 처마로 연결되어' 그것은 다시 새로운 
  발전된 단위의 마을과 사회를 이루는 우주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해석학적 이해란 언어적이고 역사적이며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언어와 관련된 언어학, 언어철학, 논리적 분석, 번역이론 ,정보이론, 
  화술론에 연관되어 있어야 하면서 동시에 현상학적 입장에서 지각적 
  현상학과 음악적 그리고 미학적 현상학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타자들의 해석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시적으로 이해하는
  역사적인 이해와 신화적인 분석을 병행하여 작품과 해석자 자신의 대화의
  과정과 결과로서 항상 해석을 통하여 해석자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은 아울러 작품과 작품 사물과 사물의 역사적인
  전거에 비교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그래서 내가 비비에스에서 언젠가 
  틴에이져들을 위하여 강조했듯이 서양의 발렌타인데이는 우리나라의 설날의 
  널뛰기나 단오날의 그네뛰기 풍습에서 처녀들이 발을 내미는 상징적 의미를 
  도출해낼 수도 있으며 그에 더하여 발음의 pun을 동원하여 `발낸데이' 
  `발낸다이'로 버나큘라화하여 그것을 합쳐서 다시 `발낸다인데이'로 희화화
  할 수도 있는 심볼리즘의 다양성을 극대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I-thou의 관계란 바로 작품과 해석자 상호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좀더 근본적인 입장에서 볼 때 
  해석자와 작품 그 자체는 이미 보다 커다란 하나의 `집'에 포괄적으로 
  유기적인 관련 속으로 귀일되어 있어서 불이(不二)적인 일체관계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작품과 다른 작품과의 연관 또는 픽션의 작품과
  실제의 역사적 사건과도 아울러 연관한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강조한바 
  있는대로 춘향전은 삼국시대의 한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며 애국가의 가사는 중국의 고전인 <시경>의 
  한 시편에서 패러디된 것일 수 있음을 짐작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 면에서 항상 자아에 대한 반성과 발전을 도모할 때처럼 해석은 언제나
  작품 그 자체와 해석자 자신 그리고 두가지 모두에 대한 물음과 대답의 
  변증법적 기대 지평(horizon of expectations)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움을 전제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재미있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 해석에서 새로움이 없으면 분석적 맹목성(analytical blindness)을 
  초래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재미'란 결코 맹목적인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 `즐거움'을 고유한 기능으로 정의했으나 이는
  덕(virtue)을 망각한 것이란 점에서 후세 철학가들에 의하여 비판되어 왔다. 
  모든 해석과 그 작품은 재미를 기준하여야 하되 미학적인 가치가 있어야
  한다. 미학적 현상(aesthetic phinomenon)은 순수한 감각적 형식과 예술적 
  만남의 현상학을 넘어서서 그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넘어서서 인간화된
  진리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


       4. 해석학과 심볼리즘
   
   해석학은 심볼리즘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문화의 숨은
  내면과 전체적인 배경이 간직한 상징적 형태를 풀어내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해석학은 모든 예술과 음악 시 과학 언어 신학 등에 있어서 상징적 형태를
  지닌다. 그러한 심볼리즘의 형태는 다음의 두 요소로 집약될 수 있다.

   1) an ordinary thing (object, event, action, person, relation) with a 
      surplus of meaning and 
   2) a psycho-cultural context of past generation and development 
      extended into present (and future) experience.
   
   이러한 상징적 형태는 전통과 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상징성을 말한다.
  해석학에서의 해석이란 이러한 상징적 형태가 해석을 필요로 할 때 발생
  한다. 이러한 상징적 형태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이루어진다.

     when the process of symbolic evolution produces structural 
     stress (when the acquired function of the symbolic form becomes 
     over-complex), when the evolution of the community of use undergoes
     morphologic transformation, or when the symbolic forms or their 
     dependent community are confronted with an alternative symbolic 
     system/community.
  
  예를 들어 예수에 대한 `주님'(lord-ship)에 대한 초기 기독교적인
  개념은 당시의 황제에 대한 킹쉽의 상징적인 형태를 포괄한다.
   (the early Christian idea of the lord-ship of Christ is extended to 
    include the symbolic form of imperial kingship) 
  
    그렇기 때문에 유대-기독교적인 상징적 형태의 유산을 현대적 세계관으로
  해석한다면 그러한 킹쉽은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이것은 문명간 지역간의
  이해와 더불어 인종간의 이해(利害) 관계에 따라서도 시대와 문화에 대한
  해석은 발생한다. 그러므로 해석학은 상징성들이 이미 시대적인 구조적 
  형태학과 문화적 변화에 의하여 아니면 다원주의에 의하여 부서지고 있을 
  때 일어난다.

