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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ang (장상현)
날 짜 (Date): 1996년10월09일(수) 15시43분22초 KDT
제 목(Title): 할아버지의 수기 5


  조선어 학회 시절
 '조선어 연구회'는 창설된지 4 년 후쯤부터 훌륭한 동지들을 많이 얻게
되었으니,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 극로, 경도 제대를 졸업한 최 현배,
입겨 대학을 졸업한 김 윤경 씨 등이 입회하게 되어 점차 번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엇인가 보람있는 큰 사업을 벌이자는 의견이 나와 1929 년 한글날
대회에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으며, 우리말보다는 일본어를 국어라고
강요하고 있는 판에 우리말을 모아 놓은 사전 하나 없는 실정이니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말이 완전히 말살되어 버리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부지런히 서둘러서 우리말 사전으로 편찬하자고 분발하였다.
 이렇게 되니까 '조선어 연구회'의 이름이 너무 약하니 이름을 고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단순한 연구기관에 머물 수는 없었다. 연구회란 이름을 가지고는
이러한 사업이나 계몽, 선전을 하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논한
결과 조선어 학회로 고쳤다(1931 년 1 월). 그리고는 곧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사전을 편찬할 장소가 없었다. 아직 회관조차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 세권이라는 건축가가 화동 근처의 집 한 채를
기부하였다. 집이 좁아서 사무실로나 쓸 정도였다. 이 때 '조선 교육 협회'를
조직하여, 청소년 교육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유 진태 씨(과거에
나와 같이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였던 분)가 수표동에 있는 자기 집 방을 빌려
주어서 거기다가 '사전 편찬실'을 차리고 일을 시작하였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표기법이 통일되지 않아 일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
우선 표기법을 정리하기로 하고, 학회가 주관이 되어 전문가로 위원을 뽑아
진지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1933 년 10 월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1936 년
10월에 '사정한 표준말 모움'을, 1941 년 1 월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완성함으로써 사전 편찬의 기초 작업을 끝낼 수가 있었다. 이 약 10 년 동안에
학회 회원의 노고와 일반 사회 단체 저명 인사들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또, 사전 편찬에 직접 참여하여 애쓴 분은 당초의 사전
편찬 위원 이 극로, 이 윤재, 한 징, 이 용기, 김 선기 씨 등이고, 표기법
관계로 모든 사무가 '조선어 학회'로 통합되면서 새로 선정된 이 극로, 
이 윤재, 정 인승, 한 징, 이 중화, 권 승욱, 권 덕규, 정 태진 씨 등이다.
 이러한 사업과 병행하여서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여(1927 년 2 월 창간)
국어의 학술적 연구와 보급과 선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1942 년 가을 초벌 원고를 완성하고
일부는 인쇄에 넘어가게 될 무렵 세상이 다 아는 '조선어 학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1942 년 10 월).
 우리 동지들 30 여 명이 홍원 경찰서에 갇혀서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되어 불려 간 사람도 백여 명이 넘었다. 이 중에는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후원하여 주던 학계, 교육게의 명사들을 비롯하여 각계의
인사들이 구속되어 문초를 받거나 증인으로 홍원에까지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나는 검사국 심문을 마치고 잡힌 지 1 년 만에 함흥 형무소로 넘어갔다.
거기서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어 병보석으로 먼저 풀려 나왔으나, 함흥에다
거주 제한을 하여 떠나지 못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이 내리어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라나 곧 경성 헌병대에 또 잡아서 얼마 동안 갇혀 있다 풀려 나왔다. 그래
견딜 수가 없어 양주땅에 밭을 얻어 거기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이 되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후회 없는 90의 생애를 돌아보며

 해방이 되어 모든 동지들이 다 풀려 나오자 조선어 학회를 다시 부흥시켰다.
