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guest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2mb18noma) **isok Guest Auth Key: c39a7f5a6117691fa38c5bde90170c92 날 짜 (Date): 2011년 06월 27일 (월) 오후 11시 12분 10초 제 목(Title): 유재흥과 현리전투 유재흥 장군이 군단장으로 참여했던 현리전투와 덕천전투의 글을 퍼왔다. 2군단 궤멸의 덕천전투와 3군단 해체의 현리전투...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7일-25일 사이에 현리지역에서 벌어진 희대의 패주극이다. 한국전쟁 초기 의정부방어전에서 7사단을 사실상 '해체'시켜버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침없는 북진중 예기치 못한 중공군과의 교전으로 한번 국군 2군단을 말아먹은적이 있는 (...덕천 전투. 청천강 부근에서 중공군에 사실상 포위 전멸당함 -_-;) 유재흥 장군을 도대체 무슨이유에서인지 한직으로 좌천되어있던 한강 방어전에서 눈여겨 볼만한 활약을 보여준 김홍일 장군 대신 국군 3군단(3사단, 9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인제 - 홍천 사이에 교통 요충지였던 오마치 고개가 있었는데 이곳은 미 10군단의 담당지역이였다. 하지만 이 요충지를 두고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국군 3군단장 유재흥 장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향간에는 유재흥 장군이 국군 30연대를 이곳으로 보냈다가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이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항의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철수 시켰다는 소리들이 있는데.. 그 국군 30연대장 손희선 중령은 훗날 "저는 오마치 수비 명령을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마치 고개 북쪽 고지에 배치되어 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명령받았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여기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몬드 장군이 관할권을 주장했을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당시 5월 대공세를 준비중인 중공군 정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관할지역 따위를 주장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월 15일이 되자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15일 인제지역, 16일에는 가평을 향해 엄청난 병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시 미 10군단에 배속되어 미 10군단의 우익인 인제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5, 7사단은 엄청난 병사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공군의 돌파를 허용해 버리고 말았다. 반면 가평지역은 영연방국가들로 이루어진 여단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훌륭히 방어해냈다. 그런데 중공군이 돌파한 인제을 통해 30km를 내달려 온 중공군 1개 수색중대가 우회침투해서 오마치 고개를 점령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초기에는 불과 1개 중대규모였지만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이를 보고 받고도 대응을 하지 않았다. 결국 중공군이 튼튼한 방어선을 마련한 다음에서야 위협을 인식하고 겨우 각각의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서 공격이 이루어졌으나 실패, 사실상 유일한 후방퇴각로를 상실했다고 느낀 국군 3군단은 병사는 물론 고위 지휘관들까지 공황에 빠졌버렸고 여기서 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몸소 병사들을 내버린채 연락기를 타고 후방으로 도망쳤다. 나중에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 이름을 떨치게 될 호랑이 장군 김종오 준장 (앞장서서 도망친 전례가 있는데 아직도 이 사람을 참 군인이라고 부르는 얼간이들이 있다), 9사단장 최석 준장, 군단 참모장 심언봉 준장은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도망쳤다. 군단내 모든 장군이 도망쳐버린것이다. -_-; 이 어처구니 없는 패주극에 대해 훗날 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연락기를 타고 작전 회의에 참석하러 간것이였다.' 라고 말했는데, 군단이 포위된 마당에 군단장이 포위되어있는 군단을 내버려두고 작전회의를 한다는것 그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주코프에게 포위 전멸을 당한 독일 제9군을 이끌던 파울루스 장군도 전선에 있었지 작전회의 한다고 전선을 이탈해 후방으로 간적이 없었다. -_-; 거기에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이때 유재흥 장군은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앞에서 다룬 문제의 30연대장의 증언과 백선엽 장군의 이야기를 조합해보면 결국 앞뒤가 안맞는 변명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군단장, 사단장이 모두 도망가버린 마당에 병사들은 간신히 소총정도를 휴대하거나 아예 그냥 민간복장으로 갈아입고 지휘관이 없는 3, 9사단은 무계획적인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군단이 사실상 와해되어버렸다. 일주일 가량의 전투아닌 전투의 결과 병력의 65%정도만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군단의 보유한 중화기, 야포(특히 군단 포병이 사용하던 최신형의 155mm야포)들은 모두 중공군에게 노획당했다. 미 8군 사령부에서는 미 10군단의 예비대였던 미 3사단의 2개 연대를 차출해 소방수로 투입. 거의 60-70km나 뚫고 들어온 적의 돌파구 차단에 나서게 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중공군의 고질병인 보급문제로 공세가 현저하게 약해진 시기에 왼쪽에서 운두령을 공격해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 역으로 포위, 공격함으로써 사태가 진정되었다. 하전부리에서 5월 20일까지 수습된 병력은 65%, 장비는 30%도 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전방 지휘소에서 만난 밴 플리트 장군과 유재흥 장군의 대화이다. 밴 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 유재흥 : " 잘 모르겠습니다. " 밴 플리트 :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 유재흥 : " 그런 것 같습니다. " 밴 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 이 희대의 탈주극으로 국군 3군단은 5월 26일부로 해체되었고 예하 9사단은 미 10군단에, 3사단은 국군 1군단에 배속되었으며, 육군본부에 존재했던 전방 지휘소가 폐지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