   Hermeneutics begins when symbols are already broken by structural 
   morphology (internal change), or cultural evolution, or by
   pluralism (= the appearance of novel structures of meaning.)

   영화나 시, 그림, 이야기, 생활 또는 신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들은 상징적
  존재들로 가득하다. 특히 현대 사회의 정치 속에는 수많은 정치심리학적인
  심볼리즘이 동원되고 있다. 정치란 어떤 면에서 심볼리즘의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한창 대선 구도의 변화무쌍한 분위기로 무르있던 
  한국의 정치 분위기 속에 방영된 드라마 <용의 눈물>이라는 현실 정치성이 
  농후한 한 사극의 중간에 이방원이 타는 말잔등에 난데없이 D.J라는 알파벳이 
  시청자들에게 비치도록 실수 또는 조작한 사건은 그같은 정치적 상징성을 
  강렬하게 나타낸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장차 태종으로 대권에 오르기 위하여 혈족들을 무참히 살해해가면서 
  쿠데타를 주도해가는 이방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합당정권 최대의 연속극
  제작비를 들인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상징성이 그대로 전두환의 집권과정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바로 대중문화의 정치적 상징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대중 드라마인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전체적 상징성의 부분적인 
  상징으로서 전두환을 상징하는 이방원이 올라타게 되는 말(말을 탄다는 
  의미는 상관이 부하를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에 D.J라는 이니셜이 찍혀 나온 
  것은 그 과정이 아무리 촬영상의 실수라는 나중의 해명이 있었다 해도 장차 
  대권에 오를 D.J 즉 김대중을 `말'로서 상징하게 되는 `이방원의 세력'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상징적 의미는 양장삼김의 공존공생의 의미일 것이라는 것은 바로
  그같은 드라마 구성과 제작의도에 강하게 숨어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예처럼 해석학에서 상징성은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의 문학 예술 
  속에 내재된 모든 상징주의를 해석해내는 현대인의 사고의식이며 심리적인 
  생활 패러다임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 문화에 대한 의미 해석은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의 패턴에로 포개어져 나타나면서 그 의미의 해석의 다양성은 
  내적 외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5. 해석학이 가져야할 당위성
     
    이렇게 볼 때 해석학은 먼저 역사적 이해가 선재되면서 작품에 대한 
  선이해(pre-understanding)가 있어야 하며 언어적 진술에서 존재론적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어야 한다. 조로아스티즘의 수퍼맨 신화사상의
  선이해가 없이 영화 <수퍼맨>이나 <카잠> 그리고 마이클 조든 영화인
  <스페이스 잼>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은 어려운 것이다. 
  
    해석학의 상징성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할 때 고전문학 <흥부전>의 
  처마밑 제비 다리 고쳐주기는 바로 처마밑으로 찾아드는 나그네에게 
  적선을 베풀어 주라는 당대의 권선문학의 상징적 의미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며 <심청전>의 심청의 왕후 등극은 지나친 남아선호 의식이 
  사회적으로 여아 유기나 홀대에 대한 당대 사회문제에 있어서 상징적 
  계몽문학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현상의 해석이란 특히 사실이든 작품이든 그에 대한 객관적인 
  참여이면서도 변증법적인 과정으로서의 해석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바로 현재의 빛에 비추어 나타나는 참여적인 의미에서 그 미학적인 의미는
  완성될 수 있으며 작품과 해석자 사이의 그 사실의 의미에 대한 호환적
  내재적 유기적인 현상학으로서의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주의적인 해석을 기반하는 것을 말하며 현대의 해석학은 
  종합 문화에서 분화된 기술 문명의 문제점을 안고 나타난다. "현대의 
  기술중심적 사고방식 및 그 근저에 놓여 있는 힘에의 의지로 인하여 
  우리는 주관을 숭상하면서 동시에 사상(事象)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경고하는 해석학자들의 말은 타당하다.
 
