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reeeXpression ] in KIDS 글 쓴 이(By): Luka (c) H. Son) 날 짜 (Date): 1996년02월15일(목) 03시45분48초 KST 제 목(Title): 어느날에... 춘수는 소를 몰고 개울로 나갔다. 초여름의 쌀쌀함이 느껴지는 초저녁이었지만 진흙이 흠뻑 묻은 녀석을 씻기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무동이라 이름 지워준 이 황소는 뿔이 아주 사납게 생겼다. 춘수의 일과는 새벽녘에 무동이와 함께 시작된다. 무동이가 자는 흙으로 지은 헛간을 청소하고 아침을 먹인 후 학교에 간다. 춘수는 십리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읍내의 중학교를 다닌다. 국민학교 역시 같은 읍내에서 다녔다. 고등학교또한 중학교와 붙어있는 종합고등학교를 다니게 될것이 분명하다. 방과후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다시 무동이와 같이 해야 한다. 무동이는 건너집 김부자가 2년전에 P시에서 사온 것이다. 춘수네 집은 김부자집의 농사를 비롯해 온갖 잡일을 맡아 함으로써 아쉬우나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춘수의 부친은 지난 전쟁 때 부모를 여의고 이런 저런 곳을 떠돌다가 이곳 상남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 김부자의 부친이 거두어 농사일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차자 춘수의 모친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녀는 군소재지인 흥천에서 "서울다방"이라 불리웠던 찻집의 종업원으로 있었다. 그녀가 춘수의 부친을 만나 살게까지 되었던 것은 순전히 김부자 모친의 중신 때문이었다. 별다른 이유없이 흥천엘 드나드는 아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고 근동에서 소문난 부자집에서 다방 종업원을 며느리로 들일 수는 없었다. 그보다 서울에 유학까지 시킨 아들이 그런류의 여자와 놀아나는 것을 ㅇ용납치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춘수의 부친과 그녀를 혼인시키면서 얼마만큼의 돈을 주어 서울로 떠나 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김부자의 모친은 둘의 혼인이 이루어지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애초에 춘수의 모친은 돈에 관심이 있었을 뿐 춘수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계획은 결혼후 서울로 가서 춘수 아버지를 떼어 놓고 도망할 생각이었으나, 김부자 모친의 죽음으로 그저 그곳에 머물르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김부자의 욕심도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둘은 바보스러운 춘수애비의 눈을 피해 만나고 있었다. 그러던중 춘수가 태어났다. 그때쯤엔 김부자도 혼인하여 춘수애미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춘수애미역시 그런 운명의 흐름을 자연스레 받아드리는듯 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떼어준 한마지기 돌밭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고 자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예쁘장하던 춘수애미의 모습도 시골의 잡일에 초라해질 무렵 태어난 것이 춘수 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춘수애비는 춘수가 크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듯했고 춘수애미역시 아이의 탄생이 어떤 계기라도 되는 듯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듯했다. 김부자역시 새로 얻은 아내에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잔잔한 강물처럼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었다. 춘수가 네살이 되던해에 김부자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모친과 잘생긴 김부자를 닮아 유난히 예쁜 딸이 태어났던 것이다. 상남뿐아니라 읍네에서까지 축하객이 몰려들었다. 아들이 아닌 것이 내심 섭섭하기는 했어도 첫아이를 갖게된 김부자의 입은 한껏 찢어졌다. 그 아이의 이름은 조령이라고 지어졌다. 소를 씻기던 춘수는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루에 네번 지나다니는 상남의 유일한 외부 교통수단이었다. 신작로의 한 귀퉁이에 잠시 머물다 떠난 버스에서 내린 조령의 빨간 책가방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김부자는 조령을 흥천시의 국민학교로 보냈다. 몇년이 지나도 조령의 동생은 태어날 기미조차 없었고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자식인 조령에게 기대가 커졌던것이 그 이유였다. 김부자의 마음에는 여성 법관으로서의 조령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조령의 춘수가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두서너번 흔들고는 집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춘수는 양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무동이를 몰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제 김부자집 헛간에 무동이를 집어넣으면 하루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길게 늘어진 춘수와 무동의 그림자 그리고 서산녘에 걸친 태양... 모든것이 평화로왔다. 이듬해 춘수는 예상대로 읍내 종합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조령역시 흥천시의 H여중에 진학하였다. 남달리 억척스러운 김부자 내외의 고집으로 남보다 한살 적게 학교에 보낸 조령이었다. 국민학교때 한번도 일등을 뺏긴 적이 없었다. 춘수의 일과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소를 돌보는 것 이외에도 농사일을 거들어야 하게 된것이 달라진 것이라면 달라진 것이었을 뿐이다. 다음해에 인문계와 실업계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다. 춘수의 운명은 실업계쪽으로 자연스레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의 종합고등학교는 인문반과 농업반 그리고 상업반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농업반은 그중에서 제일 인기가 없는 곳이다. 한번의 겨울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다가왔다. 오랜만의 한가함... 춘수는 풀을 곱씹고 있는 무동을 발로 차는 시늉을 내고는 곧 개울뚝 움푹 패인곳에 길게 누웠다. 