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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ang (장상현)
날 짜 (Date): 1996년10월09일(수) 15시41분22초 KDT
제 목(Title): 할아버지의 수기 1


내가 걸어온 길
                  장 지 영

내가 태어난 해는 고종 24년(1887년)으로 우리 나라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끼여 부대끼고 있을 때였다. 그 후 을사년 보호조약, 병술년 합병조약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는 일조에 망하고, 왜족의 통치가 시작되어 우리 나라
역사가 끊어질 때 나는 20대 청년으로 직접 목격하였고, 또 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독립 운동을 하며 갖은 고초를 겪었었다. 그로부터 60년이나 지나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떴고, 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있기에 내 기억을 더듬어 지난 일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꼭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라든지, 이것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일이 풀려서 해명이 되겠기에 불가불 이야기하기로 한 것이다.

민족에 대한 자각의 계기

나는 메우 완고하고 한학을 숭상하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정교육을
받은 것은 순전히 유교 사상과 한문학뿐이었다. 이것이 내 생각이나 성격과도
맞아서 어려서부터 남에게 고루하다는 평을 들었다.
 내가 18세 되던 해는 갑진년(1904년)으로 노일 전쟁이 일어났다. 결과는 다
알다시피 일본군이 승리, 우리나라에서 러시아 군사를 내몰고 만주까지
쳐들어가 요동반도를 점령하였다. 그들의 승리는 육상에서만이 아니라
해전에서도 무적을 자랑하는 러시아 해군을 압도하였다.
 그 이듬해가 곧 을사년(1905년)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를 위협해 강제로
보호조약을 체결하였는데, 그 결과 우리 나라는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각국
공사가 철수하였으며,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에 이토오
히로부미가 부임하였다.
 이 때 충정공 민 영환은 마침 부인이 돌아가 장례를 치르러 시골에 내려가
있었는데, 장례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보니 이미 보호조약이 체결된 뒤였다.
이에 민공은 바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복각으로 올렸는데, 임금이
달래면서 물러가라 하여도 세계의 공의를 위하여 바로잡게 하여 달라고
항거하며 굳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이 가만 있지 않았다. 이토오는
임금을 위협하여 마침내 임금은 할 수 없이 잡아 가두라고 화를 내시기도
하였다. 황제에게 꾸지람을 들은 민 영환씨는 물러나와 집으로 갈 수 없다고
민공 집에 드나들면서 집안 일을 돌보던 사람의 집으로 갔다. 그날 거기서
민공은 유서를 썼다. 명함에다 석 장을 썼는데, 한 장은 정부에게, 한 장은
각국 원수에게, 한 장은 백성에게 썼다. 나도 유서를 보았지만 그것을 완전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고 기억된다.
 "자기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는 우리 나라로서 지금 역신들이 있어 왜족에게
국권을 넘겼으니 우리 국민은 앞으로 모든 종족이 환난 속에서 있게 될 것이다.
내 힘으로 뒤짐어 회복할 수 없어 먼저 가니 국민은 자강자립하여 국권을
회복하라."
고 하고 끝에 서명을 하였다.

 민충정공 잘렬을 따라

충정공이 돌아가자 조정과 백성들이 발칵 뒤집혀져 야단을 하였다. 그의 장례는
시민장이나 다름없이 모든 시민들에 의하여 지내졌다. 상여를 청진동에서 모셔
나가는데 상행을 보호하기 위하여 앞뒤로 무명줄을 매어 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붙잡고 갔다. 종로로부터 서소문으로 나가는데 나도
집불하는 사람 중에 끼었다. 그 때 상여꾼이 부른 '해로가'는 예사 것이
아니었다. 뜻있는 분이 참여하였으니까 충정공의 충성심과 우리 나라 장래의
운명, 우리 국민의 위기, 충정공의 장한 절개를 엮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런데, 그 곡조가 어떻게 비통한지 상여를 모시고 가던 사람 모두가 통곡을
하였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었다. 나는 그 속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예전엔 완고하고 중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두터웠는데, 그것이
변해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역사적으로 남의 종노릇밖에 못 하느냐?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냐?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우리도 자주 독립을 하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팽팽하여졌다.
 이와 같은 의식은 관립 한성 외국어 학교 한어과에 다니는 동안 더욱
강해졌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왜놈을 내쫓고 독립하여서 우리의 힘과 우리의
지혜로 살아갈 수 있나를 골똘이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게 되자(1906년) 우리가 당장 하여야 할 일은 첫째도 독립, 둘째도, 세째도
독립하여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당장 무엇을 어찌하여야 할지
마음을 작정할 수 없었으므로, 나보다 연세가 많은 고명한 분들과 사귀기
시작하였다. 그 분들에게서 많은 교훈을 받게 되었다.
 그 때의 형편은 일본의 세력이 팽창하여 경찰권과 군사, 외교, 사법권까지
장악하고 있어 섣불리 독립 어쩌고 하였다가는 잡혀가는 판국이어서 독립
운동을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었다. 대개가 숨어서 은밀히 동지들끼리 모여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이 비교적 마음놓고 쉽게 모일 수
있었던 곳이 예배당이었다. 적어도 한 주일에 한 번은 모일 수가 있고, 그
곳에서는 무슨 소리도 할 수 있었다. 서양 사람이 관련하는 곳에는 일본
검찰이나 경찰이 간섭을 못 하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 교회 중에 상동
예배당이 있었다. 지금 남대문로 3 가에서 4 가사이 수각다리 옆인데,
'상정승골' 또는 '상동'이라 하는 곳으로 옛날 상정승이 살았다는 유래가 있는
곳이다. 여기 지금도 남아 있지만, 상동 예배당(감리교) 안에 초등 교육을
위하여 소학교를 설립하였었다. 공옥학교란 이름이었는데, 그 학교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며, 나는 이 분들의 지도를 받으려고 교인도 아니면서 그
교회에 다녔다.

