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ang (장상현) 날 짜 (Date): 1996년10월09일(수) 15시42분44초 KDT 제 목(Title): 할아버지의 수기 3 3 . 1 운동의 열파 속에서 이렇게 내려오면서 '흰얼모' 활동을 계속하여 오는데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미국 대통령 '윌슨' 씨가 저 유명한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게 되자, 국내 각 종교의 지도자들이 이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고자 모이게 되었으니, 이른바 3 . 1 독립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거사를 사전에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마침 고종 황제가 돌아가셔 인산날이 멀지 않은 때였는데, 그 사인에 의혹이 짙어서 민심이 분분하던 때이다. 이 때라고 생각한 우리들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새라 즉각 행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 경 현수라는 노학자 한 분이 주장하기를, "고종이 돌아가셨으니 그 후계자 한 분을 세우자. 우리는 이 때까지 군주 정치를 해 와서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끊을래야 끊을 수 없으니 군주를 세우고 왕통을 이어갈 분을 찾아 세우자. 지금은 고종 황제께서 돌아가셔서 빈소에 모시고 상 끝날 때가 되어 국민이 많이 모여 곡을 하고 있을 때 의친왕을 모시고 들어가 애통을 표하고 종묘에 주인이 없으니 주인을 세우자고 하며 재궁 옆에서 즉위식을 하고 독립 선언을 거기서 하자." 고 하였다. 처음엔 우리도 그 뜻이 좋을 듯하였으나(순종이 생존하였으나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임금을 다시 세울 수는 없겠으므로) 잘 될 것 같지 않아 겉으로는 "예! 좋습니다" 하면서 빠져 나왔다. 곧 '흰얼모'의 모임을 가지고 우리끼리 의논한 결과 '독립 선언'은 종교계에서 한다고 하지만 그냥 독립 선언만 하여서는 이 국민을 모두 일으킬 수 없다. 그러니 독립 선언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국민들을 격동하여서 모두 참여하여 이 독립 운동이 전 민족의 운동이 되도록 하는 일을 하자고 결정하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고종황제의 승하가 천수를 다한 것이 아니고, 간악한 왜놈의 책동과 매국노의 더러운 손에 의하여 피살되었음을 백일하에 폭로하여 국민들의 의분을 격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때마침 인산날이 임박하여 경향 각지의 남녀노소가 많이 모여 있으니, 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자연히 고향에 돌아가 전할 것이고, 그래서 짧은 동안에 전국에 퍼질 것이라는 것도 계산에 넣었다. 이 일에 주동한 이는 '흰얼모' 중에서 조 규수, 김 정섭, 신 경우, 노 대규, 나 등이었다. 이런 일은 은밀히 하여야겠기에 교남동 132번지 내 집에 모여서 하게 되었다. 우선 선언문은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이던 조 규수 씨가 지었는데, 지금 그 내용은 완전히 기악하지 못하나 민중을 격동시키기에 알맞은 명문이었다. 제목은 '포고문'이라고 큰 글씨로 쓰고,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써 나갔다.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온 우리가 문화라든가 역사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데 웬 억지손에 의하여 간악한 일국에 눌려 국권을 잃어버리니 이럴 수가 있느냐? 세계의 대의에서도 그냥 볼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강화 회의가 '파리'에서 열리는데 거기에 특사를 보내려고 하니까 먼저 고종 황제를 없앨 양으로 독약을 바쳤는데, 거기 앞장선 놈이 윤 덕영이고, 그 독약 심부름을 한 놈이 한 창수로 식혜에다 독약을 타서 드렸다....." 고종의 의문스러운 죽음 여기서 고종의 승하 경위에 대하여 한 마디 하여야 되겠다. 이 일은 그 때 총독 하세가와의 사주를 받아 윤 덕영 일당이 저지른 것이다. 여기에 가담한 이로 알려진 사람 가운데는 현재 존경받는 교육계와 종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끼여 있으나 차마 그 이름을 밝힐 수 없고, 윤 덕영, 한 창수는 세상이 다 아는 자들이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데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내시이던 이 병정이 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전한 이야기로는 고종이 돌아가실 때 코와 입엣 피가 나왔다고 하니 독살이 틀림없지 않는가? 