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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ang (장상현)
날 짜 (Date): 1996년10월09일(수) 15시43분01초 KDT
제 목(Title): 할아버지의 수기 4


  조선어 연구회 창설

 주 선생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시간을 맡아 가르치던 중 임 경재, 최 두선,
이 규방, 나 이렇게 몇 사람이 모여 의논을 하였다.
 "우리가 그냥 국어 연구만 하면 뭘 하느냐? 조직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 승빈 같은 이는 계명 구락부라는 조직체를 가지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또
 많이 선전하고 있는데, 우리도 조직체를 하나 만들자."
 이래서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게 되었으니(1921 년 12 월), 이것이 현
'한글 학회' 곧 '조선어 학회'의 출발이다. 발기인은 임 경재, 최 두선, 이
규방, 권 덕규, 이 승규, 신 명균, 나 이렇게 일곱 명이었고, 다음과 같은
규약을 만들었다.
 1.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다.
 2. 매월 한 차례 연구 발표회를 열고 때를 따라서 강연회, 강습회를 연다.
 3. 간사 3 사람을 두어 사무를 주관한다.
 이에 따라 임 경재 씨를 간사장으로 뽑고, 최 두선씨와 내가 간사의 일을
보았다. 사무실은 휘문 학교 교장실에 두어 매달 모임을 가지며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 나는 오래 몸담고 있던 경신 학교를 나왔다. 형제처럼 친한 친구 
권 덕규 씨가 중앙 학교에 못 있게 되어 그를 위하여 사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중앙 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권 덕규 씨가 술을 많이 마신다
하여 예수교 학교인 경신 학교에서 받아 주지 않아 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권 선생과의 의리를 생각하여서 나도 중앙 학교를 나와 양정 학교에 시간
강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 무렵이 내 생애에서 가장 복잡한 시기였다. 중앙의
최두선 교장의 권으로 다시 중앙으로 갔으나 교직 생활이 너무 평범하고
갑갑하여서 그만두고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의 사장은 월남 이 상재 선생이었고, 부사장은 나와
가까운 신 석우 씨였다. 처음에는 견습 기자로 교정부에 있었는데, 하루는 신
석우 씨가 보고 말하였다.
 "교정부에 있는 것이 창피하지 않아?"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얼마 후 나를 지방부장으로 올려놓고는 신문 제호
밑에 신 석우로, 편집인은 나로 바꾸어 놓았다(1928년 9월 - 1929 년 11월).
그런데 때가 때인 만큼 편집인 행세가 도무지 수월치가 않았다. 당시
왜놈들에게 붙어 날뛰던 각 지방의 도평의원이니 시협의원이니 하는 사람들의
행패가 심하여서 그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면 곧 경찰서에 잡아갔다. 그 때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하고 대들었다. 그라나, 그 당시 총독부의 신문지법이 매우 고약하여서, 
 "사실의 유무를 막론하고 남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을 게재할 때에는 유죄로
판결한다"로 되어 있어 저촉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종로 경찰서 사찰계와 검찰국을 내 집 드나들 듯하여 나도 모르게
전과 4범이 되었다. 그것이 호적에 오르고, 그 후부터 내 활동은 항상 제약을
받았으며 취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이 상재 씨가 돌아가고 신 석우
씨가 사장이 된 뒤에 나를 문화부장으로 옮겨 놓았다. 문화부장을 맡게 되면서
내가 가장 힘쓴 일이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을 이용, 중학교 이상 각급 학교 
학생을 동원하여 각 지방에서 벌인 문맹 퇴치 운동(부나르도 운동)이었다.