하늘은 약간의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고 흐르는 구름 하나하나가 정겨웠다. 툴툴대는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흥천시의 친척집에 머물고 있는 조령이 집에 오는 날... 춘수는 일어서서 조령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어 줄 조령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린 조령은 춘수가 있는 곳에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더욱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조령을 보며 춘수는 두손을 크게 흔들어 주었다. 그 해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해를 넘기고 눈으로 하얗게 덮인 들판이 얼어붙었다. 맑은 햇살이 얇게 유리처럼 얼어붙은 눈위를 반사하고 있었다. 춘수는 연을 만들었다. 새끼를 꼬는 일 말고는 달리 할일이 없는 겨울날 이런 맑은 날에는 연날리기만큼 좋은 소일거리는 없을 것이다. 이미 들녘에는 동네 꼬마들이 어접사리 만든 연을 하나씩 들고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조령은 흥천에서 온 그녀의 사촌들과 하늘높이 날고 있는 연을 구경하고 있었다. 춘수의 연은 이씨 할아버지의 것보다 더 높이 날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춘수의 연을 손으로 가르키며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온갖 곡예를 펼치는 춘수의 연... 춘수는 자랑스레 멀찌기 서있는 조령을 비껴 보고 있었다. 서서히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들녘을 벗어나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조령과 그녀의 사촌들... 춘수는 연줄을 놓았다. 따라서 미끌어져가는 실뭉치... 다시 세월이 흘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춘수는 집안을 이끌어가야 했다. 한번도 심각하게 자신의 인생을 생각한 적이 없는 그였지만 갑작스레 맡겨진 짐이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학이란 곳으로 가버린 얼마안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듬해 춘수는 군에 입대 하였다. 애인에게서 온 사진과 편지를 읽고 좋아하는 동료들 틈에서 춘수는 조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철든 후부터 말한마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조령이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오랫동안 같은 마을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것은 기나긴 시간이었다. 몇개월마다 한번씩 다녀온 휴가 때마다 조령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조령은 서울 E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휴가때 춘수는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정한 목적지도 없었다.휴가비 몇푼과 약간의 여유돈이 전부였기에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으로 차있는 가슴이 더웠다. "E대학교"라고 씌어진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교문 앞에서 그는 나오고 들어가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허름한 군복을 입은 그를 사람들은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보고는 했다. 제대후 춘수는 서울로 올라갔다. 농사일에 싫증을 느낀것도 이유중 하나였으며 군생활 도중 여러 사람들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들이 그를 시골 구석에 쳐박아 두기에는 너무나 유혹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구로동의 한 염색공장에 취업을 했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서울이란 곳이 젊은이에게 주는 것이 있다면 완벽한 향락아니면 새로운 삶의 기회였다. 무엇인지 모를 어떤 목표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춘수도 알아버린 것일까? 어느날 배달된 전보에는 부친의 사망이라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상을 치루고 상경한 춘수는 더욱더 열심히 일했다. 서울의 어느 이름있는 집안의 장남과 약혼했다는 조령의 소식을 춘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반응 없이 듣고 있었다. 딸과 사윗감 자랑에 부친의 죽음따위는 하찮게 여기는 김부자에 대한 작은 시위였을까? 적은 급료였지만 다달이 모친에게 송금하는 돈을 제외하고는 모두 적금을 부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남으로 가는 버스는 아직도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의 자갈로 여전히 툴툴대고 있었다. 고향마을로 가는 여정은 과거를 거슬러가는 추억의 길이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먼 옛날 조령이 했던 것과 같이 개울둑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오른손을 치켜올려 두번 흔들어 보았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오두막집... 춘수는 있는것 같지도 않은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김부자에게 한마지기 되는 땅과 집을 넘겨주고 몇푼의 돈을 받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내일이면 춘수는 서울로 떠난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어떤 명분도 없는 고향이라는 이곳... 그는 개울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린 시절 누웠던 움푹 패인 곳에 다시금 몸을 뉘었다. 하늘은 변함없이 맑았다. 하이얀 구름이 흘러간다. 포플러 이파리들이 부산히 자지러진다. 개울 소리, 새소리... 멀리 조그만 점하나가 신작로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머물다 떠나버린 그 버스... 누군가가 버스에서 내린듯 했다. 춘수는 누워있는 채로 오른손을 치켜들어 두번 흔들었다. 작게 보이는 그 누군가도 손을 흔드는 듯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어디론가 팔려가 없어져 버린 무동을 제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길게 그림자가 늘어지고 있었다. 어느날에... |