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lone (김보성) 날 짜 (Date): 1995년01월10일(화) 19시13분51초 KST 제 목(Title): 민족사고(民族史考) 단군신화? 3 민족사고(民族史考) 단군신화???????? 3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후 3.1 독립선언 때까지 강제로 빼았아 불태워버린 우리 의 사서는 무려 20만권에 달한다. 그 20여 만권의 사서는 바로 우리 민족의 기 원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혀주는 사서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사서를 탈취,소각,인멸하는 데 열을 올렸던 일제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제왕운기는 그대로 두었다.왜냐하면 '삼국사기'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 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말도 없고 '삼국유사'는 승 일연이 단군을 불교 신화로 각색했기 때문이다.결국 두 사서는 일제가 '단군'을 부정하는 데 써먹었던 것이 다. 그러나 일제와 그 앞잡이가 눈에 불을 키고 없애려 들었지만 그 마수를 피하여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단군왕검에 대한 사서가 있다. 일제가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서 우리의 사서를 약탈하여 '조선사 편찬사업'을 벌여 놓고 우리 역사를 말살,왜곡하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던 시기를 전후하여, 절멸되어가는 우리 역사의 명맥을 살려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광복 후에 올바 른 우리 역사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우국지사와 재야 사학자(왜 재야가 될 수 밖 에 없었는가!)들에 의해서 펼쳐졌다. 그분들 중에 어윤적,윤재구란 분들이 계셨 는데 두분 다 구한말의 사학자로서 조선사 편찬위원회 위원과 조선사 편수회 위원으로 일제의 조선사 편수 사업에 참여했던 분들이다. 어윤적이란 분은 대한 제국 학부 편집국장을 역임한 분으로 소중한 우리의 사서 20여만권이 약탈,소 각당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사서가 모조리 절멸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제왕 연대력'이란 사서를 바탕으로 수산집의 동사,성호집,풍속고,동사강목,해동역사, 동국통감,연려실기등을 집대성하여 1915년 9월에 '동사연표(東史年表)'를 간 행하였다. 윤재구 또한 겨레의 정사(正史)가 말살된 것을 몹시 애통하게 생각 하다가 1938년 조선사 편수 사업이 끝난 후 고향 전라남도 나주로 낙향하여 서 계수와 같이 1939년 1월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를 간행했다. 위의 두분 말고도 만주 관립사범학교를 나온 이창환이란 교사가 있었는데 그분 도 일제가 우리의 상고사를 말살,왜곡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중국 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고대 사료를 찾았고, 중국 고서를 비롯 조선 관계 사료를 빠지지 않고 섭렵한 후, 단군 조선의 발상지인 태백산(백두산)을 출발지로 만주 벌판의 고적들을 답사하여 자신이 직접 확인한 고적들과 각종 사 료들을 종합하여 귀국 후 20년만에 '조선역사(朝鮮歷史)'란 책을 냈다. 이렇게 우리의 선대들은 하마트면 없어질 뻔 한 상고사를 새로운 자료를 찾고 다시 저술해서 광복 후 조선의 정사(正史)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바라던 광복 후에도 그들의 피맺힌 노력은 빛을 보지 못하고 조선사 편수회에서 우리의 역사를 난도질해서 만든 '조선사' 가 우리의 정사로 활용되며, 어찌 목숨을 내걸고 이 나라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선대들이 찾고 만들어 놓은 사서들은 기피하고 있으니 이아니 통탄할 일인가! 이는 순전히 친일파들이 광복 후에도 제 자리에 박혀서 사회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병도같은 식민 사학자가 우리나라 사학계의 최고봉으로 군림 하면서 그 일제(日製) 머리답게, 우리 역사의 머리를 일제로 꼬리부분만 국산 으로 만들어놓아 오늘날 우리의 역사가 머리를 잃은 '꼬리역사'가 되고 만 것이 다. - 다음에 계속 - ----------------------------------------------------------------------------- 훔치 훔치 태을천 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파아 | s940123@ccs.sognag.ac.kr +-> 태을주 : 천지의 밥숟가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