그런데 '조선'이란 이름이 마땅치 않다 하여 '한글 학회'로 고쳤으며, 당장
국어 교육에 필요한 국어 교재를 편찬하고 부족한 국어 교사를 양성하느라고
열심히 일하였다. 당국의 허가를 받아 '세종 국어 교원 양성소'를 세운 것은
1948 년 8 월의 일이었다. 나는 한글 학회 이사장 직과 교원 양성소 소장직을
맡아 힘드는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사전도 완결을 시켜야 되겠고, 교재도 빨리
만들어야겠고, 유능한 교사도 많이 양성하여야겠고, 할 일이 너무나 많았었다.
 한 5 년 동안 우리는 잃었던 우리의 소중한 보물을 되찾아 갈고 닦느라고
하루를 천 일같이 살았다. 6.25 사변만 나지 않았어도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었는데, 사변은 우리 민족에게, 또 우리 학회에게 큰 고난을 안겨다
주었다. 첫째, 우리 노력의 결정인 [큰사전]이 전 6권 중 3권만 나오고 중단된
일, 대학으로 발전시키려던 세종 중등교원 양성소가 사실상 문을 닫게 된 일,
모처럼 얻은 회관이 불타 버린 일 드은 국난 속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더욱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휴전 후 [큰사전]의 완간을 보았고, 각 대학에서
젊고 유능한 국어 국문학자와 국어 교사가 많이 배출되어서 이제 나의 마음은
한결 기쁘다.
 한편, 해방 직후 조 병옥 씨를 길에서 만났는데, 대뜸 나더라 가자고 하더니
어느 정당 사무실로 끌고 갔다. 거억이 확실치 않지만 보수 정당이었다.
가자마자 나더러 규약 강령 기초 위원을 맡으라고 한다. 그래서 얼마 동안
거기에 나가 일을 보았으나, 가만히 보니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나라를 재건하느 데보다 권리 다툼이나 사리사욕을 위하여 더 힘쓰는 것
같았다. 그 때 내 나이 60으로, 그 날까지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큰 잘못 없이
깨끗이 살아왔는데, 여기에 그대로 끼었다가는 앞으로 무슨 곤욕을 당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 진작 이 정당이라는 곳을 벗어나려 하였으나 무슨 구실이
없던 차에 '군정청 관리거나 교육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은 정치 단체에 참여할
수 없다'는 법령이 나왔다. 마침 군정청이 서고, 학무국이 일을 시작하게 되자
편수과 부과장으로 들어오라는 교섭이 왔다. 평생에 관리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새 나라 새 교육을 위한 교과서 편찬이야말로 내가 하여야 할 가장
보람 있는 일이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응낙을 하고 취임하였다. 마땅한 구실이
생겼으므로 정당에는 바로 사표를 내고 정치에서 손을 뗐다.
 사실 나의 과거는 학문과 교육 외에 직접 정치 운동(독립 운동)에 참여
하였었으나, 정작 우리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정치와는 인연을 끊은
것이다.
 1948 년 대한 미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동안 국민 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각종 교과서를 편찬하여 새로운 민주 교육에 공헌하였으나, 관리 생활을
좋아하지 않아 어쩔까 하던 참에 연희 대학에 국문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나는 관리 생활을 물러나와 연대 교수로 부임하였다. 여기에서의 10년이
나에게는 가장 즐겁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때이다. 사변으로 인한
2,3 년의 고생은 누구나 다 겪은 것이니까 할 수 없으나, 이 기간 동안에 나는
우리말, 우리글을 깊이 연구할 수 있었고, 후진들에게 마음껏 가르칠 수가
있었다. 가정적으로도 안정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70이 되던 해 정년으로 전임 교수직을 물러났지만, 대학원의 시간 강사로 5,6
년을 더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하여 일할 수가 있었다. 내가 대학 교단을 떠난
것은 76세가 되던 해이고, 그 후 오늘날까지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다.
 이상이 근 90 평생을 살아온 나의 과거이다. 갖은 파란과 고난을 겪은 쓰라린
과거였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후회란 없다. 나라를 위하여 나의 성의와 나의
능력과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여생을 우리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조용히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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