선언문이 다 되자 끝에 '융희 13년(사실상 '융희'라는 연호는 4년이 마지막이었지만) 2월 28일 국민 대회'라고 썼다. 그런데, 이 선언문이 신빙성이 있으려면 대회인이 있어야 되겠는데 어디서 그런 도장을 갑자기 새길 수 가 없어 걱정을 하였더니, 조 규수 씨가 즉석에서 '국민 대회'라는 도장을 새기었다. 여러가지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르다가 글자의 순서가 바뀌어 '대회 국민'이라고 새겼다. 급한 김에 내가 그 도장을 둘로 쪼개어 옳게 맞차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을 널리 퍼뜨리려면 인쇄를 하여야 하는데 등사판이 없었다. 그 때는 왜놈들이 등사판을 눙이 뒤집혀서 찾고 있을 때라 쉽게 구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 때 신 경우 씨가 나서서 내가 구해 올텐데 그냥 빌린다고 할 수 없고 산다고 하여야 할 테니 20원만 달라고 하여 나가더니 얼마 후에 구하여 왔다. 그 당사기는 윤전 등사기로 성능이 꽤 좋았다. 당장에 2천장을 박아 냈다. 종이 사고 뭐 사고 하는 것은 별 수 없이 내가 맡아 하였다. 낯선 사람이 자주 출입하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으니까 퍽 조심하였던 것이다. 밤이 되자 둘씩 짝을 지어 풀하고 선언문하고 들고 거리로 나섰다. 남대문--을지로--동대문 방면, 서소문--종로--동대문 방면, 서대문 일대, 이렇게 세 방향으로 나뉘어 붙이러 다녔다. 여관에는 여러 장씩 넣고 서대문에도 한 장씩 붙였다. 나는 신 경우 씨와 한 짝이 되어 서소문 방면을 맡아 서소문 문짝에도 붙이고 종각에도 붙이고 하다보니 새벽 세시가 다 되었다. 다행히 그 당시는 인적이 드물어 은밀히 붙이고 다니기가 쉬웠다. 다 붙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순검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체 주정을 하였더니 무사히 놓여 올 수가 있었다. 집에 와 보니 벌써 새벽이 되었다. 잠간 눈을 붙이고 깨어 살피니 거리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전날 등사할 때에 33인 중의 한 분이 와서, "우리가 큰 일을 할 텐데 여기서 발각이 나면 어떻게 하나?" 하며 자꾸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은 먼저 먹는 약이야. 당신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자극을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 이 기회에 시골 선비들이 알게만 되면 되니까 염려 말고 가서 할 일이나 하시오." 이렇게 하여 놓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 냈던 것이다. 대한문 앞에서 곡하며 아침 일찍 나는 베두르마기에 백립을 쓰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곡을 하였다. 인심의 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그랬었다. 과연 모두들 술렁술렁하고 방이 붙었느니, 그런 줄은 몰랐느니 하며 야단들이었다. 아주 격동이 되었다. 그래 "이제는 됐다"하고 시치미를 떼고 내 근무처인 경신 학교로 갔다. 거기에는 학생 회장이 우리가 쓴 포고문을 학생회증이라 하여 봉투에 넣에 편지통에 넣었다. 그것을 본 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들었다. 선생들도 걷잡을 수 없는 노도 그대로였다. 만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탑골 공원으로 갔다. 거기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술렁거렸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때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하고 그 대표가 탑골 공원에 와서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드디어 불은 질러졌다. 탑골 공원에 모인 각 학교 학생과 시민은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모든 시민이 합류하여 온 장안이 만세의 물결로 뒤덥였다. 이를 제지하기 위한 일본 관헌들의 포악무도한 잔학 행위는 우리가 다 아는 일이지만, 더욱 가증스러웠던 것은 일부 한국인 형사들이었다. 내가 아는 김 옥현이라는 자는 "나도 한국 백성인데 만세를 불러야지" 하며 춤을 추듯 돌아다니면서 학생, 시민 등에다 분필로 동그라미를 표시하여 두었다가 해질 무렵 돌아갈 때 모두 잡아 갔다. 또, 진고개에 살던 왜놈들은 죽창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한국인을 막 찔러 죽였다. 