 위대한 주시경 선생

 이 무렵, 즉 내가 한성 외국어 학교를 졸업한 지 2 년 뒤인 1908년 나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뵉게 되었으니 바로 주시경 선생님이시다. 주 선생님은
황해도 태생으로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하시다가 17세 때 한문이 남의 글임을
깨닫고 우리글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나, 혼자서는 발전성이 없으므로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에 오신 후 독학으로 신학문을 접하다가 1894년 19세 때 배재
학당에 입학하시어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교내
인쇄소에서 일하며 학비를 보태시었다. 이 곳에서 주 선생은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셨다. 그런데 영어를 배우다 보니까, 미국 사람은 영어를 배우는 데 자기
말이라고 그냥 배우지 않고 법을 세우고 규칙을 세운 문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말도 이러한 법칙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리고 한문, 영어 따위를 배워 보니까 언어마다 그 선조가 다르므로, 남의
말의 문법을 그대로 우리말에 적용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 우리말에 맞도록
체계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셨다. 물론 주 선생 이전에 유 길준, 최 광옥, 
박 원식 같은 분이 문법책을 내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외국에서 배운 외국
문법을 본떠서 저술한 것들이었다.
 선생은 먼저 어학의 문전을 만드는 데는 학술어가 우리말이어야 되지 외국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영어나 일어를 배울 때 쓰는 명사, 동사 등의
술어도 한어이므로 쓰지 않기로 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조사하여 보니, 한문의
근원지인 중국에서는 사물의 이름은 정자, 활동, 사건 등을 일으키는 것은
동자로 쓰고 있음을 알게 되셨다. 그러니까 '명사' 따위의 명칭은 중국어도
우리말도 아닌 일본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술어를 순 우리말로 정하기에 많은
고심을 하셨으며, 우리말의 본질을 확실하게 파악하여 세우신 우리말의 문법
체계가 저 유명한 [조선어 문법(1908년 완성)]이다. 여기 이 책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겨를이 없으므로 우리말의 9가지 분류에 대하여만 간단히
소개하면,
 임(임씨) -- 여러 가지 몬과 일을 이름
 엇(엇씨) -- 여러 가지 어떠함을 이름
 움(움씨) -- 여러 가지 움직임을 이름
 겻(겻씨) -- 임기이 말이나 움기의 자리를 이름
 잇(잇씨) -- 한 말이 한 말에 이어지게 함을 이룸
 언(언씨) -- 어떠함이라 이름
 억(억씨) -- 어떠하게라 이름
 놀(늑씨) -- 놀라거나 느끼어 나는 소리
 끗(끗씨) -- 한 말을 다 맞게 함을 이름.
대개 이러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품사의 이름에 대한 나의 소견을 잠간 말하려 한다. 술어란
대개 몇 개의 낱말이 합성하여 이루어짐이 예사인데, 따라서 구성되는 낱말은
모두가 이름씨이어야 함이 원칙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주 선생의 술어는 잘
되었는데, 긴 이름을 피하여 줄여서 임씨, 엇씨 등 좀 생소한 느낌을 주기는
하나 습관하여 써 왔다면 아무 불편이 없었을 것이다. 위 술어 중 고쳤으면
하는 것은 언씨, 엇씨, 억씨가 서로 섞이기 쉬워 이것만 구별할 수 있도록
고쳤으면 좋았겠다. 요즘 술어 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일본식 한자 술어를
채택하는 것을 보면 유감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우리의 선각자 주 시경
선생이 창안하신 순 우리말 술어를 그대로 계승하여 개선하여 나가면 썼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얼굴을 붉히고 다툴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새삼스러이 거룩하고 높은 뜻을 지니셨던 스승님이 그리워진다.
 내가 주 선생님을 뵈었을 때는 문법 체계를 완성하시고 여러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내가 중학 과정을 다시 할 수는 없고, 또 일반적인 것보다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 위하여 그의 사저에 3년 동안 다니면서 배웠다. 나의
국어학의 기초는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나는 그 때 이미 신학문에 뜻을 두어, 마침 동경 물리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신 이 일 선생님이 창동에다 사사로이 정리사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자 거기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하였다. 이 선생은
'정리사 대학'이라고 하였지만 전문 학교 과정이었다.
 나는 1910년을 전후하여 국어를 비롯하여 중국어와 수학을 아울러 공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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