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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ang (장상현)
날 짜 (Date): 1996년10월09일(수) 15시42분19초 KDT
제 목(Title): 할아버지의 수기 2


 교육계에 첫발

 그 무렵 '청년 학원'이라는 사립 중학교가 설립되었다(종로에 있던
'청년 학관'과는 다른 것임). 그 때 원장은 월남 이 상재 선생이었고, 현 순
목사, 유 일선 씨 등이 이어받았다. 특히 현 목사는 독립 운동 목사로 유명한
분이다. 이 밖에 거기 직원은 아니면서 늘 들르던 분을 기억나는 분들은 
이 회영(이 시영 씨의 형님) 씨, 여 준 씨, 이 동녕 씨, 백 남일 씨 등이었다.
이 승만 씨도 청년으로 가끔 왔었다. 그 분들은 학원 사무실 자그마한 방에
가득히 모여서 담론하곤 하였다. 그 때 나는 그 분들 모두가 나에게
존장이었으므로 옆에서 그 어른들의 뜻있는 말씀을 들으며 그 분들을 위하여
돕는데 보람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어른들이 나를 부르시더니, 
 "너 시골로 가거라."
하신다.
 "시골 어디로 가라십니까?"
하니,
 "지금 평안 북도 정주의 오산 학교가 매우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설립한 학교인데, 그 설립자는 정주 사람 이 승훈 씨로 호는 남강이다. 생각이
 열렬하고 투철한 분이야. 그래서 우리 국민을 정신적으로 양성해 보겠다고 
 옛날 선비들이 모여서 글짓던 승천제라는 집에다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게
 바로 오산 학교지."
 그런데 말씀을 들어 보니, 오산 학교는 공부를 가르치는 일보다 독립정신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총독부 시학관이 시학을
왔다가 하는 말이,
 "나는 학사 시찰을 왔는데, 와서 보니 병영에 와서 군사 시찰을 하는 꼴이
 되었군."
하더란다. 결국 왜놈들은 이 학교가 불온한 학교라 하여서 폐쇄시킬 목적으로
이 승훈 씨를 잡아다가 제주도로 귀양보냈던 것이다(1911년 5월). 그러니,
학교의 주인이요 기둥인 남강이 없는 이 학교는 자연히 문을 닫게 된 것이었다.
어른들은 이러한 사정을 말씀하시더니,
 "학교의 재정도 없고 하니 누가 선생으로 갈 사람이 있겠느냐? 그러니 너하고
 아무개 아무개 너희들 다 젊은 사람이지. 너희들은 집안이 살기도 괜찮고 하니 
 월급 받을 생각 말고 거기 가거라. 참, 갈 때는 너희들 쓸 것 너희 집에서
 가져가거라. 거기서 아마 밥은 해 줄 거다."
 내가 공경하던 어른들의 말씀이므로 서슴지 않고,
 "예 가겠읍니다."
하고 바로 떠났다. 거기 가서 보니 과연 민족 정신을 양성 배양하는 정신
집단임을 절실히 보았다.
 내가 그 곳에 간 지 얼마 안되어 '105 인 사건'이 터졌다(1911 년 9 월).
남강 선생은 연루자로 구속되어 10 년형의 선고를 받게 되었으니, 학교 사정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얼마 동안 지내다가 더 있기가 어렵게 되어 서울로 돌아와
청년 학원에서 시간을 맡아 가르치게 되었다.

 무명옷을 짜서 입고

 청년 학원에 다니는 동안 내가 공경하던 휘문 학교 교장 임 경재 씨, 청년
인재 양성에 진력하던 유 진태 씨 등과 자주 만났다. 이 무렵 인도에서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으로 자활하겠다는 뜻으로 우선 자기 옷을 자기 손으로
짜 입는다 하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 곧 임 경재 씨, 유 진태 씨, 그리고 그 때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설 직조 공장을 하던 김 덕창(종로 3가에서 덕창
직조 회사를 경영하였다) 씨, 나 이렇게 몇 사람이 이야기가 되어 우리 나라를
다시 살리는 길을 첫째 경제 자림, 둘째 문화 독립에 있다고 보아 그 운동을
위하여 '물산 장려회'를 만들고, 우선 '간디'를 본받아 우리도 직접 무명을
짜서 옷을 지어 입자고 하였다. 물론 그 때는 구식의 수동식 기계로 무명을
짰다. 이 일을 시작하니까 원료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시골 목화를
모아서 시골 부인들이 물레로 고치를 만들면 이것을 덕창 직물 공장에 가져와서
무명을 짰다. 이 고치 모집 책임을 내가 맡았는데, 주로 고양, 통진, 김포
등지로 다니며 모았다. 시골 부인들은 돈이 생기니까 부업으로 많이 하였다. 이
무명에 검정물을 들여서 주로 두루마기를 지어 입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이것만 가지고는 독립 운동에 기초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청년 학원 시간을 보면서도 항상 내 속마음에 학교 교육은 내게는 부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제자들이 생기고 또 마음에 맞는
사람이 생기니 뜻이 강렬하고 정직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20명쯤 모였다.
우리들은 모이기만 하면 왜놈을 어떻게 물리치느냐? 또 어떻게 하면
독립하느냐가 화제의 촛점이었다. 그러다가 여 준, 이 동녕, 이 회영 씨 등은
북만주, 노령, 상해 등지로 흩어져 외국에서 독립 단체를 만들어 돌립 운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우리는 직접 지도하는 지도자는 잃었으나 은밀한 교신을
통하여 의논도 하고 지시도 받았다. 그렇게 되니까 우리도 조직체를
만들어야겠기에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손가락을
쪼개어 피를 흘려 가지고 혈서 동맹까지 하였다. 그 때 단체 이름은 
'흰얼모'라고 하였고, 나중에 상해 임시 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한자로
'백영사'라 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조직적 단결이었으며, 상해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이 회영, 이 동녕 씨가 중요직을 맡게 되면서 더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청년 학원은 지도자들이 다 해외로 떠나고 나니 남궁 억 씨를 청하여 원장으로
모시고 내가 학감이 되었다. 그 시절에 생각나는 사람이 김 윤경, 윤 복영(협성
학교) 씨 등이다. 비록 지도자는 떠나셨지만 우리끼리 단결하여 무엇이든
하자고 맹세하였다. 이렇게 되니까 총독부에서 이 곳은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고 독립 운동하는 곳이라고 폐쇄령을 내려 청년 학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청년 회관의 공개 토론회

