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guest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2mb18noma) **isok Guest Auth Key: c39a7f5a6117691fa38c5bde90170c92 날 짜 (Date): 2011년 06월 27일 (월) 오후 11시 17분 36초 제 목(Title): 유재흥과 덕천전투 이번에도 앞서 다룬글의 주인공이였던 유재흥 장군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앞서 쓴 희대의 탈주극 '현리전투'와 달리 이번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침없는 북진중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이외에도 미8군 예비대로 미 제1기병사단, 미 187공수연대, 영연방 29여단이 있었다. 미 8군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위해서 11월 24일 대동강을 향한 대공세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유재흥 장군이 이끄는 국군 2군단이 미 8군의 우익을 맡았고 그에게는 국군 6, 7, 8사단이 맡겨졌다. 이 당시에는 중공군에 대해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UN군 사령부는 전황을 낙관적으로 판단(물론 맥아더의 고집이 큰몫을 차지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전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작전 하루만에 모든 전선에 걸쳐 10km이상을 진격, 미군은 물론 유재흥 장군이 이끌던 국군 2군단에게도 중간 목표였던 원참을 점령하고 최종목표인 압록강까지 내달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쓸어버리고 조국통일을 이루는것은 쉬울것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자, 각지에서 중공군이 맹렬히 반격(10월 25일-11월 5일), 국군 2군단은 묘향산 부근에서 중공군과 큰 피해를 입었을뿐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미 1군단, 9군단은 힘들지만 그래도 진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26일에 야간 대공습을 감행하여 하루밤사이에 국군 2군단이 담당하던 영천과 덕천지역까지 '쓸려'버리기에 이른다.-_-; 이에 우측방이 완전히 노출됨에 따라 미 8군 사령관 워커중장은 정면으로 물량공세를 펼치는 중공군에 맞서기 위해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태새로 전환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묘향산만 내다보던 국군 7사단이 적군의 우회공격을 허용해버리는 바람에 어처구니 없이 덕천까지 밀려나고, 후방에서 사단 사령부에까지 대대병력 규모의 적군이 침투, 공격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당시 덕천에는 도로가 두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군우리로, 다른 하나는 북창으로 가는 도로였다.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중공군 때문에 모든 퇴각로가 막혀버린 상황에서 간신히 북창으로 가는 도로를 뚫어 8연대 일부와 사단장 신상철 준장만 무사히 도망(...)가는데 성공했다. 당시 사단 사령부에서 가장 가까운 내창천을 방어하던 8연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 즉 3, 5연대 이 중 사단본부에서 가장 떨어져서 좌익을 맡았던 3연대는 연대장 독단으로 군우리 방면으로 혈로를 뚫어 겨우 퇴각하는데 성공하였고(연대장을 비롯한 병력의 50%가량이 전사, 행방불명), 중앙을 맡았던 5연대는 사실상 전멸해버렸다.-_- (이외에도 50포병대대도 전멸당했다) 국군 2군단내 8사단이 맡고 있던 영원-맹산 루트는 압도적 병력으로 십여차례에 걸쳐 중공군이 국군을 포위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한채 간신히 16연대 하나만을 건질수가 있었다. 전선이 붕괴하고 있는 와중에 유재흥은 예비대로 있던 국군 6사단을 투입조차 안했으니-_-; 이는 미군이 취했던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동이었다. 미 9군단은 한국에 도착한지 40일 정도 지난 터키여단을 군단 우측방 방어뿐만아니라 11월 27일,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무너져 가던 국군 2군단을 구원하는데에도 투입했었다. (이과정에서 중공군에 포위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조직력을 유지한채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북창에서 덕천-맹산간 방어선과 거리는 12km가 조금 넘는 거리로 이정도면 미군에 비해 수송수단이 부족한 국군으로도 하루도 안걸려 이동이 가능한 거리였다. 이 방어선은 지형상 방어가 유리한 지역으로 여기에 예비대였던 6사단을 투입했으면 미 8군의 예비대였던 미 제1기병사단이 도착할때까지 충분한 저항이 가능했을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 1군단, 9군단과 함께 보조를 맞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퇴각이 가능했을것이다. 물론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이 모두 유재흥 장군에게만 있던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예비대조차 투입을 안해 더 큰 희생을 치루게 만들었다는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