그 당시 참혹하던 일은 지금 생각하여도 몸서리가 쳐진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33인이 주동한 독립 선언 및 만세 운동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이 분기하도록 불을 질러 놓았고, 또 각 지방으로 빠르게 파급되게 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그 때 모든 독립 운동을 주동한 사람, 가담한 사람, 심지어 만세를 부른 일반 시민들까지도 모두 잡히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주동한 사람들은 몇 년씩 징역을 살았었다. 우리 동지들도 잡혀 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지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이렇듯 불타는 애국심과 거칠 것 없는 용기와 굳은 의리를 가진 동지들이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만 남았다. 의친왕을 모시자 나는 그 때 신변이 위태로와서 시골에 내려가서 얼마간 숨어 있었다. 좀 바람이 가라앉은 듯하여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하루는 길에서 나 창헌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는 대동당 당수 전 협의 일을 돕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전하기를, 전 선생이 장 선생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대동당은 세상에서 다 아는 큰 독립 운동 단체였다. 당수 전 협 씨는 체구도 당당하고 참 점잖은 사람이었다. 나도 반가운 생각에 만나겠다고 하였더니, 만날 장소는 내가 새로 이사가 죽첨정(충정로) 집이 좋겠다고 한다. 우리가 만난 것은 기미년 여름인데, 전 협 씨의 이야기는 매우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그렇게 떠들다가 이렇게 잠잠해졌으니 이럴 수가 있소? 그러니, 우리 일 좀 합시다." 한다. 그래 나도, "아닌게아니라 걱정이오. 좋은 일을 생각하셨거든 말씀하시오. 내 힘껏 도와 일을 하리다." "그럼 내 생각을 말하리다. 지금 상해에는 임시 정부가 섰소. 그러나, 우리 나라가 오랜 군주 국가로 내려온 터이니 지금 대통령을 세운대야 이 민족의 단결이 이루어지기 어렵소. 하니 우리 왕을 하나 세웁시다." 내가 깜짝 놀라, "왕을?" 하니까, 그는 말을 이어, "아니, 고종 황제의 아드님 한 분을 모시고 상해로 나가서 한나라 말년에 소의 황제를 세우듯 하면 인심이 움직여질 것이니, 우리 임시 정부를 우리 왕통 정부로 만들어 봅시다." 한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그도 좋은 방법일 듯하였다. 그래서 나도 찬의를 표하면서 그 방법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내가 의친왕을 모시고 나갈 생각이오." 한다. 그 당시 의친왕을 모셔 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까 통감부 고등 정탐으로 소문난 정 운복을 포섭하여서 그의 도움으로 의친왕을 모셔 낸 다음 상해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는, "의친왕을 모셔 내오면 곧 남대문역(지금 서울역)에서 시차를 타고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가겠소. 물론 변복을 하고 갈 거요." 라고 한다. "전 선생, 부디 성공하기를 빌겠소." "장 선생, 한 가지 해 줄 것이 있고." "뭔데요?" "선언문을 지어서 우리가 떠난 다음에 즉시 그것을 시민들에게 발표하시오. 그 점도 다 유의해 놓았소. 선언서를 짓거든 나 창헌 편에 보내주시오. 그러면 인쇄해서 보내겠소. 내가 아는 여류 독립 운동가 김 선이란 부인이 차를 하나 빌릴 수 있다니까 그 차를 이용하여 선언문을 전 시가에 뿌리도록 하시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수락하였다. 곧 새로운 독립 선언문을 지었다. (지금 생각에는 잘 쓴 것 같은데 한 장도 남겨 두지 못함이 한이다.) 독립하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무렵 옛날 중국 낙빈왕이 무칙천을 토벌할 때 쓴 격문을 많이 읽었을 때라 그 글귀, "청컨대, 보아라. 오늘날에 마침내는 이것이 누구의 천하가 되겠느냐. 다 쳐서 멸하겠다." 를 인용하여, "보아라. 이 앞날에 우리 나라는 마침내 누구의 나라가 되겠느냐.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로 끝을 맺었다. 이틀 후 나 창헌이 원고를 가져갔다. 곧 인쇄를 하였다. 그 다음날 연락하는 사람을 통하여서 알아보니, 의친왕을 무사히 모셔 내 갔다 한다. 의친왕에게는 상복을 입히고 방갓에 포선을 두르게 하여 완전히 변장을 하였으며 차를 타고 떠난 것을 보고 왔다고 전하였다. 그 때 나는 수배중인 몸이었으므로 김 선 씨 혼자서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그러나, 김 여사는 동대문 채 못 가서 일경에 잡혀 갔고, 의친왕도 압록강을 건거기 직전에 수색에 걸려 일경에게 잡혀 그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 어인 불운의 연속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