 한편, 주 시경 선생은 그 당시 설립된 학교마다 국어 시간을 설강케 하고 그
시간을 전부 맡으셨으니, 그 당시 학교로는 배재, 경신, 중앙, 보성, 휘문,
숙명 드이었는데, 한 주일에 45-46 시간을 맡아 하셨다. 선생님은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하여 의복은 남루하고 초라하였으며, 지금 같은 도시락이 없으니까
놋주발에 담은 밥과 놋수저를 노끈으로 짠 노망태에 담아 가지고 다니셨다. 또
한적, 필사본에서 많은 책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셨는데, 그 크기가 한
아름은 되었다. 그래서 한 쪽에는 노망태를 들고 한 쪽에는 책 보퉁이를 들고
걸어서 다니셨으므로 사람들이 '주보퉁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가셔서 저녁 어두울 때까지 그 무거운 보퉁이를 들고 이 학교 저 학교로
오직 국어를 젊은 학생에게 널리 가르치겠다는 일념 때문에 동분서주하셨으니
과로가 아니 될 수 없었다. 마침내 1914년 7월, 38 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니까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의지할 데가
없는 것 같았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김 두봉, 권 덕규, 신 명균, 나 등이
장례를 모시고 한 자리에 모여서 뒷일을 의논하였다. 주 선생 혼자서
맡으셨다가 돌아가셨으니 누가 맡을 것인가? 잘못 하다가는 국어 교육을 영
못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한 가닥 광명조차 꺼지고 말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한 결과 제자인 우리들이 나눠 맡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의 하였다.
 그래서 몇 명이 동행하여서 각 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휘문 학교 교장 임 경재
씨, 중앙 학교 교장 최 두선 씨, 보성 학교 교주 이 규방 씨, 배재 학당 교장
신 흥우 씨, 경신 학교 교장 미국 선교사 쿤즈 씨 등을 찾아가 우리의 뜻을
말하였다.
 "주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구겅 교육을 폐지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니 국어
 교육을 우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하니, 모두들 찬성하며
 "주 선생님의 제자로서 여러분들이 나오셔서 가르치니 이런 기쁠 데가
 없읍니다. 학교 배정과 시간표를 짜서 주시오."
 그래 나는 예수인이라 배재와 경신을 맡기로 하고 학교에 갔더니, 당장
내일부터 와서 가르치라고 하였다. 김 두봉은 휘문, 권 덕규는 중앙, 신 명균은
보성, 이렇게 배정을 하여 국어 교육은 정상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청년
학원이 폐쇄되는 바람에 배재와 경신에서 국어 교육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학교에 나가게 되면서 선생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그 중에 '흰얼모'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다만 가르치는 문제에만 서로 의논하곤 하였다. 나느
나대로 독립 운동을 하려고 '흰얼모'에 꼭 나섰다.
 그 무렵 박 승빈이라는 사람이 계명 구락부를 조직하고 기관지 <계명>을 내고
있었는데, 그도 국어학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체계란 일본 문법 그대로 흉내낸 것이다. 동사의 활용에 있어 일본의 4단
활용성을 그대로 흉내내어 국어에는 11단 활용이 있다고 한 것이라든지, 표기에
있어 '먹으니'를 '머그니'로, '잡으니'를 '자브니'로 적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에 동조하는 이가 정 규창, 최 남선 씨 등이었는데, 기관지가 있고 하여서
그 세력이 굉장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개별적으로 그들과 논쟁하다가 어느 날 임 경재, 최 두선, 권
덕규, 나 이렇게 모인 자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들과 공개 토론으로
대결하여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타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도 우리 제의에
응낙하였으므로 3일간 청년 회관에서 공개 토론회를 열고 그들 주장의 그릇됨을
통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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