  신간회를 조직

 직접 가르치는 일은 학생들이 맡고, 나는 그들을 동원하여 파견하는 일,
간단한 독본을 만들어 십만 부, 이십만 부씩 인쇄하여 나누어 주는 일, 현지에
나가 그 학생들을 지도하고 독려하는 일, 시. 도 등에는 강습소를 설치하는 일
등을 맡아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에 우리 나라 전국에 안 간 곳이 없이 다니게
되었으며, 글을 깨쳐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된 사람이 삼십여만 명이 되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3년이 지난 뒤인데, 사장 신 석우 씨가 "우리가 이렇게 잠잠해서는 안 될테니
국민을 계몽하고 활동하면 깨우치게 조직을 만들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합법적인 단체를 만들자"고 제의하였다. 여기에 동조하여 모인 사람이 
신 석우, 조 병옥, 홍 명희, 안 재홍, 이 승복, 이 관용, 나 들로서 이들의
발기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1927년 1월). 신간이란 이름은 옛 말처럼 고목에
새 줄기가 나듯 새 움이 터 남을 상징한 것이다. 조직은 총무부, 조사부,
교양부를 두고 각 지방에 지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안 재홍, 조 병옥,
이 관용, 홍 명희 씨 등이 각 부의 간사가 되었으며, 나는 조사부 상무 간사를
맡았다. 회가 조직되니까 각 지방에서 다투어 지회를 조직하여 그 규모가
삽시간에 커졌다. 서울에도 지부가 생기어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공산당으로 활약하던 사람들까지 참여하였다. 동시에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여류 기자 최 은희 씨가 주동이 된 회로 신간회와 뜻이
같은 여성 단체였다.
 나는 조선일보의 편집일을 보면서 신간회와 근우회를 위한 난을 따로 만들어서
본부와 지부의 활동 상황을 소상히 보도하였다. 그러자 총독부에서 또 시비가
왔다.
 "일반을 위한 신문인데 특별히 신간회와 근우회의 기관처럼 보이니 어떻게 된
 거요? 우리가 눈을 다르게 뜨고 주시하고 있소."
 이 말을 들은 사장이,
 "우리가 신문은 신문대로 유지해 가면서 일을 하여야 할 텐데, 저 기세로 보면 
 조선일보가 큰 벌매를 맞을 테니 좀 삼가기로 합시다."
라고 하여 그 난을 없앴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순 문화 사업에 전념하기로
하고, 국민의 계몽을 위한 잡지를 계획하여 사장의 허락을 받아 소년 잡지와
농민 잡지를 아울러 발간하였다.
 그 뒤로 저선일보서의 경영이 순탄하였더라면 나는 그런 일에 더 종사 하였을
것이나, 내가 조선일보사에 들어간지 7년만에 경영이 어려워서 사원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신문 제작도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자 유력한 부호
몇이 고등게 형사 이 경렬과 짜고 조선일보사를 넘겨 맡으려고 하였다.
신 사장은 민족의 대변지를 차마 그런 자들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버텼으나
얼마 후에 방 응모 씨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신문사를
나왔고 나는 양정 학교로 갔다.

  일본에 아부한 한인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지만, 한일합방이 된 이듬해(1911년)에 총독부 학무국
편수부에서 황국신민의 교육에 적당한 교과서를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물론
모든 교과서를 일어로 하고, 일본 황국신민의 긍지를 가지도록 그 내용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어 교과서만은 우리말로 하여야겠는데, 철자법이
통일되지 않아 교과서 편찬이 어렵게 되니까 '조선어 교과서 편집 철자법 정리
위원회'란 것을 만들었다. 이래서 1차 철자법이 제정되었고, 1921 년 다시
'보통 학교 교과용 도서 언문 철자법 조서 위원회'를 구성하여 2차로 '개정
언문 철자법'을 확정하였으면, 그 뒤 교육가와 일반 여론으로 개정이
불가피하다 하여 1928 년 3 차로 개정을 하게 되었다. 그 때의 위원은 14
명인데, 일인 위원은 타카하시, 오구라 등 경성 제대 교수와 총독부 통역관
니시무라, 후지바, 타나카 등이었으며, 일본에 아부하는 조선어 연구회장 
이 완응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인신보 편집구장 김 상회 등과 권 덕규, 신 명균,
심 의린, 최 현배, 정 열모, 이 세정, 나 등이 참가하였다. 이 심의회는 여러
달에 걸쳐 총독부 제 1 회의실에서 열렸다. 토의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 의견
차이로 언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의견의 차이가 개인에 따른 차가 아니라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과의 차이로 갈렸던 것이다. 가증스러운 것은 같은
한국인이면서 이 완은, 김 상회 등이 일본에 부동하여서 엉터리 수작을 하고
억지 떼를 쓰닌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중 양식 있는 일인이 민망하였던지
하루는 니시무라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장 선생,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하고 묻는다. 나는 짐짓 비꼬아서,
 "총독부 순사가 제일 무섭더군."
하니, 그는 딱 잘라서,
 "그런 소리 마시오. 지금은 무식한 사람이 제일 무섭소."
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일본측 위원이 잘 모르고 떠들어대니까 한 소리다.
 학무국 편수관은 우리 이론이 옳으니까 쫓아 옳다고 우겼다. 합의된 통일안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비교적 잘 되었다. 그래서 이대로 결정하자고 하였다니,
일본 관리들은 이것은 우리끼리 결정을 하였으니 국내에서 조선어의 최고 권위
학자에게 의견을 들어야 최종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누군가
하였더니 가나자와이었다. 그는 며칠 후 나타나 우리의 안을 훑어 보고 다
좋은데 'ㅎ'받침만은 쓸 수 없다고 하고는 빠쁘다는 핑계로 총총히 일본으로
떠나 버렸다. 잠간 와서 'ㅎ'받침 하나를 떼먹고 가 버린 것이다.
 총독부의 철자법 통일안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출판사를 경영하는
친구 양 재기 씨가 찾아와, 지금 철자법이 공표되기 전에 먼저 내가 철자법안을
써 주면 자기가 곧 출편하여 주겠다고 조른다. 마침 총독부 회의에 참석하면서
통일안이라는 것을 하나 만든 것이 있었다. 이것을 조선일보에 특별 기획으로
연재하던 중 거의 완결 단계에 있었으므로 그 원고를 그대로 내 주었다.
그랬더니 '조선어 철자법 강좌'라는 이름으로 호화 양장본을 만들어
출판하였다(1930 년 8 월). 이것이 나에게는 최초의 저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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