   오늘날 넘쳐나는 미국의 대중문화는 그 수적인 작품에 비하여 그 해석학적 
  비평의 고갈에 빠져 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짧은 국가 역사에도 그 
  기본적인 영향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바로 미국의 대중문화들이 그같은
  물질문명이 정신보다 앞선 문명의 자만에 빠져 역사 이해를 경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팔머의 지적을 인용해보자.
    
   "미국문학 비평이 지닌 가장 커다란 결점은 역사의식(historical 
    consciousness)의 부족이다. 그 결과 문학이 지닌 본질적 역사성을 통찰할
    능력이 없다. 현재 미국의 대다수의 문학 교사들은 형식주의자나 
    골동품 수집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은 역사의 거리를 메우는 일이다. 역사적 이해와 역사의식은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현상학적 비판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해는 사건(역사)이라는 
  성격을 포함하기에 작품의 의미 해석은 동태적이고 시간적이며 인격적이다. 
  팔머는 그런 면에서 현대 과학문명의 해석에서 인문학적 결여성을 비판한다.
   
    "현재의 우리에게 있어서 해석의 과제는 과학적 객관성의 이상과 과학자의 
     지각방식을 파괴하고 실존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
     중심적인 사고의 전망을 극복해야만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성을 통찰 할 수 있게 된다."

   어떠한 해석도 단한번 그리고 모두에게 있어서 올바른 해석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절대적 the 해석은 없다. 모든 주류 문화에 대한 컬트 문화는 
  그래서 존재할 수 있는 당위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적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에 있어서 당대의 주류는 역사가 흐르면서
  재해석을 하게 될 경우에 여지없이 비주류가 될 수 있으며 당시대에
  배척된 이단은 다른 시대에서 중심 사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역사가 보여준
  해석학적 사실이요 양태였다. 
  
   매 시대마다 플라톤, 단테, 세익스피어, 밀턴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져 
  왔고 이미 우리는 동양에서 금세기 이내에 라오쯔, 콩쯔, 멍츠 등의 철학들이 
  여러차례 정치적인 재해석을 해오면서 숙청과 부활의 해석학적 변화무쌍한
  잦대로 재해석되어온 중국의 현대사를 보아왔다. 모택동이나 톨스토이, T.S 
  엘리어트, 그리고 헤밍웨이는 물론 헤라클레스나 오딧세이 등의 고대 신화 
  등이 해석까지도 아무도 그 평가가 끝났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양의 기독교가 맹종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인도나 희랍 중국의 
  종교와 사상은 제거되어야 할 `사탄의 것'으로 배척되었으나 오늘날 서구의
  나스티시즘(Gnosticism)이나 인돌로지(Indology) 그리고 시놀로지(Sinology)는 
  새로운 리바이탈라이제이션을 맞이하고 있다. 그같은 오랜 인류의 사상과
  전통에 대한 해석학적인 새로운 접근을 지난 한세기동안 추구해온 흐름의 
  결과인 것이다. 아울러 세계의 문화이해와 그 해석의 방법론은 바로 그같은
  다양한 인류전통의 인문 사회과학을 바탕으로 재해석되고 재참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하나의 역사와의 대화이자 그 현재적인 참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Michael Polanyi는 <Personal Knowledge>에서 말한다. 우리는 "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에 대한 선언에서 기원과 인과성 및 신경학적
  내력 등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조급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문학 해석의 
  구체적인 앎이 갖는 풍부함과 복합성에로 돌아가자는 것에서 역사성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해석이란 각 개인의 인식론적 능력에 따라 차이(difference)가 있다.
   그러나 모든 해석은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인식이라는 컨소시엄을 
   형성하면서도 독자적인 관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현재적 해석이며 참여적 해석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한국인이면 어릴 때부터 수없이 가르쳐져 왔던 누구나 아는 다음의
   시조에 대한 그야말로 나의 해석학적인 풀이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는 단순한 권학시조가 아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그 `태산'이
   결코 단순한 `높은 산'만 말하는 것이 아닌 중국의 산동에 있는 태산으로 
   해석 하면서 16세기의 그 시조의 작가적인 의식을 초월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중국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던 `황제의 산'인 태산을 `사람'인 우리
   조선사람들도 오를 수 있어서 우리도 `황제'에 버금할 수 있다는 탈 
   중화사상으로 풀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해석은 모든 곳에 숨어 있다. 
   이것은 나의 해석학적 명제이다.

  
                                               
  
  
                                                오두방정(namsan)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